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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전도학

복음을 나타내는 방식

복음을 나타내는 방식
마틴 로이드 죤스 

● 들어가면서 
복음을 나타내는 방식은 언제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는 영원한 귀추이기 때문에 그 문제는 항상 중요한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그것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할 필요성조차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보편적인 배도 입니다. 교회들 편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땅한 방식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에 따른 경건치 않음과 물질주의가 갈수록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이 보내고 있는 시대의 성질 때문에도 복음을 나타내는 방식의 문제는 긴박한 중요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외적으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말들을 달아보고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나타낼까 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라도 자기들의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 우리가 그들과 접촉할 때 그전보다 그런 문제가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마땅합니다. 또한 우리는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죽음이 갑자기 임하는 세상에서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사람들이 숙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확언하는 문제를 숙고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신 놀라운 방식에 새로운 충격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설교하는 임무를 맡기셨다니 그 얼마나 기이한 특권이며, 그 얼마나 놀라운 영예입니까? 그 일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가공할 만한 책임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지워집니다. 여러분은 청소년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 사람들의 삶을 지도하는 사람들로서 여러분의 입장은 여러분의 일을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 주제는 정말 크고 중요해서 한 번의 연설로서 적당히 다루기가 전혀 불가능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들에 속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선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할 수 있는 한 실제적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일을 주관하는 적극적인 원리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 복음 사역을 감당할 때 우리를 위협하려고 항상 벼르고있는 위험들 중 몇 가지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이 주제를 다룰 뿐 아니라, 청소년들 가운데서 일한다는 차원에서도 다룰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구분입니다. 우리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매우 위험스런 구분으로 돌입해 들어갈 수 있는 구분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에 기독교 사역을 연령별로 나누는 경향이 두르러지게 나타났었습니다. 저는 결코 연령별 곧 노인층, 중년층, 청년, 어린이 등등으로 구분하는 일에 열심 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의도는 복음을 연령층에 맞추어 수정 조절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이 구분들을 의식해서 복음을 맘대로 고치고 어설프게 조작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오직 유일한 복음을 다른 여러 연령층에 적용하는 데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방식과 절차상에만 국한되는 것입니다. 

Ⅰ. 복음의 본질 
어떤 서클에서 이 주제에 대하여 말해주십사 하는 청을 받는다면, 저는 가장 먼저 복음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애쓸 것이며, 복음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많은 단체 속에서 사람들이 갈피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단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볼 때는 복음이 전혀 아닌 것을 복음이라 설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복음의 내용을 규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커다란 근본적인 교리들, 기독교 신앙의 기본 원리들에는 다 합치한다고 저는 전제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접촉하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나타내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복음을 나타내는 것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하여 그렇게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전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복음을 믿으면 복음을 바른 방식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정통적이고 바른 것들을 믿는다면, 자기가 믿는 바를 적용하는 것은 자연히 처리될 문제다.” 제가 볼 때 그런 식의 생각은 매우 큰 실수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고픈 충동을 받는 이는 누구든지 자기의 연약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언제나 낭패케 하려고 시험하고 있는 우리 영혼의 대적을 더더욱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는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방식으로 입증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바른 것을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바른 것을 바르게 나타낼 수 있음을 지당한 일로 여길 수 없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들의 믿음과 교리에 있어서는 건전한 복음 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통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전혀 열매가 없이 메말라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도 여러분만큼이나 건전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역은 아무 것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 제가 제시하는 두 번째 증거입니다. - 겉으로는 자기들의 일과 노력에 대단한 열매를 얻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캠페인을 벌입니다. 또는 한 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나옵니다. 소위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 중 많은 부분이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영구하게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잠시적이고 지나가는 성질을 가진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두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제가 볼 때 오직 한 가지의 설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과 사람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통하여 실제로 나타내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위험은 복음에 ‘관하여’만 말하는 위험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믿고 진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나타내고 복음을 말하는 대신에 복음에 관한 놀라운 것들을 말합니다. 온통 모든 시간을 복음을 나타내지는 않고, 복음에 관하여만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 사람이 지극히 정통적이고 건전하다 할지라도, 그의 목회사역이 아무런 결과도 보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에게 해당하는 위험은 너무나 복음의 적용과 결과를 얻는 데만 관심을 두고 마음을 기울인 나머지, 자기가 나타내고 있는 것(그리고 자기가 믿는 것)과 실제로 결과 자체를 얻는 것 사이에 격이 지게 하는 위험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진리를 믿는다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바를 바른 방식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Ⅱ. 연구방식의 문제 
