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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 사건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 사건


노승수 목사


구속사라는 말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소박하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가지신 구원의 계획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구속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속사건 혹은 구속계시라고 엄밀히 나누어서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은 헤르만 바빙크(Hereman Bavinck)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하신 세 번째 큰 사역으로서 창조사역과 성육신 다음의 큰 사역이요, 성육신 다음의 신비입니다. 성령께서 오실 수 있게 된 근거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성령의 역사적 오심이라고 부릅니다. 역사에 반복이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 반복적이지 않듯이, 성령의 역사적 오심 역시 반복적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적 오심이란 말 그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그 성전을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행위이며, 이 행위는 사람의 노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에 근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회적 사건이라면, 역시 성령의 역사적 오심 역시 단회적 사건이어야만 합니다. 
오순절에 하나님은 인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로써 심판과 구원의 두 역사가 이미 완성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구속이 전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면, 성령은 이 구속의 역사를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가장 주된 사역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여 부르신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과 거듭난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일이 오늘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아직” 그 사역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적 오심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과 심판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속 사역이 완성 되면 성령의 내주가 구원 사역의 확장과 연관되지 않을 것이고 새 인류에의 내주가 완전해 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새 인류에의 하나님의 내주가 성령 오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 강림은 구약에 약속하신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출29:45)의 성취이며, 이 일은 종말에서 완성될 것입니다.(계21:3) 
성령의 역사적 오심은 하늘 본처로 가셨다가 또 오시고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 처음 인류에게 오신 날부터 떠나시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관련해서 방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보면, 각기 다른 혀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혀는 성령 강림의 상징적 표지인 불의 혀와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성령 강림시 사도행전은 두 가지의 표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급하고 강한 바람이며 다른 하나는 불의 혀가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 표지는 세례요한의 설교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마 3:11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겠다는 본문은 뉘앙스 상 폭풍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독해하는 것이 더 온당해 보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공히 바람과 영이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 3:10-12의 문맥을 보면, 세례요한의 자신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 곧 메시야의 세례는 회개가 아니라 심판의 세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읽기가 온당하다면, 응당 폭풍과 불로 읽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두 가지 표지 역시 급하고 강한 바람 곧 폭풍과 불의 혀, 곧 불입니다. 이 해석은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뒷받침이 됩니다. 요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를 해설하는데, 여호와의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구약 안에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날은 믿는 자에겐 구원의 날이요, 불신자들에겐 심판의 날입니다. 마치 노아에게 홍수가 구원의 날이지만, 노아를 따르지 않던 이들에겐 심판의 날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날의 이중성이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아모스서입니다. 이 여호와의 날은 아모스의 말처럼 기쁜 잔치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암 5:18-24).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은 구약신학에서 계속적으로 확대됩니다. 베드로가 요엘서 본문의 여호와의 날을 인용하는데, 요엘 2:28이하의 내용입니다. 원문에 "그 때에"를 "말세에"로 옮겨 인용합니다. 즉, 오순절 성령의 오심의 사건은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이요. 그 내용이 오늘 너희에게 성취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의 메시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에 뒤따른 심판과 구속의 완성의 사건입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빗나갔지만, 오순절 방언은 각 나라의 말이었고, 사도행전이 증거하는대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과 그것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한 해설을 베드로가 설교를 통해서 풀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방언은 단순히 현대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시의 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구속 계시과 그 확증으로서의 성령의 역사적 오심이라는 큰 계시적 틀에서 방언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계시라는 점에서 이 모든 날의 마지막에 아들로 계시를 하신다는 성경의 증언에 따라(히 1:1-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그것을 확증하는 성령의 오심, 그리고, 에베소서의 증거를 따라(엡 2:20), 교회의 기초를 사도와 선지자 위에 세우셨다는 점이 계시가 종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혹자들이 요즘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요즘도 사도나 선지자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요 사기꾼들입니다. 여러분 집을 2000년간 짓다가 다시 헐고 기초를 다시 놓는 그런 경우를 보셨습니까?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석입니다. 그들이 왜 교회의 기초석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가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적 오심을 위한 교회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사도들이 임파테이션(전이)에 의해 성령을 나누어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 집에 갔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을 것을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령세례라고 주장되는 극히 개인적인 체험과는 달리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은 공동체적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강림(행 2:1-4), 사마리아의 성령강림(행 8:14-17), 이방인의 대표인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10:44-38), 모두가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적 체험이었습니다. 세 사건 모두 사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사도행전 1:8에 나타난 예루살렘, 사마리아, 땅끝의 대표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행 1:8의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는 동방과 서방의 공통의 신앙고백서에서 교회를 4 가지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의 교회, 사도적 교회입니다. 현대의 교회가 이렇게 나누어져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이며, 그 교회는 거룩하며, 보편적인 공적 교회이며, 사도적입니다. 사도행전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 까지 성령강림 사건에는 항상 사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 때, 얼마든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오고나서야 성령이 강림합니다. 이방인 고넬료도 마찬가지이지요,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둘째는 사도적 교회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그냥 우리가 위임식을 행해서 세울 수 있는 것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그의 사역과 죽음심, 그리고 그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자 그의 생전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도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의 확증과 더불어 신약 계시도 종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속과 심판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그럼 이 완전한 성취가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에게 적용되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지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 본대로, 방언은 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이 목적이지, 성령세례의 표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13장에 더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은 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더 온전한 것이 바로 신약의 완성된 계시이며, 이 완성된 계시로 인해, 더 이상의 방언의 계시적 성격이 다 폐하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방언만 하지말고 통역하기를 힘쓰라 했습니다. 이 말은 방언 자체가 계시적 성격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이 어디 그렇습니까? 이는 오늘날 사이비 예언집회와 아주 흡사한데, 저의 블로그에서 "점술같은 허황된 예언 집회"<<클릭 검색해 보십시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람들에게, 방언한 것을 녹음해서 가져가 보십시오. 다 다른 해석을 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은사입니까?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의 역사적 오심이며, 이 예언은 종국적으로 계시록의 예언처럼(계 21:3),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온전히 성취될 것이며,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신 사건은 왔다 갔다 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들어오심을 의미하며, 그 역사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신 결과 이 땅위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하고, 주로 인정하게 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세례가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자는 사도행전에 믿는 것과 성령받는 시점이 다름으로 인해 오해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오심이 예루사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사도를 통해서 전파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생긴 신약 시대의 불일치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적 오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처럼 단회적인 사건이요, 다시 반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