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되신 하나님
바르트가 하나님 계시에 관한 교리를 전개하는 구조는 하나님 말씀의 세 가지 양태에 유비적으로 상응한다. 즉 “계시자(der Offenbarer)” 성부 하나님, 계시(die Offenbarung) 그 자체인 성자 하나님, 그리고 계시하는 존재(das Offenbarsein)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신적 계시는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 “선포된 말씀”에 상응한다. 이러한 삼중적 구조에 상응하게 바르트는 제2장 하나님의 계시론 제1절에서는 말씀을 통한 계시의 3중성과 “계시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KD I/1, 쪮쪮 8~12), 제2절에서는 “계시 그 자체인” 성자(말씀)의 화육, 곧 화육된 말씀에 관하여(쪮쪮 13~15), 그리고 제3절에서는 “계시 존재”인 성령의 부어주심(쪮쪮 16~18)에 관하여 기술한다. 이렇게 바르트의 계시신학은 삼중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상응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제1절: 삼위일체 하나님(Der dreieinge Gott)
“쪮쪮 8. 자신의 계시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르트는 “1. 교의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의 위치”; “2. 삼위일체론의 뿌리”; “3. 삼위일체론의 흔적(Das vestigium trinitatis)”으로 세분하여 기술한다. 그리고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계시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계시의 개념에 대한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은 파괴될 수 없는 통일(Einheit) 속에 있는, 그러나 또한 파괴될 수 없는 다양성(Verschiedenheit) 속에 있는 계시자(der Offenbarer)이시고, 계시(die Offenbarung) 그 자체이며, 그리고 계시하는 존재(das Offenbarsein)라는 것을 의미한다(311).
이러한 진술에 의하면, “교의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의 위치”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내용상 전체 교의학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최고 높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316/389). 왜냐하면 성경은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는 자”로서 성부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으며(313/386),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과 구체적인 인간 사이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315/387) 존재로서 성령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를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계시된 존재 그 자신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그 계시를 일으키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를 스스로 “계시하는 하나님”과 그 분의 “계시”와 그 분을 “계시하고 있는 존재” 사이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삼중적 통일성이 있다(315/388). 즉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 계시가 이미 일어났다면 - 자신을 이미 계시해 주신 “계시 그 자체”가 되신 것이고, - 계시를 행하고 계실 때는 - “계시하는 존재”로서 세 가지 존재 양식을 취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바로 앞 단락에서 진술한 계시의 삼중성, 바꾸어 말하면 말씀 계시의 삼중성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성경과 교회의 선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321/395).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주(主)님으로 계시하신다”(323/397)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자이면서, 한편으로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계시하는 존재”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 “계시”, 곧 “하나님이 자신을 주(主)님으로 계시하신다”는 명제는 삼위일체론의 기초(뿌리)가 된다(324,328/399, 403f).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계시에 관한 “하나의 해석”(329)일 뿐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삼위일체의 뿌리”를 “계시”에 두고자 하는 것 역시 그의 “계시개념”의 삼중적 의미에 기인한다. 그에 의하면,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란,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따르면, 인간에게 드러내어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들이 관여하도록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Selbstenthullung)을 의미한다”(332f/409).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 그 자신을 인간이 보고, 경험하고 그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할 수 있도록 대상(對象)으로 내세우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눈에 보이게, 즉 자신이 아닌 다른 형태로 보이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둘째로,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곧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는 곧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338/416)이다. 즉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은폐되어 계신 분이다. 셋째로 “계시는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며, 구체적인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계”(343/421)속에서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에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시를 하나의 역사(Geschichte)로 기술하고 있다(344/422). 따라서 계시는 “비교될 수 있거나,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모든 다른 것과 구분되고, 비교될 수 없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즉 “계시는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일어난다(senkrecht vom Himmel)”(348/427). 달리 말하면, 계시는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 한 특정한 인간에게 우발적으로 인간에게 일어났다(348/427). 이렇게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폐되어 있어 알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게 바르트의 계시론에는 ‘인식할 수 있음’과 동시에 ‘인식할 수 없음’의 역설적 변증법이 존재한다(349/428).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흔적(Das vestigium trinitatis)” 역시 계시의 삼중성, 혹은 말씀의 3가지 양태에 상응한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물의 존재 사이에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가 있다는 이론에 기초한 어거스틴의 자연신학적, 더 자세히 말하면 우주론적 인간학적, 삼위일체의 흔적 교리를 거부한다(354/433). 