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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설교학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 


이문장 (Trinity Theological College, Singapore)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이다. 설교(Preaching)는 성경 본문(텍스트)과 현장 상황(컨텍스트)을 두 축으로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 설교 전달을 위해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청중을 이해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모든 설교자에게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 작업이야말로 일차적으로 중요한 과정이다. 설교자의 사명은 어쨌든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권성수 교수님이 이 부분에 대한 발제를 하실 것으로 안다.) 필자의 작업은 한국 사회 분석과 청중 이해(Understanding the Audience)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본문과 현장 상황이 적절하게 연결되어질 때 설교가 제 역할을 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를 특별히 주목하여 언급한 이유는 한국적 상황에 고유한 혹은 독특한 요소들을 찾아보라는 주문이 들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우선 이 주제는 두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겠다.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한국 사회를 끼우는 것이다. 즉, ‘설교-한국 사회-청중’의 도식이다. 이 경우는 설교자와 청중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려는 것이고, 설교자가 한국 사회 혹은 한국 문화를 여과하여 설교를 해야 청중에게 도달할 수 있겠다는 문제의식을 다루게 된다. 소위 말하는 현장 적실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검토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를 청중의 일상적 삶의 현장으로 놓고 설교의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즉, ‘설교-청중-한국 사회’라는 도식이다. 이 경우는 설교가 한국 사회의 구성적/형성적 담론 역할을 할 수 있겠는지 여부를 검토하게 된다. 우선, 설교가 한국 사회라는 장(場)에서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고찰해 보도록 한다. 이것은 설교 사역이 지니는 시대적 가치를 확인하고 확보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두 번째 꼭지인 ‘설교(사역)의 사회적 함의’부터 먼저 다루어 볼까 한다. 
설교는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가 
설교가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장(場)은 교회 공동체이다. 설교란 교회 공동체의 고유 영역에 속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설교는 교회 안의 담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실 설교가 현실에 개입을 하고 있다는 측면을 새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설교의 사회적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 설교의 장(場)이 확대된다. 
그동안 설교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 제한된 청중과 사이에 자체 담론을 형성하는 차원에 그쳤다. 어느 한 목회자의 설교는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인 교인들에게 영향과 파장을 미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목회자들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에 노출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섭렵하는 것을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인들은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로부터 어느 정도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고 또한 라디오나 케이블 TV 등으로 기독교 방송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에 노출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거의 없어졌다. 적어도 기독교계 안에서는 설교의 유통 폭이 훨씬 넓어졌고,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상당히 확대되어졌다. 설교의 장(場)이 확대되어진 것이다. 
설교의 유통 범위에 변동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설교의 장이 여전히 교인들의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민중교회를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 즉 교회 바깥의 불의한 현실을 설교에 직선적으로 반영하였던 때가 있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민중 교회가 직면했던 난제는 설교의 대상이었던 민중 교회 청중의 현실과 교회 바깥의 참담한 현실 사이가 실존적으로 상통(相通)하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설교를 듣는 청중이 피부로 느끼는 ‘나의 현실’과 이념적으로 파악되어진 ‘현실’ 사이에 완벽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민중교회가 청중 확보에 실패하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여러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아미 이 부분이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설교가 교회 바깥의 현실에 직선적으로 관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설교가 교회 바깥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경우 간혹 정치적 혹은 계급적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도 상존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설교자가 교회 바깥의 현실을 설교에 반영하는데 한계와 부담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실상 설교자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설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설교가 교회 바깥 일반 사회의 마당에서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사회적 의미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강조되어야 한다. 설교는 말 그대로 교(敎), 즉 기독교의 가르침 혹은 진리를 설(說)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교’, ‘진리’ 혹은 ‘가르침’은 그 성격상 교회 안과 교회 바깥의 세상에 두루 연관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설교가 설교를 듣는 청중을 매개로 교회 바깥의 세상과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에 의해 설교 내용이 현장에서 실천되고 일상화되어지기를 기대하고 촉구하게 된다. 설교자는 사역의 속성상 소위 사회 변혁적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한국 사회로 침투 혹은 잠입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이 부분이 설교자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설교 사역이 청중을 매개로 사회 변혁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설교자는 생활현장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설교가 한국 사회와 접촉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들 연결고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측면에 설교의 사회적 의미가 확대될 수도 있고 왜소해질 수도 있다. 
2. 설교의 언어가 사회 친화성을 띠어야 한다. 
