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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교회 단상

교회 단상
노승수 목사 
전통적으로 지성과 의지는 영혼의 기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정서에 대해서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대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은 영혼불멸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죽음을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자살의 증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현격히 줄어 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삶이 죽음으로부터 격리되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좀처럼 사람의 주검을 목격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생로병사에 대해서 깊은 이해의 결여를 가져왔습니다. 
현대를 나름 정의해보면 감정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지성과 의지가 영혼의 기능으로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의 기원은 어디일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대체로 사람이 가진 오감에 기대어 있습니다. 설교에 대채로 무신경한 성도라도 '나가수'를 보고 감동을 합니다. 이는 무대 연출과 가수의 폭발적 가창력 등등이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공포 영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스런 장면에 의해 공포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화에서 공포를 연출하는 방식은 바로 음향효과입니다. 음향이 제거된 공포 영화는 매우 심심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정서는 대체로 몸에 기대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듭니다. 주로 대형교회에 몰려들죠. 나름 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영혼의 갈증 때문에 찾아듭니다. 영적인 욕구들이 우리의 지성과 의지(도덕성)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 중 아무 잘못이 없어도 경찰차를 보면 마음이 뜨끔 거리는 것은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죽음이 격리된 이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영원과 영혼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고 이것 때문에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이 제공하는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을 가감없이 전하기 보다 사람들의 몸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욕구들을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그들은 교회 와서 '잘 짜여진 공연' 하나를 관람하고 나름 눈물을 조금 흘리며 그 감동스러움을 은혜로 착각하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성경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과 무관한 삶을 그저 다시 살아갈 뿐입니다. 
중세 교회가 스탠드글라스와 잘 울리는 예배당과 사부 성가곡들을 통해서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종교심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몸의 욕망에 만족을 준 후 그들의 영혼을 무지한대로 내 몬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싸이키 조명(실제로 이런 교회를 봤습니다. ㅋㅋㅋ)과 현란한 성가대, 강단이 아닌 무대에 올려진 아름다움 춤과 현란한 음악과 영상 등으로 인간의 오감에 만족을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감동을 은혜라 칭합니다. 
그러나 은혜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그리고 그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결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임하면 주님의 구원이 나타나고 그 구원의 현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루는 성취가 영광이 아니라 신자의 삶과 영혼 가운데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 그 영혼이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남이 영광이요.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대형 교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럼 소형 교회와 개척 교회의 형편은 조금 낫습니까? 결코 그들이 대형교회보다 낫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보기엔 그저 교회가 크지 않기 때문에 못하고 있을 뿐이지 동일한 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들 비판하지만 교회의 성도를 앗아 간다고 혹은 그러면 안된다고 기실 초록이 동색입니다. 똑같은 사고에 똑같은 방식으로 호객을 하고 있으니까요? 전도는 전붙이는 일로 먹을 것을 나누주는 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등록이라도 하면 언제 그랬나는 듯이 그 영혼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목사로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관심을 잊어버립니다. 결혼이 부부의 골인지점이 아니라 출발점인 것처럼 참된 전도는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임에도 이미 그물 안에 들어와 있는 고기조차 바리새인들처럼 배나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에 급급한 한국교회입니다. 
도대체 한 사람이 중생할 때, 그가 회심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이 없고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이 있어 가르침으로 이 진리를 깨닫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교회는 참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2012.05.21 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