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엘리야 컴플렉스

엘리야 컴플렉스 

노승수 목사

엘리야 시대는 참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대도 중세의 암흑이 가득한 시대였지요. 그래서 칼빈이 섬기던 제네바 아카데미의 모토와 표지도 Post Tenebras Lux(어둠 후에 빛이 있다) 였습니다. -욥기 17:12의 "post tenebras spero lucem" ("After darkness, I hope for light") 라는 구절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 가깝다 하는구나'로 개역개정에서는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로 번역했는데 이는 오역인 거 같다. 바른 성경은 '그들이 밤을 낮으로 바꾸고, 어두움 앞에서 빛이 가까웠다고 말하는구나'로 번역하는데 BHS, LXX, 영어 번역본들, 아프리칸스 성경도 이 번역을 지지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 시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거 같습니다.
연일 교회가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뉴스에 심심치 않게 오르는데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혁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그 목소리는 상당한 정도의 의로운 분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말하려 하는 것은 엘리야 컴플렉스입니다. 엘리야에게 무슨 컴플렉스인가? 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요. 엘리야는 아마도 갈멜산의 전투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시점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갈멜산의 드라마틱한 전투와 산정에서의 믿음의 기도, 그리고 아합의 마차를 앞서서 달려가는 엘리야의 모습은 마치 '신앙적 영웅'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이런 높은 기준의 영적 엘리트적 삶을 지향하게 됩니다. 근데 이게 엘리야의 컴플렉스요,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이세벨의 한마디가 그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청했습니다. 자신 밖에 남은 사람이 없다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영웅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엘리야가 다른 성도들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 이전에 오바댜라는 궁내대신을 통해서 선지자 100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는 혼자라 여겨졌습니다. 7000명의 사람들을 두셨음에도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 하지 못했습니다. 이 숫자는 산술적 7000명이기보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를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역사입니다. 엘리야는 그들과 접촉점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단하나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본 이상은 특이했습니다. 광풍과 지진가운데도 계시지 않던 하나님이 미세한 속삭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전 심판은 그의 손이 아니라 인생채찍과 막대기와 같은 하사엘과 예후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상이 보여주는 바도 영웅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경계라고 보입니다. 갈멜산의 전투와 같은 장대한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요, 은밀히 고요히 그의 자녀들을 건지시는 일은 엘리야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아합시대의 영적 상황은 암흑기입니다. 그 암흑기에 7000명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바벨론이 하나님의 풀무이며, 오히려 그곳에 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무화과 광주리라고 합니다. 가장 어두워서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심판을 작정하시고 돌이키지 않으실만큼 어두운 시절에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 에스겔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의 모토처럼 저는 이 개혁은 이 어두움이 더 깊어져야 일어나리라고 봅니다. 그 전에 영웅주의적으로 등장하는 전사(?)들은 모두 엘리야처럼 영적 그로기를 맛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은 몇몇이 나서서 그 흐름을 바꿔놓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흘러왔다고 보입니다. 어둠이 더 깊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더 타락할 것이고,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회개하면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것이 거짓 선지자의 외침이었던 것처럼 이 시대도 우리가 회개만 하면 하나님이 돌이키셔서 이전과 같은 부흥을 주실 것이라는 외침은 거짓 선지자의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어두워져가는 이 시대에 신자가 해야할 바는 엘리야와 같은 성급한 능력의 행사가 아니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타락함에 흥분하지 말고 의와 공평의 왕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시편 37:1 말씀이 제 가슴을 후벼 팝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시 37:1) 우리의 개혁에 대한 의분이라 자처하는 바들은 어쩌면, 행악자에 대한 불평이요, 불의한 자들에 대한 투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정말 그 자리에 있다면 그들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어쩌면, 우리의 분노나 불평은 그저 '사촌이 땅을 사서 배아픈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잠잠히 잠재우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오늘 아침에 들어 몇자 적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