설교는 청중을 매개로 한국 사회에 개입하고 있다. 설교 행위는 설교를 직접 듣는 청중과의 정신적 및 영적 교섭이지만, 청중들의 삶이 한국 사회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가진다는 구조적 및 실존적 연계성으로 말미암아 이미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설교의 대상이 되는 청중이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존재들이라는 현실에서 설교와 사회의 관계를 간접적인 것으로 보다는 어쩌면 오히려 직접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마땅하다. 설교의 청중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동일한 생활공간을 공유한다. 그들의 삶은 상당부분 중첩되어진다. 같은 직장, 같은 조직이나 단체, 같은 업종 등 삶의 중복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 없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은 설교 청중과 현저하게 다른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가능성이 발견된다. 한국 교회 청중을 향한 설교는 곧장 교회 바깥의 한국 백성에게도 들려지고 이해되고 공감되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교회 안 청중이 이해하는 설교라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현실 체험과 교회 밖의 사람들의 현실 체험이 상호 부딪히고 교섭하는 폭이 의외로 넓기 때문이다. 설교는 일차적으로 청중에 의해 ‘나의 이야기’로 수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청중의 이야기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나의 이야기’로 수긍이 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설교의 언어가 문제로 대두된다. 설교의 언어나 전달 방식이 한국 사회의 일상 언어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언어 세계를 구축해 가지고 있는 한 설교의 한국화 내지 현장화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의 언어와 설교를 통해 전달되어지는 내용이 교회라는 공간 내부에서만 통하는 언어 in-house language가 되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소통이 막히게 된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가 일반 사람들이 들어도 흥미와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적 친화성/ 친근성을 확보하는 일이 요긴하다. 그래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흡입력 있는 가르침이 설파될 것이요, 설교를 통해 한국 백성들의 마음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설교가 한국 사회 안에서 의미 있는 공간을 당당하게 차지할 뿐 아니라, 교회 바깥 사람들의 담론 속으로 치밀하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설교 언어의 사회 친화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3. 설교가 시대 흐름을 조타하는 역할을 한다. 
설교가 ‘현장 적실성’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설교의 영향력이 ‘조직 유지용’의 차원을 넘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얻는 지경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현실 개입은 누구나 인정하는 설교의 기능이다. 설교 사역이 존속하는 한 설교의 현실 개입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설교는 다양한 현실 삶의 조건과 환경에 부딪쳐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청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청중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영적 계발이 일상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삶과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개인적 혹은 집단적 삶의 성공과 좌절을 맛보게 만드는 현실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설교의 현장 적실성과 청중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현장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구체적 생존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지평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구체적 현장의 삶을 바르게 영위할 수 있는 영적 이치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설교가 시대적 현실을 향해 예언적 가르침 혹은 선도적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 설교가 당시 시대와 호흡을 같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시대 흐름과 엇나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설교는 시대 분위기나 흐름을 비켜서서 비판적 입장을 끈질기게 견지해 주어야 한다. 설교가 당대 사회의 관심이나 가치나 유행을 반영하는 선에서 멈추어 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설교는 한 시대 전체의 사고방식 내지는 정신세계의 흐름에서 불필요하게 소외되어질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당대 사회 전반에 대한 질타와 더불어 적극적인 차원에서 방향타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4. 설교자 자신의 현실인식이 제고되어야 
설교와 한국 사회의 접촉은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도 진행되고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현실에 개입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교가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는 단지 일상의 현실을 살고 있는 청중을 통한 것뿐이 아니다. 일상 현실을 동일하게 살고 있는 설교자의 주체적 체험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현실의 정서가 은연중 설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설교자가 현실적 정서의 흐름에 민감할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삶의 구성요소에 의해 설교의 내용과 형식을 어느 정도 규정해 버리는 정도까지 영향을 받게 될 위험성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설교자의 한국 사회의 접촉 부위는 다음 두 가지로 관측되어진다. 
첫째는, 설교자의 현실 인식이 설교에 투영되어진다는 측면이다. 설교자의 현실 세계 인식이 철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어진다. 그렇지 않고 설교자의 현실인식이 허구적이거나 불철저한 것일 때 설교를 통해 전달되어지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현장 적실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위하여 설교자는 생활현장에 대한 귀납적 학습을 해야 하고 지식을 널리 얻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얻은 지식에 대한 검토와 예민한 반성이 빠질 수 없다. 그리고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바른 분별과 판단을 거쳐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설교자가 현실을 통해 깨닫는 하나님의 이치가 설교의 깊이를 좌우한다. 설교자가 말씀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성경의 원리와 이치들을 체득 혹은 체인하고 있다면, 그러한 말씀 실력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현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삶의 현실이 보인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본다는 의미이다. 바둑의 정석을 깊게 공부하고 바둑을 두는 실력이 고수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바둑판을 보고 미리 수(手)를 앞서 읽는 능력이 생긴다. 태권도의 고수가 되면 상대방의 허점이나 급소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했다. 성경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 눈에 삶의 현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성경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두 현실이 서로 대응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수준의 투철한 현실인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깊은 설교가 들려지게 된다. 
