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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설교학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
박영재 교수 
차 례
1.설교에 수사학을 사용하라?
2.수사학의 기본 개념을 알라
3.수사학이 설교에 주는 교훈들
4.청중 설득의 4가지 요소
5.논리를 개발하라
6.선한 의지를 자극하라
7.논리에 화법을 덧입히라
8.그림언어를 사용하라
저자 소개 박영재
침례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사우스웨스턴(Southwestem)침례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과정(M.Div)을 텍사스 주에 있는 타일러 한인 침례교회를 섬기면서 강해설교로 유명한 달라스신학교(Dallas Seminary)에서 신학석사과정(ST.M)을 마치고 켄터키 주 소개 서든침례신학교(Southwestem Baptist Seminary)에서 신학석사(Th.M)와 신학박사(Ph.D)과정을 마쳤다. 서든침례신학교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설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담당 디렉터로 섬겼고 한인소망교회에서 사역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강사로 많은 설교학 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움을 이끌면서 설교자의 자질과 심성,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의 기본원리,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전달을 위한 설교방법론을 참신하게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최근 실천신학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설교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우리 심성, 우리 교회 형편에 맞게 소개하는 창의적인 형편에 맞게 소개하는 창의적인 젊은 신학자로 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서 문♠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흔히 설교를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성경을 해석하고, 해석된 결과를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것’ 으로 인식하지만 설교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설교자의 논리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이의 필요성을 직시하고 수사학에서 강조하는 연설의 논리를 우리 설교 사역에 적용하여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지금껏 출간된 많은 설교학 책들과는 달리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은 논리성 개발뿐만 아니라 수사학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연설을 위한 값진 이론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론들을 우리 설교자들이 바로 알고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설교사역이 더욱 알차게 되리라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은 그 독특성이나 필요성이 설교자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효과적인 학습과 학습의 편의를 위해서 설교자가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론과 그것을 적용한 예들을 제시했습니다. 
설교 사역이 인간의 학문에만 기초하여 진행된다면 뼈아픈 실책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설교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대하면 분명 설교 논리 개발과 더불어 설교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1997. 8.
박 영 재
1. 설교에 수사학을 사용하라?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을 통해 설교자들과 지면으로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분들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연구해 온 설교학을 동역자들과 나누는 일이 하나님이 필자에게 주신 사명임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배운 바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효과적으로 도움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젊은 목사로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전병욱목사는 설교 사역을 목사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또 그 설교 사역은 영혼 구원은 물론 교회 확장에도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확신했다. 필자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설교 사역은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 기관의 사역자가 지방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목사인 남편에 대한 사모들의 가장 큰불만은 ‘남편의 불성실한 설교 준비와 설교내용’이라고 입을 모았다는 것이다. 
「확신에 이르게 하는 설교」에서 목회자들이 하는 일 중 가장 많은 일이 설교 사역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설교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며 기피하려는 사역 또한 설교라고 밝혔다. 아이러니하다. 이같은 모순을 탈피하려고 설교자들은 잘 만들어진 설교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훌륭한 설교를 하기 위해 배우려는 일환으로 모방하는 차원일 수 있다.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나 노력도 없이 잘 포장해 놓은 선물을 뜯어서 나누어주기만 하듯 남의 설교를 전달하기만 하면 언제 자기가 준비하여 만든 선물을 양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까?
모든 설교자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욕구는 있으나 훌륭한 설교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 부족하거나 그런 열심을 갖지 않는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설교를 잘 만드는 것이 끝도 없이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필자도 설교를 작성하는 데에 무기력 감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말씀을 선포해야 할 시간은 가까워오는데 설교가 만족스럽게 준비되지 않았을 때가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는 설교를 효과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열정이 있다. 하나님이 양질의 설교를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설교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반성하는 차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요 반성을 넘어서 의미 있고 효과 있게 설교를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말씀을 능력 있게 전달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과 그 효과적인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거쳐야 할 과정이 많다. 다가오는 주일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전해야 할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고,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하고, 해석된 본문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교를 논리적으로 구성하여 마침내 능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설교자의 개성, 인격, 지적 수준 등이 반영되어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된다. 설교가 설교자의 영성과 지성과 인격이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해도 어떤 구성법과 어떤 문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질과 효과에 차이가 있다. 양질의 설교를 만들어내는 데 설교 구성법과 문장 사용, 그리고 논리 개발에 집중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수사학의 영역이다. 결국 말의 힘을 키우는 곳이다. 한 편의 설교 속에 수사학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동시에 성령이 충만하면 그 설교는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되리라는 것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 교회의 강단은 지금까지 영성 있는 설교자들에 의해서 지켜왔다. 즉 설교자의 영성이 설교의 힘의 핵이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영성이 수사학의 이론을 통해서 표출될 수 있었다면 훨씬 바람직한 설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수사학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 견해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면 ‘설득을 위한 능력, (the faculty of discovering in the particular case what are the available means of persuasion)이다. 즉 연설가가 진리로 청중을 설득하는 방법, 연설, 혹은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공부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향해서 어떤 말을 해야 그들이 부모의 충고에 따를까?’ , 혹은 ‘낙태를 찬성하는 그룹들을 향해서 어떤 연설을 해야 그들이 자신들의 고집을 꺽고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게 할까?’를 생각한다고 해보자. 연설가는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 독특한 구성법을 사용하고 말의 힘을 더하기 위해서 화법이나 논리 등을 연구해야 한다. 연설자의 의도대로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서론은 어떤 형태가 좋으며, 본론 전개는 어떤 방식이 효과적이며, 어떻게 끝을 맺어야 연설의 목적을 잘 드러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또 어떤 논리로 전개해야 전도자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며, 어떤 화법을 써야 청중의 마음에 더 매력적으로 닿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수사학이다. 이러한 생각을 설교에 적용해 보면, 어떤 설교 전개 방식이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효과적일까,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나님나라 확장에 더 헌신적인 사람들이 되게 하며, 어떤 방법으로 설교해야 불신 청중이 주님을 믿게 하는 데 보다 설득적일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방법으로 설교해야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사학은 당연히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제시한다. 2,500여 년 동안 수사학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왔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부들이 이방 종교와의 논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있어서 수사학이 한몫 해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설교에는 항상 정확한 논리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고 이러한 논리는 설득적인 힘을 더 했던 것이다. 
히틀러가 세계를 상대하는 전쟁을 일으킬 때 독일 국민들로부터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연설 속에서 주무기로 사용했던 수사적 구성과 논리와 화법의 사용 덕분이었다. 그의 수사적 연설은 항상 힘이 있었고 온 국민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독재를 뒷받침하는 데에 수사적인 연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설교자들은 설교를 위해서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고 해석된 본문을 청중의 삶에 적용시키며 설교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다 되는 것인 줄 생각해 왔다. 하지만 설교 전체의 짜임새나 구성에 있어서 효과적인 방법, 또 설교를 위한 선명한 논리나 청중의 감정을 다스리는 표현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이런 무지 속에서 열심히 설교를 하긴 하지만 왠지 설득적이지 못함을 설교자 자신도 느낀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말하려는데 청중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설교자도 자신이 여러 번 설교했던 내용을 언급하자니 자신도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은 뻔한 내용을 뻔한 방법으로, 혹은 늘 같은 방법으로 설교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럴 때 수사학을 알고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사학은 이런 면을 효과적으로 돕는다. 수사학은 우리의 뜨거운 영성이 담긴 설교를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표현하도록 돕고 청중들의 심리에 뚜렷하게 호소하도록 돕는다. 또 청중들의 심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들이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 설교자들은 히틀러보다도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는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어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설교자들에게는 설교자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즉 청중들은 “우리 목사님은 늘 좋은, 그리고 유익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무슨 말씀이든지 듣겠다.”하는 기본적인 턔도를 지니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연설자들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자료들을 사용해야 한다. 특히 믿을 만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한다. 많은 연구와 논리에 기초를 둔 연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설교자들이 성경을 인용할 때 청중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성경 이야기를 하면 다들 수긍한다. 이 또한 다행스러운가? 연설자들만큼 자료를 많이 연구하지 않더라도, 즉 성경의 내용만 잘 쪼개서 전달하더라도 성도들은 듣는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설교자들은 여느 연설자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런 유리한 위치에서 설교에 수사학의 이론을 가미하면, 분명 2배 3배, 그 이상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2. 수사학의 기본 개념을 알라
자, 이제부터 수사학 이론과 실제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자.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지성과 영성, 그리고 인격 위에 수사적 감각을 옷 입혀보자. 이를 위해서 우선 수사학의 기본개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연설 상황(Rhetorical Situation)
수사학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사학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기초 상식을 살펴보자. 이 기초 상식 또한 설교자의 설교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수사학에서는 연설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연설은 청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필요로 할 때 행해져야 한다.
즉 청중들에게 어떤 도전이나 반응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을 때 연설이 필요하다. 그런 필요성이 느껴질 때 연설자는 청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고 그들로부터 예상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략에 돌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략은 대개 서론에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갈라디아 성도들로부터 얻고자 하는 반응이 있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상한 다른 복음을 좇는 삶으로부터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감지된다. 이것을 설교에 적용해 보자. 설교자는 이번 주일날 설교할 때, 특히 설교의 주제를 정할 때 ‘왜 이러이러한 주제로 설교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가령 성도들이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고, 설교자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주제로 설교를 한다면 이는 그 설교의 동기나 의도가 매우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수사학은 설교의 목적이 선명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청중의 필요에 맞는 것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설교는 성경 강해가 아니다. 강해된 본문을 청중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강해한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설교하게 되면 이는 설익은 밥이나 먹기 힘든 밥을 사람에게 먹게 하려는 것과 같다. 천중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선한 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크래닥(Craddock)은 ‘성경 강해만 있는 설교는 완성되지 않은 설교’라고 강조한다. 고슬고슬 잘 익은 밥이 맛있는 것처럼, 구성이 가미된 설교를 할 때 청중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설교가 결론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설교를 듣던 청중이 감동을 받아 마음에 결단을 위해 꿈틀거리게 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날카로운 적용의 기회도 삽입되어야 함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찰스 스펄전(Charse Spurgeon)은 ‘설교에 적용이 시작될 때라야 진정한 설교가 시작된다.’ 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적용을 하긴 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꺽둑거리는 흐름으로 진행되는 설교는 그 설교 구성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편의 완성된 설교를 위해서는 많은 구성이 치밀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기본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특히 강해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설교의 적용이 없이 성경의 내용만, 마치 과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보고하는 식으로 설교를 하거나, 혹은 적용을 하기는 하는데 껄끄러운 진행으로 청중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설교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청중들이 동의하지 않는데도 설교자의 일방적인 선포로만 끝나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강해 설교의 진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설교자의 불성실에서 나타난다. 또 설교의 목적이 선명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한 편의 설교 안에서 너무 많은 주제를 정해서 나열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의 유명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짧은 25분 설교 속에서 6가지 주제를 전하였다. 설교학자인 필자도 그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성도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교의 목적을 잃지 않는, 아니 설교의 목적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설교를 해야겠다. 설교가 효과적이지 못하면 성도의 신앙의 질을 높이거나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 본문을 선정하는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강해설교를 선택하는데, 재고해 보면 좋을 듯하다.(물론 주일 낮 설교 이외의 설교 시간에는 큰 문제는 없으리라 본다.) 
둘째, 연설자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연설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헌신예배의 설교를 할 때, 청중들은 그 설교 속에서 기대하는 수준이 있다.
