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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죄책과 오염, 칭의와 성화의 교회사적 변곡점.

죄책과 오염, 칭의와 성화의 교회사적 변곡점.

 

노승수 목사



죄책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 라틴어 reatus는 법적 책임을 말한다(벌코프, 612). 성경이 죄를 빚의 개념으로 유비한 데서 착안한 단어로 문자적으로는 빚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칭의를 “법정적”이라고 말한다(벌코프 762). 법적 책임으로서 죄책은 죄의 책임(reatus culpa, potential guilt 이하 RC)과 형벌적 책임(reatus poenae, actual guilt 이하 RP)로 구분한다(벌코프, 449, 464). 투레틴은 분명하게(벌코프 464), 댑니는 모호하게 구분했다(벌코프, 449), 좀 쉽게 설명하자면 벌책은 법원의 형량에 범책은 전과 기록에 해당한다.

이런 이해는 중세적 이해이면서 동시에 종교개혁과의 연속성이 있는 이해라 할 수 있다. 중세 후기 행위 구원론이 개입된 이유는 의가 주입된 신자가 그 의를 기초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중세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로마 가톨릭은 타락으로 원의라는 첨가된 은사(donum superadditum)를 상실한 채 낙원에 있던 인류를 정욕(concupiscence)이 지배한다고 설명하고 정욕을 죄가 아니라, 단지 죄의 연료라고 보았다(벌코프, 452). 죄는 원의의 부재가 빚은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 이해는 현대 가톨릭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원죄는…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이 상실되기는 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가톨릭대사전)라고 말하는 데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들은 지금도 원의만 회복되면 의의 순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인죄론에서 죄책과 오염을 구분하게 된다. 당연히 기독론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순종의 사역이다. 아무튼 종교개혁의 신학은 로마 가톨릭과는 다른 인간 이해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 개념이 바로 오염 개념이다. 벌코프의 한글 번역은 때로는 부패로 때로는 오염으로 번역해서 오해를 자아내지만 같은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벌코프 449). 오염은 죄의 전이 과정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며 부패는 그 상태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다. 오염의 정의는 모든 인간이 겪는 죄의 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범죄로 처벌 받은 후에도 남는 전과 기록에서 비롯된 본성의 더럽혀진 것과 그 성향을 일컫는다. 사실 이 오염의 개념은 희랍의 교부들에게 있던 개념이다(벌코프, 464). 그러나 종교개혁 신학과 결부되면서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 개념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단지 죄의 재료로서만 여기던 정욕은 전혀 다른 개념이 된다. 그것이 루터의 노예의지이며 존재론적 범위에 있어서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의지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교리이다.

우리는, 칭의는 벌책을 제거하는 것으로(벌코프, 765), 성화는 부패를 제거하는 것으로(벌코프 766), 이해한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기본 프레임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중생과 칭의가 혼동되어 있는데, 이는 칭의가 법정적 행위가 아니라 갱신의 행동 혹은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벌코프, 715). 이런 이해가 칭의로 주어진 의를 그리스도의 행동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로 오해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단적이다. 칼뱅 역시 오시안더의 이런 의를 이단적이라고 본 것이다(inst 3. 11.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역시 주입된 의를 거부한다(West. 11. 1.).

이 혼동은 극단적인 칼뱅주의나 율법폐기론 혹은 무율법주의를 낳고 자동 성화론을 낳는다. 왜 그럴까? 본질적이면 다른 게 필요없고 그냥 저절로, 자동으로 자라가니 하나님의 법으로써 율법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율법 혹은 율법폐기론 혹은 절대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자기 도덕적 방종을 합리화하는 서머나 교회 김성수 목사 같이 극단적인 칼뱅주의로 기울게 된다. 가톨릭은 벌책을 대죄와 소죄로 나누면서 그 일부 남겨둔 반면,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이에게 전가된 의가 본질적으로 이해되면 아마도 이들은 전가라 쓰고 주입이라고 이해할 가능성이 꽤 높다. 그래서 씨가 심겨서 자동으로 결실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율법은 이들에게 그냥 죄를 깨닫는 정도의 역할 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그런 게 아니다. 괜히 칭의를 법정적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럼 칭의가 법정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글의 모두에서 설명한 대로 reatus 곧, 법적 책임을 말하며(벌코프, 612), 범책(RC)과 벌책(RP)이다(벌코프, 449, 464). 이는 창세기 2:17을 석의하는 해석학적 개념이다. 즉,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에서 먹는 행위가 범책(RC)에 해당하고 반드시 죽는 것이 벌책(RP)에 해당한다. 이것이 아담의 최초의 죄이며 이 죄가 우리에게 행위 언약을 매개로 전가된 죄를 원죄라고 한다.

