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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이용한 교회교육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이용한 교회교육
김진흥 목사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 12:6)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고전 11:2)
------------ 목 차 ---------------
1. 교회교육의 근본지침으로서의 ‘사도적 교훈’
- ‘믿음의 분수’(롬 12:6), ‘그 유전’(paradosis, 고전 11:2),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딤후 1:14)
- 사도적 교훈과 교리문답
* 개혁교회의 자녀교육: 가정, 교회, 학교, 신앙단체의 역할분담.
2. 무엇을, 어떻게? (소교리문답을 이용한 교회교육의 내용 및 접근방법)
2.1. 소교리문답의 구조와 내용
2.1.1. 제 1-3문답의 논리적 구조
2.1.2. 소교리문답의 내용 구분: 큰 두 부분(4-38문답, 39-107문답)
2.1.3. 소교리문답의 구조와 내용에 나타난 특징
2.2. 소교리문답에서 제시하는 교육 지침
2.2.1. 소교리문답에서 찾을 수 있는 ‘신실한 교사’의 모습
2.2.2.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과 그 활용에 관하여: 86-107문답
2.2.3. ‘말씀’의 중심성과 제 90문답의 교훈
2.3. 소교리문답 교수법: 교리(doctrine)의 암기?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2.3.1. 체계적인 신앙 지식(notitia)의 중요성: 칼빈의 ‘신앙’ 정의
2.3.2. 성경본문을 활용한 소교리문답 교육
3. 바른 소교리문답 교육의 열매
3.1. 소교리문답이 가르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3.2. 삶의 변화: 인생관, 가치관, 성품의 변화 -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4. 구속사적 성경 이해: 교리문답과 더불어 함께 가르쳐야 할 성경이야기
4.1 ‘두 길’ 테마 (12–19문답): ‘율법’(torah)의 의미, 구약 성경의 주제.
4.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23-26문답):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직분(HC 32)
4.3. 어린이 성경 활용: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 (E. Kuijt, Kleuterbijbel,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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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교육의 근본 지침으로서의 바른 ‘전통’: 사도적 교훈
교회교육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이 종종 제기됩니다. 지역교회마다 처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라면 어떤 교회든지 마땅히 한 목소리로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모범 답안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한 가지를 우리는 로마서 12장의 서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6에 나오는 ‘믿음의 분수’(analogy of faith)라는 말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는 교회의 교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이 말은 앞의 3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metron pisteos)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오해 됩니다. ‘분량’(metron)이라는 그리스말은 measure, degree, quantity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크기’를 뜻합니다. 그러나 6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수’라는 말은 아날로기아(analogia)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보통 proportion of the faith로 번역되는 이 표현을 종교개혁자 칼빈 선생은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칙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을 공부할 때에 그 본문의 뜻을 올바르게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이정표로, 혹은 반대로 표현하면 어떤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올바르고 합당한 교훈을 넘어서서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는 것을 막아주는 울타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분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침으로 바로 이 ‘믿음의 분수’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교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의 분수’라는 지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교리’(doctrin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적인 교훈들입니다. 그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된 ‘사도들의 가르침’이며, 더 거슬러 가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6의 짧은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전해 주시고, 사도들이 교회에 가르친 그 교훈, 그것이 바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참고해야 할 준칙이라고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넘겨받아 다시 교회에 넘겨준 사도들의 교훈, 이것을 고린도전서 11:2에서는 ‘그 유전’(tas paradoseis)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또 디모데후서 1:14에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the good deposit that was entrusted to you, paratheken)을 지키라" 하는 말씀으로도 나타납니다. 이런 말씀들은 주로 교회에 가만히 침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하고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올바른 교훈을 따라 바르게 교회가 세워지도록 권고하는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고대교회에서도 바로 이런 의미로 '파라도시스'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는 영지주의 이단(the Gnostic heresy)을 논박하는 중요한 근거로서 바로 이 파라도시스, 즉 사도들의 전승, 유전을 내세웁니다. 요한서신 등에서 언급되는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진리가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수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참된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영지(gnosis)라고 믿었습니다. 