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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기도 단상

기도 단상


노승수 목사


기도를 빼고 기독교를 말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말하듯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속의 유익을 얻는 방편(88문)이 된다. 본문을 먼저 살펴보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속의 유익을 전하는 표현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전하는 표현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은 그의 규례인데,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의미하며 이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은혜란? 구속의 능력 곧 그 유익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일반적인 방편을 정해두셨는데,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고 말한다.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라고 함으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속의 유익을 전하는 방편은 말씀과 기도인 셈이다.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기도는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만약 기도를 이렇게 인식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기도에 관해서 펠라기안적이다(어거스틴과 신학 논쟁을 통해서 정죄되었던 사상으로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 행위에 있다는 주장). 기도를 소요리 문답 88문을 따라 이해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다. 그것도 택자들에게만 효력있는 길이다. 
기도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앞에 관철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처럼 사랑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도는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 대화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의 대화라는 정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기도는 대개의 경우 일방통행이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는 기술이라기보다 듣는 기술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술이다.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여야한다. 그러나 해본 사람들을 알지만 기도시간에 고요히 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온갖 상념들로 꽉 차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기도시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기도는 여전히 대화라는 점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듣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사람들이 말을 주고 받는 것을 관찰할때면 신기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수많은 말들이 오고가지만 그저 그 사람의 어떤 말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이야기를 서로 던진다. 형식논리적인 대화는 오고가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공을 던질 뿐 아무도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맥루한이 "군중 속의 고독"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는 듣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말씀으로부터 듣기가 힘이든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통해 주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듣는 훈련이 그래서 필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며 가지는 고요한 임재의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다. 기도의 시간에 말씀을 도외시한 채 기도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12번째 사도로서 맛디아를 보선하는 과정이 나온다. 그들은 사도를 보선할 계획을 따로 가진 것이 아니었는데, 베드로가 느닷없이 일어나서 사도 보선에 관한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고 혹자들은 하나님은 바울을 12번째 사도로 생각하셨는데, 베드로가 옛 성품을 못버리고 나섰다고 주장하는 목사님들도 계신데 그것은 성경은 완전히 잘 못 읽은 것이다. 아마도 이들이 모여서 7일 가까운 시간을 전혀 기도에 힘쓴 것은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 보선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본문에 그런 흔적들이 나타난다. 사도들의 삶처럼 우리는 하나님은 향해 내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열망한다. 말씀을 통해 인도 받는 일 그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한다. 성령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듣는 것을 말씀하시는고로 말씀의 실체이시자 최종계시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은덕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런 고로 기도는 성령께서 이와같이 구원의 은덕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시간인 셈이다. 
이 말씀은 그냥 어떤 말씀이 머리에 떠오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묵상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말씀이 가진 원래의 뜻으로부터 신학적이며, 문법적이며, 역사적인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절히 말씀이 조명되어 질 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큰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가 되어야 한다. 둘째는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신앙고백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되어야한다. 이런 두 가지를 바탕으로 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바로 이렇게 사용되어 질 때, 참된 은혜의 방편이 된다. 
-승수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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