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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기타미분류

현대 무신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현대 무신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강영안 
1.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현대의 질문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함께 한 마음과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담긴 문서를 우리는 신앙고백서라고 부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등 16세기 교회 개혁이후 새로운 신앙서가 있지만 세계 교회가 공유하는 신앙 고백으로는 고대 교회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니케아신경,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도신경은 누구나 알고 있는 신앙고백 문서입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은 사도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문자 그대로는 ‘사도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영어로는 The Apostles' Creed라고 하는데, 여기서 Creed라는 말은 라틴어 크레도(Credo), 즉 “내가 믿는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틴어로는 '숨볼룸 아포스톨로룸'(Symbolum Apostolorum)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희랍어를 라틴어화한 표현입니다. ). ‘사도들의 숨볼룸’, 곧 사도들의 신앙의 표지, 사도들의 일종의 비밀 표시 또는 암호와 같은 것입니다. 비밀결사단에 입단할 때 자기들만 아는 기호나 표지를 쓰지 않습니까?. 사도신경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라틴어나 희랍어로 된 사도신경을 보면 ‘믿습니다’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이 때는 믿는다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엣’(et), ‘그리고’란 접속사로 연결해 두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성령과 거룩한 공회와…영생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입니다. ‘크레도’란 동사에 주목해 보면 사도신경이 삼위 한 분 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임이 쉽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최근에 새로 번역한 사도신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이 사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우리가 현재 예배 중에 쓰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믿는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사도신경이 지닌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무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첫줄은 (우리가 익숙한 번역을 따르자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고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 라틴어를 보면 이 구절은 우선 무엇보다 크레도 인(Credo in),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신뢰합니다”, “나는 의탁합니다”, “나는 맡깁니다”라는 말이지요.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에게 의탁한다는 말입니까? ‘데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Patrem)시고, '전능자'(Omnipotentem)시고,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Creatorem coeli et terrae)라는 것이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맨 먼저 하는 고백입니다. 라틴어 순서대로 직역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시고, 전능자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이 출발점이고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나에게 아버지이며, 전능자이며,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이 사도신경 첫 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번역에는 이것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보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데, 그 분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고, 천지를 만드신 이유는 그 분이 전능하기 때문인 것처럼 고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문과 거리가 먼 번역입니다. 
어떻게 번역해서 쓰든 간에 사도신경 첫 줄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당장 문제에 봉착합니다.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사도신경의 고백은 유효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서양 근대 문화가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야 하고, 이를 감수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유아기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우리가 이 사실을 신앙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있었던 일들을, 마치 아무런 일도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여길 수 없습니다. 예전에 믿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신앙 고백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도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씩 이 문제들을 간단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첫째, 현대 우주론의 도전입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해서 생긴 공간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가 폭발하여 생긴 산물입니다. 학교에서는 이 우주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 가르치지 않고 이른바 ‘빅뱅’(Big Bang), ‘대폭발’의 산물이라 가르칩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 결과라는 주장은 교회에서나 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현대 우주론에서는 150억 년 전 대폭발의 결과로 우주가 생겨났고, 지구는 약 40억 년 전에 출현했으며, 지구 위에 생명체가 생겨난 것은 약 30억 년 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생명이 지구상에 출현한 후로는 돌연 변이(genetic mutation)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과정을 따라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과학 이론입니다. 만일 이러한 이론들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빅뱅을 통해 우주가 시작되었고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고등한 생명체로 생명이 진화되었다는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왜 이 땅에 악과 고통이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은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선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곧장 생기게 됩니다. 무엇이나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아시고, 언제나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면 그가 만든 세계에는 죽음도 없어야 할 것이고(왜냐하면 죽음은 나쁜 것 중에서도 나쁜 것으로 우리에게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질병도 없어야 할 것이고, 장애자도 없어야 할 것이고, 불평등도, 미움도, 질투도, 전쟁도 없어야 할 것인데, 실제로 이와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거나,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은 분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로서, 오랫동안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괴롭혀 온 문제입니다. 고통과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전능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페미니스트(feminist) 신학자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년 간 여러 교회들의 총회에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하여 채택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어려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전히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겨우 한 세기 전의 일입니다.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직까지도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표현을 따르면 여성은 ‘제2의 성’, 곧 남성이 우선하고 그 다음에 오는 성,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 성입니다. 우리는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배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조차 지난 2000년 동안 여성들은 2차적인 위치에 있었고, 엄청난 헌신과 봉사가 있었음에도 그에 걸맞은 위치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이를 신학적으로 교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반성해 보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넷째, 생태주의자들의 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다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축복)을 주셨습니다. 생태주의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입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 때문에 땅이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들이 과도하게 땅을 개발하고 착취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