헌신예배이니 자신들의 헌신의 자세에 대해서 자극을 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런데 기대치 이하로, 즉 헌신의 자세에 관한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했거나 미진했다면 그들은 설교가 시시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만양 기대치 이상으로 자극을 주었다면 청중들은 “굉장했어!” 하는 평가를 내린다. 결국 설교자는 청중이 원하는 수준과 기대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에게 설교할 때,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자극을 주어야 한다. 설교 속에서 그들이 소화해 내기 힘든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신앙의 자극과 도전을 줄 때 적절한 설교가 이루어진다. 청중이 설교로부터 무엇을 듣기 원하는지 혹은 무엇에 자극 받기 원하는지를 설교자가 알아야 적절히 준비를할 수 있다.
셋째, 연설자는 제한성 혹은 강제성(Constraint)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전도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하자, 전통을 잘 지키려는 습관을 지닌 청중들에게, 일단은 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을 가급적이면 삼가면서 복음의 핵심을 선포해야 한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을 강조하면 충분하게 제사 드리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전통을 버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는가? 처음부터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 얼마나 많은 초신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술부터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고자 하겠는가? 또 다른 예를 들면, 교회 분위기가 대체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설교자가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하면 그들이 시험에 들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이럴 때에 설교자는 청중들이 십일조에 관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혹은 성도들 대부분이 십일조를 하고 있으며 십일조를 하지 않는 몇몇 성도들이 자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설교자는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해도 좋으리라, 설교자는 반드시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을 의식하며 설교의 주제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장애물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연설의 문제들(Rhetorical Problems)
1.연설자와 청중과의 관계
한국에서 목회하는 설교자가 미국 이민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될 때, 혹은 도시 설교자가 농촌 교회에서 설교하게 될 때, 설교자들은 자신들과 판이하게 다른 청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청중이 설교자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점 때문이다. 생활 습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가치관도 다르다. 경험하는 바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청중의 관심사와 상관이 없는 주제에 관해서 설교할 수 있거나 설교자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동떨어진 것을 설교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청중이 설교를 거부하거나 외면하게 만든다. 그러면 설교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청중들은 메마른 자신들의 심령 속에 설교자가 말씀으로 충만히 채워주길 간절히 바란다. 사례비를 더 올려달라는 심정으로 설교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설교 시간에 흘리는데 현재의 사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청중들은 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역겨워한다. 이때 갈등이 증폭한다. 설교자가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청중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들을 예상할 때 설교자들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하고,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려 노력해야 한다. 또 영적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설교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2.설교를 위한 주변의 상황들
설교자가 청중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으면, 호소를 위한 설교를 할 것인가 논쟁적인 설교를 할 것인가를 선정해야 한다. 장례식에서 설교자는 사랑과 위로가 듬뿍 담긴 설교를 해야 하며 결혼식에서는 결혼식의 주인공들과 하객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즐겁고 희망찬 기분을 갖는 분위기를 만들도록 설교해야 한다. 새벽 예배에선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이 조용하게 설교해도 좋으며 철야집회에선 보다 뜨겁게 설교해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예배들을 위해서 장소와 특징에 따라서 설교자 자신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청중과 설교자 사이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설교를 짧게 할 것인가 아니면 길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설교 장소가 예배당인가, 야외인가, 강당인가 등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어린아이를 위한 설교라면 일반적으로 짧은 설교여야 할 것이며 강당에서 설교를 한다면 주일예배처럼 엄숙하고 무게 있게 하기보다는 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설교해야 할 것이다. 주변 상황을 고려하며 설교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선결 과제이다.
3.설교의 주제들
설교자가 지나치게 복잡한 문제들을 끄집어내어 설교하면 청중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열심히 설교를 했는데 너무 많은 문제들을 언급한 나머지 설교가 끝날 때쯤에는 단 한 가지도 생각할 수 없게 한다면 이러한 주제 설정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주제가 청중이 기대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빚나간 내용의 설교 역시 주제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생각하고 전도설교인가, 헌신을 위한 설교인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설교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문제를 파헤쳤으니 자신이 속한 교회의 특성과 상황을 고려해서 해결해 나아가길 바란다. 이제, 설교학과 수사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수사와 설교의 차이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사람의 인격을 통해 선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말씀을 받는 작업, 해석작업, 설교 구성 작업, 전달을 시도한다. 특히 설교 구성에 있어서 사실이나 진리 설명, 적용, 절정을 향한 점진적 전개 등이 시도된다. 연설자는 수사적 논리와 화법 등으로 연설문을 작성한다. 하지만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한 권위로 성경을 풀어나가면서 설교한다. 또 수사학에서는 강연자의 의도대로 청중을 설득하지만 설교는 설교자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도에, 하나님의 맘씀 앞에 굴복시키려 한다. 결국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콕스는(James Cox)는 설교의 4가지 기능이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설교는 선포(proclaiming), 가르침(teaching), 증언(witnessing), 예언(porphesying)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거나 믿음의 확신에 거하지 못한다면 설교 속에서 증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설교의 목적도 적절히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없다. 신앙 없는 설교자나 불신자는 절대로 설교할 수 없다. 연설은 연설자의 노력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훌륭한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와 하나님과의 영적 긴밀함이 우선 조건인 것이다.
수사의 종류
설교는 설교의 주제에 따라서 교리설교, 윤리설교, 헌신설교, 위로설교, 상담설교, 신앙성장설교 등으로 나눈다. 하지만 연설에는 주제에 따라서 변증연설, 선언연설, 그리고 충고연설 등으로 나눈다.
1.변증연설 : 법정에서 피고를 위한 변호를 말한다 
2.선언 혹은 예식 연설 : 청중을 칭찬하거나 격려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연설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현재 청중들이 잘하고 있는 일, 혹은 훌륭한 믿음생활의 모습에 대해 칭찬한다.
3.충고연설 : 전쟁에 참가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느냐 현상을 유지해야 하느냐, 혹은 외국에 군대를 주둔해야 하느냐 철수해야 하느냐 등의 주제를 가지고 청중을 설득할 때 필요한 연설이다. 즉 청중이 연설자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혹은 그들을 설득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연설자는 이런 종류의 연설을 할 수 있다. 권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데 충고의 연설을 한다.
3. 수사학이 설교에 주는 교훈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 맞게,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에게 맞게 접근했던 기독교 최고의 설교가 바울 사도. 설교의 대가 바울의 지혜와 수용자 분석론을 수사학에서도 확인한다.
설교 준비를 할 때 본문을 잘 설명하고 본문을 청중의 삶에 잘 적용하도록 했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니다. 준비하고 선포한 설교가 과연 청중들이 쉽게, 그리고 적절하게 받아들일 만한 방법이었나를 생각해 보자. 이것을 위해서 설교자는 수사학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 제안을 살펴보자.
청중이 설교를 듣게 만들라
수사학에서는 청중을 설득하기 전에 청중의 마음을 열어놓을 것을 강조한다. 즉, 연설가에 대해서 신뢰감을 갖게 하고 연설을 듣도록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래야 연설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청중들이 설교자의 설교를 마음을 활짝 열고 듣게 할 것인가?
첫째, 성도와 설교자간의 간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성도로부터 신앙의 열매를 성급히 기대하다가 변화되지 않는 성도를 보면 화가 날 수 있고 이런 화(禍)가 설교에 나타날 수 있다. 설교자가 “신앙생활 5년 10년을 해도 교회에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이 봉사해 놓은 터전 위에서 즐기기만 하는 얌체 성도들이 있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 봉사 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다면 성도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고 역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성도와 설교자간의 거리감을 만들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어도 교회를 위해서 아직 봉사를 하시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은 봉사하고 싶은데 늘 바빠서 안타까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이해합니다. 또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어디서부터 봉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배우시길 바랍니다. 서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박영재 설교)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은 성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성도들이 “목사님이 날 이해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마음이 더 열려서 더 빨리 봉사에 참여하게 된다. 결국 설교는 설교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청중이 어느 설교자를 더 좋아하고 신뢰하게 될지는 자명해진다. 설교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청중을 존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한다. 이러한 설교자의 도는 청중들에게 긍정적으로 전달되며 결국 설교에 설득적인 힘이 더해지는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청중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개척교회에 한 기성 교인이 찾아왔다고 가정하자, 목사님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바싹 다가가서 “성도님이 오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오셔서 우리 개척교회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면 도망갈 성도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와줄 마음은 서로가 신뢰하게 될 때 생기는 법인데, 목사와 성도간에 신뢰를 쌓는 기간도 갖지 않은 채 교회에 와야 하는 필요성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부탁은 그 성도의 귀에 순수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간사해 보일 수 있다.
차라리 “성도님,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교회는 저의 오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를 통해서 이루실 뜻이 있어 세우셨습니다. 성도님도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려고 이곳에 보내신 분이 아닌지 한번 깊게 기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다면 목사의 권위가 서게 된다. 이런 말은 “목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목회 하는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게 만든 그 설교자를 신뢰하게 된다. 성도는 그 목사로부터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니, 이미 그 목사로부터 영적으로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신뢰는 ‘이 목사님은 다른 목사님과는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설교를 듣도록 마음을 열게 한다. 즉 설교에 식상한 성도라 할지라도 ‘이 목회자는 뭔가 다른 설교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결국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잘 듣는 성도로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는 목회자가 성도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게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설교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서 훌륭한 목사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청중들이 설교들을 준비를 하게 된다. “우리 목사님은 기도 참 열심히 하셔, 참 진실하셔, 틀림없는 분이야!” 하는 말이 성도들 입으로부터 나오게 만든다면, 그것은 곧 목사님을 신뢰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신뢰의 관계 속에서 설교할 때 설교는 성공적일 수 있다. 
“목사님과 얘길 나눌 때마다 저는 목사님으로부터 언제나 배울점을 발견합니다.”하고 고백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목사는 만나는 성도들마다 영향을 미치는 설교자임에 틀림없다. 그런 관계 속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청중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파고들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성도들로부터 신뢰의 관계를 쌓아서 그들의 마음을 열고 설교들을 준비를 갖추게 하라. 청중들이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작업은 더 힘들고, 더 오랜 시일이 걸린다. 이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훌륭한 인격을 지녀야 하며 성도를 신실히 보살피는 균형잡힌 목회적 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즉 목회적 감각을 높이기 위한 설교자의 감성 지수를 개발해야 한다.
동조(Adherence)개념을 활용하라
펄먼(Perelman)은 그의 저서 「신수사학」(The New Rhetoric)에서 청중들의 마음을 연설에 빠져들게 혹은 찰떡같이 달라붙게 (adherent)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과학자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단지 보고하는 식으로 설명하고 끝나는 것, 즉 청중들의 동의없이 보고만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천중들이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진리가 진리로 인식될 수 있으며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 그 결과를 성령의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자가 과학자의 보고서처럼, 청중들이 설교의 메시지에 동의를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단지 외치기만 한다고 그 메시지가 성공적일 수는 없다. 청중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동의를 하게 만드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선한 의도가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즉 청중들이 동의하게 만드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적인 메시지로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불신자를 상대로 설교할 때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혹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하고 말하면 설교자와 불신자인 청중들 간에 거리감이 형성된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모순과 의심을 갖게 합니다.” 하고 시작한다면 청중과 설교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우리 설교자들은 때때로 너무 빨리 결론에 도달하는 말을 한다. 즉 청중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기회나 과정도 갖지 않고 결론에 도달하는 말을 하고 결단을 촉구한다. 결국 청중들은 감동 없이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 청중(Universal Audience) 개념을 활용하라
설교는 설교의 내용이 얼마만큼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주관적인 내용으로 일색된 설교는 매우 무가치하다. 수사학의 목적은 최대 다수(Universal Audience)의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의 목적 역시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객관성을 띄어야 한다. 물론 설교는 때때로 주관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만이 온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주관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객관성을 요구하는 설교에서 주관적일 때가 많다. 
