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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에서의 버나드의 인용

기독교 강요에서의 버나드의 인용

#작성완료
#인용문만옮겨옴
#인용이외에도자유로운언급과인용이다수있음

베르나르는 좀 더 정교하게 진술하고 싶어서 “불멸하는 의지의 자유와 또한 틀림없는 이성의 판단에 대한 찬동"(consent)이라
고 말하여 오히려 의미를 더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Inst., 2. 2. 4.)
Bemard, De graπa et libero arbitrio, ll. 4.

베르나르도 역시,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사람이 자신을 충동시켜 이런 유의 선한 의지를 추구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Inst. 2. 2. 6.)
Bemard, De gratia et libero arbitrio, xiv. 46.

베르나르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나, 선을 향하여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이익이고 악을 향하여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손해가 되며, 따라서 단순히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요 악을 향하여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부패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선을 향하여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충분히 일리 있는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Inst. 2. 3. 5.)
Bemard, Conceming Grace atul Free Will, vi. 16.

베르나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생물들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런데 죄가 개입함으로 인하여 사람 역시 일종의 폭력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해를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래 부여받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언가 비열하고도 이상한 방식으로 그 의지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더 악하게 변하여 그 자체가 필연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이 - 그것이 의지에 속하면서도 - 의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반대로 의지도 - 그것이 이끌립을 받아 그릇된 상태로 내까지만 - 필연을 배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필연이 말하자면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뒤에 가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의적인 종노릇의 멍에이며, 따라서 의지가 자유로울 때에 스스로 죄의 종이 되었으니 종노릇의 상태를 보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고 의지를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이렇듯 영혼은, 무언가 이상스럽고도 악한 방식으로1 자의적이면서도 그릇 자유로운 필연성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것이다. 필연 때문에 종노릇하는 것이요 의지가 있으니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스럽고 더 한심스러운 일은,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죄책이 있으며, 죄책이 있기 때문에 종노릇의 상태에 있는 것이요 결국 자유롭기 때문에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Inst. 2. 3. 5.)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xxi. 7, 9.

베르나르도 이에 동의하여 교회가 다음과 같이 간구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에게 의지가 없사오나 저를 이끄사 의지를 갖게 하옵시며, 제가 걸음이 더디오나 저를 이끄사 달리게 하옵소서.(Inst., 2. 3. 12.)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XÌ. 9.

베르나르도 동일한 사실을 적절히 가르치고 있다 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연이 우리를 꽁꽁 묶어서 죄의 종들이 되도록 만드는데 바로 그 필연이 동시에 자발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가 더욱 비참하다는 것이다(Inst. 2. 5. 1.)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xxi. 7, 9.

베르나르의 권고는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빛일 뿐 아니라 양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기름이기도 하니 그것이 없으면 영혼의 모든 양식이 메말라진다 그것은 소금이니 그 맛이 없으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무미건조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입에는 꿀이요 귀에는 이름다운 곡조요 마음에는 즐거움이요 동시에 좋은 약(藥)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말씀하지 않는 강론(講論)에는 향기가 없다'
(Inst. 2. 16. 1)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V. 6.

25. 믿음의 두 까지 면에 대안 베르나르의 논지
Inst. 3. 2. 25.

‘그러나 더 높은 망대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성(城)을 찾고 그의 성전을 찾고 그의 집을 찾고 그의 신부(新橋)를 찾읍시다. 내가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존귀함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Inst. 2.2.25.)
Bemard of Clairvaux, St. Bernard's Sermons for the Seasons, II. 419-426.

베르나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보다 훨씬 더 바르다 하겠다: ‘패가 믿기로 바울이 경건한 자들의 자랑’ 이라고 부르는 양심의 증거에는(고후1:12)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긍홀하심이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도 없음을 믿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랍이 선행을 할 수가 없음을 믿으며, 마지막으로, 영생을 값없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수고로도 영생에 합당한 공로를 이룰 수가 없음을 믿는 것이 필요하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다시 덧붙이고 있다: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들은 그저 믿음의 시작에 불과하지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령의 증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게 되기까지는 그 죄들이 사함 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사하시고 공로로 인정해 주시고 그 다음에 상급으로 돌려 주시니 , 처음 시작 단계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Inst. 2.2.43.)
Bemard, On the Feα, 5t of the Annunciation of the Blessed Virgin, i. 1. 3.

이 문제에 대해서 베르나르의 권면이 도움을 준다: “끊임없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근심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행위를 기억하며 근심과 불안의 상태 속에 있는 데서 이따금씩 걸음을 뒤로 빼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그 높고 청명한 대지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쓰디쓴 쑥에 달콤한 꿀을 뒤섞고, 그 꿀의 달콤한 향을 곁들여서 그 쑥을 마셔서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십시다. 여러분 자신을 겸손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동시에 주님의 선하심도 함께 생각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Inst. 3. 3. 15)
Bemard of Clairvaux,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 2,

3.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르나르의 증언(Inst. 3. 12. 3.)

