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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과 위장 : 위장을 걷어내야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

신앙의 본질과 위장 : 위장을 걷어내야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
황규학
키치의 정의 
미술용어에서 키치라는 말이 있다. 키치는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이다.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현대 대중문화·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술사가 조중걸씨는 그의 책,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 에서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키치는 19세기 독일에서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서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허위의식에 기대어 번식했던, 순수 예술을 가장한 기만적인 통속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키치는 사이비 예술, 주관성에 사로잡혀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 Arnold Houser는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키치는 의미를 가장하고 주관성을 띠고 있다. 즉 대상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대상을 감상하는 자기 자신에 관심한다. 따라서 키치는 순수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만, 순수 예술이 감상자를 밀어내고 스스로의 진리를 구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감상자의 기호를 따른다. 대상에 대한 예술적 가치보다, 대상을 보고 있는 자기자신에 관심하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파리 국립예술관에서 밀레의 만종이나 고호의 그림을 보면서 작품의 예술성에 감동되는 것보다, 그림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감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키치는 통속예술과는 또 다르다. 
일상의 힘든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는 순수 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적 동물로서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여흥으로서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속 예술이다. 통속 예술에는 진리보다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통속 예술은 스스로에게 고급예술이라거나 쾌락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고 삶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통속 예술은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차라리 순수하고 솔직하다. 
키치는 고급예술을 가장하는 통속예술 
그러나 키치는 주관성이 가미되어 고급예술을 가장하는 통속예술이다. 감상자는 키치를 통해 손쉽게 자신이 고상한 예술행위를 감상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키치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소비하는 태도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감상자는 연극 작품을 보면서 작품 속에 담긴 슬픔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커피광고는 커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꾸며진 분위기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광경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오래 전에 커피광고로 이름을 낸 연극인 윤석화는 『알고 보면 나도 부드러운 여자예요』라고 광고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시청자들은 커피맛보다 당시 학벌파문이 일어나기 전 한창 잘 나갔을 때의 윤석화의 모습에 더 매료되었다. 
소비자의 관심을 상품 그 자체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능적이거나 호사스럽거나 아늑한 분위기일 것이다. 사용가치는 이렇게 잉여가치로 전락을 하고 사물의 의미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키치는 이처럼 원래의 본질보다는 이차적인 곳으로 방향을 전환시킨다. 본질과 실체, 대상이 사라진다. 고급예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허위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사물을 지향하고 있다. 즉 대상의 객관성보다는 보는 이의 주관성에 관심한다. 
예술작품은 작품에 대한 객관적 가치보다도 단지 자기 감상을 위한 주관적 가치로 전락한다. 아무리 심오한 깊이를 담은 예술 작품도 키치적 태도에 사로잡힌 감상자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감상자들이 많을수록 그들에게 거짓 예술을 팔아먹는 키치 장사꾼들 역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점점 키치들이 범람하게 된다. 
키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키치가 무서운 것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철저히 이중적인 데 있다. 대상을 주관화하고, 부정직한 것을 숨긴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죄악을 통해 번성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영혼을 거짓된 베일로 가리고 있다. 우리를 기만 속에서 살고 거짓 속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키치의 특징은 기만적이라는 것인데 이는 남을 속인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기독교내 침투해 있는 키치는 상당히 위험한 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는 허위의식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의 신앙내용은 삼류이거나 통속성을 면치 못하면서 마치 고귀하고 고결한 것처럼 위장을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 처럼 말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는 그들의 키치적 신앙을 알아채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철두철미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키치적 개신교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를 한 번 들여다보자. 개신교인수가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 만에 인구의 1/4 이 넘었는데 기독교가 상식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론에서 연일 비판을 해대고 있다. 목회적으로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들이 단골메뉴로서 언론에 등장하여 뭇매를 맞고 있으며, 가는 곳마다 교회 분규가 끊이지 않아 개신교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고귀한 신앙이라고 위장을 해왔다. 
선교를 하든지, 후임자를 결정하든지, 선거를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대형집회를 하든지 뭐하나 상식적인 것이 없고 기독교가 사회와 언론의 조롱거리로 남게 된 것은 이를 잘 반영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키치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키치가 범람하면서 그것은 단지 예술에 대한 태도나 예술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스며들었다. 종교생활에도 스며들었다. 그러다 보니 거짓복음을 팔아먹는 복음장사꾼들이 늘어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사이비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오늘날 정상적인 개신교들에게까지 퍼져있다. 
첫 번째 교회를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한국개신교 신도들은 교회라는 원래의 공동체보다 가시적인 교회당을 더 좋아한다. 교회분규의 대부분은 '교회(당) 차지하기' 이다.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무형의 에클레시아보다 한 평에 수백만원, 수천만원씩 하는 가시적인 교회(당)만을 교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키치적 신앙이다. 교회의 가치와 본질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 더 관심하며, 이것을 차지하는 것이 곧 교회를 지키는 것이며,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십자가 군사로 자리매김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해 한다. 건축후유증으로 무형의 교회가 다 파괴되어도 관심 없으면서 수십억씩 은행대출을 받아 매달 수백만원씩 이자를 내면서도 아름답게 건축한 유형의 교회를 보면서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는 것이다. 본질을 도외시 한 키치적 신앙이다. 