물론 원죄가 전가되는 방식이 바로 행위 언약이라서 법적이다. 그 중 벌책(RP)은 전가가 되는데 범책(RC)은 전가되지 않는다. 범책은 자범죄에 한해서만 유효하며 천국에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세 신학과 달라지는 중대한 변곡점이 발생했다. 로마 가톨릭은 16세기부터 20세기후반까지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에서 대죄에 있어서는 범책(RC)은 모두 사하지만 그 벌책(RP)은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바뀌며 이 형벌을 자신의 공덕으로 갚아야 하며 소죄는 범책과 벌책을 모두 갚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20세기 후반 제2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달라진 것은 대죄에 있어서 범책과 벌책 모두 다 사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소죄에 있어서는 역시 우리의 공덕으로 갚아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는 정도가 달라졌을 뿐 구원에 우리 공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그런데 종교개혁 신학은 이 문제를 다르게 설명을 했다. 특히 범책(RC)은 어떤 형태로도 사라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범책은 용서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거한 칭의에 의해 제거되는 것도 아니며, 단순한 사면에 의해 제거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인간의 죄는 의롭다 칭함을 받은 뒤에도 생득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으로 남는다 이 같은 의미의 죄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이될 수 없다."(벌코프, 464)고 말한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로마 가톨릭의 공로 신학을 배격하기 위해서라고 이해가 되지 않을까? 참 기이한 일이다. 전과자로서 그 기록은 형량을 다 채운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가톨릭은 범책(RC)이 사해진다고 했는데 왜 종교개혁 신학은 그것이 전해지지 않으며 용서되지도 않는다고 말할까? 두 번째 원죄의 전가에 있어서 죄책은 벌책은 전가되어도 범책은 전가되지 않는다고 말할까? 아담의 최초의 죄에서 범책은 위의 설명처럼 아담에게 오로지 아담의 것으로 남는다. 범책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자범죄에 국한한다. 그 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고 전이 될 수도 없다(벌코프, 464). 따라서 원죄에서 아담의 범책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신학은 원죄를 죄책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염의 개념을 동원했다. 어거스틴은 터툴리안의 이해를 받아서 원죄를 실재론적으로 다루었는데 생식에 의해서 전달(propagation)된다는 입장을 지녔다(벌코프, 455). 이 개념이 종교개혁기에 와서 오염의 개념이 되었다. 이 분리, 즉, 죄책과 오염의 분리는 칭의와 성화의 분리를 의미했다. 법적 책임과 실제적 변화를 분리함으로 의화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둘로 나눈 것이다.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성화를 설명할 때, 그래서 오염의 제거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오염은 부모를 매개로 전달되는데 모든 신자에게 생득적으로 임하는 것이며(벌코프, 449), 이것은 오염이 인간의 본질에 관련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준다. 칭의와 죄책이 법적 지위와 위치를 설명해준다면 성화와 오염은 인간의 존재의 본질적 상태와 능력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벌코프는 이 부패는 죄책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지만 법적인 관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죄책은 직접적인 부패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벌코프, 449). 이게 무슨 뜻일까? 죄책은 법에 의해서 직접 전가 되며 오염은 생식을 매개로 간접 전달된다는 의미다. 그 직접 전가에는 행위언약이 있고 간접 전달에는 생식법이 작용했다. 만약 어거스틴처럼 생식에 의해서만 오염이 전해진다면 우리 후손으로 갈수록 더 악하게 태어나게 태어나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언약신학을 동원헤서 행위 언약을 통해서 법적이고 직접적으로 벌책이 전가되고 그 벌책을 근거로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부패한 본성을 유전한다고 설명한 것이 개혁파의 입장이다. 물론 신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다를 수 있다. 가장 통상적인 설명을 하자면 그렇다.

물론 범책(RC)은 종교개혁 신학에서는 천국에 가서도 남는 죄의 상흔과 같으며 이 자체가 오염의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신학사적으로 볼 때, 범책의 개념이 오염 개념으로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천국에서도 제거되지 않은 우리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의가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다. 그럴 때 우리는 루터가 말한 것처럼 “의롭게 된 죄인”이며 영화의 상태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범죄의 상흔과 비참의 기억이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한다. 타락 전의 아담에게는 이 범책의 흔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범죄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때문에 범죄했다. 그러나 영화에 이른 우리는 이 범책의 흔적 때문에 다시는 죄를 범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지 죄의 책임만을 면책하는 것일 수 없다. 우리 자범죄의 범책까지도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으로 덮어주신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행위를 기준한 심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마 7:21, 전 12: 14, 계 20:11-15, 롬 2:11-15).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범책이 다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영혼이 남는다고 말한다. 중세 신학과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변곡점으로부터 사실은 희랍 교부들의 오염의 교리를 가져와서 원죄를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신학은 공로 신학을 제거하기 위해서 죄책과 오염을 구분했고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다. 성화가 실재적이며 우리 존재에 내재한 죄의 세력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윤리를 붕괴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그릇된 이해들 특히나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오해나 언약의 통일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성화에 대한 이해를 붕괴시켰으며 사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성도나 교회가 적다.

다시 아담의 최초의 죄로 돌아가 보자.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와 사망의 형벌이 그의 죄책이었다. 가톨릭은 부패 교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로만 설명했지만 공로신학을 반대한 종교개혁은 부패교리를 체계화하면서 법적 책임과 부패한 본성을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이 법적 책임의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이 요구된 것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범책을 감당하는 방식으로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에 부응하신 것을 능동적 순종으로 아담과 그 택하신 후손의 모든 벌책을 담당하신 것으로 수동적 순종을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칭의가 법정적인 책임을 그리스도께서 다 지심으로 우리 구원을 완성하셨다. 우리는 거져 믿음으로 하늘의 의를 전가 받게 되었다. 이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전가의 반대 개념이 주입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전가를 생각하면 자꾸 우리 안에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반대의 개념이다. 전가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에 우리가 접붙임바 되었다는 의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게 도대체 우리 삶에 무슨 변화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공격도 루터나 칼뱅의 교의가 우리를 윤리적으로 느슨하게 만든다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건은 법적 선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를 그저 내버려두시지 않고 성령을 보내시며 교회를 여셔서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가 적용되는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이 은혜의 방편이며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믿음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하늘의 은혜-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를 입는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에게 적용하신 그 은혜로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게 된다. 그것이 율법의 제3용도 곧 성화의 준거다. 믿음으로 성령을 따르면 그 열매로서 선행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신학은 그래서 오직 믿음인 것이다. 우리 구원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가된 의에 우리는 믿음으로 접속한다. 믿음이 도구이자 매개가 되어 하늘의 은혜가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 심령에 부어질 때, 삶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