지엽적인 설교는 보편적인 청중들의 관점에서는 비진리로 인식된다. 이러한 경우 어느 특정한 그룹은 그 설교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그룹은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객관성이 결여된 설교는 가치가 하락된다. “그 어떤 교회보다도 훌륭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 “이 동네에서 제일 가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 “한국에서 제일 가는 모범 교회 되게 해달라.”등의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이 아니다. 삼자가 거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이기적인 태도요 이전 인수격 신앙이다. 또 자아 도취에 빠진 태도이다. 모든 교회가 잘 되길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라.
분석된 청중의 삶을 유의하라
만약 설교자가 청중들을 잘 알고 있다면 설교자는 쉽게 그들의 정신적 접촉(mental contact)이 이뤄지게 된다. 청중 가운데 가족의 일부가 전쟁에 참여한 상황이라면 설교자는 자신의 가족의 상황을 “내 아들도 전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고 설명하면서 청중과 설교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정신적 접촉을 위해서 설교자는 청중의 직업, 삶의 정황, 그들의 긴박한 필요성, 개인의 경험, 신앙의 수준 정도 등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버크(Burke)의 ‘동일시론’(Identification)은 청중분석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동일시(Identification) 개념을 활용하라
효과적인 설교를 행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도, 즉 청중과의 간격을 줄이고 청중들이 설교자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한다. 버크(Kenneth Burke)가 주장한 ‘동일시론(Identification)’은 한마디로 설교자가 성도와의 신뢰를 쌓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신뢰를 쌓는 방법이란 설교자와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을말한다. 즉 동일시하는 것이다. 동일시론은 ‘본질의 합체’(Consubstantiality)와 같은 개념인데 이는 본인의 정체성(Identity)을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설득의 기초가 마련된다고 보는 것이다. 
A라는 사람이 B와 직업이 같다든지, 그와 친구가 된다든지, 활동 영역이나 믿음이 같거나 가치면에서 서로가 일치함을 느낄 때 사람은 쉽게 하나가 된다. 특히, 서로가 본질을 나누거나 깊이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나눌 때 곧 하나가 된다. 두 객체가 일반적인 개념이나 태도 혹은 자료들을 통해 연합이 이루어질 때 그들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설득하려면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해야 한다. 또 어린이가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할 때 어린이는 그러한 어른의 행동을 좋아하게 되고 결국 어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은 자기와 비슷하거나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때 하나가 된다.
동일시(Identification)하기 위한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도와 공통점을 찾는다.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청중들에게 자신이 낙태 반대자임을 밝히면서 연설하면 청중들은 마음을 열고 그의 연설을 경청한다. 국회의원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한 후보가 시골의 청중들에게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하면 이러한 내용은 시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타후보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또 설교자는 신앙의 공동의 적인 마귀나 세상을 적대시함으로써 기독교 청중과 동일시될 수 있다.
둘째, 친구의 적을 적대시함으로써 친구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과 소련은 독일을 적대시함으로써 두 나라가 하나 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또 의견이 늘 달랐던 두 교수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학과를 없애려는 학교의 방침을 알고 그들이 학교 방침을 공동으로 대항할 때 그들은 하나가 된다. 또 설교자와 청중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청중의 의견에 동의함으로써 청중과 동일시될 수 있다. 관심거리나 의견이 청중과 설교자간에 일치할 때 청중과 설교자는 하나 되며 설교자는 청중 설득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단에 대해서 설교자가 분노를 발할 때 청중은 설교자와 하나됨을 느낀다. 행여 설교자가 청중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런 성도는 신자가 아닙니다.” 한다면 이런 설교를 듣고 설교자와 일체감을 느끼는 성도는 별로 없다. 공격적인 태도의 설교는 성도와 동일시될 수 없다. 동일시되지 않으면 설교를 통한 성도 설득은 더욱 어려워진다.
셋째, 가장 강력한 차원으로 청중이 무의식중에 설득 당하게 하는 것이다.
태평양화장품을 사는 여성은 자신도 모르게 태평양화장품을 광고하는 광고모델의 이미지와 같아지기를 원한다. 태평양화장품은 광고모델을 통해서 구매자들의 무의식 세계를 이미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로 시작하는 찬송을 부를 때, 그가 당한 처지와 이 찬송을 작곡한 의도를 알면 이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은 마틴 루터처럼 험난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용감한 신앙인의 모습을 연상한다. 무의식 속에서 루터를 닮고자 하는 동일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동일시하는 태도가 목회 사역에서도 나타난다. 즉 훌륭한 설교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면서 성도들은 목회자와 동일시하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긍정적인 차원으로 청중에서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청중이 잘 알고 있는 단어나 내용을 설교자가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청중이 설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예수님도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심지도 가꾸지도 아니함에도….” 청중들이 느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사용했다. 이것은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입장에서 자료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이다. 
동일시론을 설교 쪽에 보다 무게를 두어 생각해 보자. 라스칼조(Craig Loscalzo)는 그의 저서 「동일시를 통한 효과적인 설교 방법론」(Preaching Sermons that Connect : Effective Communication through Identification)에서 설교자의 화술 속에서 청중이 ‘저 설교자는 우리와 친숙한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는 인상을 받는다면 청중들은 설교자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친숙을 위해서 어떻게 동일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설교자의 관건이다. 라스칼조(Loscalzo)는 이를 위해서 3가지 원리를 제시했다.
첫째, ‘진행과정’(On Going Process)의 동일시론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개척에는 은사가 있는데 교회 성장에는 자신이 없거나 큰 부담으로 안고 있는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 초신자를 위한 성경공부 인도에는 귀신인데 고급반 혹은 양질의 교사 배출을 위한 훈련에는 맹탈인 설교자가 있다. 이는 설교자가 초보 단계의 수준을 벗어나는 발상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초신자들이 “목사님 설교가 참 좋아요,” 하고 칭찬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해지면서 “우리 목사님 설교는 더 이상들을 것이 없어.”하고 평가를 내린다면 이는 ‘진행과정’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가 영적 성장이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이나 기술에 있어서 진보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의 변화를 느끼며 변화된 모습, 생각, 신앙에 맞는 태도를 취해야 동일시함이 지속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설교자는 성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둘째, ‘상호 과정’(Mutual Process)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간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즉 대화를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을 가져야 상호 연합이 된다. 애처로운 마음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민감한 설교자들은 동일시하려는 마음을 가지려 한다. 즉 청중들의 문제를 함께 느낌으로 그 성도와 하나가 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상상력을 도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갔으니 그 마음이 오죽 아팠겠습니까? 저라도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힘드시겠지만 믿음으로 이깁시다.” 하고 목사가 위로한다면 이것은 아들을 잃은자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며, 이 위로를 들은 당사자는 목사가 자신을 이해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목사에 대해서 편한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청중들의 슬픔, 좌절, 고통, 불안, 두려움, 기대감, 성취감 등을 함께 느끼려는 설교자의 태도에서 청중은 설교자를 신뢰한다. 설교자가 신뢰를 받고 안 받고는 청중을 이해하는 깊이에 달려 있다.
셋째, ‘성장 과정’(Growing Process)을 통해서 설교자는 청중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버크의 동일시론을 잘 활용하면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잘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마음 자세는 청중들이 설교를 잘 들을 준비를 하게 하는 데 공헌하는 자세이어야 한다.
잠깐!…………………………………………………………
“칭찬하고자 할 때, 혹은 비난하고자 할 때 설교자는 음성을 작게 하라. 그리고 긍정적인 면에서 강조하고자 할 때는 큰 소리로 말하라”(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칭찬할 때 설교자가 큰 소리로 말하면 듣는 사람이 역겹게 혹은 허풍처럼 느낄 수 있다. 또 비난할 때 큰 소리로 혹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면 청중이 거부감을 느낄 수있다. 그러나 진리를 강조할 때는 큰 소리로 말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하고 말할 때는 큰 소리로 말해도 무방하다. 내용이 은혜롭기 때문이다.
4. 청중 설득의 4가지 요소
이성(논리)에 호소하라
“연설자의 논리로 청중의 이성에 호소하라.”는 말은 논리를 바르게 전개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고(思考)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청중은 설교가 논리적일 때 고개를 끄떡인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못 배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설교가 논리적일 때 쉽게 이해하고 쉽게 순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논리는 청중의 지적 동의를 얻어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1.이분법을 사용하라
이분법은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단계를 가능한 전제로 내세운다. 둘째 단계는 결론을 맺는다. 예를 들면 “바울은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다.” 하고만 말하면 미완성의 문장이다. 청중들은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충 문장을 필요로 한다. “바울은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훌륭한 연설가이다.” 한다면 완전한 논리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주는 이미지는 ‘바울은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훌륭한 연설가이다.’ 한다면 완전한 논리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주는 이미지는 ‘바울이 훌륭한 연설가’라는 사실이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란 뜻보다도 청중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된다.
결국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뒷 문장인 ‘바울은 훌륭한 연설가’이다. 이 문장은 연역법적 형식의 이분법이다. 이유를 먼저 말하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훌륭한 연설가’라는 내용이 청중들의 귀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제 귀납법적 이분법을 보자. 귀납법적 이분법은 이유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먼저 특별한 전제를 말하고 난 뒤에 그 전제에 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바울은 훌륭한 연설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바울이 훌륭한 연설가인 이유, 바울이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란 이유가 더 머리 속에 남는다. 이유를 더 부각시키고 싶을 때 그 이유를 문장의 마지막에 둔다.(귀납법) 이와 반대로 이유보다도 결론을 강조하고 싶다면 결론을 맨 마지막으로 문장으로 사용하면 된다.(연역법)
위의 내용을 좀더 구체화해 보자. “난 여러분들에게 오늘 늦게까지 강의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면 이는 귀납법적인 이분법 방식이다. 강의를 연장해야 하는 이유가 더 선명하게 청중의 가슴에 남는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난 여러분들에게 오늘 늦게까지 강의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한다면 이는 ‘늦게까지 강의를 연장한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가슴에 남는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원인을 말하든가 아니면 원인을 말하고 결론에 이르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중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싶으냐 하는 목적에 따라 강조하고자 하는 문장의 위치가 결정될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뒤로 놓는 것이다.
“바울은 친구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도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귀납법)
“바울은 전도할 사명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연역법)
위의 두 문장은 강조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귀납법적 이분법을 보다 적절히 사용할 수 있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지켜본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와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무리들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제자들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한때 예수님을 미친놈이라며 정신병자 취급을 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지금 그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으로부터 능력 받고자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단 말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부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것은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후 부터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순간 그들은 생각하는 방향, 사물을 보는 관점, 삶의 목적, 모든 것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큰 충격을 주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생애를 바꿀 만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박영재 설교)
이 장면은 크게 두 구도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무시하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도 모임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두 가지 구도는 귀납법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장면을 연역법적 이분법으로 해보자.
한때 예수님을 정신병자로 취급했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그들은 생각하는 방향도 삶의 목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들이나 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고자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생애를 바꿀 만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이것은 연역법적 이분법이다. 자 어느 것이 더 좋은가? 어느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가? 장단점을 생각해 보라. 
이분법을 더 살펴보자.
