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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구약신학

선지자와 설교자 : 이사야

선지자와 설교자 : 이사야
김성수(합신 구약신학 교수)
1. 설교란 무엇인가?
제목 자체가 설교를 강조하는 만큼 우선 설교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설교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고전 2:1-5은 우선 설교의 내용에 대해 "하나님의 비밀"( ; 토 뮈스테리온 투 데우), 즉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4절에서는 설교의 능력에 대해 말하기를 설교의 능력은 설득력 있는, 이성에 호소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하심에 있다고 말한다. 즉 설교로 하여금 하나의 말에 그치지 않게 하고 효력있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께서 설교 능력의 원천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Luther 역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과 만나시는 만남은 오직 한 곳, 즉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현림하시고(gegenw rtig) 알려지신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안에 주어졌고(ist ergangen in den Schriften) 교회의 선포의 말씀 즉 설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그러나 특히 말씀의 사역자가 그에게 위임된 회중을 향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외치는 말(Zuspruch)을 통해 항상 주어진다(ergeht st ndig). 이처럼 교회의 선포, 즉 설교는 성경말씀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나 동시에 성경말씀은 "오늘의 살아있는 선포", 즉 "입으로 외치는 외침"(das m ndliche Geschrei)을 동반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경말씀과 "입으로 외치는 외침"은 둘 다 외부적 말씀( u erliches Wort)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리를 외부적 말씀을 통해 선포되게 하시며 듣게 하실 뿐 아니라 "마음 속", 심령 속으로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외부적으로만 아니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게 하시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또한 외부적 말씀과 내적 말씀하심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성령께서는 말씀없이는 말하지 않으시며, 말씀을 통해,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Der geist redet nicht ohne das Wort; der geist redet durch das Wort, in Worte).
이상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설교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하되 이 말씀이 특정대상, 즉 특정한 청중을 향해 선포되는 말씀이기에 "오늘의 살아있는 말씀 선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포되는 말씀으로 하여금 효력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2. 선지자와 설교자
"이사야의 신학과 설교"라고 하는 제목에서 우리가 일단 멈칫하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Calvin의 신학, Barth의 신학이란 말을 할 때와 같은 의미의 "신학"이란 표현을 이사야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과연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외치는 설교와 동일한 의미를 이사야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에게 매우 거슬리는 뉘앙스를 가진 "신학"이란 표현은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대로의 "설교"란 말을 이사야에게 작용시킬 수 있는지 일단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의 설교자와 선지자 이사야 사이에는 여러가지, 때로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넓은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설교자와 선지자 사이에는 공통점들이 발견된다. 선지자와 설교자는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특정 대상에게 선포하되 이 과정에 성령께서 개입하신다. 즉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이 경우에 있어서도 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지자의 경우 특히 그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된 경우에 선지자는 설교자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전달받은 자로서의 위치가 부각되며 그의 메시지는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절대적 규범인 "계시"로서의 지위를 갖게되며,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남음으로써 선지자 당시의 특정한 대상에게만 적용 가능한 계시가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다음 세대에 적용이 되며 의미가 있는 계시가 된다. 성령의 사역이란 관점에서 볼 때고 그가 얼마나 능력있는 설교자였는가 보다는 그가 계시를 받은 자로서 무오하게 계시를 전달받도록 성령께서 개입하셨는가? 말하자면 계시 과정에 개입하신 성령의 사역 즉 영감에 더 큰 강조점이 주어지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의 경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전달받아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계시에서 출발하며 그의 설교는 기록된 계시인 성경에 근거를 두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선지자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 대상의 차이일 것이다. 설교자의 대상은 옛 선지자들이 외쳐야 했던 당시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는 그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 내지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도 다르다. 즉 과거의 특정한 대상이 아니요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 대상도 아니요 오직 오늘 살아있는 존재들로서 우리와 만나는 구체적인 오늘의 청중들이다. 설교는 바로 이 살아있는 대상의 생생한 삶의 상황과 직결되는 "오늘의 살아있는 선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된 계시인 성경에서 출발하여 이것을 근거로 삼는 설교가 오늘의 살아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직결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넓은 의미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석은 좁은 의미에서의 "해석" 즉 석의와는 구별된다. 석의는 성경 본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루며 따라서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하던 당시 청중과 상황에 대해 갖는 의미 내지 오고 오는 세대의 일반적 대상에게 갖는 의미를 취급한다. 그러나 설교는 오늘의 살아있는 대상 그리고 그들의 구체적 삶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야 하므로 석의만으로는 부족하며 이 석의를 바탕으로 오늘의 상황과 연결짓는 작업, 넓은 의미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성령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도 계시 과정에 개입된 성령의 역사, 즉 영감이 강조되는 선지자의 경우와는 달리 설교자의 경우는 - 물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조명을 통해 성경 해석 과정에 성령께서 전체적으로 개입하시며 또한 설교에 있어서 바른 성경 이해가 필수적 전제이지만 - 하나님 말씀을 오늘의 청중의 구체적 삶 속에 얼마나 능력있게 선포하느냐도 크게 강조된다.