베르나르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약한 자가 안전하고 확실한 평안과 안식을 위하여 기댈 곳이 주님의 상처가 아니면 어디란 말입니까? 구원하시는 그분이 강하실수록 나는 더욱더 안전하게 거기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위협하고 육체가 내리누르고 마귀가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으니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큰 죄를 지어서 내 양심이 어지러우내 주의 상처를 기억할 것이므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그러므로,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의 공로가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비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의 공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주님의 자비가 풍성하면 그와 똑같이 나의 공로도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나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찬양하겠습니까? 오 주님, 오직 주의 의만을 기억하리이다. 그 의가 또한 저의 것이기도 하옵니다. 다시 말해서 서, 하나님께서 니를 위하여 그를 의로 삼으신 것입니다(Inst. 3. 12. 3)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i. 3.

또한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전인(:whole man )을 안전하게 만드시는 그분에게 온전히 소망을 두는 것이 바로 사람의 온전한 공로입니다"
Bemard, On the Psalm, He That Dwelleth (Ps. 91) xv.5.

“주의 영광이 쇠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내게 평안이 있으면 나는 좋을 것이옵니다. 나는 모든 영광을 버리오니, 이는 혹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도둑질할까 하옴이며 내게 베풀어진 것을 잃어버릴까 하옴이옵니다."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ii. 4.

“하나님께서 목적이 계셔서 자랑할 만한 더 확실한 이유를 주셨는데, 어째서 교회 가 공로에 그렇게 관심을 둔단 말입니까? ... 그러니 ‘우리가 무슨 공로에 의지해서 유익을 얻을 소망을 가질까? 하는 질문 따위는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선지자가 말씀한 것처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 (겔 36:22, 32) 이기 때문입니다. 공로에 대해서는, 공로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족한 것입니다만, 공로가 있다면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이 심판을 위해 충족한 것입니다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ii. 6.

“공로가 있으면서도 있다고 내세우지 않거나, 공로가 없으면서도 없다고 움츠러들지 않는 교회는 복이 있습니다. 움츠러들 이유는 있지만 공로를 자랑할 이유는 없습니다. 교회가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자격을 갖추기 위한 공로자 자랑하기 위한 공로가 아닙니다. 있는 체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 과연 진정한 공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풍성한 긍흉하심을 받아 자랑할 만한 분명한 근거가 있는 상태에서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과연 더욱 담대히 자랑하는 것입니다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ii. 6.

베르나르의 가르침도 이와 일치하고 있다 그는 교만한 자들을 불성실한 종에 비유하면서 말하기를,그들이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들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은혜를 그릇되게 자기들이 붙잡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방(室)의 벽이 창문을 통해서 빛을 받고 있으면서 마치 자기가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떠벌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Inst. 3. 12. 8.)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ii. 5.

또한 베르나르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자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고 하십니다(마19 :25-26). 이것이 우리가 신뢰하는 전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요,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갖는 이유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있으신 것은 확실하지만, 과연 그가 그러한 뜻을 갖고 계실까요? 자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전 9:1) 누가 알겠으며, ‘누가 주의 마음을 알며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습나까’ (롬 11 :34: 참조. 사 40 :13)?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 우리를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가 우리를 도와주어야 합니
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가리워진 아버지의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며 그의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심어 놓으시리라는 것을(롬 8:16) 알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값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미래의 영광에로 나아가는 중간의 통로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Inst. 3. 13. 4.)
Bemard, Sermon on the Dedication of a Church, v. 6.

(칭의에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베르나르, 그리고 성경의 반론, 1-4) Inst. 3. 15. 1-4.

베르나르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공로가 있다면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이 심판을 위해 충족한 것입니다. Inst. 3. 15. 2.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viii. 6. 참조.12장 3절.

그러므로 공로를 갖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공로가 생기거든 그것이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를 기 대 하고 하나님의 긍흉하심을 바라십시오. 그리하면 빈곤과 감사 없음과 교만의 온갖 위험은 이미 피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공로가 있으면서도 있다고 내세우지 않거나 공로가 없으면서도 없다고 움츠러들지 않는 교회는 복이 있습니다.
Inst. 3. 15. 2.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viii. 6.

