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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치명적 죄와 중독(5) : 탐욕

치명적 죄와 중독(5) : 탐욕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 3:5-
노승수 목사
탐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아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뭔가를 욕망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경계를 의미하는 ‘아와’에서 파생된 단어로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라틴어는 아바라치아(Avaritia)는 욕심을 뜻하며 이를 간단히 설명해주는 라틴어구 리비도 도미난디(libido dominandi)는 권력 의지,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지배하고 사용하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이처럼 탐욕은 경계를 넘어선 욕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쳐 계속 소유함으로써 부당하게 돈을 획득하고……. 훔치려는 마음이 없다 해도, 너무 많은 부를, 부를 통해 과도한 쾌락을 얻고자”하는 마음에서 탐욕이 드러난다고 했다. 라틴어 탐욕에서 온 영어 단어 는 Avarice이다. 로버트 맥크랙캔(Robert J. McCraken)은 그의 책<죄란 무엇인가? 미덕이란 무엇인가?>에서 탐욕을 이렇게 정의했다.
탐욕(avarice)! 이 영어 단어의 마지막 세 글자를 주목하라. - 얼음(ice). 어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두쇠는 비참한 사람을 암시한다. 탐욕스런 사람을 경쾌한 발걸음과 얼굴에 미소를 띠게 그린다는 것은 화가로서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왜 탐욕이 치명적인 죄인가? 탐욕은 추악하고 해로워 결국 불행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그것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결국 그를 파멸시킨다. 마음이 차가워지고 위에 궤양이 생기고 영혼이 궁핍해진다.
탐욕이 이처럼 냉담함과 차가움과 결부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성경에서도 탐욕은 이처럼 냉담한 이기심으로 그려진다. 누가복음 12:15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가 그러하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탐심에 대한 경고에서부터 시작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비유하셨는데, 어리석은 부자가 곡간을 크게 짓고 곡식을 쌓아 두고 행복하라고 자기 영혼에서 명하지만 결국 그 영혼을 하나님이 찾으시면 무익하게 됨을 비유로 했다.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이 냉담함이 더 극명하게 그려진다. 부자의 집 앞의 나사로는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음에도 전혀 돌봄을 입지 못한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돕고자 하는 마음을 막으면 어떻게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겠느냐?”는 요한 사도의 말씀은 탐심이 그저 이기적 욕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끼쳐지는 해악임을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쓰기보다 더 넉넉한 소유를 주심은 배부르게 먹으라. 주심이 아니요 궁핍한 이웃을 돌보라고 우리에게 청지기의 사명으로 맡겨 주신 것이다. 이것은 16장 전반부의 청지기의 비유가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이 비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내가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믿어도 좋다. 주인의 가산을 낭비하다시피하는 것을 오히려 주인이 칭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물질의 소유주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저히 소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이 비유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눔과 베품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미덕이다.
이 냉담한 이기심을 잘 보여주는 문학에서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피요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의 고전 소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양파의 비유가 이 이기적 냉담함의 파괴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옛날 농사짓는 한 여인이 살았다. 이 여인은 매우 사악한 여자로 그녀가 죽었을 때, 단 하나의 선한 행위도 남기지 않았다. 마귀가 그녀를 잡아 불 못에 던졌다. 그녀의 수호천사가 서서 그녀의 선한 행위가 없었나 궁리하다가 기억하여 하나님께 아뢴다.: “그녀나 한 번 그녀의 정원에서 양파를 뽑아서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천사가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는 그 양파를 가져와 불 못에 있는 그녀에게 내밀어서 잡게 한 수 잡아당겨라. 만약 그녀를 불 못에서 끌어올리면 그녀를 낙원으로 데려갈 것이지만, 만약 양파가 부러지면 그 여인은 불 못에 계속 있어야 하느니라." 천사는 그녀에게 달려가 양파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어서 양파를 잡으시오. 내가 당신을 끄집어내겠소.” 천사가 말했다. 그러고 천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 올렸다. 그가 막 그녀를 끌어내려는 순간에 불 못에 있는 다른 죄인이 그녀가 끌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녀와 함께 끌려 올라가려고 그녀를 붙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내가 나가야지 당신은 아니야. 이것은 내 양파이지 당신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녀가 이 말을 하자마자 양파는 부러졌다. 그리고 그녀는 불 못으로 떨어져 지금까지 고통당하고 있다. 그러자 천사는 슬피 울며 갔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p. 423-24.
