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강단

목사와 성도는 어떤 신뢰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목사와 성도는 어떤 신뢰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딤전  5:17-23

 

노승수 목사 

 

왜 하나님께서는 직통 계시나 이상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말씀을 교역하는 목사를 통해서 그 양을 먹이시기를 기뻐하셨을까? 한번 즘 해봄직한 질문이다. 게다가 흠 없는 목자는 드물다. 물론 교단 헌법들은 목사의 조건으로 무흠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흠은 대놓고 흠이 아니라 인간관계상 발생하는 성격과 성품상 흠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흠들은 멀리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가까이 동역할 때 더 눈에 띤다. 그래서 목사 가까이 가는 것보다 인터넷에서 좋은 설교 듣고 적당히 나랑 코드 맞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헌금은 주변에 가난한 사람과 교회들에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더 나아보이기도 한다. 굳이 상처를 감수하면서 목사 가까이 가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청중의 이런 욕망은 대형교회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행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교회 생활을 권할 논리도 마득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한 교회를 정하고 거기서 그렇게 흠 있어 보이는 목사에게서 양육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스위스신앙고백서에서 블링거는 고넬료를 예로 드는데 천사나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아니라 베드로를 청해서 듣게 하셨다는 점을 든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사도들에게 교회 설립이 위탁되었고 성령의 임재도 사도의 손을 통해 이루러지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선물로 주신 것을 분명히 했다(엡 4:11-14).

 

그러면 도대체 왜 그러냐는 것이다. 오히려 무교회주의자들처럼 신령한 내적 조명이 더 나이스하지 않느냐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해답을 디모데후서에서 찾았다. 때가 이르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귀가 가려워 사욕을 좇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4:3). 이 말씀을 뒤집으면 바른 교훈을 듣지 않는 증상이 뭐로 나타 나냐면 스승이 많다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왜 선생을 많이 둘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사욕 때문에 빠져나갈 길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끔 보도를 통해 대형 로또 당첨금에도 망한 사람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들은 거액의 돈에도 왜 망할까? 왜냐하면 우리 욕망은 향방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없을 땐 참던 것들이 돈이 생기는 절제 없이 이것저것 막 하게 된다. 그러면서 씀씀이가 커지고 돈을 노리는 거머리들도 들러붙는다. 나중엔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많은 스승을 두는 게 이와 같다. 우리 마음은 결코 순전하지 않고 부패하여서 자주 그릇된 선택을 한다. 그런데 목자 없는 양은 자기 욕망을 통제할 필요가 없는 로또당첨자 같은 형국인 것이다. 그가 많은 스승을 두는 이유다. 뭐라고 변명을 해도 거기엔 자기 사욕이 밑바탕이라는 말이다. 이런 형국을 이사야가 잘 표현했는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고 말한다(사 28:13).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자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주시겠다는 의미다. 원어로 보면 마치 주술자의 주문처럼 혹은 주정뱅이의 주정처럼 들리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본문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21에 인용하면서 이를 믿지 않는 자의 표적이라고 했다. 많은 스승을 두는 행태가 바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형국으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듣고자함으로 드러난다. 그게 여기저기를 떠도는 행태로 드러난다. 그가 어떤 신앙적 베이스를 가졌는지는 상관이 없다. 이런 자세가 신자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동시에 우리가 왜 흠 많은 목자의 돌봄을 받아야 하냐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가 청산할 자인 거처럼 말씀의 교역을 한다. 그렇지 않고 그 교역이 근심이 되면 성도에게 유익이 없다. 게다가 갈라디아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권한다. 왜 이래야 할까? 우리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지 않나 적당히 감추고 숨기고 사는 게 나을 듯한 데 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할까? 스티븐 코비가 그의 책에서 자녀를 책망할 때 사랑의 잔고를 확인하라는 권면을 한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사람의 특성상 책망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자녀들이 책망을 듣고도 그 부모와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오히려 성장과 성숙을 하는 이유는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부모는 책망보다 사랑이 항상 더 잔고가 많다. 교회에서 중고등부에게 목사는 그냥 아저씨다. 그 아이들이 목사를 목사로 보는 시점이 있는데 먹을 것을 걷어 먹인 후이다. 일을 시키려면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걷어 먹여야 한다. 그렇게 관계가 형성되어야 훈계도 가능한 것이다

 

목사는 역시 위로도 많이 하지만 성도를 책망하는 책무가 있고 성도는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회개해야 하는 자리에 서 있다(살전 2:13). 근데 이게 원활히 잘 되려면 목사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이여야 한다. 그런데 가장의 자녀 양육은 부모가 물질과 사랑과 교훈을 모두 주는 자리라면 목사는 물질에서 성도들에게 기대어 있는 자리다. 디모데전서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고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직분자에게 더욱 그리하라는 말씀에 이어 나오는 것이 그들이 받는 삯의 마땅함에 관한 논증이다(5:17-21). 그래서 목사의 경우는 가정과 달리 성도 편에서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 목사와 좋은 정서적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서 권면한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는 의미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가정에서 자녀가 둘 이상이면 항상 편애의 문제가 등장한다. "왜 오빠만 챙기냐, 나는 자식이 아니냐?" 우리가 어려서 자주 부모님께 하던 투정이다. 목사 편에서 성도와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 이 일이 불편부당하게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온누리 교회에 꼭 선물을 받으면 사례를 해야 하는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답례를 하는 장면은 다른 성도들의 눈에 띤다. 이걸 본 성도들은 누구만 챙긴다. 어느 성도랑 가깝다. 이런 소문이 났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말씀 교역이 되기 힘들다. 목사는 한 명이고 성도는 많다. 이 일이 공평무사하게 되려면 목사 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편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권면한 것이다. 교역자는 편견 없이 불공평하지 않게 맡은 일을 처리할 책무가 있다(딤후 5: 21). 

