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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

마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
아더 핑크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고전 14:33)
그렇다. 어지러움은 마귀의 짓이며 마음과 본래의 성품을 혼동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시키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나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악한 성품을 지니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할 책임이 있다” 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두 성품, 즉 육과 영 외에도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이 사실을 다룬바 있으나 더 상세하게 부연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내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개선할 수 없지만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있으며 또 그렇게 하여야 한다. 예를 들자면, 성품은 게으르고 안일을 좋아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껴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며 본성적인 생각으로는 죽음을 싫어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머리의 종교이거나 손의 종교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보다 폭넓고 완전한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며 후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끊임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종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음은 무시당하고 있다.
“성경 연구 과정”에 등록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만 영혼에 주어지는 영적 유익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바위를 깨뜨리는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말을 지나치게 신랄한 비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성경 연구 과정”을 무려 여덟 차례나 이수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최근 보낸 편지를 한 구절 인용하려 한다.
“내가 진정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고 성경이 나의 깊은 영적 필요에 전적으로 합당한 말씀이 되게 한 것은, 지금도 돌이켜 보게되는 저 ‘힘든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 대규모 “성경 모임”에서 거의 모든 강사들이 그렇듯이 성경 연구 과정의 편찬자들의 육의 비위에 맞지 않는 것과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정죄하는 것과 양심을 꿰뚫고 감찰하는 내용은 애써서 회피하고 있다. 오, 이 비극적인 머리만의 “기독교”여!
이와 마찬가지로 슬픈 것은 오늘날의 손만의 종교이다. 갓 회심한 어린 신자들이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되고 대중 앞에서 기도하게 되고 개인적인 주의 일을 하라는 재촉을 받는다.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채 영적으로 어린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자신의 영혼도 영적인 기근에 시달리면서 소위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령”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매일 두 세개의 성경 구절을 암송하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은 먹이지 못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의 은밀한 자리”에 시간을 쏟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밤마다 “선교활동”에 참여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한 주간 동안 유혹과 싸울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지 아니하고 주일 하루 종일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몰려다니는 갈피를 잃은 영혼들은 또 얼마인가. 오, 이 비극적인 손만의 “기독교”여!
사단은 얼마나 교묘한지! “주로 아는 지식”을 성장시킨다는 구실 아래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회의와 모임에 참석하게 하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종교 간행물과 책을 읽게 하는 것이다. 혹은 소위 봉사를 통해서 주를 섬긴다는 미명아래 하나님이 우리 앞에 주신 큰 임무를 소홀하게 만든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죄로부터 영혼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과의 달고도 자유로운 교제 가운데 영혼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모든 거룩한 수단과 의무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개선하는 것보다 남에게 말만 하는 것이 얼마나 더 쉬운 일인가. 정결케 하시고 바르게 하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뇌의 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시대의 징조 따위의 제목을 붙인 감각적인 글들을 한 시간 읽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은가?
마음을 지키는 이 일은 최고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이일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단순히 형식주의자들임을 의미한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 우리 입술의 기도와 찬양과, 손의 수고와 올바른 외적 행실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한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 사도는 선언하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고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비록 형식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향한 당신의 사랑을 부지런히 더욱 살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는 분이며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이다.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겔 33:31-32).
여기에 “내 백성처럼”하신 말씀은 형식적은 위선자의 집단을 가르키는 것이 분명하다. 내 백성처럼 이라고 하신 것이지 내 백성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무엇이 그들을 위선자가 되게 하였는가? 그들의 외모는 매우 아름답다. 높은 정도의 신앙과 존경할 만한 몸가짐과 은혜의 수단을 즐거워하는 것같이 보인다. 아,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며 오히려 정욕의 지배를 받으며 탐욕을 좇는다.