이 영적인 지식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이런 이단적 주장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도들에게 위탁하였고, 또 그 사도들이 자신의 충실한 계승자에게 부탁한 믿음의 내용 이외에 별달리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참된 신앙의 시금석이 되는 것으로서 ‘파라도시스’ 즉 사도들의 전승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신앙의 전승에 따라 어떤 사람의 견해나 성경 해석이 과연 합당하고 올바른가 하는 여부를 판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라도시스’의 요약된 내용으로 이레네우스는 ‘신앙의 규칙’(rule of faith)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신앙의 규칙’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육신이 되신 한분 그리스도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선포하신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요 17:3의 말씀을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주의 교회(Presbyterian Church, Reformed Church)는 바로 이런 사도적 전통을 그 토대와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타락한 중세 로마 교회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종교개혁이 무르익어 갈 때, 로마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새로운 교리’(Nova doctrina) 곧 이단사설(異端邪說)을 유포하는 자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때 ‘새로운 교리’라는 표현은 바로 사도들이 전하여준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비난입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 선생은 기독교강요(Institutio)를 통하여 로마 교회의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사도적 전통에서 떠난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중세 이래의 로마 교회이며, 개혁교회야말로 사도들이 전하여 준 바 올바른 복음의 전통에 서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교훈에 바로 서 있다는 것은 참된 교회의 핵심적인 지표입니다. 이것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고 또 교회 안에서 계속 믿음의 자녀들에게 신실하게 전수하기 위하여 개혁교회는 항상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만들어 왔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6장의 근본적인 명령(쉐마)과 연관하여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만들었습니다. 장로교회의 Westminster Large and Short Catechism과 개혁교회의 Heidelberg Catechism과 같은 훌륭한 교회교육의 자료들이 그때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교리문답교육을 태만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하는 것과 같으며, 자녀들로 하여금 교회를 등지고 나가게 하는 첫걸음이다”라는 경고의 말이 전해질 정도로,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는 항상 교리문답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러 좋은 교리문답들 가운데서, 오늘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에 널리 소개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교회교육에 활용하는 방안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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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혁교회의 자녀교육이 교리문답교육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꾸준히 성경말씀을 읽어 주어서 자녀들이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역사를 익숙히 잘 알도록 하는 일도 교리문답교육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중요하게 간주되었습니다. 
현재 사도적 신앙을 잘 지키고 있는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들의 경우에, 자녀교육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큰 범주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신앙교육이 이루어집니다: 가정(home), 교회(catechisatie), 기독교학교(Christian schools), 청소년 연맹활동(jeugd vereinigingen). 성도들이 신앙적 이념에 따라 직접 설립하여 직간접적으로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학교’의 체제가 잘 갖추어진 이곳 네덜란드 개혁교회이지만, 누구나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매일 꾸준히 지속되는 점심과 저녁 식사 후의 성경 읽기(다양한 어린이 성경, 일반 성경 및 그 해설 혹은 묵상집)를 통하여 성경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게 되고, 부모와 함께 드리는 주일 예배를 통하여 예배드리는 자세를 배우게 되며,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모들께 신앙적인 훈육을 받습니다. 교회에서는 매주 1회 1시간씩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배웁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단계별로 잘 마련된 교재를 해마다 차례차례 배워서, 최종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입교’ 때까지 목사나 혹은 교회가 세운 교사를 통하여 이 교리문답교육 과정을 밟아 갑니다.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에 따라 설립한 기독교학교에서는 유치원-초등학교 시절의 자녀들에게 일반 교육과 더불어 신앙교육을 실시합니다. 대부분이 개혁교회의 성도로 구성된 신실한 교사들을 통하여 자녀들은 가정과 교회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동일한 세계관을 가진 사회 속에서 일관되게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전국 및 지역 조직을 갖추고 있는 청소년 연맹 모임에서는 캠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기독 청소년들이 함께 교제를 나누고 또 여러 가지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이 청소년 모임이 매주 1회 1시간씩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네 가지 범주 사이의 상호협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주 1회씩의 교리문답교육과 청소년 연맹 모임을 하루 저녁의 좀더 긴 프로그램으로 통합하여, 서로 중복되는 내용을 지양하는 한편 좀더 여유를 가지고 교리문답을 배우고 실천하고 서로 교제하는 일을 좀더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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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엇을, 어떻게? (소교리문답을 이용한 교회교육의 내용 및 접근방법)
2.1. 소교리문답의 구조와 내용
2.1.1. 제 1-3문답의 논리적 구조
소교리문답의 첫번째 문답의 내용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이 첫번째 문답에서 곧장 ‘어떻게’(how)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어떻게’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제 1문답의 가르침을 크게 오해하는 일이 교회에서 수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즐기는 일’을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방법을 바르게 알지 못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인도와 보호하심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입니다. 