한국 사회와 청중 이해: 설교 유형을 고려한다 
설교가 대 사회적 함의를 가진다는 측면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는 설교의 구체적인 형태를 각론적 차원에서 짚어보려고 한다. 한국 사회와 청중을 이해할 때 설교의 지향점이 어디에 놓이게 될지 대충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교가 청중에게 제대로 접속이 되려면 한국 사회라는 설교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의 한국 사회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및 심리적 환경 일체를 의미한다. 설교의 청중은 일상생활의 각종 현장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부딪히고 씨름하고 몰입되어 살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이 누구인지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청중 이해는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취지가 아니라 청중과의 바람직한 접속을 이루려는 설교자의 기본적이며 동시에 필수적인 관심사항이다. 물론 설교자가 마주 대하는 청중은 늘 고정된 청중이 아니다. 청중은 변하기 때문이다. 매 주일 대하는 같은 청중이지만 청중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되어야 한다. 청중이 살고 있는 일상 삶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청중도 달라지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의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청중의 변화를 자극하는 달라지는 시대 분위기를 적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외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게 된다. 종종 청중의 세계와 아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설교자들이 있음을 본다. 설교자는 청중의 요구와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어야 할 한국 사회 환경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통시적 diachronic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공시적 synchronic 환경이다. 통시적 환경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전통과 직결되어 있는 문화 종교적 환경을 말하고, 공시적 환경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최신 경향들을 포함한 당대의 지적 정신적 및 정치 경제적 현실 흐름을 말한다. 통시적 환경과 공시적 환경을 선명하게 구분 짓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통시적 환경은 이미 공시적 환경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차원에서 상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지로 임의 구분을 해 보자면 통시적 환경은 고정된 양상을 띠나, 공시적 환경은 수시로 변화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공시적 환경의 변화가 통시적 환경의 강화 내지는 약화를 초래하고 있음이 함께 주목되기도 한다. 어쨌든 오늘 우리의 목회 환경 혹은 설교 환경은 이들 두 환경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들 두 환경의 조합에 대한 예민한 관찰이 효과적인 설교 사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1. 통시적 환경: 한국인의 의식구조 
1) 호의적인 설교 환경 - 영혼을 흔드는 설교를 하라 
한국의 설교자들은 행복한 설교 환경을 갖고 있다. 최근 목회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다. 목회하기가 쉽지 않다는 푸념들이 나온다. 성도들의 기대가 떨어진다거나, 설교가 길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지루한 내색을 드러낸다거나, 아니면 아무리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한국의 목회 환경 변화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설교 환경’과 그에 수반하는 ‘성경 해석학적 환경’은 한국과 비교할 만한 지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설교 환경’이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해석된 내용을 가지고 강단에서 설파하려고 할 때 수위(水位) 조정을 해야 할 압박을 느끼는가 아닌가 하는 측면을 말한다. 필자가 오랜 기간 살았던 에딘버러는 설교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성도들 가운데 비판적/ 자유주의적 신학에 노출된 사람들이 일부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지레 부담을 느낀다. 설교자의 성경 해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을 벗어나 체험적이거나 영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로 약간이라도 흐르는 경우 즉각적으로 부담스런 반응이 돌아온다. 한두 번 그런 반응을 접하게 되면 영적으로 강한 설교 혹은 깊은 설교를 하기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에서는 설교를 할 때 적어도 영적인 차원과 관련하여 수위조절을 해야 할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거꾸로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자가 더 영적인 깊이를 소유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설교자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이러한 설교 환경은 설교자 자신이 성경의 세계로 무한대 진입하는 노력을 경주하도록 채찍질한다. 
이러한 설교 환경 혹은 해석학적 환경에서의 설교는 영적인 깊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외향적으로 볼 때, 객체인 청중의 가볍고 변덕스럽고 대중적인 기호를 맞추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청중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말씀 자체의 영적 깊이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청중의 기호나 입맛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만 보고 설교의 수위나 방식을 조정할 이유가 없다. 청중은 가벼운 감동에 열성적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은 깊이를 갈구하고 있음을 갈파해야 한다. 청중의 진정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있는지 여부에 놓여 있다. 설교가 언어적 유희에 경도되거나 튀는 말솜씨로 청중에게 어필하려고 해서는 설교 환경의 진상파악에 실패한 꼴이 될 것이다. 설교가 청중의 기호에 맞추는 식으로 말씀을 푸는 것이라면 더 이상 생명력 있는 역사를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2) 초월 세계를 향한 열린 태도 - 하나님을 설교하라 
한국인의 심성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21 세기에 들어 선 오늘에도 이러한 한국인의 성향에는 큰 변동이 없다. 한국인의 성향은 현실 중심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초월세계의 실재를 인정하는 종교성도 현상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과 동양인의 우주관 및 내세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인은 현세구복적인 성향과 더불어 현세 초월적 성향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 두 성향 사이에 형성되는 적절한 긴장관계가 한국인의 삶에 균형을 잡아준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 문제의 해법을 초월적인 힘의 도움을 구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 땅의 현실을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각종 예기치 못한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일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를 향해 도움을 청한다. 혹자는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이 무속주의의 부정적인 영향에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종교적 감수성의 존속은 한국 기독교를 위한 커다란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서구 정신세계에서 목격되는 독립적 사고 내지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하늘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도록 만들었던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숙한 인간의 자화상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입되어진다. 초월적인 힘에 기대거나 의존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질이 아니라는 교육도 주어졌다. 현대 문명인은 하늘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의식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에는 초월 존재에 대한 의존도가 살아있음을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월적 존재를 향해 열린 태도는 단순히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한국인 가운데 특정 종교적 전통에 속한 사람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초월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기공(氣功)이 각광을 받는 것이나 초능력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 고조도 이러한 경향을 일부 반영한다. 