그러나 계시는 이미 주어진 것이므로 설교자의 범위를 벗어난 문제요 또한 우리의 설교로 하여금 능력있게 선포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 역시 학문적 논의 대상으로서는 부적합한 점이 있음을 감안할 때 결국 남게되는 것은 성경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에 있어서의 성경 해석은 주경신학자의 성경 해석, 즉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끝나는 석의와는 달리 수 세기, 수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구체적 청중의 삶과 연결시켜야 하는 과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이 복잡한 문제는 설교학이 전문이 아닌 필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터이라 문제 제기만으로 그치기로 하며 다만 두어가지 원칙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⑴ 구속사적 상황 변화에 대한 고려
성경은 어떤 원리체계를 제시한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변화를 전제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취급하신 역사 가운데서 많은 변화가 있어 왔다. 구약 이스라엘이 지켜야 했던 제사와 할례와 같은 의식은 신약에 와서 폐지되었으며, 순종이 한 때는 즉 아담에게 있어서는 영생을 얻는 방편이었으나 타락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이 가능해졌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말하자면 시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로서 이와같은 많은 변화가 일어난 역사 상에서 한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다른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오늘 우리에게 또는 다른 시대에 적용하려고 할 때는 그 어간에 일어난 역사적 변화,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급하시는 원리와 방법에 초래된 변화를 - 왜냐하면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 고려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⑵ 불변의 동질적 요소
성경에 제시하는 역사에는 이처럼 많은 변화와 굴곡이 있으나 동시에 이 전체 역사를 꿰뚫고 흐르는 일관된 흐름, 동질적 요소, 불변의 흐름이 있음을 성경은 동시에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나 노아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 우리의 가슴에 직접 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장소에 따라 변하며 모습을 달리하는 것 같으나 근본적인 동질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수 천년 전의 선지자의 설교와 사도들의 설교가 오늘도 우리 마음을 찌르며, 수 세기 전의 개혁자들의 설교와 한 세대 전의 한국 초대교회 목사님들의 설교가 오늘의 청중에도 변함없이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루기 위해 과거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의 근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역사적 연속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주터 종말까지 하나의 연결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어서 그 역사 속에 끌어들여진 나에게 있어서는 과거 아브라함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 - 내가 그 역사의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 가 된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가 나에게 의미있을 수 있고 과거에만 적용 가능한 역사 의미가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10:11; 롬 5:4 등의 말씀은 이러한 순전한 역사적 관련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깊은 근거에 대해 말하기를 이전의 일들, 과거의 역사는 (튀피코스)하게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다. 의 정확한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의 역사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뛰어넘어 후세대를 의식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선 역사의 의미가 단회적 의미로 특정 역사 상황과 더불어 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후세대에 대해서도 지속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이것이 가능하려면 역사의 시종을 주관하시며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즉 역사를 계획하시고 시행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하여야 함을 암시한다. 이처럼 역사의 궁극적 의미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두는, 달리 표현한다면 과거와 현재간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객관적-실제적 연결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해석은 역사의 궁극적 주체를 인간으로 보며 그의 참여적 관심에 의해 역사의 의미가 창출된다고 보는 실존주의적 해석의 극단적 주관주의와는 구별된다.
여하튼 오늘의 구체적 상황 속으로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를 관통하여 수 세기, 여러 세대의 시간의 벽을 넘어 오늘의상황에 말씀하는 이 동질적(同質的) 내지 typical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주는 예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향해서도 적용이 되는 것은 인간이 처한 근본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