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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오바댜강해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옵 1:10-21)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옵 1:10-21) 

노승수 목사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13]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15]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18]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19]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20]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21]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1. 에돔의 비열한 범죄(10-14)

에돔은 야곱의 형제였음에도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환난을 외면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야 하면서, 그 심판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매로 치셨다 하여 에돔도 그렇게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매를 맞고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배우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를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와 척이 졌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나 형제들의 고난이나 환난을 방관하거나 고소해하거나 혹은 입술로 궤휼을 일삼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돔이 이와 같은 죄악으로 이 땅에서 끊어진 것처럼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 역시 끊어질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수탈하는 외국인 중 하나와 같은 에돔을 8차례에 걸쳐서 고발을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이 14절에 "막다(자르다)"가 부정사 형태인 것을 제외하면 모든 동사가 미완료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동사의 시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언어입니다. 우리는 "했다" "했었다" "한다" 등 동사가 상태 중심인데 반해 히브리어는 그 동작이 계속되고 있는가? 종결되었는가? 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은 모두 미완료, 곧 그 동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하는 동안 멀리서서 관망하면서, 전쟁의 전리품을 취하고 있습니다. 재앙을 방관합니다. 유다의 패망을 기뻐합니다. 고난의 날에 입을 벌리고 전쟁으로 힘없는 유다를 수탈합니다. 마치 수해나 자연재해를 입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그들이 힘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집을 터는 것과 같습니다. 에돔의 악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을 피하여 도망하는 자를 사거리에서 막고, 유다의 대적들의 손에 붙입니다. 이런 천인공노할만한 악행을 인하여, 하나님은 이 에돔을 이 세상에서 끊어버리시려 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 형제나 이웃의 아픔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나에게는 이처럼 하이에나 같은 에돔의 습성이 없습니까? 

2.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15-19)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우리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에돔의 이 무서운 범죄가 자기가 행한대로 그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16절에 "마신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흔히 진노를 "잔"에 비유합니다. 그 잔을 유다가 마셔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처렴, 이제 에돔 역시 그렇게 패망할 것인데, 마셔버려서 아예 없었던 것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긍휼의 징계였으나 에돔을 향해서는 멸망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그런데 매일성경 본문 해설은 문맥을 잘 못 읽은 것 같습니다. 15-16절의 내용은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을 이 흐름을 마치 하나의 흐름인 것처럼 생각이 들도록 번역을 했습니다. 15절의 "너"는 2인칭 단수로 4번 반복됩니다. 여기서 너는 에돔 족속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16절은 "너희"로 2인칭 복수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너희"는 에돔 족속이 아니라 유다 백성을 가리킵니다. 문맥을 잘 보십시오. 너희가 마신 것 같이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신 자가 누구입니까? 에돔입니까? 바로 예루살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이 잔을 마신 것처럼, 만국인이 마셔서 없던 것 같이 되도록 심판을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1-14절까지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무려 "날"이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러다가 15절에 들어서 다른 날을 말씀하십니다. "만국을 벌할 심판의 날"입니다. 앞선 날들을 에루살렘을 향해 징계의 매를 드시는 날이었다면, 15절의 날은 열국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 심판과 진노의 날이 에돔에게 임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야기 흐름의 반전이 생깁니다. 이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종국적 심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무튼, 16절의 내용은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너희가 나의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의 너희는 예루살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들을 통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번역 : 너희가 내 거룩한 산에서 잔을 마셨다. 그러나 이제 온 세계 모든 민족이 욱더 쓴 잔을 마실 것이다. 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하여 없어질 것이다."
쉬운 성경 : 너희들이 나의 거룩한 산에서 마신 그 잔으로 모든 나라들이 계속하여 마실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마시다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공동번역 : "나의 거룩한 산에서 너희가 마신 쓴 잔을 이웃 모든 민족들도 마시리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곤죽이 되리라. 

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이 마셨던 잔을 에돔과 만국이 마셔서 그들이 사라지기까지 마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예언이 단순히 에돔에 대한 예언 만이 아니라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이라는 이유입니다. 

에돔과 만국은 이와 같이 망하고 없어질 것이지만, 멸망한 것 같았던 유다에 오히려 피할 자가 있고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오히려 그 기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야곱을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 곧 불과 불꽃으로 삼으셔서 에서 족속을 초개와 같이 사르시면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표현하나는 성경에서 이처럼 불이나 불꽃은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미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의 이미지로도 사용이 됩니다. 대표적 사례가 모세 사건에서 보듯이 불붙은 떨기나무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중첩되어서 나타납니다. 이 사르는 사건은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임재로 에돔에게는 심판의 임재로 나타납니다. 

지금은 득의한 듯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선하신 경륜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인류 역사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유다는 뿌리 채 뽑힌 듯 했지만, 오히려 나라가 견고히 섰고, 에돔 족속은 유적지에서나 그 역사를 기억할 뿐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9절 이하는 에서가 유다에서 전리품을 취한 것처럼 에서의 땅을 여러 기타 민족들이 전리품으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21절에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면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구원자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이 조금 문맥에 흐름에 자연스럽지 못해 보이기는 합니다. 몇몇 학자들은 "구원 받은 자들"로 해석을 하는데,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이 없는 문자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점차 죽은 언어가 되는 과정에서 학자들이 읽는 법을 유실하지 않기 위해서 후대(기원 후 14세기 경)에 점으로 만들어 붙입니다. 그게 흔히 말하는 맛소라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의 모음 점은 영감된 성경 원문이라기 보다 독법에 더 가깝습니다. 이 단어에 모음 점을 다르게 찍으면, "구원 받은 자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음 점의 변화를 가하지 않더라도 '구원자들'이란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함의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자들이란 얼마든지, 우리말에서도 문맥에 따라 그런 의미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독자들이 이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본문이 문맥에 더 자연스럽고 전체 성경 사상에도 더 부합합니다. 마지막 때의 성도의 승리와 다스리는 권세에 대한 신약 성경의 메시지와도 부합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이 특권에 참으로 감사합니까? 나도 에돔처럼 충분히 멸망할 만 했으나 내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그 마음에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형편이 멸망자가 아니라 구원자가 된 사실에 깊이 감사하십니까? 이런 감사가 있는 자라면, 에돔이 행한 것처럼 이웃에 대해서 행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참으로 일만달란트를 탕감을 받았다면,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자를 진정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이웃에 환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며, 심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어떤 감사를 드립니까?
전체적으로 :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성경은 야곱은 택한 자녀의 상징으로 에서는 유기된 자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돔에 국한 옛적 심판에 대해서 예언한 지난 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장차 올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야곱의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의 혈통적 성격을 가지지 않습니다. 로마서가 증거하는대로 그가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이 야곱은 택하고 야곱은 버리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삭수를 보고 미리 아시고 예정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결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가 에서의 죄보다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야곱은 징계 후에 긍휼을 베푸시는 반면, 에서는 멸망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불평을 합니다. 태중에서 이미 그러하셨다면,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아닌가? 천만에요 하나님이 에서의 이후에도 심히 자주 부르시고, 징계하시고 권계하셔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은 돌아왔느냐? 둘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 심판하셔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의 기뻐하심을 따라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불공평하여서 비난받아 마땅한 역사일 수 있습니까? 은혜의 역사인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나는 택한 은혜의 백성이 된 사실에 참으로 감사합니까? 오늘 하루 이 사실을 묵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