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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실/교육자료

기독교 교육: 누구를 위해? 왜? 어떻게

기독교 교육: 누구를 위해? 왜? 어떻게? (제1부) 
(Christian Education: For Whom? Why? How?) 
Otto Bouwman 
교회의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직임자들을 포함한 모든 교회 회원들이 관계된 일입니다. 1940년대에 Grand Rapids에 있는 Calvin College의 교회사 교수인 Krommenga 교수는 교육과 기독교 개혁 교회 (Christian Reformed Church)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교회가 그 지지자들에게 신자의 의무를 적합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일정한 안내를 제공할 기회를 가졌던 일은 교육적인...분야에 있었다. 1870년 총회는 교회학교 (church school)가 네덜란드식의 교육과 개혁주의 교육에 대비할 수 없을 경우에 그 둘 다 공립학교에서 여전히 가능하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그 문제가 교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1886년 총회는 부모들이 연합하여 노력하고, 가능하다면 지역학교에서 기독교 교과서를 사용하기를 계약하도록 일깨웠다. 그리고 2년 후의 총회는 Sander's Union Readers and Spellers 와 Wilson's Readers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 총회는 또한 우리 교회 회원들이 지역학교에서 성경 읽기 개론을 학교 위원회에 요구하도록 하였다. 이런 관행이 없었던 학교들조차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지방자치제의 감소와 함께 공립학교의 진행되는 탈 기독교화는 교회로 하여금 정부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 확실히 개혁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기독교학교 (Christian schools)를 세우기를 추구하도록 하였다. 이미 1886년 총회는 교회학교 (church schools)라는 수단에 의한 연합된 힘을 가진 진전된 일차 교육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1892년 총회는 총회적인 원조를 약속하면서 모든 목사와 장로가 기독교 학교의 설립과 복지를 지원할 의무를 강조하였으며, 이 목적을 위한 단체의 조직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교회학교에 대한 구상은 버려졌고 지역 단체들보다는 더 전반적인 단체가 구상되었다. 그 문제는 일차 교육에 있어서 교회, 국가, 가정 각각에 적합한 기능에 대한 연구를 요구하였고, 시간이 경과된 후 네덜란드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의 영향 아래 그 해결책은 국가와 교회의 감사에 개방되어 있지만 이들 두 기관의 지배에 대해 자유로운 부모들의 학교 (parents' school)에서 발견되었다. 
분명히 교육은 교회적인 회합들에서 의논되어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 개혁교회 총회는 초등교육 그 자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별다른 말이 없는 편이었으며, 우리의 신앙고백서들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총회의 결정들에는 분명히 교육적인 파생 결과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다루기를 바라는 교육과 관련된 세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의 “누구-who”, “왜-why”, “어떻게-how”입니다. 
누구? (Who?) 
누가 기독교교육을 위해 개혁학교 (Reformed schools)에 옵니까? 어떻게 이 아이들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이 아이들로부터 기대해야만 합니까?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저는 여기서 이 용어를 넓게 사용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많은 학교들은 아이들을 잠재적인 회심자로 봅니다. 이 아이들은 그 나라를 위하여 되 찾아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학교의 기능들 중의 하나는 선교적인 활동을 수반해야 하는 것이며, 교실은 선교 현장이 됩니다. 실제로 어떤 교육이론가들은 학교가 하나님께서 설립하신 기관이며, 교사는 아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된 직임자와 유사하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구세주를 영접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배우기를 말입니다. 