기독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가르친다. 또한 현실에서 봉착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하도록 계몽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을 통해 현실의 난제들이 풀리는 원리들과 예증들을 무수히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늘과 초월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현실 문제해결을 의뢰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무조건 배척할 일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성향을 여전히 담지하고 있는 한국 청중을 향한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현실감 있게 재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영광의 추구는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을 건드린다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등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 삼는 것이어야 한다. 이 시대는 너무 분주해서 ‘왜 사느냐?’ 혹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질문을 가지고 묵상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초월적 존재를 향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는 청중이 갖고 있는 심성의 틈새를 뚫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넘어 본질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또한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청중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끌어 올려주는 설교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의식이 상승하도록 만드는 일이 시대적으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초월적인 힘을 의지하는 한국인의 심성은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수준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자기 부정 혹은 자기 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인정 혹은 의지가 체계적으로 학습이 되어진다면 한국 청중들의 영적 수준은 수직 상승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제는 그러한 학습과 실습이 설교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달되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교는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을 건강하게 자극하고 견인(牽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현실 집착과 무한적인 경쟁관계로 돌진하도록 부추김을 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삶의 근원적 이슈를 묵상하도록 자극을 주는 역할이다. 현실에 몰입해 살아가는 청중들을 향해 이 세상을 너머 존재하는 초월 세계 및 영적 세계의 실재를 환기시키고 이 땅의 현실을 영원의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을 제공해 주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자가 유의해야 할 측면은 지나친 현세 부정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는 설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런 초월 세계에 대한 감도를 지나치게 혹은 무리하게 조장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초월 세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청중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킬 위험이 있다. 극단적 현실 혐오나 현실 부정을 통해 신비주의적 성향을 부추기는 일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초월 세계 혹은 영원한 세계의 차원에서 현실을 조망하는 시각이 무차별 매몰되는 현상을 좌시하고만 있어서도 곤란하다. 성경에 근거한 건전하고 건강한 가르침이 선포되어 현실의 부품 내지는 노예 상태로까지 전락해 전전긍긍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청중에게 현실의 무게를 견디어낼 소망의 빛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3) 경전 권위에 대한 순복 - 실천적 지혜 practical wisdom를 설교하라 
작금 한국 교회를 우려하는 목소리 가운데 세속화 경향에 대한 지적이 부쩍 늘고 있다. 더 이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맹랑한 시대 분위기를 질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통적인 가르침의 권위에 순복하는 심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경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복은 크게 손상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 내지 저항은 진정한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 권위를 부리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노출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경험을 통해 한국 청중은 진정한 권위 앞에 언제든지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 권위에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의 자업자득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말씀 강론에 뒤이어 청중의 삶이 변화되는 것까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지침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 청중이 시중(市中)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들이 설파되어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설교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길과 생활현장에서 관찰되는 하나님의 길을 연결해 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종래 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한국적 개념의 설교는 그 차원을 넘어서야 마땅하다. 설교자는 성경 본문 투시와 오늘의 현실 투시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즉,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깊은 학습을 기초로, 오늘의 생활 현실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 여호와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는 소망을 읊었다. 성경 말씀의 세계를 오래 힘써 익히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파악하는 눈이 트이게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땅의 현실을 말씀의 빛에 비추어 오래 익히고 관찰하고 묵상하면 오늘의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경륜을 볼 수 있는 눈이 트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본문과 더불어 이 땅의 현실도 밀접하게 관찰하고 주도면밀하게 묵상하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설교자가 이 땅의 생활 현장에서, 혹은 피조 세계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치를 찾고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될 때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살고 있는 생활 현장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적용을 훌쩍 뛰어넘는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자신이 생활 현장을 통해 보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야 청중도 설교를 통해 현실 삶을 성경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될 것이다. 청중은 설교를 통해 현장에서 드러나는 무수한 영적 이치와 원리들을 배우고 깨닫고 터득하게 된다. 그런 다음 청중의 삶 가운데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절한 이치와 원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실습하게 된다. 따라서 설교의 적용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삶의 현장에서 하게 된다. 여러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방도 혹은 가장 시의(時宜)에 적절한 이치를 찾아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설교의 바른 적용이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실천적 지혜 혹은 생활 지혜를 전수하고, 청중은 그것을 올바른 행동으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구조가 된다. 