우리가 이 복음을 나타내는 방식의 주제를 연구하는 데는 두 가지 주요한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 자체, 특히 사도행전과 신약의 서신들을 특별하게 참고하여 연구하는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으면, 그 방식이 가장 우선에 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과서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원시적인 최초의 본, 규범, 표준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과 서신들은 기독교가 무엇이며, 기독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교회는 자기의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완전하고 충분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방식이 신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항상 확실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방식은 보충적인 방식입니다. 신약 시대 이후의 기독교회 역사에 대한 연구입니다. 부흥시대와 위대한 영적 각성시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과거 복음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크게 존귀함을 받은 사람들의 전기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의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진 원리를 주목합니다. 과거 역사로 돌아가 그 역사를 읽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용하신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릴 때, 저의 바람은 우리가 지난 70년을 뛰어넘어 그 이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음을 마음에 분명하게 새겨두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1870년까지는 정말 진정한 복음 적인 역사는 전혀 없었다는 견해를 가진 것같이 보이는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있음을 압니다. 영국에 있어서 복음 적인 역사는 ‘무디’가 영국에 온 이후에야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70년간의 영광스러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과거의 교회사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보라고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18세기로 돌아가 보십시오. 청교도들의 시대로 나아가 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 종교개혁 시대로 가보십시오. 아니 그 이전으로 나아가서, 로마 카톨릭이 전권을 장악하던 때에 유럽 대륙에서 살던 복음적인 사람들의 부류에 대한 역사를 연구해 보십시오. 복음적인 사상들을 견지하던 초기 교부들의 시대로 나아가 보십시오. 그런 연구는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요합니다. 거짓된 역사관을 가지고 복음적인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만 일어날 수 있고, 어떤 방식을 적용하고 사용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단정하는 대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대하여 매우 철저하게 연구하여 보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한 사람이 그처럼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제게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계시와도 같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위대한 학자요, 철학자로서 자기가 설교할 내용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쓴 사람입니다. 그는 지독한 근시(近視)라서 강단에 설 때에는 한 손에는 설교 원고를,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서곤 했습니다. 또 그가 자기의 설교문을 읽을 때에 사람들이 회심하였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죄책감과 성령의 권능을 견디지 못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70년간의 대중적인 복음전도의 차원에서 복음 적인 역사를 생각하면 그같이 설교한 사람은 도저히 회심을 얻어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18세기에 미(美) 대륙에서 있었던 대 각성 때에 하나님께 사용된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사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보고, 하나님께서 여러 시대와 여러 시기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보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주제를 접근해 나가는 두 주요한 노선은 바로 성경연구와 기독교회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의 대 기본 원리들이 이 문제 전체를 주장하는 것으로 명백히 드러남을 발견할 것입니다. 

1. 이 일의 최상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심입니다. 다른 모든 목적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을 설교하는 제일 되는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고상하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결코 그 첫 자리를 빼앗아 점령하는 일을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2. 이 일을 진실로 행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권능은 성령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천성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본성적인 성향의 결과로 무엇을 행할 수 있든지 간에, 복음을 나타내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상의 목적으로 인도하는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신약성경 자체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성령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려고 하지만 철저하게 실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습니다. 이후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여러분은 성령의 도구가 되는 일을 멈춘 사람들이 그 목회사역에서 대번에 열매가 없게 되는 일을 만납니다. 그들의 본성적인 능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친히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임을 입증한 셈입니다. 
