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신학/구약신학

우리의 친구 시편에 나오는 원수

우리의 친구 시편에 나오는 원수
우병훈 목사
시편을 읽으면 마음이 강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와 찬송을 모아놓았습니다. 그러니만큼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시편은 내 속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내 영혼의 거울이자 내 삶의 일기입니다. 시편은 우리 편이며, 우리의 친구입니다. 시편을 읽으면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 이 이유 때문입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우리의 친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정말 비슷하고 나와 처지가 같은 사람을 우리는 시편에서 만납니다. 거기서 동지 의식이 생겨납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하는 이가 세상에 또 있구나. 시편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공감을 일으키는 성경입니다.
악한 자들을 저주하고, 그들의 죽음과 심판을 바라는 기도도 이런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사람, 나의 원수와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한번쯤은,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을지라도, ‘저 인간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저 인간을 콱 죽여버릴까 보다.’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나도 모르는 사이 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런 살인 충동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만일 “살인하지 말지니라” 대신에 “오직 한 사람만 살인할지니라”고 하셨더라면, 지구상에 인간은 오래 전에 다 죽고 말았을 것이라는 어떤 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 감정과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편도 역시 이런 “살인을 바라는 표현들”을 담고 있습니다. 원수를 향한 적대감이 그를 향한 지극한 분노와 살인 충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시편은 정말 우리와 똑 같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해야 할 것은 시편은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시인들은 자기가 원수를 죽이고 싶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 그것조차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저 원수를 죽이겠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 원수를 죽여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종적 판단, 마지막 의사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나의 지극한 적대감마저 하나님께 갖다 놓음으로써 거기서 해결되도록 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악한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놓는 것, 우리의 가장 강렬한 감정인 살인 충동마저도 하나님 앞으로 던져 버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친구 시편이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럼 “살인을 청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했다고 해서 다 들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바대로 항상 다 들어주셨더라면 세상은 오래 전에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도들의 말에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성도들의 말이 그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권세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3:1, 유 5). 혹시나 세상 일이 우리의 말대로 이뤄졌다고 해도, 그건 우리 말이 가진 권세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하나님의 뜻이 “어쩌다가” 일치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최종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당신의 뜻에 반영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드려져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일치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간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인을 청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실까요? 하나님은 이 기도 역시 다른 모든 기도와 동일하게 취급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하나님은 친히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나의 “살인 청구 기도”의 대상이 되는 “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 또한 될 적에 반드시 처단하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을 완전히 등질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인생을 건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반드시 멸망 받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의 멸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로운 정의와 진노의 무서움을 봅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는 분이심을 알기에 시편의 시인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우리가 직접 갚지 말고 친히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레 19:18, 롬 12:19, 히 10:30).
이쯤 해서 우리는,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리는 자는 나 또한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본회퍼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사람 편에 서는 것보다 항상 우위에 둘 것입니다(참고. 히 10:31; 행 4:19).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도 친구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아담의 후손들 중에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었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는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는 찬송이 자주 불려집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궁극적으로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자이며,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멸하실 원수는 바로 사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26).
그렇기에 우리는 시편을 읽을 때도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루터는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듯이, 시편의 모든 기도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며, 십자가에서조차 원수를 용서하심으로 몸소 모범을 보이셨던 주님은, 원수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시편 기도의 성취자요 완성자이십니다(마 5:43-44, 눅 23:34).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는 시편을 읽는 우리들의 마음이 더 독해지기보다는 차라리 더 순해지며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편은 그런 점에서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좋은 친구는 늘 우리 편에 서 있으면서도, 항상 우리를 한 단계 성숙시켜 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