요즘 젊은이들한테서는 효 사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들 말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어느 학자는 나름대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지식이 부모로부터 왔다. 삶의 지혜와 기술의 습득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러 받아야 살 수 있었다. 평생을 머슴살이해도 제 힘으로는 밭 몇 뙈기 사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와 신분도 부모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양반 자식은 양반으로, 상인 자식은 상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옛날에는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사회와 학교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얻기 때문에 옛날처럼 부모 덕 볼 일이 없고, 그래서 효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곽선희, 「참회의 은총」) 
이 또한 귀납법적 이분법이라고 볼 수 있다. 질문을 던지는 형식 이면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자녀들이 효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란 내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해 답을 풀어나갈 때, 즉 원인을 파헤쳐나가는 노력 속에서 청중들에게 “왜냐하면”이란 전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청중들에게 논리적인 흥미를 유발시킨다. 
필자는 설교에 귀납법적인 이분법을 즐겨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논리 전개에 있어서 더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납법적 이분법을 바꾸어서 전개하면 연역법적 이분법이 된다. 설교자의 취향에 따라서 연역법적 혹은 귀납법적 이분법을 사용할 수 있다.
2,삼분법을 사용하라
논리적 전개에는 이분법 외에 삼분법이 있다. 즉 논리가 3단계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 단계는 대전제이며, 둘째 단계는 소전제이고, 셋째 단계는 결론이다. 삼단 논법에서 결론의 주어가 되는 개념을 소개념(S)이라 하고, 결론의 술어가 되는 개념을 대개념(P)이라 한다. 대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전제를 대전제라 부르고, 소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전제를 소전제라 부른다. 두 전제에는 들어있으나 결론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매개념(M)이라 부른다. 삼단 논법은 크게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 형식을 아래 예를 통해 살펴보자.
1단계 (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2단계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3단계 (결 론) 모든 사람은 죽는다.
여기서 매개념이 1단계, 즉 대전제(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2단계, 즉 소전제(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의 주어로 되어 있다. 1단계와 2단계의 연결이 매개념을 통해 이루어졌다. 두 전제의 주어인 “소크라테스”가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3단계에서는 1단계와 2단계를 다 수용하는 결론을 맺는다. 1단계와 2단계가 3단계의 결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하도록 만든다. 1형식에 해당되는 예를 더 들어보자.
1단계 수은은 고체가 아니다.
2단계 수은은 금속이다.
3단계 그러므로 어떤 금속은 고체가 아니다.
이것도 대전제와 소전제의 주어가 같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소전제가 반드시 긍정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분법에는 귀납법의 형식과 연역법의 형식이 있다. 귀납법적 삼분법은 특별한 상황에서 일반적인 상황으로 전이되는 것을 말한다. 즉 특별한 상황의 일반적 추론으로의 귀결을 말한다. 특별한 것(소크라테스는 죽는다)에서 일반적인 상황(모든 사람이 죽는다)으로 연결되는 귀납법적 삼분법이다. 만약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는 연역법이 된다.
1단계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실패자였습니다.
2단계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3단계 실패 속에서 우리도 주님께 붙들리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위의 문장을 골격으로 삼분법의 구도를 유지하며 길게 설교해 보라. 예를 들면 1단계의 내용을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요점은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실패자였다.”는 내용을 설명한다. 그리고 2단계의 긴 설명 속에서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에게 붙들린 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요지가 들어간다. 그리고 3단계에서는 실패자인 청중이 적용할 수 있는 것, 즉 “실패자인 우리도 주님께 붙들리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는 사실로 연결시키면 청중은 은혜를 받는다. 이와 같은 삼단논법은 설교 전체 줄거리의 요점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위의 각 단계를 독자를 스스로 길게 만들어보길 바란다. 
또 다른 예에서 삼단논법을 찾아보자.
1단계 안산의 김학중 목사는 교회 역사상 보기드문 경이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했습니다.
2단계 그는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열정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3단계 저와 여러분도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불같은 열정이 있다면 경이적인 교회 성장 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1형식의 삼단 논리이다. 1단계인 특별한 상황(김 목사의 경이적인 교회 성장 기록)에서 시작하여 2단계와 연계시킨 후에 3단계에서 결과를 받아들이게 하는 논증이 되게 한다. 1단계와 2단계의 주어들이 연결된다. 그리고 연결되지 않는 술어들(P와S)끼리 결론에서 연결시킨다. 위 삼분법에 살을 붙여서 설명해 보라. 그러면 바로 그것이 설교가 된다. 설교의 기본은 논리이다.
1단계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2단계 흑인은 사람이다.
3단계 그러므로 흑인은 백인과 동등하다.
대전제인 “모든 사람”이 3단계에서 주어가 된다. 1단계와 2단계가 역시 받아들일 만한 전제가 되면 나머지 3단계는 매개념을 뺀 나머지 전제(소개념 및 대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 논리로 만든다.
제3형식의 삼단논법을 보자. 매개념이 대전제에서 술어로, 소전제에서는 주어로 되어 있는 형태다. 예를 들어보자.
1단계 예수님은 사랑의 선지자다.
2단계 사랑의 선지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이다.
3단계 그러므로 우리가 본받을 사람은 예수님이다.
이것을 좀더 길게 활용해 보자.
1단계 1세기 중반 이후에 전 유럽과 중동이 복음으로 초토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라는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2단계 바울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3단계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이 복음으로 온 세계를 초토화하는 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한 삼분법의 좋은 예이다. 3단계에서는 청중이 적용할 수 있게 했다. 설교가 항상 은혜로우려면 청중에게 관련시켜야 하는데 삼분법에서 이를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다.
제4형식을 보자. 이것은 모든 개념이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다 술어로 되어 있는 형태다. 이것은 전제 중의 하나가 반드시 부정 문장이 되어야 한다.
1단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릅니다.
2단계 당신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3단계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전제 중 하나가 부정이기 때문에 결론도 부정으로 끝난다. 이것의 공식은 아래와 같다.
이 외에도 삼단논법은 총 256종류나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구별하여 사용하여 사용하기란 쉽지 않다. 비슷한 내용들이 많지만 대전제와 소전제가 주어든 술어든 연결만 되면 결론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논리를 성립시킬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 24, 25절에 나타난 비율의 예를 보자.
1단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지으셨다.
2단계 하나님께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으신다.
3단계 그러므로 우상들에 대한 섬김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바울은 이 삼단논법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생략 삼단논법으로 전도 목적을 향해 나아갔다. 
1단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지으셨다.
2단계 하나님은 자기를 찾도록 사람을 지으셨다.
3단계 당신은 하나님을 찾도록 창조된 사람이다.
이러한 논증 형태는 철학적 토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며 청중들에게 요점을 쉽게 인식시킬 수 있다. 설교에 삼단논법을 적용해 보자. 세 단계를 거쳐서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연결을 이룬다.
1단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2단계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에 주도권을 쥐신다.
3단계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먼저 구원을 시작하셨다.
출애굽기 3장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1단계 하나님은 모세를 구원하려고 찾아오셨습니다.
2단계 하나님은 모세 구원에 주도권을 쥐셨습니다.
3단계 저와 여러분의 구원에 하나님이 선수를 치셨습니다.
1단계와 2단계가 ‘하나님’의 연결 고리를 통해 3단계에서 자연스런 결론을 내렸다. 즉 3단계에서 진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3.수사 구성법을 사용하라
사랑의 위대함을 주제로 말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론 : 인간은 그 행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싸움과 갈등, 분노와 좌절 등을 겪습니다.
이런 상태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인간은 오랫동안 자기의 수명을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술 : 그것은 인간이 사랑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사랑을 할 때 싸움과 분노에서 생긴 마음의 부정적인 요소를 몰아내고 ‘그래도 세상은 사랑할 만하구나.’하는 감정을 갖습니다. 사랑을 할 때 외로움을 이길 수 있고, 절망도 이길 수 있고, 불안함도 이길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지논증들 
․(아무개)젊은 과부가 어린 자녀와 함께 수절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 은 자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입시에 실패한 (아무개) 학생이 자살하려고 한강다리 위에서 뛰어 내리 려다가 막판에 포기한 것은 자기를 끔직히 사랑하는 부모님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사랑을 하거나 받는 것을 기억할 때 인간은 살아갈 힘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개) 의학자는 인간이 사랑을 하거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할 때 몸 속에서 엔돌핀이 생성되어 인체 내에 있는 스트레스를 없애주고 좌절, 걱정 등 부정적인 요소들을 마음으로부터 몰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의 고통과 좌절을 잊을 수 있 는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기 때문 아닙니까?
확신 :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가능하면 사랑하며 삽시다. 여러분의 삶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위의 예는 고대 수사학에서 주장하는 연설 구성을 위한 논리를 설교에 적용시켜 본 것이다. 위에서 ‘(아무개)’라고 한 것은 실질적인 예를 들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가급적 실제 인물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나 이야기를 언급해야 청중이 자기들의 이야기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짧은 예지만 이를 골격으로 얼마든지 설교를 늘릴 수 있다.
1956년 3월 17일에 행해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설교는 위의 구성법에 의해서 짜여진 것이었다. 이날 청중은 전국의 장로교 평신도 지도자들이었고 54분간 진행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문 : 로마서 12장 1절
주의 단계(20분)
윌터 로이더(walter Reuther)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장로교회를 칭찬한다.
장로교단으로 넘어간 침례교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하버들 대학의 정신 나간 사람에 대해 말한다.
하와이에서부터 말씀을 듣기 위해 60명을 끌고 온 유대인에 대해서 말한다.
기독교인이 된 의사에 관해 말한다.
본문 읽고 설명한다.
필요 단계(11분)
세상 속의 얽힌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
진짜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①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봉착해 있음을 언급한다.
②이 문제는 모든 문화 속에서도 나타난다.
③이 문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죄’라고 불린다. ─ 그것은 병이고, 어떤 형 태로든 해결되어야 한다.
만족 단계(10분)
그리스도가 모든 죄의 문제의 열쇠이다.
①주를 영접할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②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 원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 복음을 지키는 곳이다.
①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②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공동체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그림으로 그려주는 단계(1분)
①초대교회는 평신도에 의해서 지탱되었다.
②초대교회의 120명이 전 로마를 뒤흔들었다.
③여기에 모인 3,500여 명은 미전역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④여기에 모인 3,500여 명이 그리스도만이 해결자이심을 믿고 각자가 그분 께 삶을 드린다면 복음화는 가능하다.
결단 단계(8분)
미 전역을 흔들 수 있는 평신도란 무엇인가?
①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②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는 사람이다.
③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다.
④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⑤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다.
평신도가 이 일을 하도록 권면한다.
필요의 단계는 결국 문제제기 단계였고, 문제제기는 문제를 해결할 대안, 즉 필요를 채울 만한 만족의 단계이며, 청중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으면서 동시에 그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하는 확신을 갖게 되면 결국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청중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했다. 사도행전 17장 22-31절에 보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전하기 위해서 4단계를 거쳤다.