3. 성령께서 일하실 때 채용하시는 오직 유일한 매개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아주 쉽게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한 설교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실제로 한 일은 성경을 강해한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 자기 개인의 체험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베드로의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바울의 특징적인 방식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17:2).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상대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와 주의 말씀을 전하였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디모데 전서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딤전2:4). 진리가 성령께 사용되는 매개체입니다. 
4. 그러므로 네 번째 원리는 복음전도에 대한 진정한 동기는 이 원리들을 숙지하는데서와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위하여 열심과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심지어 가장 진지한 자들 중에서도 오류와 이단의 위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또한 거짓된 열심과 비성경적인 방식들을 채용하는 위험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부단하게 검증하고 성경 자체로 돌아갈 필요성만큼 신약성경에서 보다 자주 권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 다섯 기본 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매우 분명하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 원리들은 기독교회의 이후 역사에서 풍성하게 확증됩니다. 

Ⅲ. 원리들을 적용하는 문제 
저는 이제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두 번째 주요 대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곧 이 원리들은 복음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일에 적용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자연히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복음전도의 일이 있고, 그런 다음에 덕을 세우고 의로 교육하는 일이 따라옵니다. 

1. 복음전도와 그에 수반되는 위험 
우리가 복음 적인 일에 종사할 때,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다음의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오직 유일한 참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고 저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는 영혼들이 하나님과 화해되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그 까닭은 영혼들의 됨됨이 때문이며, 영혼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상태에 있다가 멸망을 당할 위험에 처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모든 복음전도 사역의 목적입니다. 곧 영혼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는 상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은 단지 청소년들로 하여금 믿음의 결심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하게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성경공부 반이나 교회에 가입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자, 이 복음전도 사역과 관련하여 야기되었고, 야기될 매우 중대한 위험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믿음의 결심을 크게 높이는 위험입니다. 특별하게 젊은 사람들 속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길게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린 사람들과 성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차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기는 해야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어린 사람들을 감동시켜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일이든지 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로마 카톨릭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일곱 살 될 때까지만 우리에게 맡기라. 그러면 그로 생명을 얻게 하겠다.”는 식의 주장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결심을 높이 추켜세우는 위험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사용하여 “모임의 흥을 돋구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합창을 부른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결심을 유발시키는 바람직한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 음악이나 합창을 하는 것을 의뢰합니다. 아마 또 다른 유의 사람들은 방불한 방식으로 음악보다는 이야기들을 이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야기를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하는 재능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군부대에서 어떤 일을 하는 자기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자기 친구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요. 정말 의로운 타입의 사람이고요, 정말 기운차고 시원한 사람이지요.” 신약성경에는 그러한 유의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을 특별하게 기운차고 시원한 사람이라고 묘사하던가요? 
아마 제가 이 시점에서 본 주제를 잠깐 벗어난 이야기를 해도 무방할 줄 압니다. 복음전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장 존귀하게 쓰임 받은 종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못난 사람들인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주목하신 적이 있는지요? 저는 그것을 연구하여 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는 바입니다. 복음전도자가 결과를 산출하기 위하여 자기의 개성의 매력을 의존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할 때에 축구경기와 같이 모든 자가 합세하거나 게임을 한다는 생각을 대변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린 청소년들에게 매우 큰 호소력을 가지기도 하고, 그 자체가 전혀 해가 될 것도 없고 매우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점은 때로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믿음의 결심이 진리를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산출되기보다는, 그런 팀 정신에 의하여 산출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위험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위험은, 듣는 사람들의 의지에 압박을 가한 결과로 믿음의 결심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개성과 의지력과 다른 사람들을 주장하는 자기의 수완을 지나치게 사용하여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억지를 부려서 자기의 호소에 반응을 나타내게 하는 위험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들은 그러한 유의 결심을 합당치 못하게 높일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에 속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잘하는 기막힌 재능을 가진 어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복음전도자에 대하여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는 정말 그런 방면에서 가히 천재였습니다. 그가 말로 묘사하는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아집니다. 이 사람이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앞에 있는 회중들을 최면 시키는 것 같습니다. 집회가 끝날 무렵이 되면 결심의 방으로 오라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옵니다. 그러나 그 결심의 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 온 사람들에게 어째서 이 방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자기들은 잘 모르겠으나 강사님이 오라고 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들을 깨우치고 확신을 주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여러 이야기들에 감화를 받았고, 그래서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것같이 보인 것입니다. 음악도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합창을 하여 급기야는 도취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효과를 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계적으로 자기들에게 주어진 어떤 명령이나 어떤 초청이든지 다 응해 버립니다. 
