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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삼위일체의 위격 개념 이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assumption의 중요성

삼위일체의 위격 개념 이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assumption의 중요성


노승수 목사


삼위일체의 논의가 기독론까지 전개되었지만 위격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는 불가피 해보입니다. 벌콥의 조직신학 신론은 하나님의 실유, 하나님의 속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작정, 섭리, 구속)등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 중에서도 실유(Being)을 다루면서 삼위일체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셔서 보셔야 합니다. 제 말은 실유 즉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관한 이야기와 위격에 대해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이야기 할 때, 그 속성을 말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속성은 바로 simplicity 순일성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나뉠 수 없는 단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에 관한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일반적이며 보편적 이해입니다. 
사람의 존재 역시 그 구성을 말할 때, 신적 단일성과 다르게<몸과 영혼>이라는 두가지 구성으로 말합니다. 물론 리(위트리스 리)나 니(워치만 니)는 다르게 말하겠지만 전통적으로<몸과 영혼>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되시면서, 몸과 영혼만 취하셨지, 사람으로서 인격은 취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이 정통 교리와 반대되는게 잘 아시는대로 네스토리우스가 말한 두 인격에 두 품성 교리입니다. 그럼 왜? 그리스도는 사람의 인격을 취하지 않으셨음에도 온전한 사람인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몸과 영혼만 있는게 아니라 인격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참 사람이라면, 당연 사람으로서의 인격도 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이 교리 즉, 두 인격 두 품성 교리가 왜 이단일까요? 한 번 생각해보셨습니까? 두 인격 두 품성이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로 불충분해집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유는 아시는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가 되시기 위해서 참 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질문해봅시다. 사람이 몸과 영혼 그리고 인격으로서 사람이라면, 어떤 교부가 말한 것처럼 취하여지지 않은 것은 구원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인격은 취하지 않으셨음으로 우리는 몸과 영혼만 구원받고 인격은 구원받지 못합니까? ^^ 흥미롭지요? 다시 삼위일체로 돌아가서요. 왜 벌콥이나 기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곧 실유를 말할 때 삼위를 말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독론에선 왜 그리스도의 인성의 취하심을 말할 때 인격이 없는(anhypostasis) 몸과 영혼을 취함만으로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이는 위격(hypostasis) 개념이 존재/본질/실유에 관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존재/실유에서 다루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들에서도 다루지 않고 이런 존재와 그 속성들을 다 다루고 난 다음, 다른 쳅터에서 다루고 있으며 보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인성을 취하실 때,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영혼과 몸을 온전히 다 취하셨기 때문에 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인격 역시 존재의 개념에 포함된다면, 씨릴이 틀렸고 네스토리우스가 맞는 것이 됩니다. 즉, 한 인격 두 품성은 틀렸고 두 인격 두 품성은 맞는 것이 된다 이 뜻입니다. 그럴리가 없지요... 하나님이 교회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게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응당 한 인격 두 품성 교리가 정통 교리고 우리는 그것을 변론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럼 도대체 이 위격은 어떤 개념이냐? 현대적 언어로 옮기면, 완전히 일치한다고 하긴 어렵지만<의식적 주체>내지<현상학적 주체>개념입니다. 이를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체라는 말의 뉘앙스 때문에 자꾸 존재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분명 존재에 관한 개념이 아닙니다. 리의 삼일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상호내주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개념 자체가 존재에 대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리의 이런 주장은 뭐와 비슷하냐면,<풀만먹는 최상위 포식자>라는 말과 흡사합니다. 개념적으로 서로 합치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의식적 주체로서 위격이 서로간에 주체 안에 따른 주체가 내주한다? 심히도 불경한 말이지만 하나님을 마치 정신분열환자와 같이 만드는 망언 인 것입니다. 이는 절대 성립이 안됩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의 두 인격 두 품성 교리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사람의 인격도 취했다면, 그가 취한 것은 그냥 사람이고 그를 배후에서 조정하시는 하나님으로 마치 줄달린 인형을 조정하는 것처럼 그런 형국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한 본질 즉 한 존재이며 이 존재의 가장 궁극적 속성은 순일성(simplicity)여서 나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구별되는 실체로서, 의식적 주체 곧 세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적 주체 안에 또 다시 존재론적으로 다른 의식적 주체가 내주한다? 동방교회가 히포스타시스를 말할 때는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방교회의 persona가 마치 한 의식적 실체의 다른 여러 가면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의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은 존재론적<상호 내주>가 아니라 인격적 연합으로서<끊어질 수 없는 상호 교제>이며, 페리코레시스는 원래의 뜻인 춤으로서<윤무>개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라는 표현은 존재론적으로 읽으면 안되고 인격적 개념으로 읽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주의 점, 
1. 여섯 가지 부정
1.1. 삼위는 본질에 있어서는 구분이 안 된다.
1.2.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의 세 “부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1.3. 삼위는 동일한 존재자의 단지 다른 이름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1.4. 삼위는 동일한 하나님의 세 가지 연속적 존재 양식이 아니다. (양태론 거부)
1.5. 삼위는 외적인 사역으로는 구분되지는 않는다.
-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삼위가 공동으로 참여하신다.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구분 되지 않는다(Opera ad extra indivisa sunt).
1.6. 삼위는 시간적 우선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 예를 들어 성자가 성부보다 늦게 생겨났다는 견해는 잘못 된 것이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없던 때가 있었다(there was when the Son does not exist)”라고 했다. 이런 견해는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2. 세 가지 긍정
2.1. 삼위 하나님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이시다.
2.2.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셨다.
2.3.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
Tarmo Toom, Classical Trinitarian Theology, 22-30에서 
"person은 어원론적으로 봤을때 라틴어 페르소나에서 유래했는데 그것은 “을 통하여”라는 페르와 “말하다“는 소나가 합쳐진 말로서 로마의 배우가 연극할 때 쓰고서 말하는 가면과 그 배우가 묘사하는 구체적인 인물을 뜻한다. 그 단어 자체가 니케아 신조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어를 사용한데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터툴리안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단어는 한 하나님안에 계시는 세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각각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시는 세분을 하나의 신적본질과 구분하기 위해서 마침내 교회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문맥에서 위격을 하나의 의식하는 자아 다시 말해서 자기 의식의 중심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안에 참되고 구별된 자의식적 자아들로 존재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
레이몬드 최신 조직신학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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