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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은혜의 수단

솔로몬의 경우에서 보듯이 믿음과 지혜가 출중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죄가 성하게 되면 우둔해지고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 믿음이 강하여지려면, 은혜의 수단을 자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죄로 무성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밭을 매는 호미요 괭이가 은혜의 수단들입니다.

믿음과 은혜의 수단도 중요하지만 교회라는 매개가 없이는 우리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목사는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말씀을 전달하는 중개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신약성경은 반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와 좋은 관계와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과 그들을 존경하는 일을 강조할까요? 목사와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고 우리의 영적 생명이 제대로 유지되기가 힘듭니다.

요즘 아이돌 팬덤 중에 아이돌 친구가 이야기해서 공부해 좋은 학교 갔다는 친구가 더러 있더군요.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이런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가 비교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목사를 정서적으로 신뢰하는 관계가 없이는 이런 종류의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 저자들은 단지 목사를 진리에 있어서만 신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하며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그리하라고 권면하는 디모데전서의 경우, 이 말씀 다음에 일꾼의 삯에 관해 언급하는데요. 예배를 위해서 목사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이 성도의 책무이며 자신의 영적 생명이 유지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목사에게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바른 교훈을 받지 않음과 사욕 때문에 스승을 많이 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여러 곳에서 여러 스승을 통해서 듣는 행동 자체가 자기 사욕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태도를 이사야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Isa 28:13) 그리고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4:21-22에서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서 방언 현상을 설명하는데서 인용됩니다.

목사가 성도를 가르침은 향방이 없는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체계와 질서를 따른 가르침입니다. 물론 좋은 목자를 만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른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여기저기서 듣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베뢰아 교인처럼 순전하게 듣고 그것이 그런한지 연구하는 태도가 무엇으로 드러나냐면 목사와 그 삶을 돌보는 방식, 곧 정서적 신뢰로 드러납니다. 마치 아이돌을 향한 팬덤의 헌신처럼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한다면 그 말씀을 질서 있게 듣기 위해서 목사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높은 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동안교회에 시무할 때, 겪은 일을 설교시간에 나눈 적이 있습니다. 대심방 기간 동안, 하루에 8가정 정도 심방을 하는데 하루 3번 식사를 거하게 하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뭘 잘 먹는다고 하면 교인들이 너도 나도 그걸 준비하기 때문에 오뉴월 꽃노래도 한두번이지 그런 식의 반복되는 식사는 견디기 힘들어서 그냥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했는데 1주일이 못 가서 집집마다 나오는 메뉴가 비슷해지는 겁니다. 이유인즉, 뭘 좋아하는지를 일러주지 않자 앞집에 전화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뭘 잘 드시더냐? 어디에 젓가락이 많이 가더냐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성도는 이처럼 목사를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이 목회자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오만해지고 교만해질 위험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 이 위험 때문에 성도가 마땅히 은혜를 얻기 위해 해야 할 것을 안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교회에서 심방을 "하나님의 가정 방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목사와 성도가 정서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실제로 그 가정을 위한 권면이나 권징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훈계와 언잖은 소리는 피상적 관계에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 전하는 자가 자신이 빚을 청산하는 자처럼 성도를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에게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목사로부터 칭찬과 책망을 듣고 위로를 얻고 회개를 하며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소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고넬료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에게 천사나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실 수 있었음에도 베드로를 보내서 그에게 듣게 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성령 강림은 항상 사도의 개입이 있고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은혜를 얻는 기구로 교회을 세우시고 이 교회에 일군으로 목사를 세우심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경륜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 안에서 자신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정서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며 그의 필요를 공급하여 근심없이 교회를 돌보게 해야 합니다. 지상에 성장하는 모든 교회는 이런 특징을 보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특성으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며 사욕을 따라 여기저기 듣는 사람은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