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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예배의 참된 방식

예배의 참된 방식
롬9:4-5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마틴 로이드존스
우리는 이제까지 강론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을 보여 주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했던 몇 가지 어휘들을 숙고해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 어휘들을 사용해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특권들과, 또한 그들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배척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어휘들 중 "예배와"(하나님을 예배함과)라는 말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어구를 사용한 것은 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종교적인 예배", 말하자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 관해서 말할 때 그 같은 방식으로 그 어휘를 사용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특별한 진술에 대해 가장 훌륭한 주석은 히브리서 9:1-5에서 발견됩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히브리서 기자는 "섬기는 예법 "이라고 부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뜻하는 바는 이러합니다. 곧 이 백성들의 특이하고 특별한 특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치셨으며,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법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그러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었습니다. 바울이 학식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상기시킨 바와 같이 - 다시 말하면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에게 상기시켰듯이 - 세상의 다른 민족들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다면" 주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행17:27).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찾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 높은 곳에 높은 신들, 허메(헤르메스)와 쓰스(제우스)와 다른 모든 신들보다 더 커 보이는 어떤 또 다른 큰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그를 위해서 한 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어떤 가르침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엿지만 무지함 속에서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무지한 채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그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산으로 올라오라 부르셨고,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성막을 세우는 것, 그 성막의 여러 치수, 성막의 여러 부분들의 규격등을 알려 주셨습니다. 또 그 성막을 어떻게 꾸미고, 어떤 색깔로, 어떤 나무 모양으로 해야 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레위기 같은 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하는 전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모세에게 가르친 교훈들이 정교하게 기술되어 있는 책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대제사장과, 그 대제사장 아래 있는 여러 제사장들이 어떻게 해야 되며. 레위인들이 또 다른 일들을 수행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이 성막을 옮겨 다시 세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레위기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우연하게 그저 내버려둔 것이나, 그들의 마음대로 하거나. 상상대로 하게 내버려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8:1-5에 그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바로 여기서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란 말이 중요한 점입니다. 그처럼 성막을 세울 때나 그 후 성전을 제울 때 행해졌던 그 모든 것은 모세의 생각이나 상상에서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자세한 지시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 로마서에서 사도는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해당되었다고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 존전에 들어가서 간구와 기도를 드리는 법을 아는 일보다 더·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보다 더 높은 일도 없습니다. 그것은 점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바로 그 교훈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 기록한 여러 특권들의 목록 속에 "하나님께 예배함"을 넣은 것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성막에서 일어났던 것을 통해서 대표되는 모든 요점이 바로 여기 몇 어휘 속에 다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붙잡도록 계속 강조하고 주장하고 있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직접 대하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의 방식과 그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계획과 의도를 이해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막의 "예배"를 통해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식이 그 성막의 "예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점은 너무나 중요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간교하게 그것을 고치려고 들 때는 매우 끔찍한 방식으로 교훈을 얻곤 하였습니다. 고라, 다단, 온과 아비람, 네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그들이 함께 모여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모세와 아론에게만 국한시켜야 하느냐? 그들이 누구냐? 우리나 그들이나 다 같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이러한 일을 하기에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 네 사람은 그 점에 합의하였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기들의 생각이 옳음을 믿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소위 고라의 반역이라는 것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무섭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땅이 갈라졌고 그들은 삼킨 바 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일이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그런 식으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이 점을 부각시켜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방식을 채용하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9:4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언약궤의 내용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거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건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의 지팡이로 싹이 나게 하시고 꽃이 피게 하시는 이적을 통해서 단번에 그 점을 확증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아론만이 대제사장이요, 아론만이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러한 이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고 계시하신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성소에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예배할 수 있는 오직 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함'이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방식에 손을 대거나, 그 방식에서 무엇을 제하거나 더하거나, 아니면 그 방식을 변경하거나 멸시하면 참으로 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고라의 반역과 심판. 아론의 싹난 지광이 등은 우리로 하여금 영구히 바로 그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의 의미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또 다른 어휘인 "약속들"이라는 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어휘를 통해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앞에서 말한 언약들과 뒤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약속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어떤 것을 보편적으로 공포하는 것과, 그 공포의 내용을 상세하게 말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았듯이 언약들을 통해서 구원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이 계시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계시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구원의 일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행하실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진수입니다.
