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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기타미분류

우리는 성경에 언제나 복종해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에 언제나 복종해야 하는가? 
Is the Bible Always Binding for Today?
-문화적 요소를 고려함-
피터 마스터스/손성은 역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명령이나 행동사례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에게 얼마나 의무적인 것으로 적용될 수 있느냐 혹은 적용되어서는 안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규범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곧, 어떤 본문이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에게도 요구되는 규범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요즘의 크리스챤들에게 더욱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주의자라고 하면서도 여러 가지 성경적인 기준으로 여겨져 오던 것들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요즘 전개되는 상황 때문에 너무나 혼동스러워 하면서, 성경이란 단지 실제적인 우리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관련시켜 보려 할때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책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별로 없다는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의 권위를 방어한다면서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제사법들은 더 이상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위해서 규범이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시기를 발을 서로 씻으라고 하는 것이나,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는 바울의 권면은 어떻습니까? 이런 것들을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노동자들이나 수공예자들와 같이 손으로 하는 일에만 종사해야 할까요? 크리스챤들이 오늘날에도 기적과 이적들을 행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2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도 재산을 처분해서 동료신자들과 함께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눠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처럼 나실인서원을 오늘날 우리들도 해야할까요? 성찬을 시행하면서 언제나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교제의 식사와 함께 시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첫 크리스챤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녁에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에 직면케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분명히 강력하게 요청되었던 어떤 실행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은 요즘에도 실행할 필요가 없는 반면에 어떤 것은 실행해야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의무적인 것과 의무적이지 않는 것 사이에 어디 쯤에 우리는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떤 실행들은 요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 이유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특별한 문화속에서 그런 일들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거룩한 입맞춤은 그 문화, 그 당시에 평화와 사랑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방면의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 그 당시에조차도 동성간에만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서구에서 평화와 사랑을 기원하는 방식은 손을 잡고 악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악수를 하면서 인사하는 것이라면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하는 사도의 말씀을 원리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명령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라는 바울사도의 교훈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명령은 그 시대의 문화가 여성들은 단지 수동적인 역할만을 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주어진 명령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이 문화적 표현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왜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명령도 폐기될 수 없는 것입니까? 이런 방식으로 실은 성경의 여러 가지 명령과 교훈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들을 폐기시켜 버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의 복음주의자들의 진술들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류성이나 충분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말하면서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구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권위적임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역할의 모든 것이라고 끝내버립니다. 성경은 이제 신자들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의 조직이나 실행에 있어서 규범적이지도 않고, 단지 구원의 메시지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분명한 행동규범들을 주셨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답변은, 그렇게 무시하는 것들은 바로 그것들이 과거의 문화속에서만 요청되었던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임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변명의 주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피상성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주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으로 성경 속의 어떤 실행이 과연 문화적인 것인지 아니면 크리스챤의 생활과 교회의 활동을 위해서 영구적으로 복종해야 할 그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일시적인 진리’의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다는 비난이 은사주의운동의 이적을 행하는 사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지는 것을 때때로 보곤 합니다. 계시적 예언의 은사나 방언이나 치유의 표적 은사들은 초대교회 당시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 은사주의 운동가들은 “당신은 성경을 제한해서 성경에 기록된 많은 것들이 임시적일 뿐이고 오늘날에는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만을 골라서 말하고 나머지 것은 더 이상 오늘날 무관한 것처럼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비난이 정말 정당한 것일까요? 표적과 예언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실행들이 임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항구적인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전문적인 용어에 약간 익숙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이 용어는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는 모든 실행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어떤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인 명령이나 그런 행위를 한 사례가 분명치가 않다면,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분명한 보장이나 권위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영국성공회의 39개신조에 나타난 생각보다 분명히 낫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의 정신에 어긋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의식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면 성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는데도 여러 가지 종류의 실행들을 예배 중에 들여올 수 있게 되는, 대단히 ‘느슨한’ 기준이 이것입니다. 이런 견해에 있어서 유일한 통제원리는 그 실행들이 성경에 분명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규정적 원리”는 이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구체적인 명령이 있을 때에만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규정적 원리”는 예배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배만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의 모든 생활에 관련된 원리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전도하며 목양할 것인가, 어떻게 생활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 말입니다.