오히려 바르트는 “하나의 참된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면, 그 흔적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언어와 세계와 인간성 안에서 자기를 계시할 때, 취하신 형태”(367/449) 속에, 곧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 말씀의 삼중적 형태 속에: 곧 당신의 계시 안에, 성경 안에, 그리고 교회의 선포 안에 계시다”(367/450)는 데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취하신 말씀의 삼중적 형태(dreifaches Gestalt), 이것이 바로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쪮쪮 9.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삼위성 안에 있는 일체성”이며, 동시에 “일체성 안에 있는 삼위성”으로서의 “삼위일체성”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의 의미”는 바로 “단일신론”, “종속론”, “양태론”의 거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점을 바르트는 우선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성경의 증언에 따라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세 가지 고유한 존재방식(Seinsweisen)으로,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로 서로 구별된 채 현존해 계시는(bestehenden)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Herr)이시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적 자아(Ich)에게로 다가오고 계시는 당신이시고, 자신을 해소될 수 없는 주체(Subjekt)로 인간적 자아에 자신을 묶고 있는 당신이시다. 그리고 인간적 자아에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하나님으로 계시(offenbar)되고 있는 당신(Du)이시다”(367).
이 명제에서 우리는 우선 먼저, 바르트가 “삼위성 안에 있는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ei|" qeov")”(참고. 고전 12:4f; 엡 4:4f)(368/451)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교회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들, 곧 “신성(deitas oder divinitas), 신적 본체(oujsiva), essentia, natura, 혹은 substantia”은, 하나님의 존재는 “신적 존재(gottliches Sein)”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은 곧 하나님의 신성(Gottheit)”(369/452)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삼중적 신성(dreifache Gottheit)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369/452), 오히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반복해서 불려지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란 말은, 세 “인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동일본질성(Wesengleichheit, oJmoousiva, consubstantia-litas)”(370/454)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삼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바르트에게 있어서 “일체성 안에 있는 삼위성”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가지 “존재 양식(drei Seinsweisen)”(374,379/459,465)이다. 왜냐하면 그는 삼위성을, 서방교회의 “인격(provswpon)” 개념이나, 동방교회의 “위격(uJpovstasi")” 개념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존재양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가지 존재 양식 속에서 한 분 하나님이란, 한 분 하나님은, 곧 한 분 주님, 하나의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곧 단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 아버지의 방식으로, 혹은 아들의 방식으로 그리고 혹은 성령의 방식으로 존재한다”(379/ 465f)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가지 신적 속성으로, 혹은 신적 본능의 세 가지 부분으로, 혹은 신적 본질이나 사역(使役)의 세 가지 분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한 분 하나님의 삼위성(Dreiheit)은, 우리가 성서적 계시개념을 분석하는데서 얻은 것과 같이, 말하자면 계시, 계시자 그리고 계시존재의 삼위성과 같은 것, 곧 하나님의 거룩성과 자비와 사랑의 삼위성, 혹은 성금요일과 부활절과 오순절의 삼위성, 혹은 창조주 하나님과 화해자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의 삼위성과 같은 것이다”(381/468f). 이렇듯 삼위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여전히 말씀의 세 가지 양태에 상응하게, 다시 말해서 말씀 계시의 삼중성에 상응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삼중적, 혹은 삼위일체론적 사고는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해석학적 특성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한 분 하나님(ei|" qeov")” 사상과 세 가지 존재양식으로서의 “삼위성”을 종합하여 “삼위일체성(Dreieinigkeit)”에 관하여 언급한다. 우선 그가 이렇게 “삼위일체성”이란 개념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한 분 하나님”과 세 가지 “존재양식”의 모순을 터툴리안(Tertullian)의 구원의 “경륜의 신비(oikonomiae sacramentum)”(389/478) 개념의 도움으로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위상(statu)에서가 아니라 단계(gradu)에서, 실체(substantia)에서가 아니라, 형식(forma)에서, 능력(potestate)에서가 아니라, 형상(specie)에서) 세 분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의 실체(unius substantiae), 하나의 위(位, unius status), 하나의 능력(unius potestatis)을 가진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Tertullian, Adv, Prax. 2)(389/478). 계속해서 바르트는, 칼뱅도 나지안의 그레고리(Gregor von Nazianz)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여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는 세 분에게서 조명되지 않고는, 한 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으며, 한 분에게로 되돌아가지 않고는 세 분을 구별할 수 없다.”(Calvin, Instit. I, 13, 17) 이렇게 그는 “삼위일체성”을 “삼위에서의 유일성(unitas in trinitatae)과 유일성에서의 삼위(trinitas in unitate)”로 주장하고 있다(391/480)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바르트는 한 분 하나님의 경륜적 구원 역사에 나타난 계시개념으로 답변한다. 즉 “하나님의 사역은, 계시자, 계시 그 자체 그리고 계시존재, 혹은 창조주, 화해자, 구원자이신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다”(391/480). 그런데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이 동일본질을 가지게 되는 것은, “세 존재 양식들은 상호 ‘내적으로 실존하며(inexistieren)’, 곧 ‘상호 내주(內住 circuminsessio = Ineinander wohnen)’ 혹은 ‘상호 실존(inexistentia)’하면서 영원부터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390/479).