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근본적 의미
노승수 목사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언을 받은 것이다.』(롬 3:21, 바른)
많은 분들이 율법을 그냥 하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이 폐하여 질 수 없고 중생한 성도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히 위에 인용한 로마서 3:21을 곰곰히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절은 로마서 3장의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하나님의 의>라는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시길 바라는 바는 뭐냐면, 바로 21절이 함의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 일이<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첫째 함의요 둘째는 율법 자체도 바로<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밖에, 율법 외에,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원래는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의의 반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바로 행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우리의 관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계시적 형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한동안 한국과 미국을 뜨겁게 달구던 본인 스스로 세대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존 맥아더 목사가 세대주의자들에게 제기했던 Lordship salvation입니다. 최근<김성수 목사 신학 알아보기>코너에 오르는 여러 건들의 글은 이런 신학적 혼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소위 세대주의적 성경관과 구원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구원이란게, 그리스도가 이미 다 하셨음으로 우리는 할 것이 없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주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는 savior로만 모시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첫번째 주장이고 이 주장의 배후에는 세대주의의 언약관이 있는데, 바로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보고 복음이 도래함으로 율법을 폐기되고 복음을 믿으면 그의 성품적 혹은 도덕적 변화라는 열매와 상관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두번째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율법에서부터의 자유는 율법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됨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혀둡니다. 사실 이 주장은 그 어떤 이단보다도 더 우리를 병들게 하는 영적 암입니다. 위의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율법과 복음은 별개가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연속성을 가집니다. 또 한가지 이 이론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이 좌충우돌하시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율법을 주셨다가 안되니까? 하는 수 없이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주신 것으로 그려진다는 것이고 더 결정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하나님의 의를 반영하는 율법에 대한 무지입니다. 신자가 구원된다는 것은 죄 문제가 해결되고 여전히 죄인으로 남는데 있지 않고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의인이 되는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하나님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이해할 때,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걸맞는 행동인<하나님의 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3절을 보면,<우리가 죄인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이 이어져 나옵니다.<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하다가<죄인>과<하나님의 영광>으로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의인>에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죄인>이고 앞서 설명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바로<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행위로 드러날 때, 그것을<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영광>이란 개념도 정돈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얼마전 신보람씨가 모 시상식에서<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한 것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매우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개념의 영광을 생각할 때, 사실 그 말은 그 자리에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영광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특별히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겠습니까? 바로<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신구약 전체의 메시지를 두 단어로 요약하면, 영광과 구원이 되고 다시 신론적 입장에서 요약하면, 영광이 되고, 구원론적 입장에서 요약하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 예를 통해서 영광에 대해 알아 봅시다. 특별히 예수님과 관계해서, 몇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3-24, 바른)
『[30] 유다가 그 빵 조각을 받고 바로 나갔는데, 밤이었다.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32]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도 자신 안에서 그를 영광스럽게 하시되, 즉시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 13:30-32, 바른)
이 두 구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의 때는 바로 십자가를 지실 때를 가리킵니다. 아시는대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치욕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자신이 영광을 받을 자리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소요리 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강조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란 세상에서 출세가도에 오르고 입신양명하여 이름을 빛냄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가 구원에 더 가까워지는 자리에 설 때,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영광이요, 사람편에서는 구원이 되며, 그것이 바로 로마서 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바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영광이 하나님의 의로 드러났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시고 그를 힘입어 우리의 죄를 간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3장 23-25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 바로 이 일이 오늘 인용한 말씀을 보니까?<율법과 선지자의 증언>을 받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 이렇게 구분하는 구분지는 잘못된 구분입니다. 구약 역시 복음으로 가득합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과 그 의로우심을 폐하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율법이 폐하여지겠습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 통치요, 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그 의를 반영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교의 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을 나타내는 여러 말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를 묶어서 구원이라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칭의와 성화>이 두 가지입니다. 칭의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요. 성화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우리가 칭의를 받는데 우리의 칭의가 참되게 그리스도께서 인치신 바로 그것이라면 신자는 반드시 성화에 이르게 되고 성화란 바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는 일이 그 삶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미 여러차례 다른 글들을 통해서 율법의 세 가지 용도에 대해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용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용도, 그리고 거룩함의 준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으로 죄를 깨닫는가? 율법으로 깨닫습니다. 그럼 신자가 무엇으로 자신이 거룩해지고 있음을 깨달으며, 무엇으로 아이가 자랄 때, 그 키와 지혜가 자라는 것을 부모가 눈으로 보고 잽니까? 벽에다 키재기 판을 붙이고 아이가 얼마나 자라가는가를 확인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거룩에 이르렀는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와 같습니다.
신자가 율법이 쓸모없다고 버리고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지를 깨달으며, 신자를 거룩해 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율법의 표지가 없이 어찌 깨닫고 자신이 가는 걸음을 확신하고 힘입게 거룩함을 좇아 가겠습니까? 신자가 자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율법을 저버리거나 율법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즉, 복음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팔이 짧아져서 형벌은 없애는데,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은 없애지 못하는 그런 구원은 세상에 없으며 그런 하나님은 전능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섬기는 하나님은 바로 이 율법에 복음의 정수를 계시하셨으며 복음이신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을 율법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이상적인 어떤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적 의미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며 신자는 그와 같은 삶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율법속에 나타난 복음에 대해서는 율법과 성전이란 주제로 다시 정리를 한 번 하겠습니다. 미력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사하며... 모든 이에게 주의 은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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