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소명(렘 1:1-10)
노승수 목사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1. 예레미야의 배경(1-3)
예레미야는 제사장 집안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냐민 땅의 아나돗은 제사장 고을이었습니다(수 21:18) 요시야 13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13년째 상황은 25:3에서 다시 언급이 됩니다. 요시야의 통치는 기원전 640년부터 609년까지 였습니다. 그럼 대략 637년 경에 첫 계시의 말씀을 받은 것 같습니다. 1절에 "예레미야의 말"이라 할 때, "말"은 히브리 말로 "다바르"인데 그 뉘앙스는 '행위' '역사' '진술' '사건'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역은 여호야김시대를 거쳐 시드기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이 두 왕은 모두 요시야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개혁적이었던 요시야 임금과는 달리 그 두 아들은 개혁과 거리가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나오겠지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종교개혁을 시도합니다. 그게 여호야김 통치 초기 때입니다. 26장에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36장에 의하면, 나중에 예레미야와 여호야김은 심각한 적대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드기야는 기원전 598년 12월 중순부터 597년 3월 17일까지 왕위에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의 조카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왕이 된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에게 세아들이 있었는데,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가 모두 왕위에 오릅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12년의 왕위에 있었습니다. 여호야김과 예레미야가 적대적관계를 보인 것과는 달리, 의논할 필요가 있을 때, 예레미야에게 자진해서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 예레미야를 보호하기도 한 왕이었습니다(렘 21:1-10 참조).
시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은 쉬이 할 수 있지만 질리고 아픈 말은 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예레미야는 멸망에 대해 선포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다 평안하다 외칠 때,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가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매국노로 오인을 받기도 하고 그 저항을 우리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70년 포로 생활 후에 귀환할 것에 대한 유명한 예언이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내가 듣기 좋은 것만 가려 들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욕구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것이 아니라 때론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상반하는 것이라도 주의 말씀이라면 따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기원전 598년 12월 중순부터 597년 3월 17일까지 왕위에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의 조카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왕이 된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에게 세아들이 있었는데,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가 모두 왕위에 오릅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12년의 왕위에 있었습니다. 여호야김과 예레미야가 적대적관계를 보인 것과는 달리, 의논할 필요가 있을 때, 예레미야에게 자진해서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 예레미야를 보호하기도 한 왕이었습니다(렘 21:1-10 참조).
시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은 쉬이 할 수 있지만 질리고 아픈 말은 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예레미야는 멸망에 대해 선포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다 평안하다 외칠 때,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가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매국노로 오인을 받기도 하고 그 저항을 우리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70년 포로 생활 후에 귀환할 것에 대한 유명한 예언이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내가 듣기 좋은 것만 가려 들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욕구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것이 아니라 때론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상반하는 것이라도 주의 말씀이라면 따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예레미야의 소명(4-1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 위에 내렸습니다. 모태에서 그를 빗기도 전에 그를 아셨고, 내중에 나오기도 전에,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니다. 그리고 그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그것과 다릅니다. 모든 작정은 세상을 열기 전에 완전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자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림을 한 장을 그릴 때 아무렇게나 되는데로 그리지 않고, 기본 구상을 먼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그의 작정을 기반하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이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는 듯하지만, 정작 삶의 중요한 순간에 이 믿음은 너무나 쉽게 허물어집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신앙고백하듯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에도 다른 위로를 너무 쉽게 구합니다. 이적을 구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작정을 섭리를 통해 오늘도 여전히 이루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도외시 한 채, 이적을 좇아 신유집회를 전전합니다. 거기에는 이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기 전에 이 상황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믿는다면, 신자의 첫 번째 기도는 이 상황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시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의 내용입니다. 작정하시며, 그 작정을 섭리 중에 이루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부르심은 어느 날 아무나 찍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작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구체적이며 적극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간지식이 있어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그런 류의 작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정하시고 그 정하신 바를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과 그것을 이루시는 섭리를 전적으로 신뢰합니까?
6절에 이에 대해 예레미야가 답변을 하는데,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합니다. 여기서 아이란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공적으로 활동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통상 이스라엘은 나이 30이 되어야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30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구요. 그는 모세처럼 말에 능숙치 못했기 때문에 말하기를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권리가 없기에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용인치 않으십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리를 그의 나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교훈해줍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라고 권면합니다. 아마도 디모데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소자가 강단에 서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나이에 무슨 인생을 알겠어?"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스스로도 아직 공적으로 말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나는 말씀의 권위를 믿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믿습니까?