두 번째는 설교를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읽거나 연구하는데는 별관심 없으면서 유머와 예화, 주관적 간증이 많은 목회자의 설교에 더 감동하며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대신 목사의 유머러스한 설교에 매료되어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펑펑 흘린다.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에 만족하며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목회자도 차라리 성경을 읽어주면 더 나을성 싶은데 성경을 해석한다고 설교를 하는데 논리성도 없고, 지나친 예화, 자기 이야기 등이 판을 쳐 오히려 성경의 감동을 반감시킨다. 키치적 설교이다.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를 하는 것을 즐겨하고 있다. 설교를 하는 자신이 주의 종으로서 대견스러운 것이다. 키치적 목사이다. 
키치적 신앙인들은 교회에 가면 성경말씀보다도 특정목사의 설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쩌면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이 불렀다는 신앙인이라는데 더 감동을 한다. 그러다 보면 특정목사의 윤리문제나 교주적 리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신도는 설교자나 설교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것 보다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에 감동을 한다. 성경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것이다. 특히 모태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내용보다 모태신앙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만족해 한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바른 의미와 해석보다, 대중의 취향이나 교회성장주의에 휩쓸려 기복과 성장에 포커스를 둔 설교를 주로 한다. 설교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 계시인 성경의 내용보다, 주관적 계시를 받고 설교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갖고, 대견스러워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스스로 교주화하는데 만족해 한다. 
세번째 목사를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한국개신교도들은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한다. 교단헌법에도 목사는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종' 또는 '사자'이며 '하나님의 도를 맡은 청지기'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과 버금과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를 비난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대형교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 데 간 데 없고 대형교회 목사만이 남는다. 그들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기 때문에 이미 카리스마틱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말에 죽고 살기까지 한다. 방송국을 때려 부수라고 하면 부수어야 한다. 그들은 감히 자신들을 십자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십자군이 된 자신의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시는 교주가 불륜을 하는 것은 로맨스이고, 재정을 사용하는 것은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것이고, 골프를 치는 것은 마귀 때리기 연습이고,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은 엘리아의 불병거를 타는 것으로 보인다. 부패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자체보다는 허위의식을 갖고 그들을 하나님의 대행자로 보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보는 자신이 주의 종을 잘 섬겨 복을 받는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키치적 신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금송아지로 만들었듯이,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목회자로 본다. 그래서 가시적인 하나님의 형상, 목회자 옆에 있는 자신들이 한 없이 즐거운 것이다. 그를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의 가방을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키치는 본질보다 이차적인 면에 만족하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야 할 자리에 목회자들이 앉아있다. 개척해서 100여명 이상만 되어도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영적인 리더 등의 명목으로 교주로서 군림하고 있다. 재정, 재산, 당회, 교회 행정과 법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맡은 소임을 다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된 것에 흐뭇해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키치적 목사이다. 
네 번째 직분을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교회에서 신도들이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 전도사, 구역장이 된 것에 대해 매우 흐뭇해한다. 사실 직분이라는 것은 섬기고 봉사하기 위한 것인데 섬김과 봉사는 온데 간 데 없고 장로가 된 것 자체에 대해서 만족해 한다. 그래서 장로가 되면 그날부터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직분자가 해야 할 내용보다 직분자체에 대해서 흐뭇해하며 만족하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교회에서 직분을 수여받을 때 수십만원, 수백만원의 기부금까지 내고 있다. 직분자체에 만족해 하기 때문에 직분수여를 위하여 기념비조로 헌금을 내어도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목회자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학위의 과정이나 논문의 내용보다 학위를 받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한다. 자신이 박사까운을 입고 졸업을 하고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도들에게는 교회, 설교, 목사, 직분을 통해서 키치가 침투되어 있다. 본질보다는 표상에 관심을 두고, 표상의 객체보다는 목회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기주체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즉 소명에 대해 실천하는 것보다 자신이 소명을 받아 주의 종이 되고, 신앙이 된 것에 대해 즐거움을 갖고 감동을 받는 것이다. 
결국 고급예술보다 고급예술을 감상하는 자가 자신이 대견스러운 것으로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듯이, 개신교도들이 실체나 본질에 관심이 없고 성경의 내용보다 성경을 들고 교회에 가는 것을 만족해하고, 설교에 대한 결단보다 설교를 하거나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고,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보이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그림자로 생각하여 그 옆에 있는 것을 즐기고, 실제적인 공동체보다는 가시적인 교회를 보면서 좋아하고, 직분의 실행보다는 직분자체를 부여받은 것에 감동을 받는 키치적 신앙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몰상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키치적 신앙은 사상누각으로서 질보다는 양에 관계된 것이고, 일차적 본질이나 객관적 대상보다는 이차적 요소와 주관적 감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이 일차적 본질에 사로잡힌 것처럼 허위의식과 기만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까지 위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본질적인 키치신앙이 실체나 본질보다 이차적 대상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한국개신교는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키치는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기만적이며 그 감상이 용이하고 무엇보다도 피상적이며 사이비예술이다. 그리고 감상자에게 아첨하고 거짓된 예술인 것은 통속예술과 같다. 그러나 키치는 자기 분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고급예술 혹은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기 환상과 감상을 토대로 한 예술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주관적이며 자기 환상적인 키치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인과 목회자들은 키치적 교인, 키치적 목회자로부터 벗어나서 가시적인 교회보다는 공동체라는 무형의 교회, 설교보다는 성경, 목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는 직분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키치적 모습은 물러나고, 본질적인 신앙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 아닐까? 
움베르트에코는 "어차피 근원이 부족하다면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자 겹겹이 둘러싼 환상의 차원을 충실히 재현하자"라고 말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표층의 흘러넘침보다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키치적 신앙에서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키치적 신앙을 거두어 낼 때, 한국교회는 상식을 넘어 초상식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