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편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기본 구조 : 이 시편은 개인 기도시이다. 시편 전체의 약 1/4이 이런 기도시로 되어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이런 기도시편은 우리에게 난관에 부딪히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 전하여 준, '토라'이거나 그 '율법'의 해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의 메시지이거나 어찌되었던 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도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낳기 마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도에 대해, 소요리 88문, 대요리 154문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는 방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소원을 아뢰이는 수단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 곧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신적 수단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기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본 시편의 기본구조는 1절은 전체 시편의 표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2-5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 6-8까지가 '하나님으로 누리는 평안'을 그리고 있다. 5절 끝에 '의지할지어다'는 히브리 동사는 '바타흐'이고 8절 끝에 '안전히'의 히브리 명사는 '베타흐'로 두개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히브리 모음은 후대에 읽기 방법이 희미해져서, 마소라 학자들에의해서 기원후 5세기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쓰기 전통에 따르면, 같은 낱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2-5은 주로 대적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6-8은 주로 여호와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또한 시편 특유의 병행도 두드러지는데, 2절에 '인생들아...'라는 기도자의 탄식 과 6절에 '우리에게 선을...'이라는 불신자의 불평이 대조와 병행을 이룬다. 3절과 7절은 같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4-5절과 8절은 여호와를 향한 믿음과 신뢰가 나타난다.
먼저 1절을 살펴보면,
“내 의의 하나님” : 구약에서 의는 단지 ‘옳음을 변호하는 의미’ 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법정적 용어로 ‘정의’와 ‘권리’를 의미하지만 시편에서 ‘의’는 언약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언약적 관점에서 ‘의’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 본문도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본문의 상반절과 후반절은 병행인데 병행이란 같은 의미가 병행되는 경우와 대조적 병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 시행은 같은 의미의 병행이라 볼 수 있다. 후반절에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셨다는 말은 구원하셨다는 의미의 관용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의 하나님께 기도를 청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자는 자신이 언약적으로 하나님께 신실했음에 근거해서 기도를 들어주셔야 함을 탄원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기도자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의에 근거하여 기도한다.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 문자적으로는 ‘내게 공간을 만드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관용적으로 “구원하신다”는 의미1)
본 시편의 기본구조는 1절은 전체 시편의 표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2-5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 6-8까지가 '하나님으로 누리는 평안'을 그리고 있다. 5절 끝에 '의지할지어다'는 히브리 동사는 '바타흐'이고 8절 끝에 '안전히'의 히브리 명사는 '베타흐'로 두개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히브리 모음은 후대에 읽기 방법이 희미해져서, 마소라 학자들에의해서 기원후 5세기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쓰기 전통에 따르면, 같은 낱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2-5은 주로 대적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6-8은 주로 여호와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또한 시편 특유의 병행도 두드러지는데, 2절에 '인생들아...'라는 기도자의 탄식 과 6절에 '우리에게 선을...'이라는 불신자의 불평이 대조와 병행을 이룬다. 3절과 7절은 같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4-5절과 8절은 여호와를 향한 믿음과 신뢰가 나타난다.
먼저 1절을 살펴보면,
“내 의의 하나님” : 구약에서 의는 단지 ‘옳음을 변호하는 의미’ 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법정적 용어로 ‘정의’와 ‘권리’를 의미하지만 시편에서 ‘의’는 언약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언약적 관점에서 ‘의’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 본문도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본문의 상반절과 후반절은 병행인데 병행이란 같은 의미가 병행되는 경우와 대조적 병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 시행은 같은 의미의 병행이라 볼 수 있다. 후반절에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셨다는 말은 구원하셨다는 의미의 관용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의 하나님께 기도를 청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자는 자신이 언약적으로 하나님께 신실했음에 근거해서 기도를 들어주셔야 함을 탄원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기도자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의에 근거하여 기도한다.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 문자적으로는 ‘내게 공간을 만드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관용적으로 “구원하신다”는 의미1)
로 사용된다. 내용상으로 보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시제는 완료 시제이다. 이것은 기도자가 과거의 곤경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경험에 의지해서 지금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우리는 곤경에 처할 때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잊어버린다. 현재에 곤경에 함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과거를 추억하면서, 그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의의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하는 첫번째 이유였다면, 이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기도자는 이것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박윤선 박사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설했다. “이것은 나갈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넓고 평안한 데로 구원해 가신 것을 의미한다” 기도자는 어떤 종류의 곤란을 겪고 있었고, 그 곤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기도자는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고 고백하고 있다.