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세 존재 양식들의 상호 내주와 공존은 아주 정확하게 하나님의 사역 속에 있는 상호 내주와 공존에 상응한다.”(395/484)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파악해야 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세 가지 모든 존재양식 속에서 동시에 그리고 공동으로 행하여진 행동이다”(395/484).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오직 “전유속성을 통해서(per appropriationem)”만 일어날 수 있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이제 끝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의미”는, 비록 삼위일체란 교리나 교설이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삼위일체론은 그 나름대로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된 성서의 본문에 대한 주석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진정성 여부는 질문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생성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해 보면, 삼위일체론은 성서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기 위해서 애써 노력해 온 것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의 사역과 관계된 삼위일체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하는 성서의 증언에 위배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특별히 삼위일체론은 교회사에서 생성된 그릇된 교설, 곧 종속론과 양태론과 같은 이단 교리들을 배척하고 정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사도신경이 처음부터 고백해 왔던 교회의 가르침이자, 동시에 세 번씩 상이하게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성서의 증언에 적합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종속론은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 아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분 하나님”(402/492)이라고 가르친다. “성서가 증언하듯이, 그 분이 계시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존재, 언설 그리고 행동하심이 어떠한 방식이든, 그 분은 주님(Herr)이시라는 것이다”(402/492).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을 거부하는 것은, 양태론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계시하는 한 양태(Modus)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세 번의 매 순간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결코 다르지 않다”(402/493).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은 단순한 양태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이 되신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어떤 점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존재 양식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고, 유일하신 바로 그 주님이시기 때문이다”(403/494). 이러한 주님께서 우리들의 하나님으로 만나시고, 관계를 맺고 계신다.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가지 존재양식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관계를 맺고 계시기에, 그 분은 창조, 화해 그리고 구원의 사역에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행동하신다(403/494).
삼위일체 되신 한 분 하나님의 첫 번째 존재 양식은 “쪮쪮 10. 하나님 아버지(Gott der Vater)”의 존재양식이다. 그는 자신을 만물의 창조주로 계시하시며,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자, 동시에 우리들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이 점을 바르트는 다음의 명제에서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은,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을 창조자로 계시하신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 현존재(Dasein)의 주님으로 계시하신다. 그분은 그러한 하나님으로서 우리들의 아버지이시다.왜냐하면 그분은 그 분 만세 전부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들의 하나님 아버지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404/495).
“창조주 하나님”(404/495)이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의 행하신 첫 번째 사역이 ‘창조’라는 것이다.1
이 말은 창조주 하나님이 따로 있고, 구원자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되시는 한 분 하나님이 첫 번째 행하신 사역이 창조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 아들의 아버지이시자, 동시에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아버지”(411/502)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현존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창조주 하나님, 곧 구약의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려졌기 때문이다(막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바로 만세 전 하나님 품안에 있던 자로서, 우리와 똑같은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는 분이시다(요17:3)(406/496). 따라서 우리들의 실존은 곧 아들의 실존이고, 아들의 실존은 우리 현존재의 실존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 존재 자체로 보면, 성자의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영원한 아들 성자에 대하여 갖는 관계에 유비적 관계가 있지만, 전자는 후자에 종속된다(418/510). 결론적으로 구약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주님으로 호칭되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성자)도 주님으로 호칭되고 있지만, 창조는 하나님 아버지만의 고유한 속성(proprium)이기에, 우리와 성자의 아버지를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삼위일체 되신 한 분 하나님의 두 번째 존재 양식은 “쪮쪮 11. 하나님 아들(Gott der Sohn)”(419ff/512ff) 양식이며, 한 분 하나님의 두 번째 존재양식인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주된 역사(役事)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및 피조물 사이에 균열된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사역이다:
“한 분 하나님은,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을 화해자(Versohner)로 계시하신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대항하는 대적(Feindschaft) 한 가운데 계신 주님(Herr)으로 계시하신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오신 아들이신 바로 그분이시고, 혹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다.왜냐하면 그분은 만세 전부터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혹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419).