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임시적인 것과 언제나 반드시 지켜야 할 항구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원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우리는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원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실행이 우리가 구체적인데까지 따라야 할 것인지 아니면 문화적인 것이어서 임시적인 것임을 구별해 줄 수 있는, 너무나도 단순한 원리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복음주의 교사들은 무엇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요구되고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상당히 놀라운 시금석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성경의 가르침과 실행이 단지 신약성경에 반복되고 있을 때에만 우리들에게도 타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금석을 따르자면, 제 4계명은 더 이상 우리들의 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금석은 분명코 적절치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식법이 성취되었고 또한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신약성경에서 반복되지 않으면구약성경에 기록된 것 모든 것이 불필요졌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어진 더욱 충격적인 시금석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곧, (1)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이고, (2)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포함되어 있으며, (3)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해 있고, 혹은 (4) 창조의 질서에 관련된 것일 때에만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에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는 없겠지만, 이 한 가지만 말씀드려놓고 싶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서신서에 기록되어진 구체적인 지시들 중 많은 것들을 쓸모없게 여겨버리게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임시적일 뿐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허약한 시금석들이 성경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소위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개진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과 일치하면서 분명하고 명백한 시금석들이 있습니다. 이 시금석들을 이용해서 성경시대의 문화로서 그 시대에만 행하도로 요구된 것인지 아니면 모든 시대의 신자들과 교회에도 적용되는 항구적인 명령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성경 자체가 취소하고 있거나 제한하거나 조정하고 있지 않는 한 모든 성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명령을 우리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는 구절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행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나가서 가나안주민들을 죽이라고 한 것에 순종하여 그렇게 한 것 같이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의 교회에 더 이상 문자적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 필요한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명령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서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될 수는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육신, 그리고 사탄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의식법들을 문자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없어졌음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하게 제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예로서 우리는 사도들에게 표적과 이적을 행하도록 주어진 명령을 들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두 번) 이러한 일들이 전적으로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 수행되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떻게 교회가 운영되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공간상의 제한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해야 합니다. 서신서들을 보면 ‘모델교회형’(pattern church)이 제시되고 있고, 이러한 것이 시대에 따라서 수정되어야 한다는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한 번 명령이 주어졌지만 그 일 후에는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명령의 예로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유대의 마을을 다니면서 제자들에게 선포하도록 하면서 주신 명령을 들 수 있습니다(마10장). 병자들을 고치고, 문둥병자들을 치료하며, 죽은 자를 살리고, 또한 귀신들을 쫓아내어야 했는데, 전대를 취하지 않고 한 벌 옷만을 가지고서 오직 방문하는 곳의 사람들의 호의에만 의지해야 했었습니다. 이러한 명령들이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쯤에 이 명령들은 주님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입니다(눅22:35~36).
둘째, 비도덕적이고 비종교적인 행동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모든 성경구절들은 오늘날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이 원칙은 따질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을 명령한 적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도덕적 권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오직 한 구절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애매모호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는 오늘날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 자체가 해석합니다. 어떤 성경구절의 행위가 우리들에게 요구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면 그 성경구절 외의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구절과 전혀 관계되지 않으면서 한 구절만 어떤 행위가 기록되어 있으면서 또한 해석하기가 애매모호하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시대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른 구절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구절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기록된 그 실행이나 조언이 임시적이거나 그 장소에 국한되었다는 것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찬이 매주일 실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매주일 성찬을 행한 것은, 드로아지역에서만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른 곳에는 이렇게 매주일 성찬을 행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은, 그 지역의 실행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요구되는 규범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찬을 때로는 자주 행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이 점은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하신 말씀에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주어진 일반적인 규범적 명령임이 분명합니다). 한 장소 외의 다른 곳에서도 지켜지고 있던 의무이면서 실행인가? 하고 질문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명령된 어떤 행위가 다른 시대나 문화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복종될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 성경 속의 모든 명령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들도 여전히 복종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 원리는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한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를 초월합니다. 영적이며 도덕적인 가치들은 스타일이나 옷 같은 어떤 외형적인 것에 엄격히 동조하는 것이 아니며, 전포괄적인 것입니다. 