응답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들으소서 : 그가 너그럽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며 그러기에 다시 긍휼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응답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들으소서’는 모두 기원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기도자의 언약에 대한 확신과 그에 의해 나오는 확신에 찬 기도를 볼 수 있다. 기도자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볼 수 있다.
종합 : 다윗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과 이전에 신실하셨던 그의 삶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에 의지하여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 이 기도의 구체적 내용은 2절 이하에 두 단락으로 드러난다.
2-5 절 : 가진 자들의 불신과 기도자의 믿음과 경건
응답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들으소서 : 그가 너그럽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며 그러기에 다시 긍휼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응답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들으소서’는 모두 기원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기도자의 언약에 대한 확신과 그에 의해 나오는 확신에 찬 기도를 볼 수 있다. 기도자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볼 수 있다.
종합 : 다윗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과 이전에 신실하셨던 그의 삶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에 의지하여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 이 기도의 구체적 내용은 2절 이하에 두 단락으로 드러난다.
2-5 절 : 가진 자들의 불신과 기도자의 믿음과 경건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인생들아” : “브네-이쉬”는 애굽과 바벨론에서 가난한 자와 대조하여 권세있고, 세력 있는 소유자들을 “남자의 아들들”로 불렀다.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단어는 NIV는 “귀족”으로, 표준새번역(2001)은 “너희 높은 자들아,”로 번역한다. 시편 49:2, 62:9에서2) 이 단언가 대조적으로 잘 사용되었다. “브네-이쉬”는 높은 자로 “브네-아담”은 천한자로 사용되는 용례도 나타난다.
“인생들아” : “브네-이쉬”는 애굽과 바벨론에서 가난한 자와 대조하여 권세있고, 세력 있는 소유자들을 “남자의 아들들”로 불렀다.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단어는 NIV는 “귀족”으로, 표준새번역(2001)은 “너희 높은 자들아,”로 번역한다. 시편 49:2, 62:9에서2) 이 단언가 대조적으로 잘 사용되었다. “브네-이쉬”는 높은 자로 “브네-아담”은 천한자로 사용되는 용례도 나타난다.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 직역하면 “영광을 치욕으로”이다. 영광은 새 번역에서는 “영광의 하나님”으로 옮긴다. 다시 말해서 힘있는 자들, 권력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치욕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시편의 주요 흐름에서 볼 때, 의인과 악인의 대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의인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 곧 구원 받은 언약의 백성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믿는 자로 드러난다. 이에 반해 악인은 불신자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하나님 보다 자신의 권력을 더 의지함으로 허사와 궤휼을 일삼는 자들이다. 2절의 범죄는 권력자들의 능동적 범죄를 가리킨다.
"허사를 좋아하고..."
허사는 헛된 일이요 궤휼을 거짓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거짓된 것을 뒤쫓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새번역은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거짓 신을 섬기겠느냐?"로 옮긴다.
3절을 보면, "경건한 자를" :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경건이란 신앙의 참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경건에 이르지않는 믿음은 모두 가짜이다. 신앙이란 다른 말로 번역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이 지식은 궁극적으로 경건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경건에 대해서 1537년에 작성한 그의 요리 문답에서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두려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은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이같은 경건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급하게 어떤 신을 고안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분에게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찾으며 그분이 자신을 보여주고 선언하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보면 경건은 언약에 신실한 감정이다. 조나단 에즈워즈도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
여기에서 보면 경건은 언약에 신실한 감정이다. 조나단 에즈워즈도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
(신앙감정론)에서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인간의 성정(Pass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의 특유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지성'과 '의지'가 활기 있어지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단순한 격정적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정서(Affection)가 경건인 셈이다. 단순히 무미건조한 지식도 아니요, 지식이 결여된 맹목적 열정도 아닌 셈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를 설명할 때, "불붙는 논리"라고 말했는데, 이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적용하자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찾으시는 자는 경건한자, 곧 무미건조한 지식을 품어내는 사람도 아니요, 자기 자신의 감정에 도취해서 열광하는 열광주의자도 아니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전인적 헌신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부터 거룩한 정서가 일어나도록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으면 경건을 이룰 수 없다.