4) 감성이 이성에 앞선다 - 감동(感動)이 있는 설교를 하라 
한국인의 특성을 흔히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심성에서 찾는다. 사실 한국인은 매우 감정적인 민족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한국인은 ‘정’(情)이 많기도 하고 ‘정’에 약하기도 하다.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계약에 의한 것 보다는 다분히 ‘정’에 근거하고 있다. 규정과 법에 따라 허용이 되지 않는 일들도 ‘인정’에 호소하면 융통성이 발휘되기도 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만 해도 한 번 규정을 어겼으면 아무리 호소를 해도 융통성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호소를 하는 한국인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되어진다. 한국인의 감성은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신바람이 날 때까지 놀기를 좋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진다. 한국인의 마음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강렬하고, 그래서 ‘어머니’를 부르면 코끝이 찡하는 정서상의 움직임이 있다. 한국인은 직관적이어서 치밀한 논리를 통한 설득에 심정적 적응이 매우 더디다. 싸움이 나거나 서로 말다툼을 했더라도 술을 한 잔 나누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엉킨 감정을 풀어버리는 체질이다. IMF 위기가 닥쳤을 적에 온 국민이 금을 팔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나섰던 일 등은 한국인의 마음이 움직이면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들 21세기는 영성의 시대, 감성의 시대, 영상의 시대 또는 체험의 시대라고 말해진다. 그래서 예배도 이런 흐름에 맞추어 중심이동을 해야 한다는 관점들이 조심스레 개진되고 있다. 즉,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신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로의 전이를 전망한다. 여기에 찬양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청중의 심령을 만지기에는 찬양이 가장 효과적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측면이 있다. 한국인은 21세기가 도래하기 이전에도 두드러지게 영적이고, 감성적이고 또한 체험적인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성의 시대에서 감성의 시대로 전이를 말하지만, 한국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감성 시대를 줄기차게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21세기의 신종 기류로 감성적 코드를 부각시키는 것에는 다소 시대착오적 발상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분히 서구적 시각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우(寓)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감성 목회를 중시해 왔다. 심령부흥회 혹은 부흥사경회가 좋은 예가 된다. 필자도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면서 부흥회에 자주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부흥회에 가면 찬양을 크게 많이 불렀다. 기도 시간에는 대부분 통성기도로 큰 소리로 외치며 부르짖었다. 집회 장소가 떠나갈 듯이 시끄럽게 기도했다. 부흥사들의 설교는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었고, 설교가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고 웃기기도 했다. 설교와 예배는 감동 추구가 핵심이었다. 그러한 부흥회의 분위기는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동이 걸렸다. 주지주의적 성경공부를 강조하는 흐름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강단 설교는 소위 지성인의 코드에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부흥사 스타일의 북 치고 장구 치는 감동 코드가 서서히 무시를 당하고 폄하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졌다. 부흥사의 이미지가 시대에 한 발짝 뒤처진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를 빙자하여 감성 코드에 대한 강조가 다시 한국 교회 안에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는 필자의 느낌이 다소 묘하기까지 하다. 
한국 교회의 흐름이 감성 추구로 방향이 돌아서는 것에 반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다만 감동의 주체가 분위기가 아닌 설교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 6-70년대 부흥회가 성하던 시절 예배는 신령함 그 자체였다. 청중의 갈급함과 부흥사들의 카리스마가 상응하면서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균형 잡힌 설교와 복음의 파괴력을 소지한 설교의 부재를 한탄했었다. 부흥회를 통한 통속적인 말씀 사역이 한국 교회의 경박함과 감정적 치우침의 주 요인이라고 진단하고 질책했었다. 80년대 이후 주지주의적 성경공부의 확산은 성경 지식의 팽창을 가져오고 성도들의 지적인 수준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왠지 은혜와 감동과 영성에 허점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의 신앙생활도 냉랭해지고 감흥이 사라졌다. 예전과 같이 마음을 움직이고 불타는 듯한 열정에 사로잡혀 은혜를 체험하고픈 영적 갈망이 상승하게 되었다. 영성이 깊은 강해설교가 아닌 무미건조한 본문설교가 강단을 식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흥회가 주도하던 시대에는 말씀의 깊이에 문제가 있었고, 성경공부가 주도하던 시대에는 은혜와 영성의 깊이에 문제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21 세기에 동일한 현상이 재현되어서는 곤란하다. 21세기에 추구하는 감동은 한국인의 타고난 감성적 심성을 말초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되지 말아야 한다. 21 세기에 추구하는 감동은 말씀의 파괴력을 회복한 감동이 되어야 한다. 다만 인지적/주지적 말씀 이해 차원을 넘어 심정적/ 영성적 말씀 이해를 도모하는 말씀 사역의 수준을 구현해야 한다. 즉 말씀이 이성적 설복을 넘어 감성적 설복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설교가 예배의 핵심에서 물러나도록 하려는 발상은 매우 큰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설교 위치의 자리바꿈은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게 만드는 일이다. 오히려 설교 사역이 감동 생산의 핵심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설교가 우리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음으로써 감동과 감격과 눈물과 회개로 들어가도록 설교 사역이 질적으로 차원 변경을 이루어야 할 때이다. 21 세기야 말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을 갖추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내면세계가 흔들리고 심령골수가 깨어지는 설교 사역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가 깊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2. 공시적 환경: 한국인의 삶의 자리 