교회교육과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한가지 안타까운 사례로 한국교회의 고3 교육을 예로 들어 봅시다. 한 해 동안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제한하면서 학업에 치중하도록 유도하는 현실은 바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방법, 곧 ‘어떻게’의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생각이 없이 접근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와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신앙교육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교회의 왜곡된 고3 교육은 얼마나 신앙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시기에, 오히려 그것을 부인하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게 만드는 끔찍한 사고방식입니다. 생애에서 아마 처음으로 그런 중요한 시기를 맞이한 자녀들이, 그런 잘못된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과연 그 자녀들의 심령이 얼마나 상하게 될까요?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에 대하여 앞으로 그 자녀들이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즐김’을 바르게 행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교리문답에서는 바로 2문답에서 ‘어떻게’의 문제, 곧 사람의 본분을 바르게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 곧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개혁교회는 성경 이외의 다른 무엇을 준칙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sola scriptura). 곧 이어 제 3문답은 그 기준인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요약해 줍니다. 그에 따르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크게 다음 두 가지 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어야 하는가? 둘째,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 두 가르침을 알면, 우리는 올바르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그분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2.1.2. 소교리문답의 내용 구분: 큰 두 부분(4-38문답, 39-107문답)
- 제 3문답의 내용처럼 소교리문답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4-38 문답: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이 믿어야 할 바
(2) 39-107 문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
-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번째 부분은 ‘사도신경’(Apostolicum)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24문답에 따르면, 사도신경은 다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대하여;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관하여.)
4-6 문답: 참되신 하나님과 그 속성, 삼위일체
7-19 문답: 하나님의 작정과 실행(창조와 섭리) - 성부 하나님
20-28 문답: 구속과 구속주 – 성자 예수 그리스도
29-38 문답: 구속의 적용 – 성령 하나님
- 두 번째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내용은 ‘십계명’과 ‘주기도문’입니다. 그것이 각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수단(말씀, 성례, 기도)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가르쳐집니다. 그 둘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요구를 이행할 수 없는 죄인된 인간의 무능력입니다.
39 문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 – 하나님의 뜻에 순종
40-81 문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신 선한 길 – 도덕법의 요약 십계명 
82-85 문답: 인간의 불순종과 그 결과, 그것을 고려하신 새로운 세 가지 요구
86-107 문답: 믿음, 회개, 은혜의 방도(means of grace)
86 문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87 문답: 생명에 이르는 회개
88-107 문답: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수단들 – 말씀, 성례, 기도
89-90 문답: 구원의 방도로서의 말씀
91-97 문답: 구원의 방도로서의 성례 – 세례와 성찬
98-107 문답: 구원의 방도로서의 기도와 주기도문
2.1.3. 소교리문답의 구조와 내용에 나타난 특징
- 이렇게 우리는 소교리문답이 성경의 내용을 두 부분, 즉 믿어야 할 바와 행해야 할 바로 잘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만든 장로교의 선조들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기본적으로 바로 이 세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대륙의 다른 개혁주의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의 모든 교리문답에서 이 세 가지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사용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전통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교회교육의 내용을 한번 돌아봅시다. 이 세 가지 기본적인 내용이 우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까? 