물론 위의 사례가 성경적 타당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공로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만 위의 예가 보여주는 것은 탐욕의 성격에 대한 은유이다. 이처럼 탐욕은 이기적 욕망에서부터 출반한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긍휼과 선행인 양파마저도 결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쌓아 놓고 나누기를 거부한다. 내가 가지기는 심드렁하지만 남을 주기엔 아까운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을 일컫기를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벧후 2:14)라고 말한다. 참으로 냉혹한 정죄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 지나친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이 말 곧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를 자신과 연관시키는 것을 정신적으로 회피한다. 탐욕은 마치 냄비 속의 개구리와 흡사하다. 이것에 의해 연단되어져 가는 과정은 적은 온도의 변화로 우리가 감지하기 어렵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른다.'(약 1:15)는 말씀은 이런 탐욕의 은밀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따뜻하다 따뜻하다를 외치다가 익어 죽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길 원한다. 여성이 예쁜 핸드백을 하나 사면 그 핸드백에 어울리는 옷을 원하고 그 옷에 어울리는 구두를 원한다. 케이 아서(Kay Arthur)는 이것을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했다. “탐욕은 중독이 된다.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게 된다.”고 했다.<여성의 삶을 바꾸는 8가지 선택>에서 질 브리스코 (Jill Briscoe)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돈과 권력과 성적욕망을 갈망할 수도 있고, 화장품, 책, CD, 창고 대방출 세일 같은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기도 한다. 간혹 사탄이 우리가 가진 모든 갈망에 관심 있어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갈망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사탄의 유일한 관심사는 각양각색의 '건수'라는 덫을 이용해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어 두는 것뿐이다. 사탄은 처음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중독에 병들어 그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 다음에는 가진 것들을 그대로 보전하고 싶은 마음의 욕구를 상대로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부를 차곡차곡 쌓아 둔 우리 자신을 집중 공략한다. 이제부터는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혼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건, 근심이다. ...중략. 재물을 쌓아 두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은 내적으로 파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은행 잔고를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영혼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거기에는 끔찍할 정도로 비뚤어지고 썩어 빠진 역겨운 감각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중략... 영국에 살 때 누군가의 부고를 듣고 웃은 일이 있다. 법정에서 유언검인이 있은 뒤에 얼마나, 누구에게 남겼는지에 대한 고인의 유산 내역이 지방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신문을 읽고 계시던 시아버지는 부엌에서 일하시는 시어머니를 부르셨다. "재미난 기사가 났군. 존즈 여사가 세상을 떴어." "정말이에요?" 시어머니는 놀라서 물으셨다. "그래, 얼마나 남겨놨대요?" "몽땅 다!" 시아버지는 재치 있게 답하셨고, 우리 얼굴에는 웃음이 지나갔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현실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탐(貪) 진(瞋) 치(痴)를 삼독(三毒)이라 불렀다.<탐>은 탐욕을 일컬음이요.<진>은 분노를 말하며,<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대체로 우리가 분노하는 원인은<욕심껏 되지 않음>때문이다.<욕심대로 되지 않음>이 인생이건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것을 계속 추구함이<어리석음>인 것이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최대의 적은 바로 탐욕이 자라 이룬 열매 곧<무지>이다. 미국과 세계 경제가 레이건노믹스에 의한 신자유주의 경제를 채택하고 가장 큰 위기를 지금 맞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서부터 비롯된 경제위기는 미국을 건너 아시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소득보다 훨씬 더 많은 소비를 창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계에<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듯이 경제 원리 역시 생산 활동을 인해 창출된 부가가치보다 더 높은 소비를 유도하는 이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지금 세계는 먹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어리석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무식이 용맹>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무지 속에는 분노가 가득함을 보여주는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분명 우리의 탐욕에서부터 출발한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화낼 일이 많다. 왜 그런가? 남의 아이에겐 관대하면서 나의 아이들에게는 화를 내는가? 그것은 아이의 현재의 상태보다 부모의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분노는 탐욕의 증거인 셈이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켜 비합리적 결정들을 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성경은 왜 탐욕을 일컬어 우상숭배라고 하는지 알겠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영적 무지의 결과물이다. 탐욕은 통계적으로도 입증이 된다. 미국의 자선 행위 실태 보고서인 Giving USA의 통계를 보면 1년 수입이 5,000달러 미만의 가정들은 그들의 수입의 5.9%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반면, 1년 수입이 10만 달러에서 15만 달러를 버는 가정은 수입에서 기부액의 규모는 4.1%를 지출한다. 탐욕은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탐욕의 다른 특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요일 3:17의 KJV을 보면, ‘But whoso hath this world's good, and seeth his brother have need, and shutteth up his bowels of compassion from him, how dwelleth the love of God in him?’ 번역하면, ‘이 세상의 물질을 가진 자가 형제의 필요함을 보고도 동정의 내장을 닫으면 어떻게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겠는가?’로 옮길 수 있다. 성경은 종종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리를 장기에 비유했다. 우리말에도<애가 탄다>혹은<애 끊는>등의 표현에서 애는 창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처럼 탐욕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탐욕은 하나님과의 동거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강의안으로 참고문헌과 각주는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