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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단

성도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도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 7:2-4



노승수


장로교회와 종교개혁의 신앙이 공통으로 주장하고 고백하는 인간이해의 출발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롬 3:10, 시14:1-3; 53:1-3). 이 말을 선언으로 들을 때는 대부분 동의를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 죄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은 저마다 교회에서 위로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우리 삶에 주어지지 않는다. 2주전 나누었던 내용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죄인입니다."라는 말에는 은혜를 받지만 "어떤 행동과 태도가 죄입니다."는 말에는 은혜를 받기보다 자신을 공격하는 말로 듣거나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선언은 있을지라도 현실과 실제에서 죄를 해결하고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진정한 위로로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말하는 대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 비참을 알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믿음이 있지 않고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위로로 삼을 수 없다. 지난주 들었던 대로 목사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놓여야만 성경이 우리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듣는 일이 기본으로 형성이 되면 이제 성도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주 흠이 있는 보통의 인간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깍이고 세워져 가는 기초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다루었다. 지난주 우리가 생각해본 것은 말씀이 선포되는 보통의 직원인 목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성도가 말씀을 듣는데 지장이 없을 수 있는가를 다루었다면 오늘은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 안의 다른 성도들을 향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지난주 배운 내용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오늘 배울 내용은 그 들은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도가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취해야 할 태도나 행동으로 첫번째로 말하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한다. 오늘 전도자는 우매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지혜자는 초상집에 가고 우매자는 잔치집에 간다는 의미로 읽을 수는 없다. 문맥으로보면 3절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하면서 얼굴의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초상집은 마음의 슬픔과 근심을 은유하고 잔치집은 마음의 기쁨을 은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근심과 슬픔이 오히려 유익하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면한다면 슬프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케네스 베일리1) 목사는 참된 회개란, 자기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비참과 슬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하려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이야기하듯이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이는 자기 비참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부정적 정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SNS에도 긍정적인 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당사자도 이야기하기 좋아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잘 이야기하기도 꺼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마음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가 간증을 들을 때도 성공 이야기는 환영을 받지만 실패의 이야기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혹 실패의 이야기가 있더라도 그것은 과정이어야 하고 기승전"성공"이어야 간증으로 인기가 있다. 우리는 부정적 감정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려서부터 우리는 기쁜 정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슬픔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워왔다. 예컨대, 아이가 힘들어 울 때, "울지마"라고 훈계를 한다. 자신의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인데 이것을 사회적으로 거절하는 교육환경에서 자라온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정적 정서를 스스로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회적 요인을 제하더라도 전도자는 그런 태도가 우매자의 태도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쁨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불편했던 감정들을 억누르고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로 두었다가 결국 그것이 누적되어서 관계가 망가지는 일을 흔히 본다. 우리 속담에 가랑비에 속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다. 부정적이고 사소한 감정이라고 무시한 결과는 참혹한 관계의 파괴로 되돌아 온다. 우린 서로 다르고 저마다 흠이 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다르기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내가 흠이 많아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간과하고 지나쳐 버릴 때, 또는 전도자의 말한 우매자의 태도처럼 잔치집에만 마음을 두는 태도가 관계를 망친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부정적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게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우매자의 태도라고 말한다.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기자는 자신의 상처받은 심령을 주님께 토설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죄가 되었든 악인의 횡포에 따른 상처이든 자신의 마음을 토설한다(시편 38 참조). 


둘째,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이웃의 허물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그대로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럴 때 우리가 용서로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난 주중에 일산에서 한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목사님께서 모 지역에 80명 모이는 교회에 부임해서 1500명 교회를 이루었는데 원로목사가 아들에게 세습을 하려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밀려난 친구 목사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헌신하여 교회에 삶을 바쳤는데 그렇게 교회를 떠나오고 마음의 미움이 가득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우리 마음의 부정적 감정을 방치하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결과가 이런 것이다. 결국 서로의 관계는 깨지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사슬이 된다. 시편 107:10-14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멸시가 이런 얽매임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간의 인내와 견딤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젠 그 당사자가 아니라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그의 마음을 미움이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사단의 전형적인 전술이며 전략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에도 부정적 감정을 방치한 결과 처음에는 사소하고 컨트롤 할 수 있었던 작은 감정들이 어느새 우리 삶을 장악해버려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미움은 그것을 구입하는데는 고작 100원 정도의 비용 밖에 안 들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는 매월 1000만원이 넘는 비용이 발생하는 괴물이다. 용서는 타인을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자기 영혼을 위해 하며 아버지의 자비를 기억하며 하는 것이다. 용서한다고 해서 화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가해자가 입힌 내상이 너무 깊어 그럴 수 없을 때도 존재한다. 비극은 잘 못은 상대가 하고 결과는 내 마음에 남는다는 것이다. 이 때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용서다. 용서는 보수자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그분을 진정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해드리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윤리적 삶의 첫 단추다. 모든 진정한 사랑은 용서를 실천한 자만이 맛 볼 수 있으며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신자가 늘 간구해야 할 바며 신자가 살아내야 할 삶이다. 우리는 연약해 그저 용서할 뿐이지만 그리스도는 성부의 진노를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누그러뜨리시고 진정한 화해를 선물하셨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만 이 화해에 접근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화해된 사랑의 실천자로서 신자의 첫 성품이 용서다. 원한과 미움을 품고 살지 마라. 그게 신자의 길이다.


