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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사랑의 체계와 미움의 체계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는 여러 인간사에 대한 함축이 담겼다. 자식이 아버지를 넘 볼 것을 두려워하여 자식을 잡아 먹는 티탄신 크로노스는 단지 신화가 아니라 고대인의 삶의 투영이다. 소포클래스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왕에서 테베의 왕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하는 비운의 왕이 되어 분별력 없었던 자기 눈을 찌르고 여동생이자 딸이었던 안티고네를 의지하여 방랑자가 되고 마는 그의 운명도 고대인의 삶의 투영이다.

 

프로이트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미움과 적개심을 놓은 것은 어떤 점에서 창세기 3:15의 원시 복음에서 아버지이신 창조주와 아담 사이에 놓여야 했던 적개심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놓이므로 배반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품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는 아버지의 사랑과 대조를 이룬다.

 

동시에, 이 대조에서 공통점은 적개심으로 관계의 비틀어짐은 반드시 적개심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원래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은 사랑의 관계성이지만 범죄한 인간의 관계성은 우리의 적개와 미움을 투영하는 관계성이다.

 

인간의 모든 우상숭배에는 이 적개와 그에 따른 희생양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젝이 밝히듯이 현대인들은 적개에서 유발되는 죄책감을 모면하고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소비한다.

 

모든 종류의 죄책감의 기저에는 적개심이 깔려 있다. 적개는 단지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욕구에서부터 사소한 미움과 죽이고 싶은 마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며 미움을 상대에게 투영하고 거기서 비롯된 죄의식을 무마하기 위한 여러 의식들을 발달시킨다. 이 의식들이 바로 우상숭배의 기원이 된다.

 

바울 사도가 우상숭배가 탐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맥락이다. 앞서 언급한 지젝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헌신은 없고 욕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만 존재한다.

 

탕자는 "품군이라도"라는 바램으로 아버지께 나오나 아버지는 그에게 "인장반지"와 아들을 비단옷을 입히신다. 아버지에게 탕자는 한번도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그렇게 사랑의 관계에 감화된 아들이 사랑을 담아두는 관계와 윤리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난관이 존재하는데, 원시 복음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적개를 두었으므로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는 과정에서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다가 괴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임이도 영적 지식이 없으므로 이 전쟁을 육의 전쟁으로 오인하여서 미움과 적개를 사람들에게 투영하여서 소위 마녀 사냥을 일삼는 것이다.

 

미국 정착 초기 청교도들에게서 나타난 마녀사냥이나 유럽의 마녀 사냥은 모두 기후변화에 의한 식량 위기나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무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그들의 신앙이 희생양을 찾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육의 체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해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체계로의 전환이 없이는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생기며 이를 빌미로 적개를 발산하게 된다. 한국전쟁 직후 기독교 안에서 발생한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이런 영적 무지를 보여준다.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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