두 번째 위험은 사람들이 거짓된 동기에서 결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어떤 사람의 체험을 자기도 하고 싶어서 그리스도를 위한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시 청소년들과 어린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노출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메시지를 여러분 자신이나 어떤 다른 사람의 체험의 효과에 기초하여 전하는 위험을 조심할 것을 저는 애써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고 있는 청소년이 여러분과 같아지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하고, 여러분이 말한 어떤 사람과 같아지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고, 여러분이 이야기한 바로 그 다른 사람이 얻은 것을 갖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심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는 단지 다른 사람의 체험을 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아니면 그가 들은 이 놀라운 타입의 인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인생을 주고 말고요.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놀라운 인생을 가지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를 때로 영웅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영웅적인 본능이 강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의 그런 국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청소년들, 아니 더 나이든 사람들까지라도 메시지가 영웅적인 본능에 호소력을 주기 때문에 성경공부 반이나 교회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삶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때문에 결심에 이르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것 역시 청소년들에게 특별하게 해당되는 위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대한 모험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열망하는 것이나 위대한 십자군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 이제 제가 이 제목 밑에 강조하고 싶은 마지막 위험은 ‘그리스도가 너를 필요로 한다.“는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고, 만일 한 청소년이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결심하지 않으면 상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식의 차원에서 복음을 나타내는 가공할 만한 위험입니다. 이러한 위험들은 제가 고안해낸 것들이 아닙니다. 저는 제 체험에 입각해서만 그 위험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읽은 책이나, 거짓된 방식을 사용한 결과로 기독교 목회사역에서 누구나 만나는 난제들로부터 발견한 것들을 참고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언급한 것들 중 많은 것들에는 많은 분량의 진리와 가치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그것들이 그 자체로는 제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들 중 어느 것이라도 최상의 자리에 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회를 가질 때에 전혀 찬송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찬송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찬송 부르는 것에 너무 많이 의존하지 맙시다. 이런 것들을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만 사용하도록 합시다. 그것들을 결과를 산출하는 결정적인 것으로보다는 보조역할로 도움을 주는 것들로 여깁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모든 것이 소극적이라고 말씀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복음전도의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저는 다시 대답합니다. 제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다섯 가지 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원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나타낸다. 복음전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적극적으로 강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본질상 어떤 조건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있으며, 무엇을 했느냐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보시기에 정죄 아래 있으며, 죄책을 가지고 있음과 “모친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시51:5)하였음을 그들로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그런 연후에 죄의 엄청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말은 어떤 죄악들의 악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Sin)와 죄악들(Sins)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그야말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특별한 죄악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너무 잦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진정한 일은 죄, 우리를 망케 하고 특별한 죄악들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 자체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안에서만 얻어지는 값없는 구원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선물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죄의 책임과 죄의 권능을 제거할 수 있으며 나사렛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2:24)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복종시킬 때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수립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결심이려면, 그 결심이 진리를 인식한 것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른 것이나 우리 자신의 개성의 매력의 결과로 사람들로 결심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할 일은 나 개인을 따르는 자들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무란 성경공부반의 규모나 조직이나 우리 교회들의 크기를 증대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케 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진리를 영접한 것에 기초하지 않은 결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2. 양육 