7절에 주님은 너는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대상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누가 들을 말씀을 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흔히 표적 설교라고 하지요.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중 누구를 들으라고 설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지 성도들을 가르치려는 행위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누가 들으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누구에게 보내든지"로 번역된 "누구에게나"의 히브리어 "알-콜-아세르"는 여러가지로 옮길 수 있습니다. 시리아역 성경에는 "내가 너를 보내는 곳에는 어디에나" 라틴어 벌게잌 성경에는 "내가 너에게 맡기는 사명이 무엇이든지"라는 의미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세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말씀을 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말씀 전하는 자 곧 목사에게 있어서 최선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자이기에 그들의 감정이나 요구, 필요들을 잘 알아야하고 그런 부분을 잘 격려하여서 따르도록 해야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과 성경이 증거하는 원칙을 타협하면서, 성도들을 성경을 따르도록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성도들의 삶에 맞추는 행위는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누구에게나 어느 상황에서나 타협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없이 지키는가? 나는 그 말씀에 나 삶의 여러 정황들을 핑계로 삼지 않고 온전히 실천하며 순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시면서, 예레미야의 필요를 외면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두려움을 이해하셨습니다. 목회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없이 전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도들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두려움을 아셨으며, 이에 대한 대비책도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하신다 하니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여러번 죽을 위기를 넘깁니다. 구덩이에 갖히기도 하고, 왕과 적대관계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시니 질병도 어려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잘 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눈물골짜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결국 그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어 우리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신 그리스도로 만족케 하실 것임을 신뢰케 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으로 성도의 죽음은 성화의 완성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날임으로 사망마저 그러하다면, 성도가 감사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두려움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거기서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가 겪는 고난 가운데 이 사실을 견고하고 확신있게 믿고 있습니까?
8-10절에 다시 하나님은 그 손을 뻗으시고 예레미야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선지자가 된 초자연적 징표였습니다. 그의 입술의 말로 왕국을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고 세우고 심기 위함입니다. 이사야는 제단 숯불을 그 입에 대심으로 에스겔을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기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의 삶의 일부가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심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이루신 만국의 역사를 그의 입술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것을 권위있게 하셨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같은 권위가 있음을 아십니까? 목사의 말로 사람의 말로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 스스로도 그 말씀의 권위 아래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단지 그와 같은 방편을 우리에게 주시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주시기를 기뻐한 까닭이지 그 개인의 경건이나 능력으로 이와 같은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적이 있지요. 모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니 백성들이 두려워 도저히 그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말씀하소서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현현하는 것을 백성들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죄가 중하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이 중하니 그를 견뎌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 사역자를 통해서 교회 가운데 그 뜻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만국을 심으며 뽑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말입니다.
6절에 이에 대해 예레미야가 답변을 하는데,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합니다. 여기서 아이란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공적으로 활동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통상 이스라엘은 나이 30이 되어야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30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구요. 그는 모세처럼 말에 능숙치 못했기 때문에 말하기를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권리가 없기에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용인치 않으십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리를 그의 나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교훈해줍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라고 권면합니다. 아마도 디모데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소자가 강단에 서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나이에 무슨 인생을 알겠어?"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스스로도 아직 공적으로 말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나는 말씀의 권위를 믿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믿습니까?
7절에 주님은 너는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대상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누가 들을 말씀을 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흔히 표적 설교라고 하지요.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중 누구를 들으라고 설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지 성도들을 가르치려는 행위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누가 들으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누구에게 보내든지"로 번역된 "누구에게나"의 히브리어 "알-콜-아세르"는 여러가지로 옮길 수 있습니다. 시리아역 성경에는 "내가 너를 보내는 곳에는 어디에나" 라틴어 벌게잌 성경에는 "내가 너에게 맡기는 사명이 무엇이든지"라는 의미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세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말씀을 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말씀 전하는 자 곧 목사에게 있어서 최선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자이기에 그들의 감정이나 요구, 필요들을 잘 알아야하고 그런 부분을 잘 격려하여서 따르도록 해야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과 성경이 증거하는 원칙을 타협하면서, 성도들을 성경을 따르도록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성도들의 삶에 맞추는 행위는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누구에게나 어느 상황에서나 타협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없이 지키는가? 나는 그 말씀에 나 삶의 여러 정황들을 핑계로 삼지 않고 온전히 실천하며 순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시면서, 예레미야의 필요를 외면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두려움을 이해하셨습니다. 목회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없이 전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도들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두려움을 아셨으며, 이에 대한 대비책도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하신다 하니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여러번 죽을 위기를 넘깁니다. 구덩이에 갖히기도 하고, 왕과 적대관계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시니 질병도 어려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잘 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눈물골짜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결국 그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어 우리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신 그리스도로 만족케 하실 것임을 신뢰케 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으로 성도의 죽음은 성화의 완성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날임으로 사망마저 그러하다면, 성도가 감사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두려움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거기서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가 겪는 고난 가운데 이 사실을 견고하고 확신있게 믿고 있습니까?
8-10절에 다시 하나님은 그 손을 뻗으시고 예레미야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선지자가 된 초자연적 징표였습니다. 그의 입술의 말로 왕국을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고 세우고 심기 위함입니다. 이사야는 제단 숯불을 그 입에 대심으로 에스겔을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기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의 삶의 일부가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심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이루신 만국의 역사를 그의 입술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것을 권위있게 하셨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같은 권위가 있음을 아십니까? 목사의 말로 사람의 말로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 스스로도 그 말씀의 권위 아래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단지 그와 같은 방편을 우리에게 주시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주시기를 기뻐한 까닭이지 그 개인의 경건이나 능력으로 이와 같은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적이 있지요. 모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니 백성들이 두려워 도저히 그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말씀하소서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현현하는 것을 백성들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죄가 중하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이 중하니 그를 견뎌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 사역자를 통해서 교회 가운데 그 뜻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만국을 심으며 뽑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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