첫째, 그 시대의 사회성을 분석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절) 이것은 바울이 청중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분석을 끝낸 뒤에 설교를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바울은 청중들의 개인의 학식, 직업, 연령, 가정 형편 등을 고려했다.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23절)이것은 바울이 청중들의 개개인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바울은 분석해 낸 사실들로부터 전도의 접촉점을 찾았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28절, 23절 참조)
넷째, 바울은 그 모든 접촉점들을 연결시켜 복음을 제시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30,31절)
바울의 설교가 효과 있는 능력의 말씀일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청중에 대한 분석이 있었고 분석을 기초로 적절한 연결점을 찾아 복음을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이 설교를 통해 바울은 또 다른 설교 구성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감정에 호소하라
설교자가 청중에게 호소하는 또 다른 방법은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인간은 논리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또한 감정의 동물이다. 즉 인간은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수사학」(The Rhetoric)에서 감정을 통한 청중 설득을 매우 강조하였고, 블레어(Hogh Blair)는 그의 저서 「수사학 강연」에서 청중이 연설에서 맛을 느끼게 해주어야 성공적인 연설이 된다고 단언했다. 이 맛은 논리를 통한 냉철한 이성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감정으로 느끼게 만듦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만국 공통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내용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사람의 지적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가 똑같다. 슬프거나 기쁜 일을 접할 때, 사람은 슬퍼하거나 기뻐하게 된다. 사람은 자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슬픔, 기쁨, 분노, 고통, 걱정, 근심, 좌절, 욕망 등에 둘러싸여 사는 존재이다. 이런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살아가는 청중들이기에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 건드려주면 청중의 감정은 쉽게 동요하게 된다. 그 감정들을 긍정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면 청중들의 감정은 긍정적인 결단으로 접어들게 된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할 때 청중이 그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맛보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
설교는 언제나 청중들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감정을 깨끗하게 처리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할 때 영적으로 치료됨과 동시에 “은혜로운 설교였다.” 혹은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하고 고백하게 된다. 차가운 논리만 있거나 냉철한 사고로 이어지는 설교는, 다시 말하지만 청중들로부터 지적인 동의는 있을지 몰라도 영혼이 치료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청중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라! 청중들이 감정으로 설교의 맛을 느끼게 하라! 설교자가 악한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서 설교 시간에 비난하거나, 훌륭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해서 칭찬을 한다면, 이 또한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를 비난하거나 애국심이 강한 전방 국군의 태도에 대해서 칭찬한다면 이것은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신앙심이 좋은 성도의 행동을 칭찬하거나 격려하면 성도들의 감정이 자극을 받거나 고무된다.
또 타락한 성도의 비극을 서술했다면 이는 청중의 감정에 비극을 느끼게 만든 것이며 신앙의 핍박을 이기느라 숱한 눈물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지킨 내용을 듣게 하면 청중의 감정은 맛을 느낀다. 혹은 마음이 감동된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9)
바울은 “이상히 여기노라”와 “저주를 받을지어다”등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그의 용어 가운데 사랑, 희생, 자비 등 감정을 일으키는 단어는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감정을 유발시키는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면서 청중을 사로잡아라. 설교에서 최근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나 감동적인 사건을 언급한다. 경고를 무시한 삼풍 사건이라든지, 아니면 한겨울 물에 빠진 일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으로 자신들의 몸을 내던진 김일석, 김진석, 형제의 희생 정신(97년 1월 사건)을 언급하면서 설교의 주제인 경고나 희생을 언급할 때 청중들의 감정에 긍정적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다음의 두 예화를 읽고 어느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지 한번 판단해 보라,
제가 잘 아는, 지금은 샐러리맨이 된 집사님이 있는데요, 한때는 그분이 사업을 크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고 빚 독촉에 시달려 이곳저곳에 몸을 숨기며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업을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했는데, 첫째는 중소기업의 자금 압박이었고, 둘째는 적은 자본으로 지나치게 일을 벌였다가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즉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사망을 낳는다…. 욕심이 지나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자 똑같은 내용을 아래와 같이 해보자
제가 잘 아는, 지금은 샐러리맨이 된 집사님이 있는데요, 한때는 그분이 사업을 크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고, 빚 독촉에 시달려 이곳저곳에 몸을 숨기며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업을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조심스레 묻자, 두 가지를 말했는데, 첫째는 중소기업의 자금 압박이었고, 둘째는 적은 자본으로 지나치게 일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목사님, 제가 욕심이 너무 컸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사망을 낳는다…. 욕심이 지나칠 때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박영재 설교)
위의 두 예 중에서 어느 것이 청중의 가슴에 더 와 닿는가? 후자의 경우다. 왜 그럴까? 헛수고한 사람의 경우를 본인의 고백을 통해서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본인의 고백을 들을 때 더 그럴 듯하게 듣게 된다. 전자의 예에서 “…즉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하고 설교자가 말한 것보다 “집사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목사님, 제가 욕심이 너무 컸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하는 것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왜냐하면 청중들이 본인의 고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즉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 본인이 직접 고백했기에 권위가 더 있게 된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설교자가 느끼는 대로 말하고 평가하는 것보다도 당사자의 고백 등을 직접 증언하는 것이 더 생생하게 감정에 와 닿는다.
이성(논리)과 감정에 호소하라
설교는 논리를 통한 호소와 감정을 통한 호소가 공존해야 바람직하다. 논리만 강조된 설교는 너무 메마르고 차갑게 느껴진다. 감정만 건드리는 설교는 너무 감정적이라 사실을 벗어나서 잘못된 곳으로 빗나갈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한 편의 설교 속에서 청중의 지성을 만족시키는 날카로운 논리와 청중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감정에의 호소, 둘 다 공존할 때 바람직한 설교가 된다.
얼마 전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분명히 열심히 설교를 하였다. 하지만 청중들은 마음에 전혀 감동이 되질 않았다. 이미 청중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새롭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2,000여 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의 피공로는 우리를 살린 행위였습니다.” 한다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청중들은 지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청중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설교자는 앵무새처럼 반복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위의 사실을 통해서 청중들이 감동하게 만들려면 감정이 맛을 느낄 수 있는 내용(감정의 자극)을 삽입해야 한다.
1988년 유럽의 알베이니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서 어린 아기와 엄마가 무너진 건물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엄마는 손가락을 깨물어 아기에게 피를 빨아먹게 했습니다. 그들이 6일 만에 구조되었을 때 지나치게 흘린 피 때문에, 아기는 살았지만 엄마는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영국(런던 타임)지는 이 사건을 향해 ‘현대판 예수’로 규정했습니다. 엄마의 피를 공급받고 아기가 살아남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해 우리도 죄 용서함 받고 새 생명을 얻지 않았습니까? (박영재 설교)
이러한 표현은 엄마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자극된 감정 위에 역사적 사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사건을 연계시킨다. 결국, 사실을 통한 논리적 동의(예수님의 죽은)뿐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까지도 불러일으키는 것(엄마의 희생)이다. 
불신자 청중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치자.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천당과 지옥이 존재할 확률은 50%라고 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죽고 보니 지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믿었다가 손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고 보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 믿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니 믿어서 손해 될 것이 없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설교자가 이렇게 귀결을 맺으면 논리적으로 마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으로 설득을 마치면 문제가 생긴다. 이와 같이 설교를 마치면 설교가 너무 사색적이 되어서 결국 청중을 사색하는 사람으로 전략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설교는 지적이면서 마음이 차가운 설교자들에게 종종 들을 수 있는 설교들이다. 다시 말해서 위의 내용은 청중을 지적인 면에서 깨닫게 하는 작업을 했지 청중이 “그렇구나! 정말로 하나님을 믿어야 겠다.” 하는 감정적으로 결단을 내리게 하는 데는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
좋은 설교는 지적으로 깨닫게 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으로 결단을 내리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위의 설교의 뒤를 이어서 감정을 불러일으킬 내용을 삽입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와 “그러니 믿어서 손해될 것이 없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하는 문장 사이에 청중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단을 삽입해야 한다.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천당과 지옥이 존재할 확률은 50%라고 했습니다. 만약 죽었는데 지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믿었다가 손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고 보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하나님 믿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확률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을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확률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꾀로 평생을 살아온 야곱은 생의 위기를 만나자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 얍복 강가에 엎드려 밤을 새워가며 기도합니다. 그 처절한 울부짖음 속에서 마침내 야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피상적으로 알던 하나님을 체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그 이후로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확률에 의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심을 알고 확신 가운데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되, 확률에 의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확신 가운데 믿으시길 바랍니다.(박영재 설교)
이 예는 확률에 의한 신앙의 가능성을 청중의 지성에 호소했고 야곱의 예를 들어서 청중의 감정에 호소를 했다. 지성과 감정에 동시에 호소할 때에 설교에는 균형을 이루는 설득력이 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에 나는 차고 문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며 못을 빼려 했습니다. 드라이버를 돌리면 돌릴수록 그 못은 더 깊숙이 박히는 것이었습니다. 이웃 남자가 다가와 나의 곤경을 안타까워하며 자세히 살펴보더니 “아 이것은 왼손잡이용 못이군요, 보통 못과는 반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못을 빼려면 보통 못과는 달리 반대로 돌려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못이 어떤 종류들이 있고 그 못마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박을 수 있고 뺄 수 있는지 그 법칙들을 배우는 데 무려 50년이나 걸렸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법도를 성경은 그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올라가는 길이 내려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라빈슨 설교)
연장 사용에 서툴렀던 사람의 고백을 통해서 인간의 연민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청중의 논리와 감정에 동시에 호소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인격으로 호소하라
청중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성실성, 적을 향해서는 가장 신랄한 비난을 하라. 이를 위해서 설교자의 선함, 선한 의지, 그리고 도덕성 등을 사용하라. 이 부분은 수사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껏 여러 면에서 이 부분에 관해서 언급했다. 또 뒷부분에 나오는 ‘선한 의지를 자극하라’ (good-will speech)를 참조하라.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교는 구성과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전달자의 인격이 바로 되어 있지 못하면 설교의 진가는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하지만 설교가 좀 엉성하고 질적인 면에서 뒤떨어진다 해도 설교자가 훌륭하면 그 설교는 의미 있게 청중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결론으로 다시 한 번 강조될 것이다.
5. 논리를 개발하라
강대상을 친다고/ 침을 튀긴다고/ 설교가 전달되던 시대는 지났다.
한 번 익혀서 평생 써먹는 논리개발의 비결 14가지. 
논리에 강한 설교가 감동도 크다.
분명한 자료(data)를 사용하라
현대는 산업 사회가 아니다. 정보 사회요 지식 사회이다. 청중들은 정보를 듣는 데 익숙해 있고 지식을 얻는 데 익숙해 있다. 예화나 역사, 혹은 성경 본문에 대한 설명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설명이나 진행은 현대와 미래 청중을 만족시킬 수 없다. 통계자료, 역사적인 근거, 사실 등을 내포하는 표현들이 예화나 본문 설명에 나타날 때, 설교는 청중들에게 신뢰성을 더해줄 수 있으며 지적 만족도를 높여준다.
“현대는 전통이 허물어지는 시대입니다.”하고 말문을 연다면 그 다음은 어디서 어떻게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청중의 욕구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중시하던 영국의 경우 이혼율이 20여 년 전에 비해 35% 증가했습니다.” 하는 것은 정확한 자료를 통해서 신빈성을 더해준다.
사실이나 진리를 사용하라
논리의 출발을 위한 전제 조건이 청중들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하면 나머지 부분, 즉 본론과 결론도 청중들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서는 청중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서론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본론과 결론 어디에서든지 사실이나 진리를 사용해야 한다. 
더 이상의 설명이나 변론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을 말한다. 즉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진리들을 사용할 때 청중들은 설교를 신뢰한다.
설교에서 “서울은 … 큰 도시이다.” 하고 말할 때 이 내용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중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이야기할 때 청중들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다.
“소금은 바닷물에 2%도 채 되지 않으면서도 바닷물의 부패(腐悖)를 방지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전체 인구의 20%나 되면서 썩어 가는 사회를 회복시키지 못합니다. 범법 행위들이 작년에 비해서 38%(만약)나 증가했습니다. 이 썩어 가는 사회를 막을 기독교인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다면 이러한 통계에 기초된 사실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어떤 옹호나 변론도 필요치 않다.