성경이 신자들이나 교회들에게 어떤 실행을 명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그렇게 명령되고 있는 것 배후에 깔려있는 영적이며 도덕적인 목적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행동의 외적 형태가 문화적인 것인가, 그래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면서도 그 영적이면서 도덕적인 원리들을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시대에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겸손과 예의, 그리고 호의와 친절을 나타내었습니다. 그 시대와 지역의 문화에서는, 이런 원리들이 발을 씻어주어야 잘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발을 씻는다는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것에 담겨져 있는 겸손, 예의, 호의, 그리고 친절입니다. 이런 내적 원리들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그 당시와 그 지역의 사회적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날씨가 아주 추운 지역이라면, 샌달같은 것을 신지 않습니다. 그리고 길이 그렇게 모래나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곳이 아니라면,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고맙게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모독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겸손, 호의와 친절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특별한 방식을 반드시 채택해야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발을 씻는 것이 이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들의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원하시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발을 씻는 일 그 자체에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 그 당시에만 유용했던 방식일 뿐입니다. 겸손과 호의, 친절을 나타내고 싶은 태도는 ‘문화적으로 옷을 입을 수 있’고 그것은 다른 문화 속에서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어떤 의무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빌립보서3장3절에 나타난 정신과 조화가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기독교는 외형적인 어떤 행위에 일치하려고 애를 쓰는 종교가 아닙니다. 외형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예식인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 뿐입니다. 로마서14장17절도 같은 방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해서, 교회의 운영과 실행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들이 깡그리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의 교회를 위하신 하나님의 설계의 한 부분이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시대에 실행된 어떤 것이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인지, 혹은 그 명령이 우리시대에 맞는 문화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질문만 간단히 해 보면 됩니다.
질문A. 그 행위가 성경시대에 사회적 관습이었는가?
질문B. 그 밑에 깔려있는 영적 원리나 목적이 다른 방식으로도 잘 표현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시대에 실행되던 관습이 그 원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만약 그 답들이 모두 “예”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외형적인 행위는 문화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화에 맞는 방식으로 그 행위 속에 담겨져 있는 영적 원리와 목적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질문들 중에 한 가지 혹은 둘 모두 부정적이라면, 성경시대의 그 행위나 관습은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도 여전히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항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은, 어떤 행위가 단순히 문화적인 것인가 아니면 항구적인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너무나도 단순한 그러면서도 합리적인 방식인 셈입니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초대교회의 실행을 예로 들어봅시다. 질문A.여성들이 지도하거나 다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적 관습이었는가? 예,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랬습니다. 이 첫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울의 금지가 그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봅시다.질문B. 그 밑에 깔려있는 원리가 다른 방식으로 충분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부정적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분명하게 교회에서 가르치며 다스리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4:34). 그 밑에 깔려있는 원리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더 이상 따져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하지 않고서 다른 어떤 방식으로 잠잠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당시 문화적으로 여성들이 잠잠해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었지만, 주님께서 또한 문화를 뛰어넘어서 그렇게 하기를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 명령을 다른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동일하게 디모데전서2:12~14에서 바울은 왜 여성들은 설교해서는 안되는지, 다스려서는 안되는지 그 신학적 이유까지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그 당시의 문화가 이것을 요구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영적인 원리와 목적을 가지시고 이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문화보다 더욱 월등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시금석이 되는 두 질문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부정적으로 답변이 된다면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복종하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명령한 대로 이 시대의 우리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실행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검토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혼동의 도가니가 아닙니다. 크리스챤들이 혼동스러움을 핑계대면서 그 명령에 대해서 복종 안해도 될 그런 책이 아닙니다. 문화가 바뀐 것 때문에 성경 속에 진술된 명령이 다른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런 간단한 질문들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그 명령이 유효한 것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천착하기를 원치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어떤 것이 지금도 유효한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취사선택하고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다음 네 가지 규범적 원리들을 잘 기억해 둡시다. 
첫째, 성경 자체가 취소하고 있거나 제한하거나 조정하고 있지 않는 한 모든 성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명령을 우리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둘째, 비도덕적이고 비종교적인 행동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모든 성경구절들은 오늘날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오직 한 구절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애매모호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는 오늘날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넷째, 명령된 어떤 행위가 다른 시대나 문화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복종될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 성경 속의 모든 명령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들도 여전히 복종해야 할 의무입니다.
-질문A. 그 행위가 성경시대에 사회적 관습이었는가?
-질문B. 그 밑에 깔려있는 영적 원리나 목적이 다른 방식으로도 잘 표현될 수 있는가? 
* 성경시대의 실행을 지금도 지켜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시금석질문들과 적용실례들 *
질문A: 그 행위가 성경시대에 사회적 관습이었는가? 
질문B: 그 밑에 깔려있는 영적 원리나 목적이 다른 방식으로도 잘 표현될 수 있는가?
손노동을 통해서 살아야 한다


여성 성직안수금지

아니오
발을 씻어줌


거룩한 입맞춤


장로제

아니오
설교자들에 대한 재정지원

아니오
세례
아니오
아니오
성찬
아니오 
아니오
참고: 
두 개의 ‘예’= 문화적인 요인으로 외형적인 표현이 바뀌어서 이 명령들은 수행될 수 있다. 
‘아니오’가 하나라도 있는 경우= 이 명령을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들은 문화를 초월해서 요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