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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치명적 죄와 중독(7) : 식탐

치명적 죄와 중독(7) : 식탐 
식탐은 호색의 쌍둥이 형제이다.
맥시 더남
노승수 목사
식탐은 호색과 그 특징이 너무나 같기 때문에 정욕의 쌍둥이 형제로 불린다. 그것은 부당한 갈망이다. 식탐은 결코 완전히 만족하지 못할 육체의 즐거움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을 탐내는 것과 관련되며 주로 음식을 탐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술과 담배를 너무 많이 하는 것 역시 과식하는 사람처럼 식탐하는 것이다. 정신 역동 이론에서는 이와 같은 음식이나 흡연 등에 대한 집착은 구강기적 고착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위장이나 몸의 만족이 아니라 입의 만족이라는 것이다. 유아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양육자에게 위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심하며 공감적인 부모가 아이의 욕구와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서 이 욕구를 해결해주면 이런 고착이 생기지 않는다. 고착은 주로 부모의 자기 중심적 반응에 의해 유아의 욕구가 왜곡될 때 생긴다. 과도하게 만족이 계속적으로 주어지거나 반대로 적절한 만족이 주어지지 못할 때 역시 고착이 생긴다.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다음의 발달과업의 성취에서 좌절을 겪게되면 퇴행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퇴행적 고착으로 구강기적 성격이 자리잡게 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이런 욕구는 완전히 만족을 주지 못한다. 리처드 홀로웨이는 식탐에 관한 적절한 표현을 했다. 
너무 많이 말하는 자, 정적을 깨고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끊임없이 떠드는 수다쟁이는 먹기를 그칠 수 없는 식탐가와 같다. 호색과 식탐에는 많은 부분의 공통점이 있지만, 이것에서 주로 일치한다. : 이것들은 모두 균형과 비례를 잃어버렸다. 자연스러운 식욕을 다른 것들을 배려함으로 균형을 찾아야 하는 본능으로 보지 못한다. 대신에 이것들은 불균형한 역할을 하게 함으로 전 인격체를 지배하고 조정한다. 비극은 결국, 식탐하고 색을 밝히는 사람들에게서 한 때 그들을 매료시켰던 기쁨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있다. 술 주정뱅이는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는 압박감 때문에 쫓기고 그 고통을 잊으려 애쓰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의 섭취, 우리가 먹는 것, 먹는 방식, 마시는 것, 마시는 방식이 우리 존재를 형성한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 그 자체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참으로 그러하다. 중세 사상가들은 식탐과 호색을 육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으로 보았다. 바울도 특별히 음란에 대해서는 다른 죄는 몸 밖에 있지만 음란은 몸 안에 죄를 짓는 것이라 정의한 바가 있다. 이처럼 식탐과 호색은 몸과 연관되어 있고 그런 까닭에 통제가 어렵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아의 정체성을 우리 육체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부인할지 모르지만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자기의 가치가 바로 이 육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방암으로 유방절제수술을 받은 여성의 고민은 죽음의 공포보다 여성으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손상으로 더 많은 고민을 한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 육신과 매우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별명이 살찐 돼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식탐을 먹고 마심에 무절제한 욕망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상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천하는 이성적 지시를 저버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절제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레고리 1세는 식탐의 악덕을 5가지로 구분했다. “어떤 때는 급히 먹고, 어떤 때는 값비싼 고기를 찾으며, 어떤 때는 까다롭게 요리된 음식을 찾고 어떤 때는 지나치게 과식하여 원기회복의 정도를 넘어서고 어떤 때는 극단적인 식욕 그 자체로 죄를 짓는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급하게, 사치스럽게, 너무 많이, 까다롭게, 탐욕스럽게 먹는다면 그것은 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다. 바울은 빌 3:19에서<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이 식탐의 삶을 적절히 묘사했다. 식탐가들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섬긴다. 자신들의 식욕, 호색함을 위한 정욕, 탐심에 경의를 표하고 과시적 소비문화가 찬양거리가 된다. 우리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먹지 않고, 먹기 위해 산다. 그것은 음식, 술, 마약, 담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욕구를 채워 줄 방도와 물건들을 과도히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 카드 사회는 지연된 만족에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즉각적 만족을 당연한 권리로 주장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식탐으로 인한 과체중이나 비만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화학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음식을 절제함으로 간단하게 체중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거운 체중에도 불구하고 비만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음식을 탐하고 항상 과식하는 생활 때문에 감정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고통받는다. 신경 과학자들은 인간의 비만에 대해 합의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또 화학적으로 불균형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비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특별히 음시, 알콜, 담배에 관련된 방종이 화학적 불균형을 만들어 우리를 중독시킨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고칼로리 식사가 뇌신경계의 도파민 과다로 인한 도파민 수용체의 이상생성으로 충동조절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식탐이 치명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들을 마다하고 입에만 단 피상적인 것들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는 식욕을 억제하려고 애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과체중이다. 