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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노승수 목사의 입장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노승수 목사의 입장

 

노승수 목사

 

최근 제가 하지도 않은 말로 세간에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 화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개혁파의 신앙고백들에 나타나는 입장이 있습니다. 제가 제 블로그에 쓴 이중 칭의(double justification)에 각기 다른 사용법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 중에서 아래의 문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모 인터넷 신문의 기사가 낫습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참 사람)로서 그가 이루신 율법에 대한 온전하신 순종, 곧 행위 언약의 성취인 것이죠. 이렇게 이루신 의가 전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출처: https://lewisnoh.tistory.com//이중-칭의double-justification-[Post Tenebras Lux]

 

여기서 문제 삼은 문구 즉,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로서"라는 표현을 그리스도가 구원받아야 할 자라고 주장했다고 썼는데요.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치에서 대신하여"라는 의미입니다. 1607년 라 로쉘(La Rochelle) 총회는 피스카토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는 것이 개혁주의 고백서 밖에 떨어진다고 결론내리고 그에 따라 5년 후 모든 목사들로 하여금 서명을 하게 한 결정문에 나타난 표현의 다른 표현입니다. 모든 목사가 서명한 문서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위치에서 대신하여서, 도덕법과 의식법에 순종하셨으며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순종이 따라서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우리의 칭의는 죄 사함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로움의 전가로도 이루어진다.(John Quick, Synodicon in Gallia Reformata, volume 1 (London: T. Parkhurst and J. Robinson, 1692), 348. 총회 결정은 265를 보라)”

 

이 결정은 1614년 토네인(Tonnein)총회에서 재확인 되었습니다(John Quick, Synodicon in Gallia Reformata, 401.) 이 문서들에서 표현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위치에서 대신하여서는 그리스도가 구원받아야 할 참 사람의 위치에서 그와 같은 율법의 순종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로서"는 그가 구원받아야 할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위치에서” “우리를 대신하여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그가 참 사람으로서 우리 위치에 계셔서 율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지 그가 구원받아야 할 자라는 의미가 아니며 만약 그렇게 읽었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 이해가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에 국한하지 않고 인죄론, 구원론, 칭의와 성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이와 관련한 글은 제가 이미 페이스북에 여러 차례 썼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여기에 굳이 더 꼬투리를 잡고 문제를 삼자면 "존재로서"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참 사람으로서 인간의 위치에서라는 말은 단지 위치적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2위격이 인성을 취하셔서 참으로 아담과 같이 참사람의 위치를 점하셨다는 뜻입니다. 특히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순종을 요구받으신 것입니다. 행위 언약이 아담에게 주어졌듯이 우리는 은혜 언약 아래 있으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의 시대에 행위언약의 수행자로 율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는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본질적 의개념으로 설명하려드는데 오히려 이것이 이단적인 개념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는 중세적인 "의의 주입"을 아직 털어내지 못한 개념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그가 지니신 의라고 함으로 구원에서 그리스도를 참 사람으로서 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서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사상을 함의합니다. 칼뱅 당시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오시안더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오류를 칼뱅은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전가된 의는 "순종하심""희생의 죽으심"이 의의 기원이며 거기서 우리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합니다. 인용해보면,

 

오시안더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견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희생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어진 의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품성 모두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Inst. 3. 11. 5).”

 

종교개혁은 중세적인 의의 주입의 거부, ,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전가라는 용어로 설명을 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뱅에게서 보는 것처럼 이런 신학적 입장은 후대에 생긴 입장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초기부터 중세적인 의화 개념을 부정하고 루터가 노예의지론에서 밝히듯이 인간이 타락하여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전제하는 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중세는 단지 원의의 부재를 타락으로 보았고 거기서 비롯된 의의 주입이 구원으로 인식되면서 이후에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펠라기우스의 망령이 부활한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루터파의 지역에서 멜란히톤이 승인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와 문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1561년에 작성한 대요리 문답을 통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할 당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Lyle D. Bierma,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163-223). 우르시누스뿐만 아니라 올레비아누스(Casper Olevianus)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를 고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Caspar Olevianus, In epistolam d. pauli apostoli ad galatas notae... (Geneva: Eustathium Vignon, 1578), 57. See also his In epistolam d. pauli apostoli ad romanos notae... (Geneva, 1579), 196, 197, 205, 206, 209, 210.).

 

그러므로 그들이 작성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문은 이런 배경에서 작성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60 :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1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심각하게 범하였다고 그 계명 중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고2 그리고 아직도 죄로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3 나를 정죄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4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5 마치 내가 죄지은 적이 없고 죄인이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순종하셨듯이 마치 내가 완전하게 순종했던 것처럼6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의로움과 거룩함을7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8

 

1) 로마서 3:21-28; 갈라디아서 2:16; 에베소서 2:8-9; 빌립보서 3:8-11

2) 로마서 3:9-10

3) 로마서 7:23

4) 디도서 3:4-5

5) 로마서 3:24; 에베소서 2:8

6) 로마서 4:24-25; 고린도후서 5:21

7) 로마서 4:3-5 (창세기 15:6); 고린도후서 5:17-19; 요한일서 2:1-2

8) 요한복음 3:18; 사도행전 16:30-31

 

이 문답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치 내가 완전하게 순종했던 것처럼이란 표현이 제가 표현한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로서"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요리문답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의로움과 거룩함을은 그 순종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뿐만 아니라 능동적 순종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초기 주석가들이 이 요리문답을 이해한 방법이었습니다(Jeremiah Bastingius, In Catechesin Religionis Christianae (Dordraci: Iohannes Caninius, 1588), 202; William Ames, A Sketch of the Christian’s Catechism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08), 119.).

 

고재수에 의하면, 돌트 총회(1618-19)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문제에 있어서 진술을 강화시킬 것을 결의하였습니다(N. H.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Its History and Sources, 152.) 이런 총회의 결정뿐만 아니라 개혁파의 대표적 신학자인 투레틴(Francis Turretin) 역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개혁교회들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라고 진술합니다(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ume 2 (Phillipsburg: P&R, 1994), 445, 454-455.).

 

그러므로 제가 쓴 표현이 성도들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부주의한 표현이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장로교회와 개혁파 교회뿐만 아니라 루터파 교회까지 아우르는 종교개혁 전통 전체가 받는 보편 교회의 고백이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루터파교회의 고백서인 아우구스브루크 고백서(Augsburg Confession)와 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는 둘 다 칭의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합니다(Augsburg Confession and Formula (Solid Declaration) III:14-164, Concordia: The Lutheran Confessions, A Reader’s Edition of the Book of Concord (Second Edition), ed. Paul Timothy McCain (Sain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5), 32-33; 538.)

 

아무래도 이런 논란들은 총회결정을 통해서 다시 판단받는 것이 좋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교회사에서 논란들은 우리 신앙을 견고히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이 논의도 결국은 건설적이며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특히 담임 목사님들께서는 본인이 속한 노회에서 헌의안을 만들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에 대한 입장"에 관한 헌의를 총회 신학위원회로 올려주십시오. 이것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기를... :)

 

*몸글의 일부와 각주는 황준호 형제의 블로그에서 직접 허락을 받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