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바이러스, 이단의 발호가 교회에게 주는 면역
노승수 목사
신천지는 기존 교회를 허무는 방식으로 포교를 한다. 이전에 이단들도 비슷한 성향을 가졌지만, 신천지는 더 공격적이고 심지어 교회 안으로 침투 하여서 교회 자체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먹어버린다. 역사적으로 이단의 발호는 항상 진리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아리우스파의 등장으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고, 말시온파의 등장으로 정경의 확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국도 예외적이지 않다. 구원파의 등장으로 구원의 확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다.
그럼 신천지의 발호로 말미암아 교회가 각성해야 할 신학적 지식은 뭘까?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러한 이단의 발호를 통해서 무언가 면역을 형성해 가기 때문이다. 이단은 아니지만 오늘날 교회의 경향 속에 나타는 뚜렷한 경향 중 하나는<가정 교회>운동과<셀 교회>운동이다. G12 등등의 이름으로 새로운 목회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운동들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교회의 어떤 필요, 특별히 소통과 나눔의 필요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필요는 사실 현대 문명의 특성에 많이 기대고 있다. 현대인의 외로움, 군중 속에서도 느끼는 고독, 우울, sns라는 혁명적인 관계 확장에도 불구하고 겪는 관계의 위축, 이 위축은 산업화 도시화가 만들어낸 인간의 기능적 존재로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생산 과정에서 한 부품만을 부단히 조립하는 공정이 생산성의 극대화를 가져왔지만 존재의 의미와 관계의 위축을 가져왔다. 많은 활동을 하고 바쁘게 지내지만 늘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갈증의 해소를 위해서 교회가 변해야만 했다. 그런 저런 운동들이 현대 한국 교회의 여러 모습들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같은 변화는 앞서 언급한 현장의 변화에만 마음이 가 있지 실제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변화를 겪으면서 비진리적 요소 즉, 앞서 언급한 이단의 발호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신학적 면역>에 대해 생각지 않으면 사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신천지의 발호가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로부터 어떤<신학적 면역>을 가져야 하는가? 이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바른, 딤전 3:15)는 말씀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딤전 3장은 바울의 교회관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특히나 3장은 감독(목사와 장로, 1-7)과 집사(8-13)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나서 15절에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진리의 기둥과 터는 진리를 파수하는 책임자인 '직분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다.』 (바른, 엡 4:11) 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직분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다.
오늘 날 사람들의 필요는 사람들과의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독이고 교회는 이 필요를 해결하는데 천착한 나머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파수로서 직분의 중요성들을 다 붕괴시켜버렸다.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현실을 눈 여겨 봐야 한다. 나는 그 결과, 돌들이 소리지르는 바가 바로 신천지라고 본다.
진리의 파수를 위한 직분의 붕괴가 교회 자체의 붕괴를 이미 내부적으로 가져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회가 허물어지는 것은 이 일의 결과물일 뿐이다.<장로 집사 호칭론>에서부터<가정 교회론>,<셀 교회론>등등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얼머나 허물었는지를 신천지라는 바이러스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질적 책임 곧 교회의 근본적 소통은 사람들간의 소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소통이며 사도신경을 통해서 고백하는 바, 성도의 교통 역시 그리스도와의 교통이라는 점을 간과해버린 것이다. 그럼 사실 교회는<라이온스 클럽>이나<보이스카웃>가 다를 바가 없는 세상적 친목 단체로 전락해버린다.
성도들의 갈증은 외로움과 관계에 대한 갈증일지 몰라도 성도의 필요는 그리스도와의 소통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세워야 하는 것은<강단>이지<친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강단의 붕괴는 이미 이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런 안목을 결여한 채, 이 세상을 본받아 그 필요를 채우기만 급급한 교회는 이미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 영적 바이러스의 잠복기를 거쳐 증상이 발현된 것이 바로 신천지인 셈이다. 이 증상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면역이 무엇일지를 교회들은 새겨야 할 것이다.
2012.04.1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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