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성찬과 속성 교류 정리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장하던 본성 간의 직접적인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in abstracto)는 칼케돈에서 부정되었다.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지 않으시고 변화되지 않으시며 분리되지 않으시고 나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in duabus naturis inconfuse, immutabiliter, indivise, inseperabiliter agnoscendum). 따라서 성찬 논쟁에서의 속성 교류는 고대교회에서 말하는 직접 교류가 아니라 위격 안에서의 간접적인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in concreto)를 의미한다. 이 교류 방식은 다시 3가지 영역으로 설명되었다. 1. genus idiomaticum, 2. genus maiestaticum, 3. genus apotelesmaticum으로 나눌 수 있다. 즉, 1. 속성의 영역, 2. 위엄의 영역, 3. 공적 사역의 영역이다.

 

1번은 칼케돈에서 정의한 대로 한 본성의 속성들이 다른 본성의 속성이 되는 일은 없으며, Reformed와 Lutheran이 함께 인정한다. 2번이 중대한 논쟁점이 되는 영역이며 이것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루터파가 공재라고 말하는 것이 직접적인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in abstracto)가 아니며 간접적인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in concreto)에서도 1번의 속성의 영역이 아닌 채로 함께 있다는 의미다. 즉 빵의 실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인성이 신성의 편재성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거기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해 있다는 견해다. 이에 비해, 개혁파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표지인 떡과 포도주에 그 위엄이 임재해 있고 성령의 연합케 하심으로 믿음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이런 차이는 기독론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루터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장소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 이해한 반면 개혁파는 이것을 장소적으로 계신 것으로 이해했다.

 

칼뱅은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표징을 경시함으로써 신비와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는 표징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표징을 지나치게 찬양함으로써 신비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면서 표징과 실체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불링거는 우리가 성찬에서 참여 할 때, 먹음은 한 종류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1번은 육적 먹음(manducatio corporalis), 곧 주님을 육체적으로 먹는 것(corporaliter manducare dominum)과 2번은 그리스도 몸의 영적 먹음(spiritualis manducatio corporis Christi), 곧 주님을 영적으로 먹는 것(spiritualiter manducare dominum)을 말하는데 우리가 성찬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방식은 2번의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이것을 게리쉬(B. A. Gerrish)는 상징적 평행주의라고 표현했는데 표징과 실제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칼뱅이 믿음을 “영혼의 입”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것을 이중적 향유(duplex manducatio), 곧 입으로 먹는 것과 영적으로 먹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표징과 신비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위엄의 임재를 말하며 육체의 임재를 거부했다. 그 위엄이 속성 교류를 통해서 표징 가운데 함께하시며 그 표징과 신비이자 원형신학이신 그리스도를 성령께서 연합케 하시며 영혼의 입인 믿음으로 그것을 먹는 자가 그 몸에 실제로 참여케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의 승천을 상징으로 이해한 루터는 위엄의 임재를 몸이 신비롭게 떡의 실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거기 있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장소적으로 천국에 존재한다고 믿는 개혁파는 표징 중에 그리스도께서 위엄으로서 임재하시지만 그 몸은 하늘에 계시며 성령이 역사하셔서 표징에 참여하는 우리를 하늘의 성소에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케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성찬관의 차이는 기독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속성 교류의 위엄의 영역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쯔빙글리, 칼뱅과 루터가 나뉘는 것이다.

 

흔히 기념설로 알려진 것과 달리 쯔빙글리 저작에는 영적 임재를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이것이 칼뱅과 완전히 같지는 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일치를 위한 단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쯔빙글리를 계승한 불링거의 성찬이해가 칼뱅과 같은 점, 루터파 지역에서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칼뱅파의 성찬 이해를 담는다는 점은 성찬과 그리스도 이해에서 신비를 매개로 같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단초를 준다.

 

https://www.facebook.com/DoyouknowLewis/posts/219763044722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