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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원리와 삶

이판사판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을 이를 때 쓰는 말로 굳어졌지만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래 ‘이판’과 ‘사판’이 합쳐진 조어로서 이(理)는 원리(原理)를 뜻하며 종교에서 이는 성(聖)을 의미한다. 이판(理判)은 이판승의 줄임말이다. 사(事)는 인간세계의 구체적인 일을 뜻하며 사판(事判)는 사판승의 줄임말이다. 이판사판이 이런 뜻을 지니게 된 것은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펴면서 승려는 최하층민으로 몰락했고 도성에는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이 된다는 것은 이판이나 사판할 것 없이 인생의 막다른 데로 인식됐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란 말이 관용적으로 이렇게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교에서만 이판과 사판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선의 정치 철학이었던 유학에서도 이기(理氣)논쟁이 있었다. 이기논쟁은 성정론으로 발달하면서 퇴계 이후 활발히 논쟁되었다. 성은 이를 뜻하며 아직 발현하지 않은 원리를 의미하고 정은 기를 뜻하며 이미 발현한 기운을 뜻한다. 조선의 선비들의 초상이 감정을 드러내는 초상이 전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리에 기울어져 있어야 삶이 반듯 해진다고 믿은 것이다. 정에 기울어진 삶을 소인배로 성에 기울어진 삶을 성인이나 군자의 삶으로 이해했다. 조선 후기의 양반의 몰락은 이런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기독교 신학도 같은 맥락이 존재한다. 바울의 신학이 indicative와 imperative로 나눈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전자는 원리를 후자를 삶을 나타낸다. 복음과 그리스도께 더 근접해 있을 때 순전한 기독교가 나타나는 반면 윤리적인 것에 몰두하는 바리새주의나 윤리를 도외시 한 채 사죄에만 몰두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 모두 복음에서 멀어져서 생긴 결과다. 신율주의, 율법주의, 극단적 칼쟁주의 모두 이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바울 신학은 indicative가 imperative를 열매로 낳는다고 보았다. 

이런 것이 무너지면 이판사판이 되는 것이다. 모든 고등 종교의 몰락은 여기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