모든 설교는 역사성을 띠게 된다. 설교는 초역사적 혹은 초시대적 행위가 될 수 없게 되어 있다. 설교가 초월적이고 개인의 영적 구원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역사적 한계상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또한 역사적 평가를 벗어날 수도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설교 행위는 역사성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정신세계의 혼돈 상태 - 영적 척도를 설교하라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의 시대상(時代相)을 크게 두 측면에서 진단할 수 있다. 하나는, 정신세계의 붕괴 현상이요, 다른 하나는, 삶의 척도가 와해되어진 현상이다. 이 두 흐름에 대한 싸움이 앞으로 한국 교회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란 사실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을 긴장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가 보이는 부정적 흐름의 한 측면은 정신세계의 황폐화이다. 오늘 한국 사회는 윤리 부재의 상황, 도덕 불감증, 음란 문화의 확산 및 부정과 부패의 고질화 등 갖가지 병리 현상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부정적 요인들이 극대화 되고 있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가정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물질에 대한 숭상 및 성공과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과도한 집착은 이 시대의 절대적 가치로 군림하고 있다. 도덕이나 정의나 정조나 신념 등은 구시대적 유물인 양 푸대접을 받고 있음이 우리의 현실이다. 더 이상 한국 사회에 공동체성을 언급할 토대가 서서히 증발하고 있음을 본다.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만 난무하는 동물적 현실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병리 현상들은 그대로 교회 현실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사회가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형세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가치 기준과 진리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형성하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침투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파장 효과로 인해 기독교 복음에 대한 의구심이 광범위하게 조장되고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시대 경향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원주의는 지역 문화의 활성화에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구의 잣대로 타 문화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던 시대는 끝나고 있다. 입장과 입장이 부딪히고,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갈등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주문하는 정신적 환경을 딱히 거부할 명분은 없다. 다만 이러한 흐름이 종교의 영역에서, 특히 기독교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회의를 부추기고 있음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지배자 노릇을 해 왔던 서양 문화에 대한 심리적 반발과 그와 함께 서양 종교로 인식되어 왔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한 몫을 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틈새를 등에 업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시대적 방종을 견제할 적절한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에 삐딱한 경고를 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교회가 이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자명종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이 시대에 더 이상 소망을 찾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교회가 이 시대와 사회를 치유하고 혼탁한 풍랑들을 막아서는 방파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정신세계의 황폐나 다원주의 및 상대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인간 삶의 파편화는 성경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치유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설교는 영적 척도를 세우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는 진리여야 한다. 진리의 설파에 타협과 절충이 있을 수 없다. 점차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의 양심과 심령에 영적 척도가 엄연히 살아있음을 환기시켜 주어야 한다. 설교가 이 시대를 향한 전투적 militant 성격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궁핍한 시대 - 공동체적 당파성을 설교하라 
1998년에 소위 IMF 위기로 불리는 경제 난국이 들이닥친 이후 한국 사회는 지속적으로 궁핍한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실직자로 전락했으며, 회사들이 도산 당했고,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타는 사람들과 길거리 노숙자를 양산시켰고,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편중 현상이 심화되어졌다. 그런 와중에 자살이 급등했고, 경제적 파국으로 인한 이혼 숫자도 부쩍 늘었다. 한국 사회 전반이 불안과 시계 (視界) 제로의 예측 불허의 불확실한 상황을 통과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힘겨운 사회 경제적 현실로 인해 버거운 삶을 영위하며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 이 땅에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교회는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궁핍한 자, 힘없는 자, 소외된 자 및 상처 받은 자들에 대한 끈질긴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 할 때이다. 이제 교회는 자체 성장을 추구하던 동력에 제동을 걸고 주위 사람들의 아픔에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교회가 사회봉사에 관심을 쏟고 실제적인 실천에 돌입해야 할 때이다.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박하게 강조되어야 할 그런 때이다. 