- 자녀교육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십계명과 주기도문 사이에 배치되어 있는 ‘구원의 방도’(means of grace)에 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현실을 고려할 때(82-84문답), 우리가 죄의 길을 벗어나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수단들을 잘 알고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연관하여, 소교리문답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85-87 문답):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86문답),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하고(87문답),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일반적인 수단들을 부지런히 이용해야 합니다(88문답).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은, 소교리문답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녀들에게서 이 세 가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생명에 이르는 회개, 그리고 구원의 방도를 잘 사용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2.2. 소교리문답에서 제시하는 교육 지침
2.2.1. 소교리문답에서 찾을 수 있는 ‘신실한 교사’의 모습
- 좋은 교회교육을 위해서 프로그램, 교재, 교육기자재 등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고, 그런 것들은 제각기 유익한 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회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신실한 교사’입니다. 그런데, ‘신실한 교사’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 가지 덕목들로 신실한 교사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롬 12:6 혹은 고전 11:2에 비추어서 정의하자면, 신실한 교사는 사도적인 신앙을 우선 잘 전수 받아서 다시 다음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 자녀들에게 바르게 전해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관한 소교리문답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신실한 교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과 ‘하나님의 요구’의 내용을 그 자신이 먼저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위하여 ‘은혜의 방도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2.2.2.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과 그 활용에 관하여: 86-107문답
- 그러므로 소교리문답의 두번째 부분에서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연결해주는 ‘은혜의 수단들’은 일차적으로 교사들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며 도구입니다. 교사들이 먼저 이런 ‘은혜의 수단들’, 곧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적극 활용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깊이 알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과 생활을 바탕으로 가정 교육와 교회 교육을 통하여 우리 자녀들에게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소교리문답이 가르치는 ‘은혜의 방도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주목해 봅시다. 특히 ‘말씀’에 관한 제 90문답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 그리고 특히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 선생은 시편 119편에서 이 방법을 찾아 다음과 같은 세 라틴어 단어로 요약하였습니다: 기도(oratio), 묵상(meditation), 실천(tentatio). 이것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거룩하게 자라가는데 필요한 아주 좋은 지침입니다. 교회교육과 연관하여, 교사들이 이 지침을 신실하게 잘 따른다면, 거기에 틀림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이것만큼 포괄적이면서 또 기초적인 지침이 달리 없습니다. 
2.2.3. ‘말씀’의 중심성과 제 90문답의 교훈
- ‘은혜의 수단들’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입니다. 말씀과 성례와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방편으로 소개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 구원의 은혜를 ‘끼쳐주시는’ 방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88 문답).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합당한 자세(90 문답)를 말하기 이전에,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말씀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지에 관하여 먼저 소개되어 있습니다(89 문답).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주도적 노력(initiative)이 우선됩니다. 은혜는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주시는 바를 겸손히 엎드려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은혜의 수단으로 소개된 성례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례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복은 성례 자체나 성례 집례자에게 어떤 능력이나 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복 주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91 문답).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 번째 은혜의 수단은 흔히 우리의 주도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98 문답과 99 문답은 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수단’으로서의 기도의 성격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 이처럼 은혜의 방도들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이 강조되어 있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 두신 은혜의 통로들이 있으므로, 우리가 생각해낸 별다른 수단을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개혁 이전에 그릇된 길로 갔던 로마교회가 만들어낸 것 같은, 갖가지 사이비 은혜의 수단들을 우리는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 참된 은혜를 받을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키기는 하지만,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하고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하도록 만들지는 못하는 인간적인 수단들을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어리석음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주도권을 기억하는 것은 또한 교회교육에 임하는 교사의 자세에 큰 유익을 줍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방편들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그 방편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도록 힘도 주십니다. 물론 은혜의 방도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 수단들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설득하시고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우리가 기꺼이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따라갈 때, 은혜의 수단은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에 의지하는 자세는 학생들을 대할 때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교사들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학생들을 바꾸려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는 대신, 학생들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꾸준히 간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은혜의 수단들을 열심히 사용하여 올바른 신앙의 내용을 전수하는 교사의 본분에 충실하면 됩니다. 단기적인 결과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세상적인 잣대로 교회교육의 성패를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믿는 교사는 자신의 교육 활동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 시키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또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수단들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실하게 그 수단들을 잘 활용하면 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문제로 고민하면서, 세상 풍조에 따라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하느라 분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심리학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성령님께서 새 사람으로 변화 시켜 주실 언약의 자녀들입니다. 