그러나 여러 차례 마음의 방황을 겪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지만 기도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공 예배에 참석할 때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머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것들에 비추어서 자기를 위선자라고 생각할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하여, 위선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변명과 반박을 들고 나온다는 사실을 일러두고 싶다.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다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 말이 당신의 말이라면 비록 하나님께서 고통스러운 마음 가운데 당신을 방황하게 하실지라도 마음이 곧은 자에게 주실 축복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의 지각과 생각 속에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많으나, 그 일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싸우려고 노력하다가 그 노력의 결과가 온전히 성공적이지 못한 것 때문에 비통해 난다면 그것은 당신이 위선의 혐의에서 결백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일은 “이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마음은 모든 살아 있는 행동과 움직임의 근원이요 샘인 것이다. 마음은 큰 창고이며 손과 혀는 다만 상점일 뿐이다. 상점에 있는 것들은 마음에서 온 것이다. 마음은 계획을 세우고 지체는 행동한다. 영적인 삶의 원리가 형성되는 곳은 마음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마음의 모든 움직임 가운데서 감사의 사랑과 존경의 두려움과 죄를 미워함과 관용을 더욱 더 추구하면서 마음속에 경건한 교훈이 자리 잡도록 더욱 힘써 주의하여야 하며, 그 안에서 거룩한 샘물이 솟아나와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을 온전히 열매 맺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지키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신앙생활의 책임을 삼가지 않고 이완된 마음으로 적당히 넘겨버리면 아무런 큰 고통도 치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며 이완되고 헛된 생각들을 묶어 끊임없이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은 무언가를 치루어야할 것이다. 기도할 때 간편하고 세련된 말을 사용하고 적절하고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는 동안 죄로 인해 마음이 상처를 입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면서 그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마음이 녹으며, 하나님의 무한히 거룩하심을 깨닫고 진실로 부끄러워하고 겸허하여지는 상태에서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여 지키는 일은 상당한 고통과 영혼의 괴로움을 치르도록 당신에게 요구할 것이다. 죄가 외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려는 것을 억제하고 삶의 외적 행동을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미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육신적인 인간도 보통 인간의 의지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타락의 뿌리를 죽이고 자기의 생각을 성결하게 다스리며 마음속에서 모든 일을 곧고 정연하게 처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John Favel)
아,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의 영혼에서 교만을 뿌리 뽑는 것보다 옥외에서 전도한다고 설교하는 일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당신의 생각에서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뽑아 내어버리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전도지를 전하여 주는 일이 훨씬 힘이 덜 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의 길로 나서는 것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일을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다.
주어진 자신의 영적 은사를 더 훈련시키는 것보다 주일학교의 학급을 맡아 가르치는 일이 수고가 훨씬 적다.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마음의 상태와 기질을 자주 시험할 것과 하나님께 향한 마음의 태도를 관찰할 것과 마음의 성향이 가는 방향을 제어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다. 자칭 신앙의 고백자들로서는 그렇게 할래야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신앙적인 사업에 헌신할 수는 있어도 자기의 마음을 파헤쳐 청결케 하고 지키는 일에 헌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마음을 지키는 일은 중단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지키는 일은 우리 인생이 끝날 때까지는 결코 마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을 하는 수고와 우리의 인생은 동시에 끝난다. 뱃사람이 배에 스며드는 물을 바다에 퍼 내는 것이나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지키는 일이나 그 성격이 같다. 펌프질을 계속해서 하지 않으면 물이 배에 차서 곧 가라앉을 것이다. 그 일이 힘들고 이제 우리는 지쳤다고 탄식하여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마음을 지키는 일을 잠시 중단 할 수 있는 상황이나 시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울 때 모세의 손을 계속 올리고 있었던 것이나(출 17:12) 그리스도인 자기 마음을 계속하여 살피는 일이나 다 동일한 일이다. 모세의 손이 점점 무거워져 내려지자 곧 아말렉이 승리하였다. 다윗과 베드로가 잠시 자기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중단한 까닭에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슬픔으로 보내야 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John F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