그러면 약속들은 무엇입니까? 그 약속들은 이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체계로부터 결과 되는 특별한 축복들을 지칭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약속들은 메시야 시대의 복락들과 영광들을 지칭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메시야와 그 통치에 속한 모든 자에게 주어지게 될 상세한 축복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메시야의 통치가 이미 그 백성들, 곧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 이미 임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이미 임한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형태로 임하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들 중 어느 것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나머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들"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풍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읽고 알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부분과 어떤 대목만을 읽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적어도 일 년에 한번은 성경을 통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약속들과 예언들을 발견하고,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의 예표들이 무엇인가를 그 성경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구약 속에서도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예언들은 메시야 시대의 영광에 관한 예언들입니다. 창세기 49:10을 예로 들어봅시다. 늙은 야곱이 죽을 때 그 가족 전체를 불러 모으고 축복합니다. 유다에 관하여 그가 한 말은 이것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 바로 그 메시야를 가리켜 하는 말씀입니다. 메시야 시대의 여러 특징들 가운데 어떤 것에 관한 한 약속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경우들을 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약속들 중 한 약속이 발람이라 부르는, 삯을 받고 예언한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민수기 24:17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발람은 바른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삯을 받고 예언한 그 발람은 메시야 시대의 영광에 속한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시편은 그러한 예언에 대한 대단히 많은 분량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고 예고하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련 45편과 72편입니다 - 메시야 시대의 영광에 관해 놀라운 시편이 바로 45편인데, 그 시편은 메시야의 신부인 교회에 대하여 또 예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가서에서도 그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예언서에 보면 대소 선지자들이 모두 다 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통치를 통해서 도래하게 될 축복들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가 사슴처럼 될 것이다", "소경이 볼 것이며 귀머거리가 들을 것이며." 그 모든 예언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35장, 이사야 53장의 마지막 부분, 이사야 55장, 이사야 60,61,62장 - 이 모든 장들이 메시야 시대의 영광에 대한 약속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고린도후서 1:20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들이 바로 그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아주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큰 약속들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된다 할지라도, 도래하는 메시야 시대를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수세기 동안 지탱해 준 것이 바로 그 약속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그 약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2:11-12에서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전에는 그것을 갖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바울은 언약들과 약속들을 함께 묶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은 정말 절망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시대나 오늘날이나 이교도는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어떤 약속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가 사람들의 약속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는 부단하게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약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놀라운 약속을 가졌었습니다. - 황금 시대, 장차 도래할 시대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그들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수나 그 나라의 크기는 아주 작았습니다. 그 주위에 잇는 큰 열방들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약속이 그들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왕조가 일어났다가 쓰러지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이 그들에게 응할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들을 주셨고, 그의 맹세로 그것들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라"는 것입니다. -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 바울이 어째서 그 어휘를 특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점강법(漸降法)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계속 나아가서 있는 것입니까? 이 "조상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이 우선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지칭하고 잇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또한 요셉과 모세와 다윗을 포함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단하게 가리켜 왔던 특별한 조상들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그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선조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스라엘 자손의 내력이 이어져 내려가게 하였습니다. 이삭과 야곱 때에 그 약속을 계속하였고 언약들을 주는 데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도 전체 이야기 중에서 정말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모세와 다윗도 그러하였습니다.
바울이 "조상들"도 저희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무엇 때문에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위대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상 위대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발견하듯이 그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나 높여졌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 영적인 사람들과 육신적인 면에서 위대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언급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특별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친밀한 방식으로 이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속한 모든 이에게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특별한 예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매우 가까이 임하셔서, 친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보면 자기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집을 도망쳐 나온 후 밤을 맞을 때 돌을 베개로 하고 누워 잤었습니다. 그런데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까지 닿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매우 가까이 임하셨고, 또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조상들"을 그처럼 예외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바울이 다른 모든 항목에 있어서 말해 왔던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는 내내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예외적으로 친밀하게 다루셨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점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창세기 32장의 브니엘에서 다시 야곱을 만납니다. 그 밤에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이 모든 같은 일의 한 부분입니다. 요셉의 이야기 속에도 역시 같은 것이 해당됩니다. 특히 모세의 경우에도 역시 같습니다. 물론 다윗과 같은 사람의 경우에도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조상들!" 그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 속에서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특권을 인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조상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실 때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정말 독특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조상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한 다른 모든 어구에도 그 점이 해당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물들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삭과 같은 사람이 언급되는 것은 그 언약이 이삭에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그처럼 친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안 것은 이삭이 바로 그러한 노선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줄기에 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는 어구가 성경에서 반복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 어구를 통해서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 사람만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그처럼 직접적이고 친밀하게 다루었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조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하나님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알리는 계시를 매우 분명하게 그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정작 오시니 유대인들은 바로 그것을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소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그의 논증을 어떻게 엮어 나가는지를 주목하셔야 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비상한 체험을 나누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참으로 예민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에도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후손들도 마땅히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후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사도가 뒤에서 말하듯이 귀를 막고 돌아섰습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으로 벌렸노라." 이스라엘이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같이 하지 아니하였고, 이삭이나 야곱과 요셉, 모세나 다윗도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조상을 잊었도다. 너희가 이 사람들의 이름을 높이나 너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도는 이제까지 한걸음 한걸음 계속 더 올라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 때까지 나아왔습니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 궁극적인 봉우리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누린 그 모든 특권들 중에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크고 가장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세상 구주 메시야께서 그들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 메시야가 그 유대인 중 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백성들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나오셨습니다. "이새의 뿌리",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구주께서 바로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오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특권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요점을 놓쳐 버렸습니다.