앞서 우리는 설교가 설교자의 현실인식과 설교자의 ‘입장’이나 ‘관점’을 은연중에 투사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설교자가 서 있는 사회적 위치 location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설교자의 계층적 관심 혹은 편향성이라 부를 수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설교자는 계층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어느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약성을 민감하게 고려해야 하지만, 설교자가 성경 자체의 계층성과 당파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오히려 더욱 곤란하게 된다. 여기가 설교자가 설교자로서 서 있어야 하는 독창적인 위치요 특수한 입장이다. 성경은 분명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압제 당하는 자, 연약한 자 등의 무리에 대한 편향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설교자가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측면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당파성 내지 편향성은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대립각(對立角)을 세우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즉, 계층간 알력과 투쟁을 조장하는 차원에서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이 성경의 의도나 메시지가 결코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가난하고 압제 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파적 관심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방편으로 강조되는 것이요, 그런 점에서 성경이 드러내는 당파적 관심은 공동체 전체의 참여를 요청하는 일종의 공동체적 당파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전체가 공동체적 당파성을 가지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실천하게 될 때 그 교회 공동체의 공동체성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교회의 생명력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3)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편향 - 성경적 가치에 기준한 회개를 무차별 설교하라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실험장을 방불케 한다. 서구 사회의 다양한 풍조들이 직수입되어 실천되고 있음을 본다. 한국 사회의 주도적 가치 혹은 시대적 가치는 거의 서구 편향적이다. 한국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문화가 자리다툼을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전반적인 한국 사회의 경향은 서구에 경도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화 되어 있음은 세속주의, 무한 경쟁, 성장주의 및 물량주의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세속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살기’가 이 시대의 핵심 가치로 등장했다. 윤리와 도덕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은 이미 지난 시대의 일이 되었다. 누드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영화배우들의 선정적인 사진들이 인터넷에 다량으로 돌고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혼, 탈선, 불륜, 성매매, 폭력 등과 같은 주제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 공략하는 포르노 사이트들은 사람들의 가치관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다. 무한 경쟁적 사회 분위기는 더 이상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을 언급하기 어색하게 만들고 있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 전력으로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주변 이웃과 공동체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딛고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고 출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게 된다. 90년대 후반 경제난을 겪으며 중산층이 엷어지면서 한국 사회의 계층화가 가속되고 있다. 이제는 한국 사회 전체를 공동체적으로 묶어줄 수 있는 이념이나 가치가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탈출(脫出)하려고 줄을 서는 형편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도 어찌 보면 한국 사회를 축소해 놓은 인상을 준다. 성도들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 역시 세속문화의 마수에 걸려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속문화의 흐름을 막고 설 수 있을 정도의 청렴결백한 신앙인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목회자는 어떠한가? 최근 ‘에어컨 목사’로 상징되듯이 (모텔 에어컨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져 죽은 인천 지역 어느 목사의 사건) 목회자의 성적 타락이 한국 사회와 교계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목회자들의 경쟁은 도를 지나치고 있다. 목회세계에서도 ‘성공’이 절대 가치로 군림하고 있다. 값싼 은혜를 덤핑 처리하건 말씀의 순수함을 변질시키건 상관없이 일단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면죄부를 제공받는다. 목회자의 능력이나 자질 혹은 인격이나 소명까지도 교회의 양적 성장이 판정해 주는 형세가 되었다. 교회 성장을 이룬 목회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지표로 사람들이 본받고 닮으려는 흠모의 대상이 된다. 양적 성장을 이룬 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자존심과 특수성을 공허하게 만드는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교회 성장의 모델이 되는 대형교회들이 한국 교회 분위기를 획일화 시키고 있음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교회가 말씀을 중심에 둔 영적 사역인지 아니면 회중을 모으는 종교 사업장인지 정체성 혼란을 겪게 만든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관심 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대의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는 성경적 기준에 입각한 회개를 무차별 설교해야 한다. 물론 시비를 거는 설교가 아닌 거룩한 설복을 통한 설교가 되어야 한다. 설교는 이러한 세속화 경향에 대해 저항하고 중화시키고 혹은 해독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장’과 ‘경쟁’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좇다가 함께 침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교의 시대적 사명이 다시 환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통시적 및 공시적 환경을 추적하여 보고 그에 따라 설교의 형태가 어떤 식이 되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선포되어야 할 설교의 방향성에 대한 일종의 각론적 (各論的) 제안에 해당한다. 설교자의 사명은 본문에 충실함과 동시에 사회 환경에 정통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이중 언어자로 통역의 역할을 하는 것에 비견되어진다. 성경의 언어에 정통해야 하고 동시에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현장 언어에도 정통해야 한다. 본문과 상황이 설교 안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여지도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설교는 본문에 충실하지도 않고 상황에 적합하지도 않게끔 엉터리로 해 놓고 성령님이 알아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한국 사회의 흐름을 짚어 보고 그 흐름을 감각적으로 수납하면서 설교의 방향과 형태를 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다면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가 이 시대를 사는 청중들에게 보다 더 의미 있는 담론으로 들려지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 해석학적 측면에서 
이제 끝으로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는 어떤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인지 원론적 (原論的) 측면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앞서 각론에 해당하는 영역들을 언급했지만, 한국 사회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설교자들이 시대흐름과 상관없이 마음을 기울여야 할 부분들이 있다. 즉, ‘지금 여기’가 아니더라도 설교의 설교됨을 확보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성분들이 어떤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여기에도 한국인의 삶의 자리에 대한 고려가 어김없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1. 누가 설교 하는가? - 말씀의 체험자가 먼저 되어야 
앞서 한국인의 심성에서는 경전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의식이 죽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목회자의 권위는 위태롭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목회자의 권위는 경전과 하나님 권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저절로 확보되는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목회자의 권위는 경전과 하나님 권위에 덩달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 스스로 확보도 하고 유지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경전과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고 자처한다고 해도, 목회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설교는 독백이 아니다. 청중과의 대면(對面)이다.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평가나 이미지가 설교의 신뢰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설교자는 기독교의 진리에 투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철두철미 헌신한 실천자요 구도자로서의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말씀 진리 앞에서 일체 사심(私心)을 접은 설교자라는 믿음과 인정을 청중에게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청중이 설교자에 대해 ‘가짜 설교자’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설교는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자 자신이 설교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설교의 공신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설교자 자신의 공신력을 높이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의 공신력은 깊은 영성의 굴착과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도덕적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 설교자는 청중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체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설교에는 설교자 자신의 체험의 증언이 배어 나와야 한다. 생활현장에 살면서 성령을 따라 사는 모습을 설교자가 먼저 시범을 보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 청중에게 실습과 실천을 요구하고 자신을 본받고 따르도록 진솔하게 권면할 수 있게 된다. 