복음을 전달하는 것에 관한 두 번째 항목은 양육(edification : 세움)의 일입니다. 이는 큰 주제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어떤 원리들을 제안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 세워줌(양육)의 특별한 일에서처럼 거짓된 방식의 위험이 더 진하게 드러나는 곳이 없습니다. 제가 세워줌(양육)이라 말하는 것은 성화와 성결에 관해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자체에도 그 위험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대번에 초대교회가 여러 난제들과 여러 위험과 초기의 여러 이단들로 첨예한 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은혜에 넘치게 하기 위하여 죄에 계속 거하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단 그리스도인이면 무엇을 해도 상관이 없고, 신조에 있어서 바르면 몸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원하는 대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폐기론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지식’에 열심이고, 다른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특별한 체험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가 말하듯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들로 묘사하면서 바울파, 아볼로파, 소수 정예인 그리스도파(고전1:12)라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와 디모데전서에서 분명하게 다루어지는바 사람들에게 혼인하지 말라, 식물을 금하라는 식의 금욕주의를 열심히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의 교회사를 읽어보면 같은 것이 부단하게 강조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도승들과 은둔자들, 어떤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리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기독교회 내에 여러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들에 열심 내는 자들은 아주 정직하고 아주 열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교와 오류의 위험에 종속하게 되었고, 처음의 참된 길에서 벗어나 배회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모든 위험들을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지 아니하고 어느 본문이나 어떤 개념을 따로 떼어서 그것을 중심 하여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는 위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지름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번에 성화에 이르고,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묘사하는 과정보다 앞서 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위험을 피하는 방식은 신약 자체, 특히 서신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서신들의 가르침에 건전하게 기초하지 않은 것은 어느 것이든지 거부해야 합니다. 성결이나 성화의 주제와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복음서에 묘사된 어떤 한 사건을 떼어내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한 이론을 짜 맞추는 일을 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특별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서신들에서 발견해야 함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서신들로 나아가면 우리의 삶이 어떤 갑작스런 체험에 기초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가 믿는 진리로부터 유추해 내야 하는 어떤 추론 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원리가 명백하게 상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므로”라는 말을 특별하게 연구해 보라고 권면해도 좋겠습니까? 그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신약의 서신의 기자는 무엇보다 먼저 교리를 설정해 놓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러므로”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에 비추어서 이것을 하라는 식으로 말해 나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우리의 교리에서 유추해 낸 것이어야 합니다. 
교리란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그 질문은 부단하게 반복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화 된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 때문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우리 앞에 있는 소망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신약은 우리더러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거룩하고 성화 된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으니, 그가 갈보리에서 당신의 피를 흘리셨으니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죄에서 구속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한 것이니, 그러므로 죄악 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믿는 것과 우리 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아무 간격도 두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하나입니다. 삶의 성화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교리에서 즉시 우러나옵니다. 신약은 우리가 은혜 가운데서와 주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약성경에는 모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자신들이 믿고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진리 곧 그들의 삶 속에 적용하고 실천에 옮긴 진리를 향한 부단한 권면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노력한 모든 것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능한 복음의 사역자들이 되고 싶고 진리를 바르고 오직 유일한 참된 방식으로 나타내고 싶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단하게 연구하는 학생이 되고, 쉬지 않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모든 좋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성경주석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읽으시고, 신약의 위대한 교리들을 해설한 것을 읽으십시오. 그래야만 갈수록 그 위대한 교리들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그 교리들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역자의 일은 단순히 자기 개인의 체험을 제시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를 가능한 단순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최상의 임무를 행하는 데에 여러분을 돕는 것은 어느 것이든지 다 연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실 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기에 누가 충분하다 하겠는가? 우리는 다 바쁜 사람들이다. 당신이 우리더러 하라고 요청하는 이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여러분이 바쁜 사람이라든지,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든지, 그래서 성경에 관한 책을 읽고 신학을 연구할 시간이 전혀 없다는 논리에는 저는 그렇게 큰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다음과 같은 훌륭한 이유 때문이지요. 제가 만난 가장 훌륭한 신학자들이나 가장 많은 학식을 가진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여러분 중 어느 분보다 훨씬 더 어렵게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러분이 누려온 이점들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무장시킬 시간이 전혀 없다는 구실을 늘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임무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시켜야 하며, 노력하고 땀을 흘려야 하고 진리를 갈수록 더 완전하게 알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디모데 전서 4:12-16에서 발견되는 말씀을 적용하여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은혜와 능력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존귀와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이 연설문은 1942년 런던의 Sion College의 지도자 연맹 사경회에서 행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