물론 그가 언급한 앞의 모든 것들이 진리가 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 그 요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의 요점과 목적이 그것입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 양자됨! 언약들! 율법을 주심! 하나님을 예배함! 약속들! 조상들! 어째서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해당되었습니까? 그들이 메시야가 나오는 민족이 되기 위한 바로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으로부터 이 복되신 구속주, 메시야가 오시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15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도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다윗의 자손도 됩니다. 사도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전체의 요점이다. 이 점은 성경에서 정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 3:16의 논증을 생각해 봅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바로 이 백성들이 너무나 눈이 멀어 그 자손이라는 말과 자손들이라는 말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네 자손"이라는 단수 명사에 엄청난 강조점이 주어져 있는 것을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 한 분에 대한 강조점을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그것이 완벽하게 지적되어 있고, 실제적인 사실로 일어났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따라 나셨을 때, 바로 너희, 즉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이 위대한 진술의 첫 부분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 점에서 멈추고 그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라는 말씀만 읽어 본다 할지라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한 존재 가치가 있는 그 엄청난 진술을 논란거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며, 그것이 그처럼 큰 논란거리가 되어 우리가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논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전체적인 문제는, 바로 이 구절이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느냐, 하나님 자신에게 드리는 송영에 불과하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라는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서부터 서로 논란을 벌입니다. 산데이(Sanday)와 헤들람(Headlam)이 쓴 유명한 주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진술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다른 어떤 단구보다 훨씬 더 장구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해야 합니까? 논쟁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만물 위에"라는 어구에 대하여 사람들이 난색을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문제를 먼저 살펴봅시다. 여기서 "만물"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뜻합니다. 그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됩니다. 또한 어떤 수의 사람들만을 다스리는 것으로도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다른 모든 것 위에라는 뜻입니다. - 전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위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어구가 누구에게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냐?"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고, 하나님아버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여러 번역본들이 판매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여러 번역본들을 삽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어야만 이 번역본들이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삭감시키거나, 하나님의 아들의 독특한 신성을 빼앗으려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수준이나 척도로 내려뜨리려는 마귀적인 뚜렷한 경향을 보이는 시대입니다. 그런 일은 지난 19세기에 시작되었고 이 20세기 내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모든 유의 "종교들"이 자기들을 선전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세일즈맨들이 우리 집 문 안에 와서 자기들의 책을 팔면서 성경을 믿는 것처럼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성경을 아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 주부들은 이런 사람들의 미끼와 희생물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책을 사 줌으로써 그들의 부패한 교리들을 선전하는 꼴이 됩니다. 또한 그들의 돈 주머니를 더 부풀게 해 주고, 그들의 선전에 홀딱 빠지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함께 숙고하고 있는 이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분명히 아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흠정역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육신으로 하면 만유 위에 계신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서 나셨다 아멘"(and of whom as concerning the flesh Christ came, who is over all, God blessed for ever. Amen). 매우 분명하지 않습니까? 줄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정역(RV)은 어떻습니까? 역시 거의 방불합니다. 웨이머스(Weymouth)의 번역도 그러합니다. 다른 번역들은 어떠합니까? 새 영어성경(NEB)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 성경은 그리스도를 "만유에 계신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번역은 이런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육신적인 혈통으로 말미암아 메시야가 저희에게서 나오셨다 만유에 높으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로다." 여러분은 그 번역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그 번역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하지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을 그것에 모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도 아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새 영어성경은 놀랍고 신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책을 사서 읽으라. 흠정역에서 만나는 난해구절을 전혀 만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된 성경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정확히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미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책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그 칭호와 그 영광을 박탈해가고 감추어 버리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사실상 그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개정역(RV)의 번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관점을 번역의 문제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1840년경 독일의 신학교에서 일어난 고등비평 운동과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정역을 번역 출근하여 공개적으로 판매하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그것이 처음 공중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비록 그 개정역이 이 어구는 사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일이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난하주에 보면 다른 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대안들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육신을 따라 저희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 만유에 계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로다."