사실이 내포되지 않은 내용의 설교,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는 기독 인구가 참 많은데도 썩어져 가는 사회를 막는 힘이 참 약합니다.”하는 내용은 설득의 힘이 약하다. “우리 나라는 최근 2년(94-96) 동안 소비가 21%나 증가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4.9%에 비해서 엄청난 증가입니다. 우리 나라 국민의 사치성 소비가 얼마나 심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처럼 사치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여러분, 죽음 후의 세계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한다면 얼마만큼의 설득이 있을까?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 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된다면, 특히 천국에서의 삶이 죽음 후에 주어진다는 내용을 말하고 싶다면, 설교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서 사실들을 증명하기 어렵다. 이런 때 설교자는 서론에서 또 다른 ‘사실’을 사용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피조물들은 죽음이 가까워올 때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사실은 청중들의 마음에 사실로 다가간다. 이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발견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 과학적 사실을 언급한 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연결시킬 수 있다.
추정(Presumption)을 사용하라
설교에 있어서 청중들의 동의를 끌어내는 또 다른 방법은 추정을 사용하는 것이다. 보통 인간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것들, 즉 납득할 만한 일반적인 감각이나 경험들을 추정하면서 전개시키면 이 또한 훌륭한 논리 전개가 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섹스(sex)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년들은 돈과 명예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노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과학적인 자료나 사실이 아니다. 단지 일반적인 경험에 기초한 추정일 뿐이다. 자료에 근거한 내용보다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경험하는 상식적인 내용들을 언급하면 쉽게 수긍하게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에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각자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다. 여기서 설교자의 추정이 사용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물론 히브리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인이 믿음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자, 5절에 보니 가인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 내 예배가 무엇에 문제가 있었기에 예배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오히려 화를 내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의 교만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속에서 태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의 예배 태도가 잘못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박영재설교)
“가인의 교만한 예배 태도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는 설교자의 추정은 설득력이 있게 된다.
가치를 사용하라
서론이나 논리 전개 과정에서 가치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훌륭한 논리를 전개시킬 수 있다. ‘나는 부와 명성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내 삶은 불행했고 외로웠습니다.’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나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내 삶은 행복했고 늘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삶이 더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와 같이 묻는다면 청중들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며 결국 후자의 경우를 선택한다. 전제를 통해서 가치에 대한 논리가 효과적인 무기임에 틀림없다. 구체적인 가치를 사용하라. 구체적인 가치 개념은 추상적인 가치 개념보다 논리 전개에 있어서 더 효과적이다.
“베드로는 진리를 지키는 청지기로서 기독교의 훌륭한 지도자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베드로는 진리를 지키는 청지기로서 기독교의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비교할 때 후자의 경우가 더 설득적이고 동의할 만하다. 왜냐하면 구체성을 띠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정의의 사도였습니다. 그분은 정의를 위하여 싸웠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면 이것 또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정의는 행동으로 옮긴 정의였기에 독특한 정의가 된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가치는 청중들에게 보다 설득적이다.
질(Quality)을 비교하라
보다 나은 질(質)을 인식시킴으로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선호하도록 한다. 마가복음 5장 21-34절의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옷가에 손이 닿기만 해도 혈루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손을 내밀었을 때 예수님의 능력이 그녀의 흐르는 피를 멈추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과 옷을 만졌지만 왜 유독 그녀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습니까? 무엇이 달랐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몸에 닿는 손길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에서, 장난 삼아서, 우연히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내미는 손길은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실린 손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해야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믿음이 실린 기도와 믿음 없이 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믿음이 내포된 예배와 믿음이 내포되지 않은 예배는 다릅니다. 믿음으로 봉사하는 것과 믿음이 없이 봉사하는 것은 다릅니다.(박영재 설교)
설교자가 더 나은 질을 끄집어내어 제시할 때, 특히 비교하며 제시할 때, 청중들은 선명하게 이해할 뿐 아니라 쉽게 동의한다. 이러한 노력은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에서부터 예화를 설명하는 것까지 모든 면에서 필요한 방법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양(Quantity)을 비교하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거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제안에는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동의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면 소수보다는 다수의 청중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더 만족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요즈음 현대인들이 누리는 문화생활 가운데 하나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이라고 한 잡지는 분석했습니다.” 혹은 “한국의 가장 발달한 서울의 강남에서는 기독 인구가 50%를 넘어서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나 군인들도 기독교인이 60%를 넘고 있다고 합니다. 어딜 가든지 우리는 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고 믿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면 자신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며 상식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 자위한다. 자신들이 이단이나 소수의 무리들 가운데 끼지 않고 다수가 누리고 있는 종교에 속해 있음을 만족해한다.
질서(Order)의 논리를 활용하라
설교자는 창세기 3장 8,9절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8절에 보니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 앞 부분에서는 아담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아담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떳떳하던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몸을 숨겼습니까?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거역하였음을 깨달았을 때 수치심을 느꼈고 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아담처럼 불순종의 죄를 지으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피하고 싶어합니다. 설교자가 사건의 원인을 분석했을 때 이성적인 청중들은 그 메시지의 내용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동의하게 된다. 예화 사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92년도 바로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그토록 목말라하던 마라톤 경기 부분에서 황영조 선수가 기어이 조국의 품에 영광의 우승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우승은 손기정 선수의 뒤를 이은 몇십 년 만의 쾌거였기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이 마라톤 장면 중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황영조 선수가 우승 직후 감격해 했던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이름이 온 세계에 알려진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게 잊을 수 없던 장면은 “끝이 분명히 있구나.”하는 사실에 대한 확인 때문이었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힘든 발걸음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눈앞에 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출발 직후 막바지에 이르러 온힘을 다한 것은 그의 눈앞에 끝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테이프를 끊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퍽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랬을 것입니다. “끝났다. 그 지겨운 고독과 고통의 과정은 다 끝났다. 그리고 난 마지막에 이겼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우리의 신앙생활도 시작했으면 끝을 맺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끝을 생각하며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박영재 설교)
평범한 예화를 설교자가 원하는 주제를 따라 끄집어내는 기술이다. 선명한 주제 전개가 아닌가?
분명한 목적(Clear Purpose)을 제시하라
바울은 그의 친구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박해로 인한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었노라.”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바울은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을 합니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선명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습니다. 여러분들도 생명을 바칠 만한 삶의 목적이 있습니까? 죽음까지도 바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박영재 설교)
존재(Existence)의 논리를 활용하라
존재를 확인시키는 작업을 함으로 청중이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든다.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친구들 가운데 가장 불안했습니다. 지진의 강도가 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충격적인 뉴스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 가족이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예문과 “저는 저의 가족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는데 지진이 일어났다는 얘길 듣고 매우 불안했습니다.”하는 말을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선명하겠는가?
본질을 활용하라
설교자가 “저의 이 아침에 매우 재미있는 그러나 여러분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할 때 이런 도입은 이야기의 본질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자 또한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게 한다.
연결 고리를 통해 논리를 펼치라
청중들은 불일치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균형을 찾고 싶은 기본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균형이나 일치를 원한다. 설교자가 “여러분 중 어떤분은 세속적인 삶의 스타일, 즉 마약, 섹스 등을 통해서 인생을 즐기고자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보장받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하늘의 영적인 삶을 동시에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면, 설교자가 불일치를 지적한 것이고 청중들의 불일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기본 욕구를 만족시킨다. 이러한 불일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한쪽, 즉 영적 삶만을 강조해야 한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이 두 가지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세속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다.” 하면서 불일치로부터 일치를 추구하는 청중들의 심리에 호소할 때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
상호 관련을 활용하라
“만약 사도 바울이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 영적 후손인 우리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면서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다. 또 “주님도 십자가를 지셔야 할 시간이 왔을 때, 믿음으로 지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에게 놓인 이 고난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전도에 관한 열정이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우리 자신과 연결시켰는데 이때의 연결 고리는 우리도 그들, 즉 바울이나 예수님과 똑같은 신앙인 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비교 설명하라
비교 설명은 설교자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논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것을 강조하였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피보다 더 중요한 피가 있을까? 예수님의 피보다 더 고귀한 피가 있을까?” 함으로써 최상급의 표현을 할 수 있다. 결국 최상급의 비교는 청중의 마음에 자극을 일으킨다.
사울은 처음엔 겸손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았지만 후에 교만해져서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나 바울은 끝까지 겸손한 마음을 지녔고 그 결과 평생을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처럼 살아야겠습니까? 모세나 바울과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박영재 설교) 
모세나 바울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설명하였다. 이런 비교 설명은 결국 모세나 바울의 모습을 더 귀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것은 설교자의 의도를 더 선명하게 한다.
희생의 메시지는 청중들로부터 최상의 동의를 얻어낸다
담임목사가 성도들로부터 “우리 목사님의 삶은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희생적인 삶을 사셔.” 하는 말을 들으면 목회 한다면, 그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대단히 권위를 가지게 된다. 희생적인 삶을 통해서 청중들에게 충분한 권위를 얻었고 그 상태에서 청중들은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으려고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님이 만약 우리 앞에서 사랑에 대해서 설교한다면 우린 감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남이 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한 목사이기 때문이다. 청중이 행할 수 없거나 모방할 수 없는 희생적인 신앙을 지닌 설교자가 있다면 그 설교자는 이미 성공적으로 청중을 설득한 것이다.
예화를 활용하라
모범이 원리를 찾아내어 청중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예화는 이미 받아들여진 진리를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의 본문으로부터 원리를 찾아내고서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을 위해 청중의 삶에 적용될 만한 예를 찾는다. 방울뱀은 미대륙에 서식하고 있는 독사입니다. 방울뱀은 꼬리에 붙은 방울을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데, 어떤 종류에게는 엄청나게 강한 독성이 있습니다. 방울뱀들은 저희들끼리 자주 싸웁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독에 대한 면역 능력이 없습니다. 즉 방울뱀끼리 싸우다가 다른 방울뱀에게 물리면 그 독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독이 나오는 이빨로는 절대 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기만 하면 상대방이 죽어버리는 것을 알지만, 결코 서로를 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분노의 독으로 끝내 형제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다면 이 저자의 말이 지나친 독선입니까? 이런 독사만도 못한 인간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윤영준)
이것은 동물의 삶을 그리면서 청중이 적용해야 할 내용을 끄집어냈다. 예화에서 적용할 요점을 끄집어내고 적용 부분을 강화시키면 자연스럽고 힘있는 내용이 주어진다. 예화는 실로 엄청난 힘이 있다. 어떤 설교자는 예화를 설교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큰 오해이다. 예화는 설교자의 의도나 설교 주제를 선명하게 전달해 주는 창문과 같고, 이미 경험된 사실을 밝힘으로써 청중들이 닮아가고 싶은 대상이 되게 한다.
단절을 통한 논리를 활용하라
감리교 설교자의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장로교는 인간의 예정론을 강조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왜 잃어버린 영혼에게 전도하며, 설교 후 사람들에게 결단을 요구합니까? 로마서 10장 13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장로교인들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들의 견해로라면 말이 되질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장로교의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인 설명으로 제거함으로써 논리에 설득을 더해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장로교 설교자도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먼저 구원의 은총을 베풀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길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치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가 우릴 먼저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불합리성을 분리해 내는 작업을 통해서 청중들에게 합리성을 제시한다. 합리성에 다다를 때 청중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불합리한 점들을 제거하며 설명하라.