2.3. 소교리문답 교수법: 교리(doctrine)의 암기?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2.3.1. 체계적인 신앙 지식(notitia)의 중요성: 칼빈의 ‘신앙’ 정의
-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우리는 오늘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자녀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창의적으로 접근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의 신앙 선배들 역시 이런 ‘현실적 적용’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소교리문답을 교회교육에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좋은 전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교리문답 자체에서도 이런 고려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오늘날 우리 자녀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내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소교리문답은 그야말로 ‘기초적인 요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거의 암기할 정도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자체에 바로 그런 암송을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39, 40 문답 등에서 나타나는 반복적 표현(질문의 내용을 답변에서 다시 반복), 그리고 십계명 해설(43-81 문답)에서 금하는 바와 명하는 바를 각각 설명하여서 그 계명의 본래 의도를 분명히 알게 하는 사례에서 그런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단 소교리문답 그 내용 전체를 빠짐없이 자녀들에게 충실하게 가르치고 익숙하게 알게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경우, 성도들이 어린 시절부터 매년 최소한 한 차례씩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배우며 자라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익숙하게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개혁주의 교회는 항상 믿음의 지적인 성격을 중요하게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믿음에는 지적 요소(notitia), 정서적 요소(assensus), 의지적 요소(fiducia)가 다 포함되어 있지만, 특히 지적인 요소, 곧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가 하는 문제가 특별히 중요하게 간주되었습니다. 한 예로 칼빈 선생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살펴봅시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이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기독교강요 III.2.vii). 바로 이런 맥락에서 소교리문답 역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기독교 신앙의 요점을 자녀들에게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2.3.2. 성경본문을 활용한 소교리문답 교육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소교리문답을 사용하여 자녀들을 교육할 때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 또한 ‘무조건적인 교리의 암기, 암송’입니다. 이런 방식은 우선 자녀들에게 교리문답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강요된 형식적 학습으로 흐를 위험이 큽니다. 그 뿐 아니라, 이렇게 해서 소교리문답의 내용을 모두 다 줄줄 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가르치는 교훈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면서 소교리문답을 잘 활용하여 가르치기 위하여 개혁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방법은 성경본문과 연관하여 교리를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바로 교리의 내용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그 교리를 표현하는 성경의 사건들이나 교훈들을 배우게 하여서 자연스럽게 교리문답의 결론으로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모든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문답의 특정 문항들에는 그 기초가 된 성경의 증거 구절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 구절들과 또 관련되는 여타 성경 본문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소교리문답을 잘 가르치는 유익한 지침입니다. 예를 들어, 제 1문답에 나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구절의 뜻을 바르게 설명하기 위하여 막 2:1-12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들어 가르치는 식입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목격한 무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런 본문에서 우리는 '영광돌림'의 기초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선행된다는 사실을 봅니다. '영광돌림'이란, 우리가 무슨 공로를 쌓아서 그것으로 이미 풍성하고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무엇을 더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달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서 행하신 구속의 사역을 세 가지 직분(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요약한 소교리문답을 성경의 생생한 기록들을 사용하여 아주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다. 소교리문답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매우 함축적이고 요약적이므로, 그런 내용의 기초가 된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내용을 설명할 때, 짧은 구절들에 담겨 있는 아주 풍성한 가르침을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교리문답의 증거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소교리문답을 잘 활용하는 첩경입니다. (*예를 들어 1문답의 증거구절들을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여러가지 소교리문답 해설서들도 대체로 이런 방식을 취하여 소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3. 바른 소교리문답 교육의 열매
