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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단

성도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성도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노승수 목사 


설교에 변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설교자의 인격이라는 변인과 두 번째 설교 내용이라는 변인입니다. 이 두 변인으로 4가지 경우를 모델로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 설교가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과 복음을 충분히 담고 있으면서 목회자의 인격이 훌륭한 경우,

둘째, 설교가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과 복음을 충분히 담고 있으나 목회자가 인격이 악하거나 모자란 경우,

셋째, 설교가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과 복음을 담고 있지 못하나(이단 사상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 목회자의 인격이 훌륭한 경우,

넷째, 설교가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과 복음을 담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인격이 악하거나 모자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한홍 목사는 목사의 설교와 인격을 칼과 칼집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좋은 설교가는 인격적이면서도 그 칼을 잘 사용하여서 때로는 의사의 매스처럼 성도의 죄로 부패한 환부를 도려내는 데 사용하고 더러는 주방용 칼로 성도들이 먹기에 좋고 몸에도 좋은 양질의 말씀을 잘 준비하는 요리사의 칼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첫 번째의 경우는 사실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인격적 문제가 있고 그가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신자가 말씀을 듣는 방식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지 사람의 말로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듣는 구체적 정황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러분들은 죄인입니다라는 설교에는 은혜 받지만,
“OOOOO한 일은 죄입니다라고 설교할 때, OOOOO한 일이 자신에게 해당될 때는 전혀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말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설교자는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강단에서는 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사라집니다.
현대교회에서 죄는 구체적 실제가 아닌 추상적인 무언가에 불과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현대 교회에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서의 망령된 행동에서 살폈듯이 쓴 뿌리가 난 것입니다. (12:15, 개정)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이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의 대표로 에서의 망령된 행동을 들었습니다. 언약의 장자됨에 대해 망령되고 가볍게 행한 것입니다. 이 쓴 뿌리는 신명기 29:18이하의 인용이었습니다.

(29: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29: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29: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29:21)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이들은 스스로 위로하기를 원합니다. 신명기 28장의 언약의 저주를 듣고도 복을 스스로 비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Van Gemeren이란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의 언어는 너무 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복음시대이므로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설교자들에게서 선지자적 임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말은 설교가 야단일변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벤 게메렌의 오늘날 설교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Vox Populi(민중의 소리)

이것은 설교자가 민중의 소리에 영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누구나 화를 당하지 않고 복을 얻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두 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점을 치거나 주술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 두 가지 미신(superstitions)’과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선지자들은 미래에 관해 선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편으로 선지자들이 미래를 말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선지서를 대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선포 내용은 개인적인 삶의 안정과 풍요라는 빈곤한 가치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들의 언어에는 이러한 민중이 원하는 바가 너무 많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참 여호와 신앙, 참 계시종교의 소리에 청종할 때입니다. 청중은 이런 신앙을 생각하며 목사를 상처주는 설교를 한다고 압박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둘째, Realpolitik(현실정치)