"택하신 줄 " : 여호와는 자기 이름을 명예를 위해서 언약에 신실한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 이 단어의 원어는 히브리어 '파라'3)인데, 용례 상 성경에 모두 7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모두 출애굽기와 시편에만 등장한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와 이적과 관계해서 등장한다. 시편에서 역시 하나님의 기이한 인자의 나타나심이라든지, 주의 행사의 기이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아주 놀랍고 기이하게 분리시켰다’(set apart wonderfully, marvellously)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아주 오래된 신앙 고백 형식으로 거룩하신 용사를 찬양하는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출 15:11; 34:19; 수 3:5; 시 77:14)
적용하자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찾으시는 자는 경건한자, 곧 무미건조한 지식을 품어내는 사람도 아니요, 자기 자신의 감정에 도취해서 열광하는 열광주의자도 아니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전인적 헌신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부터 거룩한 정서가 일어나도록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으면 경건을 이룰 수 없다.
"택하신 줄 " : 여호와는 자기 이름을 명예를 위해서 언약에 신실한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 이 단어의 원어는 히브리어 '파라'3)인데, 용례 상 성경에 모두 7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모두 출애굽기와 시편에만 등장한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와 이적과 관계해서 등장한다. 시편에서 역시 하나님의 기이한 인자의 나타나심이라든지, 주의 행사의 기이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아주 놀랍고 기이하게 분리시켰다’(set apart wonderfully, marvellously)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아주 오래된 신앙 고백 형식으로 거룩하신 용사를 찬양하는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출 15:11; 34:19; 수 3:5; 시 77:14)
혹은 다른 독법도 가능한데, '파라'라는 동사는 세음절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자음이 원래는 ‘헤’라는 히브리 알파벳인데, 이 '헤'는 알파벳 ‘알렙’과도 자주 혼용된다. 그래서 만약, 알렙을 써서 '파라'로 읽게 되면, '기적을 베풀다’로 옮길 수 있다. ‘게니자’ 수사본 등등의 많은 사본들에서 이렇게 옮긴다. 한글 성경 중에서는 현대어 성경이 이렇게 옮겼다. 영어성경에선 NJB이 이렇게 옮겼다. 이런 본문 수정이 아니더라도 이 단어 “파라”는 흔히 “구별하다”라는 히브리어‘카도쉬’처럼 흔히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구원의 의미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여기서 기적은 구속계시로서 이적들이 아니라 인생들의 허사와 궤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하게 섭리하심의 기적을 말한다. 예컨대 오늘날도 성도들의 병이 낫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구속 얻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하심의 결과이다. 구속계시의 종결과 특별섭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 1권 16장 7절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대한 증거”를 “메추라기가 진에 와서 덮이는” 민수기 11:31의 기적 사건을 언급한다. 문맥상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렇게 읽는 것이 후 문맥의 내용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1) Psalm 18:18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Psalm 31:8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2) HRV Psalm 49:2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HRV Psalm 62: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3) HRV Exodus 8:22 그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두 가지 해석 모두 구원의 의미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여기서 기적은 구속계시로서 이적들이 아니라 인생들의 허사와 궤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하게 섭리하심의 기적을 말한다. 예컨대 오늘날도 성도들의 병이 낫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구속 얻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하심의 결과이다. 구속계시의 종결과 특별섭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 1권 16장 7절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대한 증거”를 “메추라기가 진에 와서 덮이는” 민수기 11:31의 기적 사건을 언급한다. 문맥상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렇게 읽는 것이 후 문맥의 내용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1) Psalm 18:18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Psalm 31:8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2) HRV Psalm 49:2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HRV Psalm 62: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3) HRV Exodus 8:22 그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HRV Exodus 9: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HRV Exodus 1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HRV Exodus 1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HRV Exodus 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HRV Psalm 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HRV Psalm 17:7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HRV Psalm 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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