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사/한국교회사

윌리암 린튼

윌리암 린튼
5대째 한국사랑 "린튼네 사람들"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다. 민초들과 함께 뒹굴다가 지엄하신(?) 왕실과 인연을 맺기도 했던 이들은 또 일본 제국주의와 신사참배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기도 했다.
대전의 한남대학교 안에는 주변의 대학 건물과는 다른 고풍스런 멋을 풍기는 한옥이 한 채 자리하고 있는데, 대학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인돈기념관이 바로 그것. 인돈학술원이 사용하고 있는 캠퍼스 밖의 또 하나의 한옥 한 채는 지어질 당시의 옛 모습 그대로 옛 선교사의 족적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말로 ‘인돈’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 윌리암 린튼을 기념하는 두 채의 한옥이다.
한남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했던 윌리엄 린튼과 그의 가족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인연은‘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깊고도 깊다. 린튼의 장인인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에서 시작된 린튼가(家)의 한국 사랑은 5대에 이르고 있어 한국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알렌보다 한 해 늦게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벨은 의술로, 그리고 그의 사위 윌리엄 린튼은 교육으로 한국민에 대한 계몽과 선교사역을 펼쳤다. 여기까지라면 당시의 다른 여러 선교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린튼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윌리암 린튼 이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 휴 린튼(한국명 인휴)이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어 나간 것.
특별히 휴 린튼은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 한국과의 질긴 인연의 줄을 놓지 않았다. 선교사로 한국을 다시 찾은 휴 린튼 부부는 한국화된 미국인으로 전라남도 일대의 벽지와 섬지방을 돌며 선교를 했다. 현재의 광양제철 자리가 된 땅은 휴 린튼이 미국 등지로부터 받은 선교비로 간척사업을 벌여 얻은 것.
휴 린튼 부부의 한국사랑은 그대로 그의 자녀들에게 전수되어 스티브 린튼과 존 린튼으로하여 또다른 한국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증조할아버지 유진벨을 기념하는 재단(유진벨재단, 이사장:스티브 린튼)을 설립하고 식량난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동포를 돕는 일에 최선봉에 서 있다.
물론 이들의 우리말 실력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과 결혼하고 한국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한국인 친구들은 ‘보세품’이라는 농담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데 미국으로 수출됐다가 다시 돌아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별칭은 린튼 가족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보쌈과 곱창전골을 좋아하면서 한국말 잘한다는 이야기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면 할아버지께서 웃으실 것”이라는 말로 받아치는 그들은 자칭 한국사람이다.
린튼가의 4대에 해당하는 이들중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막내 존 린튼은 그런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한국사람’으로 통한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 소장으로 일하는 그는 국내 의사면허를 가진 유일한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형 스티브 린튼을 도와 북한 어린이의 결핵 퇴치에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자녀들인 한나 린튼과 에스더 린튼이 한국에서 선조들의 한국사랑을 체험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1백4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린튼네 사람들’의 한국사랑, 그들이 바라는 통일 이후에도 계속될것이라는 상상을 어렵지 않게 하고 있다. (한국기독공보 / 박성흠 기자)
유진 벨의 정신으로 북한에 복음 나누는 스티브ㆍ존 린튼 형제,
나라의 국운도 시들어가고 기아와 전염병으로 백성들도 시들어가던 1895년. 금발에 파란눈의 백인이 전라도 땅 끝으로 찾아왔다.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으로는 사랑을 갖고 전라도로 찾아간 그 사람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유진 벨 선교사.
  그로부터 1백년이 지난 다음 유진 벨 선교사의 후손인 린튼가 형제가 유진 벨의 이름 아래 갈라진 형제들의 땅 북한을 찾았다. 수 십년만에 찾아온 가혹한 기근과 결핵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가는 북한의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한 손에는 식량을 다른 한손에는 약을 들고 찾아온 그들의 손길은 삶의 희망을 찾아준 천사의 손길이었다. 지금까지 유진벨의 손길은 갈라진 형제들을 잇는 사랑의 가교로서의 역할을 든든히 감당하고 있다.
