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강해설교/야고보서강해

시험을 길이 참으라(약 5:7-12)

시험을 길이 참으라(약 5:7-12) 


노승수 목사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전체적으로: 시험을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의 결론에 거진 다 왔습니다. 야고보서가 시험을 만날 때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이제 이 시험에서 길이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들에게 놀람과 울음의 근거가 되는 것, 즉 예수의 재림은 그의 교회 회중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러분은 위로가 됩니까? 저는 전에 이런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가? 지난 몇달을 생각해봤지만 재림을 생각하거나 하늘을 보며 주님 언제 오시렵니까? 하며 학수고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참 목사로서 부끄럽게도 말이지요. 재림을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참으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서울에 모 목사님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해줌으로 산 자를 위로한다고 했지요. 참 딱한 일입니다. 그게 참으로 신자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들도 천국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간다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와서 7 형제가 형사취수법에서 모두 아내로 취하고 죽었다가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었던 본문 기억나십니까? 그 때 주님이 하신 대답입니다. 너희가 천국을 오해했다. 거기서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천사와 같을 것이다. 이 말은 이 땅에서 혈연관계가 거기서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천국에 가서 우리의 혈족인 누군가를 만나는 애틋함은 이땅의 질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혈족의 구원을 이야기 하자면 결국 아담의 집안에 가인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럼 아담 시대에 목사가 있었다면 그의 사후에 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는 제한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속죄하시지 않았습니다.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구원 가능성을 열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목회자의 기도에 위로를 받는다면, 신자가 아니거나 참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험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야고보 사도는 길이 참는데 주님이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이야기 하듯이 인생의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는 죽은 후에 만나게 될 우리 가족이 아니라 사후이든지, 주님의 재림시이든지, 어느 때이든지 우리가 만나게 될 주님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을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주님의 강림이 우리의 모든 것을 신원하시는 참된 위로가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농부가 귀한 열매를 바람으로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농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가을이면 얻을 열매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 우리의 모든 것이 신원되고 열매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의 도리를 따라 길이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8절에 형제를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 것입니다.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문 밖에 당도해 계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오래 참았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 묵상한 예레미야서에서도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착고에 채이고 진흙 구덩이에 갇히고 그가 예언하는 것을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들을 본으로 삼아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참 어떻게 저의 상황에 이렇게 적절한 말씀을 주시는지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십니다.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신자가 받는 고난이라 여기고 농부처럼 주님 오실 때 얻을 영적 결실을 생각하며 오래 참을 뿐입니다. 나의 인내가 힘들어질 때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당하였던 고난을 본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인내할 따름입니다. 인내란 늘 힘든 것이지요. 마라토너가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는 영광을 생각하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11절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자을 복되다' 하나니 욥의 인내와 그 결말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이런 여러가지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이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어리석은 것도 사람보다 지혜있으니 우리가 당하는 이 고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괴로움을 면하기를 원하고 그 열매만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이 그 열매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날마다 교훈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늘 야고보처럼 고난 너머에 계신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주의 얼굴을 뵈는 자가 바로 믿음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12절은 맹세를 금합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그렇게 맹세치 아니함으로 정죄를 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맹세란 자기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뭐 이 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이런 말은 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나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자신의 의를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누르고 지배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는 반드시 정죄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의 모든 실력행사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인 마귀에게서 나오는 악한 마음입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마귀의 자식이니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도다는 주님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참된 자녀라면 나의 의를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의 말씀을 대면하여 우리 삶의 여러 정황들에 대해 옳은 것을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만 답하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나는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