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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성도의 교제를 믿다의 의미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는 통상 하이델베르크 55문의 내용과 같이 이해한다.

55문 : “성도가 서로 교통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첫째, 성도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들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각각 성도들은 자신의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 사도신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고백의 독특성 중 하나는 믿는 바 신께 대한 신앙고백 외에 그들이 속한 공동체이자 말씀을 전하는 기구인 교회에 대한 고백을 담는다는 점이다. (교회의 기구적 관점을 잘 보여주신 와타나베 노부오 목사님이 뇌졸증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이에 관해서는 노부오와 오토 베버를 참고 하라) 그런데 만약 이 교리가 그냥 "사이좋게 지내"라면 그게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째 이유, 곧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면 왜 그것을 구원론이나 기독론이 아니라 교회에 관한 고백에 담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내게도 오랜 고민이었다. 힌트는 기독론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위격적 연합"교리는 성자의 인성과 신성이 위격 안에서만 교류가 발샹한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베푸신 은택을 통해서만 성도가 교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이 이 구절을 "성인들과의 통공"으로 생각하는 국면에 대한 이해 속에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는 의미다.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그 자신과 연합한다. 이 연합은 성령의 도움으로 땅에 속한 성도를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신비이다. 즉 이 연합은 하늘의 영역이며 달리 우리 자신이 세상에 있으므로 영적 임재라고도 불린다. 하나님 나라 신학에서는 그 나라의 현재성과 그 도래이다. 데카르트 이후 계몽주의적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 성자의 통공이 지칭하는 하늘의 영역에 대한 이해를 상실하거나 피상적 이해에 머물게 됐다.

우리의 고백이 성자의 통공처럼 하늘에 있는 성인과의 교류가 아니라 허늘에 계산 그리스도와 연합합으로 그 안에서 모든 성도와 교제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택을 공동체의 지체들의 영적이며 육적 유익을 위해 공유한다는 신앙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