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덕의 개념은 주자는 이렇게 정의한다. 밝은 덕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 비어 있지만 영적이며 밝게 알아차리는 의식이니 만물의 원리를 갖추고 있으니 온갖 일에 반응한다(#明德者_人之所得乎天_而虛靈不昧_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명덕자, 인지소득호천, 이허령불매, 이구중리이응만사자야).
아퀴나스 역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습관이라는 개념으로 덕을 정의한다(핵심감정 성화 참조). 아퀴나스 신학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하늘의 덕이자 습관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거스틴에게서도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체계화 한 책이 신앙편람이다.
17세기 개혁신학도 믿음을 주입된 습관으로 본다. 원의를 주입된 것으로 설명하던 아퀴나스와는 달리 의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습관이 있고 이 습관은 장성하여서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으로 자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가 우리 소유라는 내적 증거가 소망이며 이 소망을 이유로 인내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주자가 밝힌 밝은 덕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을 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습관이며 이는 사람과 만물 그리고 하나님을 밝게 알아차리는 의식이며 하나님과 자연과 소통하는 원리를 갖추고 있어서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상호침투하시듯이 자연과 하나님, 그리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섭리적인 일들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이신칭의의 교리에 집중하면서 놓친 부분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성경이 말하는 새언약은 우리 심비에 새겨진 것이고 그 심비에 새겨진 언약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덕의 형태로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한다. 율법을 율법으로만 머물러 두어서는 이런 결과를 일으킬 수 없다. 율법에 의해서 인도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것이 가능케 되는 수단이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교회로부터 베풀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강화된다.
대요리문답이 지닌 공공신학적인 요인도 여기에 기인한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동적 순종 논쟁에서 착각지점 (0) | 2022.09.27 |
---|---|
능동순종과 행위언약 (0) | 2022.09.27 |
좋은 그리스도인이란 (0) | 2022.09.24 |
기축통화와 달러의 미래 (0) | 2022.09.24 |
커피에 대해 어디서 좀 아는체 하기 (0) | 2022.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