3.1. 소교리문답이 가르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흔히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으로 알려진 29-38문답을 살펴보면, 소교리문답의 첫 부분 곧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바’를 설명하는 부분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자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내용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소교리문답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pro nobis)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교회교육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테마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교육을 통하여 교사가 자녀들에게 전할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모호한’ 지식(예를 들어, 약 2:19)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연관하여 개혁교회에서 널리 애용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1 문답은 교회교육을 통하여 전수되어야 할 핵심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너를 지키시며,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너를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 HC 문1: 살든지 죽든지 간에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 답1: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내 몸과 영혼이 모두, 살든지 죽든지 간에, 신실하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사실입니다. / 그분은 자신의 고귀하신 피로써 내 모든 죄를 완전히 갚아 주셨으며 / 악마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 그분은 또한 하늘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 그런 방식으로 나를 지켜주십니다. / 실제로 모든 일들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합력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 그래서 그분은 또한 성령님에 의하여 나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시며 / 내가 이제부터 진심으로 기꺼이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
3.2. 삶의 변화: 인생관, 가치관, 성품의 변화 -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교리문답을 기초로 한 교육의 목적인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 지식을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며 전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의 바른 결과로서 우리는 항상 자녀들의 ‘삶의 변화’에 항상 주목해야 합니다. 삶의 변화, 특히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성품’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녀들은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들을 말씀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반드시 우리 마음에 제기하시는 질문들입니다. 소교리문답은 처음부터 바로 그 질문을 우리 자녀들에게 제기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인생이 무엇인지 밝혀줍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자(Christ-like)이며, 경건한 자(the godly)는 하나님을 닮은 자(God-like)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는 교회교육은 결국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참 하나님이자 이 땅에 오신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할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인지 가장 잘 가르치셨고, 또 모범적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우리에게 보여주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4. 구속사적 성경 이해: 교리문답과 더불어 함께 가르쳐야 할 성경이야기
4.1 ‘두 길’ 테마 (12–19문답): ‘율법’(torah)의 의미, 구약 성경의 주제.
-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인간 (창세기 3:22 말씀을 소교리문답 12-19문답에 비추어 해설): 선악을 아는 일에 삼위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말씀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선악의 참된 기준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선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게 해 주는 말씀이 바로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절)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복하는 것을 통하여 참된 선과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악을 배워서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하였던 인간이 이제 타락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자, 그런 자는 영생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생명나무의 길은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되었던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17-19 문답)
- ‘죄’란 무엇인가 (14 문답):이제 인류는 하나님이 정하신 올바른 길로 가지 않고 자의대로 그 길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가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본래 가야할 길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이 상태를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사사기 20:6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라는 구절에서 ‘죄’ (hamartia)라는 말의 중요한 어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어떤 목적을 겨냥하였는데, 그 겨냥한 대로 나가지 않고 도중에 어긋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개념을 하나님과 사람 간의 관계에 적용할 때에 죄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삼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악하여서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제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아가려고 하였던 모든 것이 바로 죄의 시작이요 또 본질인 것입니다. 자, 우리는 과연 아담의 첫 범죄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16 문답) 우리의 현 상태를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도 역시 그 죄의 값 곧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 본성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바른 길을 싫어하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고 결정하려는 사람, 곧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인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길과 그 길을 벗어난 죽음의 길, 이 두 길 테마는 성경, 특히 구약 성경 전체를 일관하여 흐르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가인의 자손과 셋의 자손, 언약 백성들의 거듭된 타락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구약의 역사를 이 두 테마로 선명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4.