캐나다 개혁교회의 전통은, 그리고 기독교 개혁교회의 전통도 덧붙여, 자녀들을 왕의 자녀로 보는 것이 보다 더 도움이 된다고 인식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녀들이 장래의 어느 날에 회심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르친다기보다는, 우리의 동기는 자녀들이 보통 출생하면서부터 그들이 수여받은 지위(status)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은 세례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그들의 지위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왕의 자녀,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녀, 자기 달란트를 개발해야만 하는 자녀, 섬김을 배워야만 하는 자녀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언약의 자녀 (Covenant children) 
10년, 20년, 30년 전에 캐나다 개혁교회 내부에서 언약의 자녀로서의 자녀들에 관해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것은 아주 많은 도움을 주는 부요한 개념이며, 우리가 그것을 남용하거나, 또는 그것을 희화화하지 않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그에 대해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언약의 자녀라는 용어는 무엇보다 먼저 학생들의 지위(status)에 대해 깨닫게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의 수여자입니다. 이 지위는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으며, 매일의 생활에서 언약 공동체가 주어지며, 다른 언약의 회원들과의 교제를 경험하며, 자녀들의 안녕을 위해 안전하고 보살피는 공동체가 발전할 수 있는 학교에 출석하는 권리를 줍니다. 
어떻게 우리가 교육의 이런 모델을 희화화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서 멈춤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회원들인 각자가 자동적으로 이러이러한 학교에서 교육받을 자격을 받았다. 모든 언약의 자녀들이 가는 곳이며, 거기에는 모든 것이 좋다. 어쨌든 그것은 언약 학교이다.” 라고 말함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단순히 그 학생들의 언약의 지위만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학교는 무서운 슬픔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우리가 언약의 자녀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그 아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일 뿐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따라서 어떤 표준에 따라 살아갈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언약의 회원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나의 하나님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 분과의 관계 속에 두셨고, 언약의 자녀의 교사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 위에 두신 의무들을 나의 아이들 앞에 지속적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그들의 지위가 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 의무를 지운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게 됩니다. 
언약의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에 관해 진리인 것은 또한 교사에 관해서도 물론 진리입니다. 그들 역시 언약 공동체의 회원입니다. 교사는 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왕의 자녀입니다. 교사 역시 타락하고, 부패하였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따라서 어떤 표준에 따라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사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이 가르치듯이, 교실 안에서나 교실 밖에서나 자신이 선지자이며, 제사장이며, 왕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누구를 가르칩니까? 언약의 자녀, 왕의 자녀인데,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왕자들로서 살도록 도전받을 필요가 있는 자녀들입니다. 
기독교 교육: 누구를 위해? 왜? 어떻게 (제2부) 
(Christian Education: For Whom? Why? How?) 
Otto Bouwman 
제1부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왕의 자녀들인데, 아버지의 나라에서 왕자들로 살도록 도전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글은 원래 캘거리에서 있었던 캐나다 개혁교회와 연합 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es)의 합동 당회 모임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주십시오. 
왜? 
우리는 왜 캐나다 개혁교회라는 틀 안에서 이 아이들, 즉 언약의 자녀들을 가르칩니까? 많은 “이전 세대의 신자들”이 아마도 그랬던 것처럼 왜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습니까? 왜 어떤 지역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것처럼 초교파적 학교 (interdenominational schools)에 보내지 않습니까? 