2.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저희에게서 나셨다 만유에 계신 그분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시다."
3. "육신을 따라서는 만유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나셨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
다른 말로 해서 이 세 번째 번역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 말하고 구두점을 찍습니다. 그런 다음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라는 말을 뒤따라 넣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주목하다시피 이 세 가지 가능한 각 경우마다 찬미를 하나님아버지께 돌리고 있고 성자 하나님께는 돌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지난 2차대전 후에 매우 인기가 있었고, 매우 광범위하게 팔린 미국의 표준개정역(RSV)은 어떠합니까? 표준개정역은 그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서 그들의 족속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셨다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미하리로다. " 정확히 다시 같은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모펫(Moffat) 번역본에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육신의 혈통을 따라서라면) 그리스도도 저희의 것이다(만유위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시리로다)."
역시 다른 번역도 있습니다. 이 번역을 소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후회스럽게 생각하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 주는 바대로 적극적인 정보와 교훈을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아야하는 것이 교사의 책임입니다. 지혜로운 교사는 사람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위험과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교사입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합니다. 자기 양떼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거나, 그들의 유익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나, 미리 사전에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양떼들에게 경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목회자는 삯꾼 목자요 목회자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고별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을 준비시키고 경고합니다. 너희 중에서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양몌를 약탈할 것이다. 그들이 위험천만하고 저주어린 이단들을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 그는 유사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은 저의 임무입니다. 지난 시간의 강론에서 글래스고우 대학의 교수인 월리암 바클레이 박사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다시 언급해야겠습니다. 많은 복음적인 사람들이 그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도 바클레이 박사에 대하여 공정한 입장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는 능숙한 언어학자입니다.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훌륭하면서도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언어학자와 훌륭한 신학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클레이 교수는 공언하기를 자기는 성경에 대하여 "고등 비평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속죄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보편구원론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주석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이 저희에게서 나오셨다.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히 찬미를 받으시리로다. 아멘." 그는 거기서 머물러 버립니다. 그가 뜻하는 바는 정말 평이하고 분명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또 다른 번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드(C.H. Dodd) 교수의 번역입니다. 한때 옥스퍼드에서 신약을 가르치신 교수였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가르쳤습니다. 그는 매우 인기리에 판매되었던 로마서 주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 대목을 어떻게 번역하는지요? "만유에 계신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실 하나님이 저희의 것이요" 우리 주님과는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새로운 문장 어구를 만들어서 이 동일한 개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석에서 더 나아가서, 어째서 사도가 갑자기 이 송영,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추신을 담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다드 교수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이 생각이 나서 바울은 갑작스럽게 찬미를 터뜨린 것이다." 그는 그와 같이 번역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새로운 번역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 모든 사람들이 흠정역 번역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답은 이러합니다 - 다시 다드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하는 경우라면 바울의 서신들에서 이것이 오직 유일한 것이 되는 셈이다. 비록 그리스도께 신성에 합당한 여러 기능들과 찬양들을 돌린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직접 지적하여 부르는 일을 피하고 있다." 그것이 그 교수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흠정역의 번역을 바꾸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중요합니까? 어째서 우리가 이 문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어째서 이런 여러 대안적인 번역들에 대하여 답변해야 합니까? 어째서 우리는 흠정역의 번역을 지켜야 하며, 어떻게 해야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음 강론에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특히 이 시대의 당신의 백성들에게 분별의 영을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느슨하고 무기력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모두 다 함께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 함께 일하자. 로마 교회도 받아들이자. 우리가 모두 공산주의에 대적하고 있는 한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그러한 기류와 풍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그러한 풍조 속에서 가장 보배로운 진리들 가운데 일부가 팔려지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편에서의 무지가 그러한 일을 막아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그 교활함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채서 저항해 나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과 힘을 주시는 한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내버려 두어야겠지만, 이같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복되신 주님으로부터 그의 영원한 특권들을 박탈해가려고 하는 한 침묵을 지킬 수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