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23-26문답):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직분(HC 32)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두 길 테마를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사역을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소교리문답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분은 타락의 세가지 결과를 상쇄하는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이해되고 또 가르칠 수 있습니다. (*타락의 세 가지 결과와 십자가의 세 가지 결과 비교: 18 문답, 23-26문답).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소교리문답을 이용하면서도 '교리적 접근방식'이 다 제공하지 못하는 '구속사적 접근방식'의 장점을 상당부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두번째 방법은 가정에서의 (그리고 가능하다면 교회학교 및 기독교학교에서의) 꾸준한 성경 읽기 및 설교, 성경공부를 통하여 채워져야할 영역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어린이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의 구속사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면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를 너무나 잘 해설해 둔 좋은 어린이성경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에 와서 접한 여러 종류의 어린이성경의 '수준'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개혁주의 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eisgesis하는 경우를 개인적으로 많이 접했습니다. 그에 비하여, 제가 접한 한 어린이성경의 해설은 성경본문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해설에 기초하여,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한 중요한 교훈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 4.3.에서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 구속의 적용과 그리스도인의 삼직: HC 32 “Why are you called a Christian? / Because I am a member of Christ by faith and thus share in His anointing, so that I may as prophet confess His Name, as priest present myself a living sacrifice of thankfulness to Him, and as king fight with a free and good conscience against sin and the devil in this life, and hereafter reign with Him eternally over all creatures.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사역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소교리문답에서는 잘 반영되지 않았지만, 개혁교회의 또 다른 교리문답인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에서는 이 점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칼빈 선생이 기독교강요에서 가르친 '이중적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보는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곧 그분을 닮아야 할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 '믿는 자'가 어떤 자인지 가르칠 때에도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찾기 이전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4.3. 어린이 성경 활용: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 (E. Kuijt, Kleuterbijbel, 20)
"....Op de derde dag ziet Abraham heel in de verte de bergen van Moria. Daar moet hij offeren, zegt God. / Abraham stapt van zijn ezel; hij zegt tegen zijn twee knechten: 'Blijven jullie hier met de ezel. Ik en de jongen zullen samen ginds naar toe gaan. En als we daar gebeden hebben, komen wij weer naar jullie terug.' / Hoor je wat Abraham zegt? Hij zegt dat hij en Izak allebei zullen terugkomen! Maar Abraham moet Izak toch offeren? Dan leeft Izak toch niet meer? Jokt Abraham dan? Nee, Abraham gelooft dat de Heere God Izak zal laten leven. God zal voor alles zorgen! En als Izak moet sterven, kan God hem ook weer levend maken! ...."
사흘째 되던 날 아브라함은 저 멀리 모리아의 산들을 봅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지요. / 아브라함은 타고 있던 나귀에서 내려서 두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나귀와 함께 기다려라. 나와 아이는 함께 저편으로 갈 것이다.우리가 저곳에서 기도를 다 마치면, 다시 '우리가' 너희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 아브라함이 지금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었나요? 아브라함은 자기와 이삭이 모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하지 않나요? 그려면 이삭은 더 이상 살 수 없지 않나요? 혹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예요, 아브라함은 주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려두실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만사를 다 주관하실 것이예요! 그리고 만일 이삭이 죽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어요!"
-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다(히 11:17-19)는 선언의 구약적 근거로, 이 어린이성경의 저자인 Kuijt 목사님은 히브리어 원어의 복수형태, 곧 '우리가 돌아온다'는 단어를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본 사건이 기록된 바로 이전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 즉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다'는 기록(창 21:33)과 관련하여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도를 아주 잘 설명해주는 해석입니다. 
- 이런 훌륭한 성경 해설의 사례들은 다른 화란어 어린이성경들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이런 수고와 노력을 들인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들의 '교육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가정에서, 또 교회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자녀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력들을 얼마나 경주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한국어로 지어진 혹은 번역된 좋은 어린이성경이 많이 출판되기를 기대합니다. 
<글쓴이 주>* 이 글은 2002년 1월 26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 교사강습회에서 특강한 내용입니다. 
** 구속사적 성경이해를 다룬 4부는 지면 관계로 다 풀어 쓰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