베르나르가 ‘다른 식으로는 피조물 가운데서 교회를 찾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 복된 예정의 품 속에, 또한 비참하게 정죄 받는 수많은 대중 속에 놀랍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Inst. 3. 21. 1.
Bemard, Semwns on the Song of Songs, Ixxviii, 4,

베르나르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매우 올바르다 하겠다:‘그리스도의 동료들은 그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니’ (마 13 :11)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녹 12 : 32)고 말씀하시자 그의 말씀을 개별적으로 들었다 그들이 누구인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 8:29) 라고 한 그 사람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고 은밀한 계획을 알게 된 자들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딩후 2:19).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것이 되도록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그들 외에는 아무도 그 위대한 신비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조금 뒤에 가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시 103 :17), 예정으로 말미암아 ‘영원부터’ 요 영화(榮化)로 말미암으니 ‘영원까지’ 인 것이다. 예정에는 시작이 없으며, 영화는 끝이 없는 것이다."
Inst. 3. 22. 10.
Bemard, Letters, cvü. 4, 5.

베르나르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히 말씀하고 있다. 유기된 자들에 대해서 디룬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주님의 작정은 확고히 서 있습니다. 평안을 주시고자 하는 그의 목적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확고히 서 있어서 그들의 악을 간과하시며 그들의 선행에 대해서 상급을 베풀어 주셔서 그의 긍휼하심의 놀라운 방법을 통해서 선을 이룰 뿐 아니라 악한 자들이 합력하여 결국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롬 8:33), 내가 오직 그분에게만 잘못을 범했으니 그분께서 홀로 내 옆에 게시다면 그것으로 모든 의가 내게 충족히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전가하지 않기로 작정하신 그 모든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
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는 이렇게 말한다:“요 참된 안식처여! 내실’(chamber) 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로다! 요 하나님을 친히 봐옵는 곳이여 ! 진노로 상기되어 계시지도 않고 염려로 흐트러져 계시지도 않으시고 그의 선하시고 자비하시고 완전하신 뜻의 감화를 온전히 체험하도다! 그런 환상은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를 줍니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오히려 진정시킵니다. 그리고 감각을 지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고요하게 합니다. 여기서 진정한 안식이 느껴집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평안하게 만드시니 안식 가운데 계신 그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Inst. 3. 24. 4.
Bem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xiii, 15, 16,

12.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의 시대의 형편
Inst. 4. 5. 12.
그런데 베르나르의 시대에 와서는 형편이 조금 더 악화되어서그 역시 교회의 직분자 전체를 향하여 신랄한 책망을 퍼붓는 것을 본다
Bemard, On the Morals andDuties ofBishops, ii. 4-iiÍ. 8; vii. 25, 27-29

마지막으로 베르나르는 재판권을 찬탈하는 데서 나타나는 로마 관구의 무절제한 탐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교회들의 공통적인 불평을 이야기하겠다 그들은 자기들이 갈가리 찢겨지고 온 몸이 잘려나가고 있다고 외치고 있다 이런 잔인한 치명타를 애통해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들이 거의 혹은 하나도 없다. 무슨 치명타냐고 물을 것이다. 수도원장들이 관할 주교들에 의해서 쫓겨나고 주교들이 그 위의 대주교들에 의해서 쫓겨나는 등의 비리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이 그냥 묵과되다니 이 얼마나 이상스런 일인가! 이런 식으로 처신함으로써 그대들은 스스로 충만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만 그러나 의(義)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할 수 있으니 이런 일을 하겠지만, 문제는 과연 그대가 그렇게 해야 마땅하냐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각 사람의 존귀함과 명예를 보존해 주기 위함이지 그것들을 탐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4. 7. 18
Bemard, De consideratione, I. iv. 5; I. x: I3; IV. ii. 4, 5; IV. iv. 77; III. ii . 6-12; III. iv. 14.

그러나 베르나르는 시민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대의 권세는 죄에 있는 것이고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의 열쇠는 죄 때문에 받은 것이고 재물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그대에게 더 존귀한 것 같은가? 죄를 용서하는 일인개 아니면 재물을 나누는 일인가? 여기에는 비교가 있을 수 없다 이 미천한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재판장이 있고 이 땅의 왕과 집권자들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가 다른 사람의 경계를 침범한단 말인가?’
또한 교황 유게니우스(Eugenius) 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대가 윗사람 되었도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되었는7꺼 권세를 부리기 위함은 아니라 여겨진다. 그러므록 우리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지배자의 권리가 아니라 섬김의 사명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왕의 홀(짜)이 아니라 팽이라는 것을 배우도록 하라/’ 또한 말하기를, ‘지배자의 권리가 사도들에게 금지되어 있디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가서 감히 그대 스스로 지배자로서 사도의 직분을 취하든지 아니면 사도로서 지배자의 권리를 취하든지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이기를 "사도직의 모습은 이것이다. 곧, 지배권이 금지되어 있고 섬기라는 명령만이 있디는 것이다."(Inst. 4. 11. 11.)
Bernard, On Consideration, 1. vi, 7; n, vi. 9-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