  유진벨재단(회장:스티브 린튼, 한국명 인세반)은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비롯해 의료지원사업을 벌이는 민간단체. 95년 식량지원으로 시작해 97년부터는 결핵퇴치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진벨재단은 15만명에게 6개월간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의 결핵약을 북한에 공급했고, 검진차량을 비롯한 다목적 차량 30여대 지원, 요양원을 위한 농기계 및 농업물품 지원, 수술실 설비 및 엑스레이 지원 등 결핵퇴치사업의 최전선을 지키는 든든한 보루가 되고 있다. 돈으로 환산하면 3백여 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지원이 이뤄졌다.
  선교지 할양 정책에 따라 순천, 광주, 전주 등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의 후예들이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지역이었던 북한에서 의료지원사업을 벌이는 것은 흔치않은 인연이다. 린튼 형제의 부모였던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역시 전라도와 충청도 등 중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고, 린튼 형제 역시 그런 인연으로 전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진벨재단의 인요한(존 린튼) 박사는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결핵이 제일 무서운 질병이었는데 5남매 중 3형제가 병에 걸리기도 했다"며 "이 병을 퇴치하기 위해 어머니께서 40년 동안 무진 애를 많이 쓰셨는데 그런 가문의 이력이 북한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한 것 같다"고 전한다. 사실 유진벨재단의 북한 사역은 식량지원사업으로 시작했다. 유진벨 선교 1백주년을 맞이한 지난 1995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린튼 형제는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식량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는 북한주민을 위해 그들이 전해 준 것은 대략 1만여 톤의 식량. 그런데 97년 북한의 한 당국자가 결핵퇴치 사업을 제안해 왔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을 돕고자하는 유진벨의 순수한 정신과 성실한 지원을 통해 믿음을 갖게된 북한 당국이 유진벨 측에 당시 북한의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결핵의 퇴치를 제안했던 것. 물론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 40년간을 고군분투한 린튼 가문의 사연도 북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데 일조를 했다.
  막상 결핵퇴치사업을 시작하려하자 린튼 형제는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엑스레이 필름이 없어 방사선을 그대로 쪼이며 환자의 상태를 검진하는 열악한 의료환경, 4~5개의 약을 지속적으로 먹어야 치료에 효과가 나타나는데 필요한 약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기근으로 환자들이 굶주리는 상황 등등. 그래서 유진벨이 생각한 것은 결핵약 만이 아니라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고 완쾌시키기 까지 필요한 각종 물품의 체계적인 공급이었다. 그리고 몇몇 지역만이 아니라 북한 전역을 대상지로 삼았다. 그 결과 유진벨은 현재 북한 인민병원과 요양소 등 60여 지역에 의약품과 농업용품 등 각종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인세반 박사의 경우 그 자신의 결핵을 두번이나 앓았지만 북한 사람을 살리기에 말 그대로 몸을 던졌다. 약을 전달하기 위해서 북한 전역을 돌고, 의료기구를 전달하고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한 두달을 북한에서 보냈다. 그러면서 쌓인 상호신뢰는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인요한 박사는 상호신뢰의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에 보냈던 검진차량이 고장나 그 것 때문에 북한 신의주로 가서 차 밑에 기어들어가 기름을 뒤집어 쓰며 차를 고쳤는데 그 뒤로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 이렇게 상호신뢰를 형성한 이후로 결핵퇴치 사업만이 아니라 간염예방 등 의료 전반으로 사업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이같은 사업을 진행하는 유진벨재단은 재정의 대부분은 국내외에 있는 한인교회 등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감당하고 있다면서 남북간의 관계가 더욱 좋아져서 직접 지원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 때 쯤에는 사업을 접을 수 있다고 전한다. 남북이 직접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바란다는 인요한 박사는 "뱃길, 차길, 기차길, 하늘길 가릴 것 없이 남북을 잇는 길들이 더 많아져서 남북이 만나는 일이 무조건 많아져야 한다"고 전한다. 남북이 대화하지 않고는 통일의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인 박사의 진단이다.