이것은 목회자가 현실과 타협하는 내용의 정치(목회)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지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심과 여호와를 향한 신뢰보다는 강대국과 연합해서 현실을 해결하는 시도를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역사 속에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싹이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삶 속에도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목회자들에게 적용하면 다른 말로 목회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의 목회제반활동 속에 이 원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는 목사들이 신자들의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 무언가 될 것 같은 의식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교인들에게 적용되었을 때, 거기에는 심각한 이원론적 삶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교회에서 신앙적인 것과 사회에서 신앙적인 것에 대한 통합된 이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공로적이며 사회생활은 이기적입니다. 이원론적 그리스도인은 고금의 역사를 통해 한 번도 그 의식 및 행동반경이 자신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청중들은 계속해서 설교자를 민중의 소리로 압박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죄를 지적하는 것을 자신들을 공격하는 소리로 듣는 것입니다. 설교자에 인격적 문제가 있더라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종교개혁 전통에 선 신자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설교자의 인격적 문제라고 지적하는 많은 것이 사실은 지나치게 자신의 복을 빌고 평안을 얻고자하는 민중의 소리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왜 이렇게 사납고 공격적이며 서로 물어뜯기 바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대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죠. 즉 우리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손주를 오냐오냐 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버릇이 나빠질까봐 지나친 칭찬을 삼갔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과도한 칭찬과 자기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자라 조그만 불편이나 기다림도 견디지 못하고 갑질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를 좇아 살다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데 자기 미래를 알려는 점과 자기에게 미칠지 모를 화를 방액하는 주술로서 설교를 이해하는 우상숭배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사가 죄를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그것을 목사의 인격의 문제로 공격하고 자신들이 공격당한다고 느끼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세 번째 경우, , 설교가 신앙고백과 복음을 충분히 담지 못하면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경우는 두 가지 경우로 다시 나뉠 수 있습니다. 전자, 그러니까 신앙고백과 복음을 아예 못담은 이단의 경우와 목사가 말씀에 제대로 훈련되지 못해서 미숙하게 복음 이해를 지닌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단적 가르침이라면 당연히 교회를 떠나는 게 맞고 단지 미숙한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인해서 효력을 내고 역사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게다가 목사님의 성품이 훌륭하다면 설교에서 부족한 많은 부분들이 양육과 교회 안의 목회적 돌봄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의 경우, , 설교와 인격이 모두 모자란 경우는 사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목사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여러분이나 주위에 있는 분 중에 그런 환경에 처한 분이 계시다면 교회를 옮기실 것을 권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특히나 믿음이 연약하고 어린 자라면 제대로 된 말씀을 듣고 자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 불링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해서 1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2:13)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 자신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20). 그러므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10:16, 13: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합법적으로 부름 받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설교되어 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선포된다는 사실과 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믿는 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는 이 말씀 이 외에 다른 말씀을 날조해 내거나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그것을 설교한 사람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 그 설교자가 악한 사람이요,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참되고 선하다.

그러므로 참 종교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이 성령의 내적 조명에 달렸다든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31:34)"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외적 설교가 아무 소용없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필히 외적으로 설교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교역 없이 성령에 의해서 혹은 천사의 사역에 의해서 고넬료를 가르치실 수 있었다(사도행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고넬료를 베드로에게 보내사 "그가 네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리라."고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내적 조명이 외적 설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사 내적으로 조명시키는 바로 그분이 동시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고 명령형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립보에서 자주 장사인 루디아에게 말씀을 외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내적으로 열어 주셨다(16:14). 또한 동일한 바울은 그의 사상을 아름답게 전개한 다음 로마서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교역 없이도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그가 원하시는 때에 내적 조명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과 실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대로 사람들을 가르칠 때 보통 방법대로 한다.

 

저는 설교자의 인격이 칼집이며 설교가 칼이라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개인적 권한을 옹호하거나 남용을 목적으로 휘두르는 데도 반대합니다. 그런 설교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의 대부분은 청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한국 사회의 정치에 대해서 혐오감을 표현하고 가장 신뢰도 낮은 집단으로 국회를 거론하지만 그들을 형성하는 투표권자가 우리 자신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그 나라 정치는 민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앞서 민중의 소리에 대한 벤 게메렌의 지적처럼 교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있어서 설교자의 인격문제를 거론하며 진리의 말씀에 귀를 닫는 현상이 있습니다. 왜 스위스신앙고백서는 설교자가 악하고 죄인이라도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블링거가 사역하던 그 시대 중세가 그런 시대였습니다. 죄악이 횡행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민중의 소리에 영합하는 우상숭배적 교회였던 것입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자신의 미래를 위한 방액을 목적으로 면죄부를 팔고 사던 시대였습니다. 설교나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 없고 그저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권력과 욕망이 종교적 괴물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섬기시던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다른 설교를 듣게 되시던지 여러분이 해야 할 선택은 설교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고백의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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