셋째, 이런 슬픔은 그때 그때 해결해야지 상황과 감정을 키우면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때 거기가 아닌데도 부정적 감정을 무시해버린 내 마음은 그때 거기에 머물러서 지금 여기를 살 수 없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그냥 잊어버려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용서는 잊어버리는 게 아니다. 용서는 형제가 범한 죄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 감당할 수 없음을 주님께 아뢰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자라간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잔치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두어야 한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그것을 조언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고 했다. 작은 감정을 무시한 결과, 그것을 키우게 되고 결국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지며 자기 삶 전체를 지배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 관계를 손상되고 파괴되게 만든다. 이런 심리적 특성에 대해서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미움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나면 무엇도 이뻐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때 거기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혀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슬픔과 같은 부정적 감정은 일종의 신호와 같다. 우리 신체가 느끼는 고통과 같은 의미다. 예를 들어 통점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고통을 느끼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고통의 신호가 없음으로 몸은 더 고통을 받는 상황에 노출되고 만다. 예컨대, 뜨거운 것을 만지고도 뜨거운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몸은 더 큰 고통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몸의 통점은 고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위험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 우리 마음의 슬픔도 그와 같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우매자와 달리 기쁨에 더 관심을 두기보다 슬픔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용서에 대한 태도와 성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숨기고 외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해결책이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는 용서를 기본 성품과 태도로 신자의 첫걸음을 띤다. 마태복음 18장에 말해주듯이 1만 달란트(5천만 일, 136,986년의 일당)라는 천문학적이고 디폴트가 날 수밖에 없는 채무로써 죄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이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용서를 받아들인 일이 없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실이 우리가 주께 용서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넷째, 내가 느끼는 슬픔의 감정은 단지 내 감정이기만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내면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상처가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라는 성품이 기초로 놓이지 않으면 사실상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가족관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은 수많은 상처를 주고 받지만 그런 상처로 가정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물론 현대의 여러 가정들이 이런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가정의 전제는 사랑과 용서가 그 전제이다. 그래서 아이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잔고를 확인하는 부모의 양육이 결국 성장과 자람은 부모와 자녀에게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 가정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큰 죄에서 건지시고 사랑하셨는지를 이해하는 것 곧 은혜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결정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많이 사함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다(눅 7:40-43). 그래서 지혜자처럼 우리 마음은 잔치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 유비를 이해하는 자는 복이 있을지어다. 누가복음 7장이 보여주듯이 바리새인은 판단을 하고 있으나 여인은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붓고 있었다. 이 장면은 잔치집과 초상집은 대비시키는 신약의 최고의 장면이다. 한 장소에서 죄 많은 여인에게 이곳은 초상집이었고 이 판단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잔치집이었던 것이다. 높은 마음은 주님을 곁에 두고도 판단만 일삼는다. 그의 진리에 대한 판단은 정확했으나 그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죄 많은 여인의 초상집 같은 마음은 진리를 복잡한 체계로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진리이신 우리 주님을 분명히 알고 그의 장사를 준비했다. 이 부분을 팀 켈러가 그의 책 "내가 만든 신"에서 날카롭게 설명한다. “우상이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고자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이다. 교리적 진리가 거짓 신의 지위로 격상되면 종교 공동체 안에도 우상숭배가 널리 퍼진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을 그분과 은혜에 의존하기보다 교리의 정확성에 의존하면 그렇게 된다. 이는 미묘하지만 치명적인 과오다. 이런 형태의 자기정당화에 빠진 사람의 징후는 잠언이 말하는 “거만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거만한 자는 상대를 관대히 대하기보다 늘 경멸하고 멸시한다. 자신을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다. 오히려 그는 자기 견해가 옳다고 믿어 우월감에 빠진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교회는 자신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 긍정의 심리학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교회를 찾는다. 본인은 스스로 아니라고 하지만 말씀을 들을 때, 회개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사실상 긍정의 심리학을 신앙하는 우상숭배자라는 인증인 셈이다. 죄로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주님의 발을 붙들리 없지 않은가? 바리새인처럼 판단만 하고 있으니 법의 조문에 얽매여 식어버린 사랑의 외식자들이 득시글대는 것이다. 이런 신자가 절반이 넘는 교회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많은 이민교회들의 어려움도 이런 것이다. 이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교회를 커뮤니티로 알고 오는 불신자인 신자가 많고 이민 사회에서 주류에 들 수 없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10년 20년 묵은 문제가 매년 재생된다. 이민자들은 대체로 자기가 이민간 시간에 멈추어 있다. 그들에게 새로운 인간관계나 사회적 자극이 결핍이 되어 있고 이 커뮤니티로서 교회는 자기 헌 데를 핥는 터이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이런 반복을 보인다. 4월 27일에 판문점 합의가 있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의심병 환자처럼 과거를 재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은 분명 어제가 아님에도 이 일이 사회에서도 레드 컴플렉스로 반복된다. 성경은 분명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사 54:4)라고 하지만 우리는 내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라 이웃의 가해를 기억하고 되새긴다. 그런 자는 미래로 한 발짝도 옮길 수 없고 교회에 적합하지도 않다. 우리 주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사 43:19). 그 사실을 믿으라. 그것이 신앙이란 자태가 지닌 옷매무새의 마지막 자락이다. 이런 예복을 갖추지 않고 왕의 잔치에 들어 있는 것은 반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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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신약학자이자 저술가. 철학과 신학과 아랍어를 공부한 뒤, 이집트,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에서 40여 년간 교수와 선교사로 사역했다. 레바논 베이루트 근동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를 역임했고, 예루살렘 에큐메니칼신학연구소를 운영했다. 그 후 미국의 여러 유수한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활발히 감당하다가 2016년 5월 23일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중동에서 생활하고 가르친 경험은 복음서 연구에 새로운 기초를 놓았으며, 특히 비유 연구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다. 대표 저서로는 「십자가와 탕자」(킹덤북스 역간),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새물결플러스 역간), Paul Through Mediterranean Eyes(IVP,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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