  김대중 정권에서 진행됐던 햇볕정책과 비료지원 사업을 높이 평가한다는 인 박사는 "강원도 산골에 쌓여있는 석탄을 북한의 가정으로 보낸다면 햇빛정책 못지않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겨울에 사용할 수 있는 연료가 없어 결핵환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겨울을 너무 힘들게 나고 있다면서 석탄을 준다면 북한 사람들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녹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6월. 긴장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지만 유진벨재단의 린튼가 형제들은 남북이라는 또 다른 형제들을 이어주는 사랑의 손길이 되어 따사로운 햇빛을 우리 민족에 던져주고 있다. (한국기독공보 / 이상훈 기자)
北결핵퇴치 "패키지 지원이 필수"
유진벨재단 인세반 회장 북한 결핵사업 현황과 비전 소개
10년 간 북한에서 결핵퇴치 사업을 벌이면서도 좀처럼 자신의 사역을 언론을 통해 소개하지 않았던 유진벨 재단의 회장 인세반박사(Stephen W. Linton)가 최근 기자들을 만나 북한에서 진행하고 있는 결핵퇴치 사업의 결실과 통일문제까지 다양한 범주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지난 9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을 만난 인세반박사는 "한가지 분야에서 꾸준히 일하면 누구에게나 신뢰라는 게 쌓이는데 그간 북한과의 관계에서 그런 신뢰가 쌓인 것 같다"면서,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지난 10년 간 북한의 결핵퇴치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유진벨 재단은 지난 95년부터 북한에 결핵퇴치 약품과 장비 등을 지원해온 단체로 현재 평안남ㆍ북도와 남포시, 평양시내 등 45개 지역의 의료기관을 1년에 두차례씩 방문하고 있다. 특히 유진벨 재단은 평양에만 국한된 지원이 아니라 북한의 전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진벨 재단이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결핵퇴치 사업은 '펙키지 지원'을 통해 진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세반박사는 "펙키지 지원은 의료기관의 결핵치료 능력을 강화한 뒤에 이 기능을 꾸준히 유지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복합 지원체계로 궁극적으로는 북한 전역의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지원 방법"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유진벨 재단은 약품이나 의료기기 등을 일시적으로 지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점으로 정한 북한 전역의 의료시설들을 꾸준히 지원하는 장기지원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장기지원을 하다보니 구호금액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문제에 봉착했다는 게 인세반박사의 설명. 그는 "결핵이라는 병은 내성이 강해서 치료를 시작하면 완치때까지 쉬어서는 안된다"면서, "결국 후원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인데 최근들어 모금이 줄어 들고 있어 지속적인 지원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통일에 대해서도 인 박사는 "10년 전과 비교해 볼때 남과 북, 그리고 국제사회가 서로를 바라보는 입장이 무척 변했다"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 교류 방안 등을 마련한다면 적당한 시점이 왔을 때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면서, 신중론을 펼쳤다. 
향후 계획에 대해 인세반박사는 "북한에 대형병원을 한개 세우는 것보다는 북한의 구석구석에 40개의 작은 병원들이 치료기능을 갖도록 돕고 더나아가 북한의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두겠다"고 말했다.(2006. 6. 14. 한국기독공보 / 장창일 기자)
유진벨 재단 http://www.eugenebell.org
유진벨재단, 재미동포 이산가족 상봉추진
샘소리 프로젝트 시작, 미 교포사회 이산가족 데이터 베이스 정리 계획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유진벨재단(회장:스테판 린튼)이 재미교포 이산가족의 남북상봉을 추진하는 ‘샘소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미국 시민권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재미교포들은 비공식 통로를 통해 막대한 돈을 들이고서야 북한의 가족을 상봉할 수 있었다.
린튼회장은 “교포 1세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그들에게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고향을 돌려주고 싶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진벨재단은 샘소리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교포사회의 이산가족 숫자를 파악하고 신뢰할만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한편, 1세 교포들이 남긴 문서와 사진 등 역사적인 자료를 보관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또 추상적 개념을 넘어 비극의 표상인 동포 개개인의 역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가족을 찾아 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진벨재단은 올 상반기 방북보고를 통해 6개월간 북한 평남 40개 결핵요양소와 인민병원에 11억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린튼회장은 대북지원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북한지원사업을 결핵환자에서 임산부와 아동까지 확대한다고 덧붙였다. (2006. 6. 16. 아이굿뉴스 / 이현주 기자)
“선교사 얼 스민 곳인데…” 노란머리 순천 촌놈의 호소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지킴이 인요한 소장 인터뷰
서울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들 틈으로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의사가 환하게 웃으며 토종 한국인 억양으로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든다. 미국인 존 린튼, 한국 이름으로 인요한(47) 소장이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나고 자란 인 소장. 그의 가문은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외증조부 유진 벨 선교사 이래 4대째 한국에 산다.