개혁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은 삶이란 통일된 것 (life is a unity)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자신의 삶을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하거나, 또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교리를 분리하기 때문에 불경건한 삶을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저쪽 편”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색채를 더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duimbreed"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삶의 단 한 치도 하나님께서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신앙 고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단지 교회만을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벨직 신앙고백서는 믿지 않는 통치자를 위해 썼습니다. 고백서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관해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백적 기초를 가지고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자연스러운 그런 일이지만, 고백적 기초 없이 학교를 세우는 것은 그것을 매우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제1부에서 Krommenga 교수로부터 인용한 것이 또한 그것에 대한 언급입니다-학교는 그 성격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혁적이어야만 합니다. 만약 개혁적 이어야한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신앙고백서들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성격에 있어서 어떻게 개혁적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세례 
돌트 교회질서는 교육 문제를 따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유아 세례에 관한 조항 바로 뒤에 제 58항이 옵니다-최소한 우리가 사용하는 판본에서는 그렇습니다: 
학교들. 당회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힘을 다하여 교회가 고백서들에 요약한 대로 하나 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교육을 하는 학교에 자기 자녀들을 출석시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유아 세례 시의 부모의 서약과 자녀를 위한 교육 사이의 연관성이 우리 교회 질서 속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1834년 분리 당시에도, 그 연관성은 분명했었습니다. 부모들이 그 교육이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학교에 자기 자녀들을 보냄으로 유아 세례 시에 했었던 자신들의 서약의 일부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것조차도 타당합니다. 정상적인 환경 속에 있는 부모가 선한 양심 속에서 자기 자녀를 “부모의 힘을 다하여 이 교리 안에서 교육받도록” 약속 한 다음, “이 교리”가 전체 교육에 스며들어있는 학교에 이 자녀를 보내는 가능성을 부모가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지가 저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더구나 부모들의 세대 대대로 기독교 학교를 설립할 동기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들의 유아 세례 시의 서약을 사용 해왔습니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 교육의 설립에 대한 동기는 자녀의 언약적 지위와 그에 따른 부모의 언약적 책임이었습니다. 
우리 URC 형제들도 이에 상응하는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의 의무를 개괄하고 있는 제 14항입니다. 그 조항은 우리들에게 장로들이 “말씀과 성례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자녀의 교리문답 교육을 도우며, 하나님 중심의 학교교육(schooling)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당회의 역할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부모가 자녀를 한 특정한 유형의 학교에 보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회의 역할은 부모로서의 자신들의 책임과 관련하여 부모들을 격려하거나 지도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교회들과 학교들 사이에 공식적인 직접적 연결이 실제로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도석과 설교단 사이에 엄청나게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있는 부모들과 자녀들이 또한 학교에서도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식적 연결은 없지만, 비공식적 연관은 많습니다. 
통일성 (unity) 
우리 진영들에서 가정, 교회, 그리고 학교 사이의 통일성에 관해 많은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캐나다 개혁교회 진영 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개혁교회(CRC)의 많은 이들이 그 관점을 견지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고 네덜란드의 자유 개혁 대학의 영향력 있는 교수인 Selderhuis 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가정(home)이 실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어떤 한 가지를 가르치고, 가정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기를 원할 때 긴장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 URC 형제들은 그런 긴장과 갈등의 어려움을 경험했으며, 그러한 것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개혁교회(CRC)를 떠남으로 가정과 교회의 통일성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가정과 학교 사이 또는 교회와 학교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견딜 수 있을까요? 선호되는 길은, 가능하다면 어느 곳에서든, 가정, 교회, 그리고 학교의 통일성을 표명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학교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고 그 학교의 봉사(services)를 활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우리 자녀들의 위치에 대한 인식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왜 우리는 우리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습니까? 만약 1870년대의 노회에서 네덜란드가 “공립학교 체제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 기독교화”를 인식했다면, 21세기의 초두에서 우리는 동일한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공립학교 체제는 하나님 말씀의 규범을 비웃으며,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것을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 자녀들을 그 곳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고백서들에 요약되어 있는 대로 성경의 교리 안에서 우리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우리 힘을 다해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초교파적 학교는 어떨까요-그들은 모든 교파를 포함시킵니다! 1835년에 네덜란드에서 Hoksbergen 장로에 의해 출판된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수사학적으로 물었습니다: “학교들은 꼭 교회들만큼 부패해 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 학교에 보내면서 그 교회들에 끝까지 남아있어야만 하는가?” 부모로서 우리가 매주의 경배에서 다른 이들과 연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매일의 경배를 드리도록 우리 자녀들을 보내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의 경배라고요?” 라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성경 읽기, 찬송 부르기, 기도하기 같은 활동들이 경배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가정에서 그 활동들을 합니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서 그 활동들을 합니다. 그리고 또한 학교에서 우리는 매일 그 활동들을 합니다. 
