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노승수 목사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기준은 뭐여야 할까? 논리 실증주의 자였던 호주의 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 혹은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기준을<반증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했다. 반증 가능성이란 과학자가 어떤 사태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운 가설이 ‘언제 틀리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장인 가설이 어느 조건에서 틀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과학이라고 말한 것이다. 과학은 일종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의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음으로 나름대로 인식론적 얼개를 만들어서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나름 지식을 쌓아간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출연하는 것이 바로 가설이다. 그리고 이 가설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기까지 그것은 가설에 불과할 뿐 아직 과학이라고 하기에 이르다. 그럼 과학이라 해서 항상 바른 이해를 가지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과거 천문학에서 천동설은 일종의 과학이었지만 천체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이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 관찰과 실험을 하게 됨으로 항상 관찰은 이론과 가설에 의존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맹점 때문에, 부정확한 사실관계를 사실관계로 오인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게 된다. 마치 천동설에서처럼 말이다. 그래서 포퍼가 생각한 것이 바로<반증 가능성의 조건>이다. 
포퍼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경험 때문이다. 포퍼는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아들러의 조교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아들러가 포퍼의 모든 행동을 수치심과 연관 지어서 해석했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어서 어느 경우에도 아들러의 해석은 틀릴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포퍼는 아들러의 이런 태도에 상당히 신경증적 태도를 보였고, 나중에 그가 과학의 구획 기준을 나누면서, 심리학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분류한 것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포퍼의 눈에는 아들러의 수치심 이론은 어떤 경우에도 틀릴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 가지 경험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검증하는 실험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상대성이론이 언제 틀리는지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마침 아프리카에서 개기일식이 있었는데, 그 개기일식 때, 태양 너머에 있던 천체가 원래 위치에서 관측된다면 자신의 상대성이론이 틀린 것이라고 제시를 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개기일식 중에 달의 중력에 의해 그 별로부터 오는 빛이 달의 중력에 의해 굴절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물론 앞서 설명드린대로 아인슈타인의 가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언제 맞으며 언제 틀릴지를 제시했고, 실제로 개기일식때 별을 관측한 결과 달에 의해 굴절된 별빛에 의해서 원래의 위치와 다른 위치에서 별을 관측하게 된다. 이로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상대성 이론이 단순히 가설이 아니라 사실관계임을 입증한 것이다. 
포퍼는 이 실험과 아인슈타인의 가설 검증 과정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과학과 비과학의 구획기준으로서 언제 틀리는지를 그 조건을 말하고 그것을 실험함으로 이론은 방증, 즉 증거가 증가하는 개연성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정리해보면, 과학이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가설, 그것이 경험에서 비롯되었든지, 영감에서 비롯되었든지, 그 가설을 어떤 조건의 실험을 통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을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과학에서의 관찰은 상당부분 ‘이론에 대한 의존’을 동반하고 있다. 모든 관찰은 이론과 가설로부터 나오고 이론과 가설의 눈으로만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것 역시 ‘믿음에 의한 인식’이라고 보는 인식론적 견해가 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도는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는가? 기독도의 세상이해의 기준은 바로 계시인 성경이다. 기독도는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가설로부터 세상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로부터 초자연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만난다. 과학이 가설로부터 현실검증이란 과정을 거치듯이, 기독도는 성경이라는 계시의 안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이란 불가시적 존재를 만난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듯이, 계시 역시 기독도가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다. 칼빈은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만이 자신을 아는 지식에 이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 불가능하다. 
그럼 기독도의 믿음은 과학도가 보기에 불합리한 것인가? 과학도 역시<우주의 빅뱅>을 본적이 없고,<자연의 진화>와<생명의 시초>를 목격한 적이 없다. 그것은 자신이 고안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물론 그 가설은 역사적 증거자료를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긴 한다. 그러나 신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목격한 적이 없고 초자연적 존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 계시를 통해서 그 하나님을 만난다는 점에서 근본적 구조는 같다고 할 것이다.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초자연적 체험이다. 계시란 이성적 수단을 통해서 만나는 초자연적 체험임으로 초자연적 체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계시는 한 개인에게 검증이 된다. 
그럼 계시는 그것이 언제 틀리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없다. 그래서 신앙은 과학이 아니다. 성경은 명시적으로 택자와 불택자를 구별하여 둔다. 죄로 인해 가리어진 인간의 눈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계시가 아니고서는 불가해 한 것이다. 그래서 칸트 역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치는 것이다. 계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다. 택자와 불택자에게 서로 다른 결과를 맺기 때문에 이것이 언제 틀리는지를 제시할 수 없다. 적어도 현세에서는 그렇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그러나 택자들의 공통적 경험은 계시를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다시 과학과 다르지 않다. 과학에서 어떤 가설이 세워지고 그것을 입증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수납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다. 현대 모더니즘 철학은 사실과 일대일 대응의 진술의 불가능함을 토로하면서 객관의 의미를 상호주관성으로 후퇴시켰다. 과학에서 어떤 가설이 환호를 받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계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계시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수많은 택자들의 공통적 경험은 계시를 통해서 초자연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경험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분명 존재하는 경험이며, 무엇보다 80억 인류의 80% 이상이 초자연적 존재로서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은 우리 삶을 이성적으로 또 우리 삶을 지배하던 미신을 제거했지만, 그 스스로가 거대한 미신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 과학적 언명이 아무리 사실관계를 정교하게 진술한다 하더라도 그건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과학의 혁혁할 발전으로 얼마나 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뒤집히고 있는지, 결국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지식은 세상에 관한 자기 나름의 이해나 믿음에 불과한 것이지요. 세상이란 커다란 바다를 그렇게 조각배를 타고 표류를 하다가 다른 배로 옮겨 타는 것을 진리라 믿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입장에선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기초요 세상의 창조자요. 모든 것의 실체요, 궁극적인 지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그의 계시에 의지하여 신뢰하는 것이 변함없고 흔들림 없는 세상에서의 더 합리적인 삶의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의 확신  (0) 2018.02.17
영성의 시대에 경건을 말하다.  (0) 2018.02.17
엘리야 컴플렉스  (0) 2018.02.14
성경이 말하는 영혼의 의미  (0) 2018.02.14
아동의 공격성  (0) 2018.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