이 명제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이 화해자(Gott als Versohner)”라는 것은,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의 두 번째 존재양식인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붙여진 호칭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 분 하나님의 첫 번째 사역이 ‘창조’사역이라면, 한 분 하나님의 두 번째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사역이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한 속성이듯이, ‘화해’는 하나님 아들의 고유한 속성이다.2
어떻게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는 앞 단락에서 행한 것과 같이, 이 단란에서도 ‘하나님 아들’의 계시론적 해명, 곧 기독론적 해명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그는,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Was)”을 그리고 “어떻게(Wie)” 우리에게 계시하셨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419/513). 우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에게 붙여진 칭호는, 그가 행한 사역에 상응하게 붙여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창조주 야훼 하나님이 “주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주-이름(Kyrios-Name)으로 호칭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시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을 인용한다(420~422/543~516). 특히 그는, 요한 복음(특히 서론 요 1:1~18, 이 밖에 요 5:58; 계 22:13; 1요 1:1 등)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말씀임을 강조한다(421/515).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창조주이지만(고전 8:6)(422/51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영원한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로서”(426/521)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삼위일체되시는 한 분 하나님의 세 번째 존재 양식인 “쪮쪮 12. 하나님 성령(Gott der heilige Geist)”(470ff/574ff)에 대하여 말한다:
“한 분 하나님은,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을 구원자(Erloser)로서 계시하신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Herr)로 계시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러한 이러한 성령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세 전부터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Gottes des Vaters)와 하나님 아들(Gottes des Sohnes)의 사랑(Liebe)의 영(Geist)으로 계시는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이다”(470).
이 명제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구원자 하나님(Gott als Erloser)”이란, 삼위일체되신 한 분 하나님의 세 번째 사역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점을 논증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어떻게 하나님 성령이 구원자로 고백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그는 이미 앞 단락(쪮쪮 11)에서 기술하였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계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화해’로서 온 인류에게 구원이 온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구원’은, 계시나 화해의 차원에서 볼 때,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에 완성되어질 하나님의 행위”(430/525)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화해사건은 하나님 성령에 의해서 종말에 완성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 곧 화해사건에 인격적으로 참여하도록 보증해 준다.(475/581). 그래서 오직 “성령 안에서만” 화해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인식과 순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478/584)는 이 사실에서 구원자 하나님은 “영원한 영”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처럼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새 생명을 창조하고, 화해자 하나님처럼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이 삼위일체 되신 한 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그 영은 창조주 하나님과 화해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별개의 일을 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원자 하나님의 영원한 영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하나님 자신”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482/589) 이러한 근거에서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에게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발출(Ausgang, procession, ejkpovreusi")”(498/609) - genitum non factum - 되었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르트는 서방교회 전통인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도 또한(ex Patre filioque)”(500/612)를 수용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론에서 출발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정립한다. 즉 그는 창조주, 화해자, 구원자 하나님을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이 세 번 자신을 계시하신 분으로 이해하고, 이에 기초하여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논증하고 있다. 즉 경륜적 혹은 구원사적 과정에서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은 자기 계시 과정 속에서 세 가지 존재양식을 취하게 되고, 한 분 하나님은 동시에 서로 구별된 그러나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사역, 곧 창조, 화해, 구원 사역을 행하신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결코 단지 경륜적 삼위일체론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 분이며, 단지 구원의 경륜과정에서 창조주, 화해자, 구원자 하나님의 3 가지 존재 양식을 취한 것임을 강조한다.
김재진 |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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