전문가들은 체지방율이 30%가 넘는 사람을 비만으로 규정한다. 현재 25세가 넘는 사람의 3/4이 비만이다. 비만은 내부에 든 간자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배신하여 심장병, 뇌출열, 당뇨병을 일으킨다. 어떤 이는 흡연, 알콜 남용, 불규칙적 식사, 운동 부족 등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Christianity Today에 실린<살찐 신앙인들>이라는 글에서 버지니아 스템 오웬스(Virginia Stem Owens)는, 일반인에 비해 종교인들이 더 비만하다는 한 연구를 다룬다. 이 연구의 저자는 음주와 흡연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도 식탐은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무조건적 사랑과 만인에 대한 편견없는 수용이 요청되는 시대에 식탐을 우리 영혼의 위협으로 간주하여 설교하는 설교자가 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오웬스는 자신의 뚱뚱한 그리스도인 친구의 예를 들면서 비만은 결코 염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을 짓는다. 오웬스는 엄격한 절제와 같은 덕목에 대체로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 복음주의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 
식탐은 치명적인 죄이다. 그러나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한 것의 남용이다. 이런 점에서 식탐은 행위라기보다는 태도이다. 그것은 생활로 드러난다.<탐>은 입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먹고 마시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대다수의 식탐가들은 과식으로서의 식탐이 아니라 미식으로서의 식탐에 더 탐닉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고기를 즐기는 비둔한 자만이 식탐이라는 죄에 빠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의외의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채식주의자들도 쉽사리 식탐에 경도된다. “자신에 대해 너무도 조목조목 까탈스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들은 자기 사랑에 빠져 있다. 그들의 눈은 목욕탕 체중계 아니면 거울만 본다.”(헨리 페어리) 오늘날의 헬스클럽이나 다이어트 교실에 가보라 이 장소들은 사방에 거울로 장식해 놓고 있다. 건강에 적당한 관심을 가질 때는 꾸준한 운동과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이어지지만, 섭생과 몸매 만들기가 인생의 목적이 될 경우 흔히 무절제의 유혹이 따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식탐의 영적인 해악을 “분별력의 마비”라고 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사람들은 사는 것이 따분하고 재미가 없고, 여가를 생산적으로 의미 있게 보낼 수 없다고 느낄 때 불륜을 일으킨다. 많은 여성들이 모든 것을 소유했을 때, 불륜을 일으키거나 술이나 마약에 빠지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나 실패했다고 느낄 때 불륜을 맺는다. 만족이 없는 상황에서 만족할 것을 찾는 것이다. 실패한 자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성공한 자는 자신이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년의 위기”는 모험, 흥분을 찾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위기는 ‘권태’로부터 오기 마련이다. 공허감과 공백기를 채우려는 노력, 곧 존재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지금 왜 식탐을 이야기하면서, 불륜에 대해서 인간의 내적 공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가? 그것은 바로 육체의 양식으로 영혼을 먹이려 애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그것이 호색이든지, 탐욕이든지, 식탐이 되었든지 이것들은 근원적인 죄이다. 바로 육체의 양식으로 우리 영혼을 양육하려는 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결코 성공할 수 없고 필연 중독에 빠져든다. 
샘킨(Sam Keen)은 그의 책<내적 경계(Inward Bound)>에서 권태는 유행병이지만 우리는 공허함을 경험할 정도로 오랫동안 따분하게 살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권태는 이런 점에서 “성공적 실패의 증후”며, “우리는 공허감을 채우고 자신이 가치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소비 생활을 한다”고 한다. 아퀴나스가 식탐을 가장 큰 영적 해악이 ‘분별력의 마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권태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무디게 한다. 
일단 감각 신경이 죽으면, 권태에 빠진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만한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포만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유흥과 오락과 감각적인 자극이 동원된다. 종종 내적 공허감이 배고픈 것을 더 심하게 느끼게 한다. 지나친 과식, 과음, 과도한 흡연, 과소비는 내적 공허를 채우려고 시도해 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내적 경계, 94p>이 강박적 소비는 육체의 양식으로 영혼을 먹이려는 무익한 시도이다. 대체로 실연을 당한 여인이 폭식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주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우리 영혼을 위해서는 영혼의 양식을 육체를 위해서는 육체의 양식이 필요하다.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자신의 몸을 “바보 형제”라 불렀다. 그는 육체가 마음과 영혼의 종이라고 했다. 형제로서 육체는 무시되거나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 존경할 정도로 관심을 갖지만 육체는 우리 마음과 영혼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어야 한다. 앞서도 언급한 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 육체에 두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바로 이런 문제를 부르는 것이다. 육체는 형제로 여기지만 그것이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식탐이 불필요한 음식으로 우리 몸을 채우고 책임질 수 없는 폭식이라는 방법으로 물건을 소비하고 방종과 관련되어 있다. 음식에 대한 집착은 마음을 파괴한다 육체가 우리 영혼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금식은 육신의 양식으로 영혼을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실천하는 도구이다. 팔복의 하나를 말씀하시며 예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식탐은 온당치 않은 배고픔이며, 금식은 영의 양식을 위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표현이다. 식탐은 영적 굶주림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약과 같다.

*강의안으로 참고문헌과 각주는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