가장 선호되는 상황은 가정과 교회와 학교 사이의 눈에 보이는 통일성이 있고, 이 기관들의 각각이 암시적인 또는 명백한 고백적인 기초를 가지는 것입니다. 설명을 덧붙인다면, 여기에서 가정과 교회와 학교를 구분하는 것이 또한 도움이 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을 창조하셨고, 가정의 서로 다른 당사자들에게 분명한 역할과 책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특정한 직임들을 만드셨고, 각각의 직임에 특정한 과업들을 주셨습니다. 학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아닙니다. 학교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완수하도록 돕기 위해 사람이 만든 기관입니다. 그러나 교회가-직임자들이 그러하듯이-학교의 일을 지원하는 것은 또한 논리적입니다. 
어떻게? 
결국 “어떻게?”라는 질문까지 왔습니다. 개혁교육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교육을 개혁적으로 만듭니까? 이 질문은 참으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기독 학교를 세우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특별한 문화를 갖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인식할 것입니다: 바로 왕의 자녀들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녀들이 존중받고, 존엄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들은 정직해야만 할 것입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해야만 할 것입니다-그 분의 왕국에서 순종하기는 하지만 게으른 자녀들은 바른 규범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일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상적인 학교는 경건의 문화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할 것입니다-자녀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모들은 교회의 신앙 고백에 부합하는 교과 과정을 가진 학교를 설립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념비적인 과업이며, 학교가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학교는 교회와 협력하여 일할 것입니다- 지역 교회 안에서 그런 것 같이 아이들이 주님의 일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은혜 받기를 기도할 수 있고, 주일에 목사는 주님께서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복주시기를 종종 기도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많은 학교들이 “Den School Met Den Bijbel”-즉 성경과 함께 하는 학교라고 불렸습니다. 그것은 펼쳐진 성경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좋은 기독교 학교가 행하는 것입니다-그들은 성경을 펼쳐둡니다. 성경은 모든 과목들에 스며들어 있습니다-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게 되고, 또 보게 되며, 수학에서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두신 질서에 경탄하며, 과학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정교함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언어과목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들이 종종 교실에서 나타납니다. 신명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때나, 또 어떤 기회가 있을 때에나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은 그것을 위해 셀 수 없는 기회를 받았습니다. 
개혁 교육의 “방법”에 대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요소는 교사의 역할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 교사는 아이들이 따를 좋은 모범이 될 것입니다.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태도의 모범을 만들며, 자신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주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예로서 보여줄 것입니다. 
미래 
저는 제가 세 가지 요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개혁 교육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왜 우리가 그것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저는 제가 여러분에게 언약 자녀들의 교육이 참으로 당회가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납득시켜 드렸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는 미래에 관한 몇 가지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어난 소통의 통로와 우리가 형제로서 서로에 대해서 더욱 더 알아나가는 길 위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 안에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장려해야 할 한 가지는 우리가 그 연합에 눈에 보이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적 연합의 증진을 위한 위원회로부터의 가장 최근의 서신 또한 서로 협력하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지지하는 교육적인 노력들 또한 눈에 보이는 전체적인 연합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건너야 할 다리들과 제거해야 할 장애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교육적인 협력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다리들과 웅덩이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극복해야 할 불가능하게 보이는 방해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그분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여 행할 것과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출처 ; Clarion JUNE 22, 2001 의 Educational Matters 
번역 ; 부산개혁교회 박종연 
(역주 ; 연대 소식지 제 1호에 실은 글입니다. 이 글은 원래 캐나다 개혁교회-CanRC와 연합 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es, URC 의 합동 당회 모임을 위해 준비되었던 글이며, URC는 이 전 세대부터 북미지역에 있어왔던 Christian Reformed churches-CRC가 여성 직임자를 수용하는 것 등의 문제로 인해 1996년 분리되어 나온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