2. 무엇을 설교하여야 하는가? - 엄밀한 하늘의 이치가 설파되어야 
설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만드는 사명이다. 따라서 설교는 복음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 사회 분석과 청중 이해는 설교 사역의 도구적 차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청중의 깨우침을 뒷전으로 놓을 수 없고 효율적인 의사전달(Effective Communication)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만, 설교의 본질인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고, 진리를 밝히고, 그 결과로 한 민족의 영적 세계와 정신세계를 바로 잡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삶 속에서 진리 안에 사귐이 일어나도록 영적 충격을 던져야 한다. 이러한 설교의 본질적 임무가 착오 없이 진행되려면 시대적 추세에 상관없이, 일시적 유행에 흔들림이 없이 엄밀하게 말씀의 이치만 설파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고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청중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돕는 설교,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설교가 되어야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강단 현실을 보면 말씀에 대한 깊은 강해가 실종되고 재빠른 적용이 난무한다. 마치 ‘대중 철학’(popular philosophy)이 제공하는 삶의 원리들을 기독교로 채색한 듯한 메시지들이 청중들을 현혹하고 있음을 본다. 한 마디로 설교가 말씀에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본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묵직한 메시지를 청중의 기호와 입맛에 맞추어 재가공을 하는 수준의 설교가 오히려 주류를 형성하고 있음을 본다. 이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사실은, 본문 속에 담겨 있고 또한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깊은 생각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가벼운 원리들로 코드 변경을 시키는 일은 마치 (김회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금을 구리로 도금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설교 경향이 지속된다면 한국 교회 청중의 체질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복음의 진수를 중량감 있게 깨닫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점차 ‘천연기념물’과 같은 존재들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설교 사역은 이 시대 개인과 가정과 국가적 삶의 척도를 제시해 주는 사역이다. 말씀의 올바른 강론을 통해 영적인 척도가 바로 세워져야 현재 우리의 상태가 바른지 아니면 엇나가 있는지 자체 평가를 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이 바른 궤도를 잡고 움직여야 할 심각한 필요성이 있다. 
3. 어떻게 설교하여야 하는가? -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조율 되어야 
설교는 이 시대와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한다. 즉, 이 시대를 사는 청중들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는 청중과 사이에 공감(共感) 혹은 동감(同感)을 이루어내야 한다. 동감(同感)이 감동(感動)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설교 내용과 전달 방식에 호감이 일어나고 동감이 되어야 청중의 마음이 끌려오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설교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듣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설교 양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즉, 설교 양식은 얼마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청중들의 집중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현상에 주목한다. 청중들의 집중력을 고려하여 설교 구성과 전달 presentation 하는 방식을 조정한다. 설교가 효과적으로 들려져야 한다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교 양식과 전달 사이에 갈등과 긴장의 요인이 발견된다. 
설교 양식과 전달 방식이 시대적 제약 혹은 구속을 전혀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설교의 시대적 스타일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각 시대마다 올라오는 새로운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것을 설교 양식에 흡수하는 순발력이 있으면 좋겠다. 한국 교회에는 설교가 정형화 되고 획일화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설교자들 스스로 획일성을 좇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특징에는 이야기식 설교 양식이 적합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 시대에 독특한 흐름은 아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이야기식 담론을 특징으로 갖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연역적 사고에 전혀 친숙하지 않다. 연역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청중들에게 귀납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쩌면 때늦은 감도 없지 않으나) 지극히 온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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