나타남(Presence)을 사용하라
청중의 의식 세계를 사로잡으라. 설교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에 청중이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라. 그러면 청중은 설교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인다. 반면에 불필요한 부분은 가능한 한 생략하거나 간략하거나 설명한다. 불필요한 부분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설교자가 강조하는 부분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중의 의식을 사로잡으려면 설교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과장하여 설명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축소하여 설명하든지 아니면 생략해야 한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할 때 설교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설교자는 그의 행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설교자가 “신자가 주님의 인도를 거부하면 삶의 길을 잃고 상처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밝히고자 예화를 설명한다고 하자.
고등부 때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예쁘고 성격도 쾌활해서 사람들이 좋아했고 신앙생활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직장 때문에 서울로 떠났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2년여가 지난 어느 주일밤 예배를 마치자마자 누가 저를 찾는 다는 이야길 듣고 교회 문밖에 나가 보니 다름아닌 바로 그 자매였습니다. 남루한 옷에 구두가 아닌 실내화를 신고 있었고 불안하고 어두운 얼굴이 매우 초라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한여름인지라 다리에서 늦게까지 이야길 했는데 그 자매는 밝힐 수 없는 것까지 털어놨습니다. 한마디로 서울로 올라간 후 신앙생활을 멀리하게 되었고,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다 보니 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떨리는 마지막 음성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상처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하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주님의 인도를 외면하거나 거절하면 길을 잃습니다. 상처를 입습니다….(박영재 설교)
불필요한 부분들을 없애는 능력, 꼭 필요한 부분만 언급할 줄 아는 능력이 설교자에게 필요하다.
영적 연합(일체감)활용하라
설교자가 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 그는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 등을 사용해야 한다. 장례식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서 그리고 초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청중들과 동화될 수 있고 일체감을 이룰 수 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가령, 불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설교자는 ‘거룩한 체하는 통념적인 목사의 모습 대신’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러면서도 목사로서의 매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6. 선한 의지를 자극하라
“후퇴하면 총살이다!” 와 “조국은 여러분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의 차이만 알면 당신의 설교도 적극적,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뀔 수 있다. 상처받은 회중을 위한 언어치료.
사람은 본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선을 지니고 있으며,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Good - will Speech' 란 청중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불러일으키어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전략을 말한다. 예를 들면 깡패도 병든 어머니에게 약값을 보태고 싶은 효성이 있다. 또 호랑이 상관도 잘못한 부하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 경관이 교통 법규를 어긴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다. 짠돌이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교회에 기부할 수 있다. 허약한 신병이 용기 백배하여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돌진할 수 있다. 사람에게 왜 이런 이중적인 마음이 있는가? 기독교 상담학자 크랩(Crabb)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요약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전함에 대한 욕구(need for security)와 의미를 찾는 욕구 (need for significance)를 주셨다고 한다. 크랩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관계에 대한 갈증 욕구(longings for relationship)와 영향을 미치고 싶은 갈망(longings for impact)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개인적 만족을 위해 갈증을 느끼는 인격적 존재이다. 우리 영혼은 사랑하는 관계와 의미 있고 보람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갈급해 하고 있다.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영향을 미치기 원하는 것은 인간의 합당한 갈증”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갈망한다. 순종이 친밀한 관계를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남의 삶에 나를 투자할 때 보람과 흐뭇함을 느낀다. 봉사와 사역은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우리의 갈증을 채워준다.
어떻게 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갖게 되는가? 그들의 마음에 선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거나 그 선한 의지에 자극을 주면 선한 마음이 발동한다. 그러면 어떻게 선한 마음을 갖도록 자극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상대를 믿어주는 것이다. 상대를 선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선한 쪽으로 행동한다. 허약한 신병에게 상관이 “여러분의 전진은 우리 강토를 지키고 우리 민족을 살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그 죽음은 후손들에게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영광스런 죽음을 향해 돌진합시다.” 했을 때 이 말은 전투 요원들의 대다수에게 비장한 각오를 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즉 이 제안은 “상관의 명령이다. 돌진하라. 만약 도망가면 가만두지 않겠다.”하는 말보다도 더 효력이 있다. 
왜 그럴까? 전자가 사병의 선한 의지를 자극한 반면 후자는 사병을 비겁하거나 겁쟁이로 취급했고 이런 취급은 결국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들 속에 있는 선한 의지가 발동하도록 자극을 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언어는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반감을 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엄마가 외출하면서 중학생 자녀들에게 “너희들 엄마 없는 동안 공부 열심히 해야돼. 돌아와서 공부 열심히 했는지 할머니한테 확인할 거야. 만약 할머니가 너희들이 공부 열심히 안 했다고 하시면, 너희들은 혼날 줄 알아.” 하는 것과 “얘들아 엄마가 없더라도 잘할 수 있겠지? 지난번에도 참 잘했더라. 난 너희들이 참 자랑스러워.”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고 엄마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는데 더 효과적일까?
전자의 경우는 엄마가 아이들을 불쾌하게 만든 반면, 후자는 아이들로 하여금, “엄마는 우리를 좋은 학생이요 자녀들로 생각한다.”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자녀들은 그러한 엄마의 기대 심리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고 싶은 자극을 받는다. 결국 엄마의 말은 자녀들의 선한 의지에 자극을 주는 것이며 선한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꾸지람보다는 칭찬이 교육에 더 효과적이란 말을 하게 한다. 둘째로 진실한 모습을 보일 때 상대에게 선한 마음을 갖게 한다. 'Good - will sppech'는 화자나 연설자의 진실이 전달될 때 효력을 더욱 발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한 척하는 전략을 내세워 연설이나 대화에 효력을 발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즉 화자나 연설자의 전략이나 의도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속이려 하거나 단지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Good - will sppech’를 사용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반감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Good - will sppech'는 ‘정직이 최선’이라는 원리에 기초한다. 화자 자체가 신실해야 함이 전제 조건임을 강조한다. 얼마 전, 첫째 아들이 필자가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깨뜨렸다고 고백했다. 모른 체하거나 깨뜨린 흔적을 없애므로 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받을 각오를 하면서 고백을 했다. 필자는 매대신 칭찬을 했다. 솔직함, 즉 정직에 대한 칭찬을 말이다.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분노대신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갖게 한 것일까? 아들의 모습 속에서 정직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진실을 발견할 때, 정직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은 선한 쪽(자비, 관용, 용서 등)으로 움직이게 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움직이기 위한 여러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즉 ‘청년 시절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신’을 고백했다. 이것이 오히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신실한 목회자상’으로 비쳐지고 결국 유대주의자들을 따르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따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설교자가 강단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실한 목회자상이 된다. 그것은 곧 성도를 믿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그러나 자신의 취약점을 보임으로 해서 더 큰 타격을 입을 내용에 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정직과 신실함으로 성도와의 관계 속에서 승부를 보려고 해야 한다.
7.논리에 화법을 덧입히라
과장법을 사용하라
과장법은 사실보다도 과장하여 말하면서 그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피는 검붉은 내 죄를 하얗게 씻으셨습니다.”하면 의미를 극대화시키면서 명확하게 전달한다. “사울 왕은 아말렉 족속을 패퇴시켰습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전투에서 돌아오면서 승전가를 불렀으며, 적으로부터 탈취한 양과 살진 소와 염소들로 가득 채운 수레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줄친 부분이 과장한 부분이다. 승리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 과장법이 효과적이었다. “네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빼어버리라…”하는 예수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범죄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단지 과장법일 뿐이다. 의미를 확대해 주며 또 그림처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서 과장법은 청중들로부터 주의를 끌 수 있다.
동의적 반복(Synonymy)을 사용하라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동의적 반복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강조한다. 
“당신은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당신은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서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비슷한 내용을 약간씩 다르게 설명하면서 의미를 청중들의 가슴에 각인시킨다. 교회 건축 헌당식에서 설교자는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냈으며, 여러분의 헌신의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의 충성은 몸된 제단을 일으켰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건축 헌금을 드린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기 위해서 다양한 각도로 언급하였다.
증폭을 사용하라
증폭은 의미의 비중을 처음보다 갈수록 커지게 전달한다. 의미 전달의 비중이 커질수록 청중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뜻을 선명하게 이해시킨다.
로마인을 묶는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를 채찍질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를 창으로 죽이는 것은 비인간적인 살인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극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당신을 위해 친구가 대신 빚을 갚아주는 것은 사랑의 태도입니다. 당신을 위해 친구가 대신 감옥에 가는 것은 희생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위해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뭐라고 표현하시겠습니까?(박영재 설교)
십자가의 행위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된 증폭이다. 갈수록 표현이 강해지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청중의 가슴에 새기는 역할을 한다. 베드로는 하녀들 앞에서 그의 선생 예수를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모욕과 능욕을 당하고 있습니다.(박영재 설교)
청중들이 마지막 문장을 듣는 순간 그들은 묘한 심정적 변화를 느낀다. 즉 마지막 문장을 듣는 순간 청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모든 문학 작품은 카타르시스를 일으켜 극적인 효과를 기대한다. 설교의 구성이나 논리 전개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은 청중으로부터 극적 효과를 일으킨다.
부정문을 먼저 사용하라
부정적인 문장으로 시작해서 긍정적인 문장으로 끝을 맺으면 긍정문이 더욱 돋보인다. 이런 방법이 청중의 의식을 선명하게 사로잡는다. “…이 아니라 …이다.” 란 공식을 사용한다.
나는 그 복음을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성령의 계시로 얻었을 뿐입니다. (바울)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나의 학식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채우기 위함도 아닙니다. 설교에 관심 있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그이 연약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폭도들의 저주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함이나 대제사장의 사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박영재 설교)
여기서는 부정 문장이 길다. 부정이 길 때 청중들은 “그러면 긍전적인 답은 무엇일까?” 하면서 답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구도는 당연히 청중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즉 마지막 문장이 청중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마지막 문장이 긍정문이기에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는 허무주의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늘 피곤합니까? 왜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먼지처럼 쌓여갑니까? 왜 끝없이 주저앉고 절망합니까? 문제는 일의 뜻을 모르고 있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어서 피곤합니다. 출세하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곽선희, 「참회의 은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주실 때에,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셨으나 안일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주셨으나 방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복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곽선희, 「참회의 은총」)
이 용법을 한 편의 설교 안에서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표현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효력이 떨어진다.
최상급을 사용하라
베드로는 출렁이는 시커먼 바닷물에 오른발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왼발마저 내밉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한발 한발 떼기 시작합니다…. 그의 용기보다 더 뛰어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린 용기가 생깁니다. 물 위를 걷는 용기,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주의만을 둘러보면 실망스럽고 좌절스럽기만 합니다만 주님을 바라보면 불끈 힘이 솟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삶의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박영재 설교)
이것은 최상급을 사용한 것이며 더 이상 비교할 만한 것이 없는 최선의 것임을 나타낸다. “어머니를 때렸다고? 판사님,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변호사가 더 이상 말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이 말하면 이 또한 설득적인 언어이다.