 

그래야 설교에 상처를 받는 게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성도가 사욕을 좇아 스승을 많이 두거나 목사에게 자기 욕망을 투영할 때 목사는 회개의 복음 전하는 일을 할 수 없고 근심하게 되며 회중 가운데 쓴 뿌리와 저주의 경고를 듣고도 스스로 복을 빌고 자기 영혼을 평안하다 하게 된다. 오늘날 가나안 성도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정함 없이 듣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는 회개의 복음을 들을 수 없다. 우리 마음에 아픔이 되는 이 말씀이 그리 듣기 쉬운 줄 알았던가? 마치 로또 당첨자가 향방 없이 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목자와의 관계를 이리 설정하는 자는 구원에서 멀다. 괜히 터툴리안과 초대 교부들, 칼뱅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는 그 흠 많은 사도들에게 당신의 복음을 위탁하고 그들에게 교회설립을 부탁했는지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책망을 듣는 관계는 피상적이어서는 불가능하다. 길가는 학생에게 내가 목사나 복음 교사일 수 없는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기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죄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찾아오지 않고 그저 자기 양심을 기만하기 위해 오는 자가 많은 것도 이런 교회적 풍토를 확산시킨다. 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심방을 영광스런 일로 생각했다. 성도는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가 회개의 말씀을 탈 없이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성도의 이런 태도는 목사에게는 독이 된다. 오만해지고 방자해지기 좋은 요소이기도 하다. 주요 이단자들은 여기서 넘어진 자들이다. 최근에 성폭력으로 물의를 빚는 이단자를 보라. 그런 일에도 그 교회는 끄떡도 않는다. 물론 성도는 진리를 분별하면서 목사에게 정서적 신뢰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목사의 경건을 위해 내 영혼의 생명을 희생할 텐가? 높은 뜻 숭의 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동안 교회 사역할 때 이야기다. 대심방 기간이 늘 곤혹스러웠는데 30일 넘는 기간 동안 매일 기름진 음식을 대접받아야 하는 자리가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뭐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늘 "아무거나 잘 먹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주일이 못가서 집집마다 비슷한 요리가 나온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목사가 안 가르쳐주니 앞에 심방 받은 집에 뭐 잘 드시더냐고 물은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목사의 젓가락이 어디에 가는지 유심히 살핀 것이다. 과거 한국교회 성도들은 이랬다. 실제로 목사와 좋은 관계가 질적으로 더 낮고 주해나 석의가 어설픈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이 더 성숙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에 신자는 1% 내외였다. 그들은 진정 한국 사회의 빛이요 소금이었다. 그들이 더 나은 설교나 더 훌륭한 목사를 두었기 때문인가?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시대 설교와 이 시대 설교를 비교해보면 본문 이해도에서는 그 시대는 오늘 우리를 따라 올 수 없다. 실제로 오늘 우리 성도들은 더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삶은 이 모양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설교자인 내가 보기에 이유는 한 가지다. 그 시대와 이 시대의 차이점은 바로 성도들이 목사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다. 설교의 질적인 면은 훨씬 나아졌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써 목사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이런 변화를 부른 것이다

 

우리 영혼의 부패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서는 그런 안일한 신앙태도를 보일 수 없다. 인터넷에서 설교 몇 편 듣고 악어의 눈물 같은 눈물 조금 흘리고 신자 된 줄 착각 말아야 한다. 내 영혼의 심부까지 내 심장까지 뚫고 들어오는 말씀을 대면하여 서려면 목사에게 그리 말씀을 전해도 좋다고 안심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책무다. 안심은커녕 목사의 가정과 생활도 돌아보지 않아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처럼 성전 수종자들이 끼니 걱정으로 고향에서 땅을 붙이게 해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들으며 무엇을 개혁한다는 말인가? 목사의 생활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내 영혼의 유익을 위해 가까이 하고 내기 있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그것이 참되게 말씀을 듣는 성도의 자세다바울도 디모데에게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을 두려워하게 하라고 권한다. 이는 설교 중에 그렇게 하란 말이다(딤후 5:20).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부딪히지 않고 깎이는 법이 없다. 훈련 없는 군사는 전장에서 생환을 기대할 수 없으며 연습 없는 선수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죄가 그리 가벼워 보이더냐! 그럼 이미 그대 영혼이 망하고 있음의 전조다. 흠 많은 목사의 가르침이기에 그 교훈을 듣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더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경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