그를 만난 건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때문이다. 목사였던 아버지 휴 린튼을 비롯해 그의 조상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 이곳이 위기에 처했다. 지리산 불교계의 반대로 눈앞에 뒀던 문화재 지정이 취소되면서 그야말로 ‘버려진 신세’가 됐다. 불교는 불교대로 “우리 머리 위에 기독교 유적지가 왠 말이냐”며 정색하고, 변변한 유적지 하나 없는 한국 기독교는 또 그들대로 무관심하다.
인 소장에게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이야기를 꺼냈더니 뭐가 그리 화가 나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문화재로 지정됐어도 벌써 됐어야 했다”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항상 외국 것, 남들 것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 것 귀한 줄 알아야 한다”고 쓴소리를 한다.
“한국교회들이 조금만 힘을 합쳤어도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가 이렇게까지 방치되진 않았을 거에요. 무슨 파가 그리도 많은지, 다들 내 교회, 내 교인에만 신경 썼지 이런 선조들의 문화유산에 관심이나 있었나요.”
머리만 노랬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호통치는 걸 보니 영락없는 한국 아저씨다. 그는 “지금 왕시루봉에 있는 수양관은 지금도 얼마든지 선교사들의 안식처로 쓰여질 수 있다”며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의 얼이 스며있는 곳을 이대로 버려 둬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이곳에 박물관을 지어서 등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하면 전도도 되고 얼마나 좋겠어요. 이렇게 좋은 게 있는데…. 왜 모를까요.”
인터뷰를 나눴던 인 소장의 방 한쪽 벽에는 그가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빛 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방긋 웃고 있는 까만 머리의 두 아이 사이에서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그가 멋쩍은 웃음을 웃고 있다. 그가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게 바로 저에요. 한국사람이죠. 한국사람처럼 말하고, 한국사람처럼 느끼고…. 그래서 더 화가 나요. 왜 우리만의 좋은 것을 제대로 알아볼 줄 모르는지….”
인요한은…
지난 1959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있는 그는 지금도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지난 1997년부터 형 스티븐 린튼과 함께 북한 결핵 퇴치 지원사업을 시작, 지금까지 17회나 북한을 방문하며 결핵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그의 한국 사랑을 담아 책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가문과 한국과의 인연은 유진 벨 선교사가 처음 제물포 땅을 밟은 1895년 이후 4대째로 1백년이 넘는다. 유진 벨 선교사는 미국 출신의 청년 윌리엄 린튼(인요한 소장의 조부)을 사위로 맞았고,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부친)은 목사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6백여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2006. 7. 4.크리스천투데이 / 김진영 기자)
‘인요한’
인요한 선교사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호인풍의 외모에, 친절한 미소, 게다가 걸쭉 한 전라도 사투리로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연세대 의료원 국제 진료센터 소장으로 있으면서 주로 외국인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인 선교사는 4대에 걸쳐 111년간 한국에서 선교하며 뿌리내린 그의 가문과 한국사랑을 담아 최근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펴내 주위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전라도 사투리가 자신에게 표준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190cm에 달하는 키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의 이미지는 어느덧 사라지고 정 많은 시골 아저씨로 느껴진다.
호남에서는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인 유진벨 선교사가 언더우드 선교사의 권유로 한국 땅을 밟은 1895년 이후 그의 가문이 한국에서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유진벨은 미국인 린튼(조부)을 사위로 맞았고 월리엄 린튼은 전주, 군산,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교육선교사업을 크게 벌였다.
그의 아들 휴린튼(부친)은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 6백여 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로이스 린튼(모친)은 결핵퇴치사업을 위해 35년 간 봉사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유진벨 재단의 이사장인 형과 함께 북한지역 결핵퇴치 활동과 의료장비 보급사업을 위해 17번이나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결핵퇴치운동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연세대 의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한국인의 정을 배웠으며 특히 시골의 그 끈끈한 정이 그리웠다며 은퇴 후에는 순천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최고급 호텔에서조차 급수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북한의 현실을 몸으로 느낀 후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나날이 각박해져 가는 한국을 마주하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가진 것을 나누는데 인색하고 감사한 마음이 사라졌는지 씁쓸하기만 하다고 말하는 인요한 선교사는 아직도 한국에서 받은 것이 많아 갚을 빚이 아직 남았다는 그의 털털하고 깨끗한 영혼 속에서 사람 좋아하고 정 많은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이 아이러니 하기만 하다. (2006. 7. 29. 한국장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