수사 질문을 사용하라
예수님도 수사적 질문을 애호하셨다. 산상수훈을 분석해 보라. 수사적 질문의 큰 유익 중 하나는 대화체를 만들어 낸다는 데에 있다. 수사적 질문을 사용함으로써 설교자가 독백이나 일방적인 외침이 되기 쉬운 함정으로부터 벗어나서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를 함께 만들어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수사적 질문을 적당하게 사용하라. 지나치게 사용하면 설교가 질문만 던지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유사를 활용하라
“어리석은 자를 교훈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지옥에서 주님을 찾는 것은 지나간 열차에 손을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남같이,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 신앙 행위는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등은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선명하게 만든다. 필자는 이런 유사 사용을 설교에 즐겨 사용한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한편의 설교 안에서 유사 사용이 너무 많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유사 사용은 유사의 독특성을 감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은유(Metaphor)를 활용하라
“인생의 긴 터널을 걷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은 정녕 내 발의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긴 터널’은 고통스런 시기를 암시한다. “인생의 고통스런 기간동안 여호와의 말씀은 정녕 나를 인도했습니다.” 보다 얼마나 더 선명한가? “주님은 나의 목자였고 산성이었습니다.”는 “주님은 나를 인도하셨고 나를 지켜주셨습니다.”하는 것보다도 시적이며 의미가 풍부한 ‘목자’ 나 ‘산성’이란 이미지 언어 혹은 그림언어가 들어갔다. “죄악을 끊게 하옵소서.” 보다도 “죄악의 탯줄을 끊게 하옵소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탯줄을 끊고 나오는 것이 연상되기에 “죄악의 탯줄을 끊는 순간 새 생명이 탄생하는구나!” 하는 상상을 하게 한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단단한 우리의 마음밭을 깊게 갈게 하시고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30배 6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게 하옵소서.” 얼마나 잘 그려졌는가! 기도문이 쉽게 이해된다. “하나님은 그로부터 주의를 끌려고 붉은 잉크를 사용하셨습니다.”붉은 잉크가 주의를 나타내는 색상임을 떠오르게 한다.
직유(Simile)를 사용하라
“돌 같은 내 마음을 녹이시옵소서.” 여기서 ‘돌’ 은 ‘굳은 내 마음’을 대변하다. “사자 같은 용기를 내게 주소서.” ‘사자 같은’ 은 ‘용맹스런’ 모습을 나타낸다. “바울 같은 복음의 열정을 내게 주옵소서.”는 바울이 복음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이미지 전달이 선명해진다. “모세에게 들려주신 능력의 지팡이를 내게도 주사 능력의 종 되게 하옵소서.” 모세의 지팡이가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이미지 전달이 선명하다. 부르그만(Walter Bruggemann)은 「마침내 시가 나오다」 (Finally Comes the Poet)에서 현대 설교가 시적 표현을 가미하지 않으면 더 이상 쓰임받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대위법(Pokyptoton)을 사용하라
“육체로는 죽음이요 성령으로는 생명이다. 세상으로는 파멸뿐이요 신앙으로는 영생이로다” 이러한 표현도 언어들이 다르고 센스도 조금씩 다르나 결과는 한 가지, 신앙과 비신앙과의 차이점과 그 결과를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알기 전에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먼저 우릴 부르셨으며,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가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박영재 설교)
‘우리’를 사용하라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나 비난을 할 때 설교자는 설교자 자신과 청중을 분리하지 말고 ‘우리’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설교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라. “우리는 모두가 주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를 사용해선 안 된다. 설교자만 의인인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인과의 법칙을 통한 논리를 활용하라
원인과 결과와 법칙을 설교에 사용하라. 선명한 전달을 위한 필수 과제이다. 기자는 마약 사용 혐의로 잡혀 온 소년에게 마약을 처음에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그를 마약 사용자로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의 인생을 파탄으로 이끌었습니까?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입니다.
이 설교는 결과를 먼저 말하고 원인을 추궁하는 방법으로서 연속되고 있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흥미를 북돋운다.
하와의 죄스런 행동은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낙원으로 쫒겨나고 불멸의 축복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와의 행동의 결과를 밝힘으로써 그의 행동이 그릇된 행동임을 판단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원인(불순종)을 먼저 밝히고 결과를 언급했다. 즉 행동의 결과를 밝힘으로써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이 성 침략을 눈앞에 둔 채 아간은 탐욕스런 범죄를 저질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지하지도 간구하지도 않은 채 자신들의 힘만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뼈아픈 실패를 맛보아야 했고 가슴을 찢는 후회의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박영재 설교)
여기서도 원인을 먼저 말하고 결과를 말하는 연결고리를 볼 수 있다. 연결고리는 청중들이 설교를 이해하는 데 쉽도록 도움을 준다.
말씀 인용을 통해 권위를 지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설교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설교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권위나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서 말씀에 힘을 실어보려는 태도를 갖는다. 바람직하지 않다. 말씀인 성경의 권위로 성도들을 설득하라.
평행구조(Parallelism)를 사용하라
생각을 심고, 그것을 자라게 해서 행동으로 거두라. 행동을 심고 습관을 자라게 하라. 습관을 심고 인격을 자라게 하라. 인격을 심고 운명을 자라게 하라. 믿음은 시작이요 일은 생의 지속입니다. 믿음은 안이요 일은 겉입니다. 믿음은 동기요 일은 결과입니다. 믿음은 뿌리요 일은 열매입니다.(곽선희,참회의 은총)
평행구조는 리듬을 타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청중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권사 취임식에서 설교자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잃어버린 보석 때문에 안타까워서 우는 사람,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해 분노의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의 영적 빈곤 때문에 안타까워 애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불만스런 교회의 환경을 보고 독설을 품는 사람은 많지만,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만족한 조건 속에서도 불평 속에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촛불 속에서도 자족한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려한 전등 아래서 원망의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행구조 사용은 설교자의 의도가 확실하며 선명하게 전달되는 것을 돕는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한 설교에서 평행구조를 지나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오히려 독특성이 사라진다.
능동태를 사용하라
수동태는 항상 의사 전달이 선명하지 않다. 능동태가 선명하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보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명자로 부르셧습니다.”가 더 선명하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군대에 의해서 뺨에 맞았습니다.” 보다 “대제사장 군대는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가 더 적극적으로 이미지를 심는다. “나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이 아내에 의해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보다도 “아내는 날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가 더 적극적이다.
대조하라
대조 설명은 의사 전달에 선명성을 가져온다. 한 문장만 사용할 때 의미 전달이 어렵지만 대조하며 사용할 때 그 힘은 훨씬 크게 발휘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마 5:38, 39)
너는 내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가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 7:44-46)
하나님은 우리를 품으려 했으나 우리는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며 그분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려 했으나 우리는 그분의 안내를 외면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했습니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이 대조 혹은 대칭을 이루며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설명에 있어서 선명성을 제공한다.
반복하라
이 시대의 특징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중 하나는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타락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습니다. 죄악이 만연된 사회입니다. 지도자들조차도 오염된 죄에 무감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의 홍수 속에서 흥청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거짓 예언을 타파하고 백성들을 죄로부터 끊게 하는 진노의 검을 휘두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여러분, 그러므로 부패한 이 세대를 향해 여호와의 진노의 말씀을 외치십시오. 이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진실로 따라야 할 참 진리가 없습니다. 믿고 따라야 할 진리가 없기에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역자 여러분, 진실을 찾느라 방황하는 이 세대를 향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세대에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굵은 글씨는 반복을 나타낸다. 반복을 통해 전달할 의미를 강조한다. 흑인 설교가들이 이런 반복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긍정문을 사용하라
여러분 지난주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말씀으로 승리하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남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증오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모든 더러움을 하나님 앞에 회개합시다.
이 문장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색채가 문제 아닌가? 다음 문장을 보자.
여러분 지난주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말씀으로 승리하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남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반대로 행했던 우리들은 아니었는지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 비추어 보고 불의스러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합시다.
아래 문장이 더 바람직하다. 지나치게 성도들의 부정적인 내면을 들추어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8. 그림 언어를 사용하라
감정언어는 말 그대로 감정을 일으킬 목적으로 사용하는 문장에 사용된다.
강산이 변했어도 50번은 변했을 긴 역사를 지닌 서울은 공룡 같은 자태와 코스모스와 같은 고결함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수사언어는 문장의 핵심을 전달하되 감정과 시적인 표현이 가미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사실 언어는 단지 사실만을 나타내고 과학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된다. 감정 언어는 객관적인 객체를 나타내는 것도 없이 시적이고 감정적이다. 수사 문장을 사실을 담고 있되 매력적이고 애정을 느끼게 하는 문장이다. 설교자는 사실 문장이나 감정 언어 혹은, 수사 문장 등을 설교에서 다양하게 사용하라.
그림언어 문장의 사용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느끼고 그림으로 연상시킬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라는 것은 ‘말을 하는 대신 보여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가꾸지도 아니하지만 자라지 않는가. 하물며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돌봐주시지 않겠느냐?”하는 말씀을 하셨다. 결국 주님은 청중들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하지 않고 언제든지 쉽게 이해하고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큰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대신 “우리 주님은 살이 찢기는 아픔과 뼈까지 쑤시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로 하면 더 구체적이 되고 생생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한다면 청중은 베드로가 어떻게 얼마나 많이 훌륭했는지를 알 수 없다. ‘훌륭한’이란 단어가 추상적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훌륭한지 그 내역을 밝혀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대제사장의 군졸의 귀를 단 칼에 잘랐던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커먼 바다 위로 대담하게 발을 내디딘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 가장 훌륭한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피상적인 ‘훌륭한’ 이란 단어의 의미가 이미 앞에서 잘 설명되었다. 그 설명은 구체적이었고 그림으로 연상할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 그러므로 설명이 충분하다.
스토리 설교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을 설교자가 상상을 동원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본문을 벗어난 상상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4절에 보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과 함께 사흘길이나 먼길을 가서 희생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한두 시간 떨어진 가까운 동산에서가 아닌 왜 3일씩이나 먼길을 가게 한 다음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을까요? 만약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직후에 그 일을 하라고 했다면 오히려 더 쉬웠을 것입니다. 3일 간의 긴 여행을 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을 정말 죽여야 한단 말인가? 주실 때는 언제고 바치라고 하는 것은 웬 말씀입니까? 차라리 가축을 바치라면 100마리라도 바치겠고 토지를 바치라면 바치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나를 바치라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100세에 얻은 금보다도 귀한 내 아들, 나의 전부요 희망이요 기쁨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니요?’ 원망도 하소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니야 내가 오죽 이삭만을 사랑했으면 이삭으로 말미암아 나를 시험하실까? 순종해야지. 순종하면 설마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시려고?’ 아브라함은 사흘 동안 많은 생각을 하였고 많은 고민도 하였습니다만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기에게 다른 숫양을 준비해 주실것이라는 믿음으로 산을 향했습니다.
본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본문의 내용을 상상으로 확대시켰다.
다른 사람의 관심거리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라.
상대방에게 그림언어를 사용하려면, 사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사람의 과거를 조사하고 그 사람의 현재를 무시하지 말라. 즉 그 사람이 어릴 적에 좋아했던 것을 살펴보고, 어른이 되어서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또 그가 좋아하는 스포츠와 오락과 음식과 음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라. 그가 몰고 다니는 차를 조사해 보되 그 사람이 그 차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도 알아보라.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오락은 무엇이며, 어떤 경우에 초과 근무를 하게 되는지 알아보라. 그러면 상대방과 대화할 때 사용하기에 적절한 그림언어를 발견해 내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마르지 않는 네 개의 샘에서 끄집어내라
마르지 않는 네 개의 샘이란 모든 인간 속에 그림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말한다. 먼저 자연으로부터이다. “당신은 벌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혹은 “나비처럼 여유를 가지고 일하시는 군요.” 혹은 “황혼 같은 한가로움이 당신에게 있군요.” 하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을 세밀히 관찰할 때 이런 표현을 얻을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언어는 자연으로부터 주어짐을 기억하라. 
설교의 논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설교에 청중을 설득하는 방법이 아무리 효과가 많더라도, 설교의 화법이 아무리 화려하게 입혀진다 할지라도, 성령이 임재하지 않으면, 그 설교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될 수는 없다. 설교에 건전한 성경 해석이 들어 있지 않고는 바른 설교가 될 수 없다. 성령의 도우심을 먼저 구하면서 올바른 해석을 동시에 창의력을 발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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