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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야고보서강해

불경건을 청산하라(약 4:1-12)

불경건을 청산하라(약 4:1-12) 


노승수 목사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1. 세상의 지혜에 따른 기도(1-3)


1-3절은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 지혜의 특징은 다툼을 야기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세상 사람들이 가진 지혜가 아니라 신자가 가진 지혜이며 이 신자가 이 지혜를 기반으로 기도를 한다는 사실을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이 세상의 지혜를 이야기하면서 심지어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정도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욕과 욕심이 살인을 불러온 예를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가 그렇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죽인 다윗이 그렇습니다. 당시 종교적 열심을 내던 이들의 살인도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의 순교이겠지요. 이처럼 종교적 열심조차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독한 시기와 다툼은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몰고갑니다. 이것은 마귀의 모양입니다. 우리 주님도 마귀를 일컬어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은유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로 했습니다(요일 3:15). 또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은 살인과 같은 중죄라는 말씀을 하십니다(마 5:21-24). 이렇게 해석을 하자면, 곧 '살인하며'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이 이미를 약화시키는 것인데, '살인하며'를 '당장 처 죽일 것처럼' 정도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해석은 문자적이나 문법적 해석에 부합하지 않고 상당히 자의적입니다. 그러나 처음 두 해석은 성경적 지지 기반이 분명합니다. 어느 쪽이든지, 미움과 시기라는 세상의 지혜에 기반을 둔 것이며 이런 지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지혜인데, 사람들이 이런 지혜에 기반해서 기도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는 까닭 곧 기도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요약하자면, 정욕과 욕심, 시기와 살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다툼과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런 세상 지혜를 기반으로 기도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2.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4-6)


세상과 벗이 되는 일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벗이 되는 일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잇지 못합니다(고전 6:9).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혹시 이런 죄가 있습니까? 속히 회개합시다. 우리의 죄악을 씻으시고 기억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간음은 육체적 범죄일 뿐 아니라 영적 범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는 일 이것이 바로 영적 간음입니다. 이런 죄 역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야고보는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라고 말합니다. 근데 이 말을 여자로 한정지어서 생각하시면 오해하신 것입니다. 이 표현 속에는 간음하는 남자들도 포함합니다. 이런 일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은사로 그리고 구원의 보증으로 오시게 된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원문의 뜻은 조금 불확실합니다. 첫째, 어디에서 인용되어 왔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둘째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불분명한데, 두 가지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이렇습니다. 본절은 윗절의 사상 즉, 세상과 짝하는 신자가 하나님과 원수되는 정황에 대한 구체적 설명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신자들을 그의 소유로 삼아 애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버리고 세상과 짝하면 그는 우리에게 의분의 시기를 발하시기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칼빈의 해석인데, 5절과 6절의 상반부를 "곧,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께서 시기하시겠는가? 도리어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 라고 번역 했습니다. 즉, 성령께서 그 때의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시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성품은 시기와는 정반대로 너그러우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할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과 짝하는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고 하나님을 벗삼은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해석을 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세상과 벗하는 일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를 시기하여서 더 애착하시든지, 아니면 그런다고 시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은혜를 입는 자는 세상과 짝하는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주의 뜻 가운데 겸손히 행함으로 하나님과 벗합니까? 아님 교만히 행함으로 세상과 벗합니까? 


3. 하나님께 순복하라(7-10)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를 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락의 주된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면 저가 높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구하여야 할 것은 성령을 달라고 떼를 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애통하며 회개하며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을 낮추고 있습니까? 


4.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11-12)


형제를 권면하는 일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잘못을 행할 때, 위에서 야고보가 권면한 것처럼 권면할 수 있지요. 지금 금하는 내용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근거없는 소문을 퍼트리거나 당사자하고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군수군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을 말하거나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최진실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일은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퍼다 나른 악성 루머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비방이라 하고 이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준행자입니다. 재판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나는 형제를 비방한 일이 없습니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그의 동생 모세가 구스 여인을 첩으로 둔 사실을 인하여 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첩을 둔 일이 무슨 잘한 일이겠습니까? 분명 모세가 잘못한 일입니다. 그에 적절하게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잘못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자리 곧 율법의 재판관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그 자리를 취한 댓가를 분명히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저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