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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한국교회사

한국 최초 교회, 소래교회 이야기

1884년 6월 29일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사진 좌-하)
1895년 기와 지붕의 한식교회 건물로 개축한 소래교회 (사진 좌, 우-상)
한국 최초 교회, 소래교회 이야기
124살 소래교회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 소래교회 초창기 모습ⓒ뉴스미션
경기도 양지에 있는 총신대학교 교정을 오르다 보면 왼쪽에 기숙사 건물 사이로 기와지붕으로 된 작은 건물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높이 솟아있는 종탑과 십자가는 이 건물이 교회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 기와집 교회는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 세워졌던 ‘소래교회’를 복원한 것이다. 2007년, 124살을 맞이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의 역사를 알아보자.
조선 청년의 만남과 로스 선교사의 소망, 성경 번역
◀ 서상륜, 이수정 기념비ⓒ뉴스미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항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도착하였다. 선교의 공식적인 첫 테이프가 끊어진 이후부터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외국 선교사들의 두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선교 불모지로만 알고 있던 조선 땅에 이미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이 아닌, 조선인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약 20년 전인 1866년,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가 조선의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이 지구 반대편 스코틀랜드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토마스 선교사를 돕던 윌리엄슨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의 후임을 본국에 요청하였고, 1872년 8월에 로스(John Ross) 선교사 일행이 중국에 도착하였다.
로스 선교사는 남다른 각오와 마음으로 조선 땅을 바라보게 되었다. 산둥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던 로스 선교사는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던 곳이 고려문이었는데, 특별히 고려문을 방문한 이유는 조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먼저 로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을 만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고려문에서 평안북도 의주에 사는 이응찬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다. 그를 통해 조선말을 배울 뿐만 아니라 1877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초급교재인 ‘코리아 프라이머(Corean Primer)’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익힌 로스 선교사는 본격적인 사역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 번역 사역에 집중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말로 된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과 이것이 조선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병에 걸린 조선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 조선 청년과 그의 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중국 선교를 위해 의사로 오셨던 헌터(Hunter) 선교사의 치료와 돌봄으로 조선 청년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동시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두 조선 청년은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이다. 로스 선교사의 성경 번역 사역과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한국말이 연합하여 느리게만 느껴지던 성경 번역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1879년, 중국 심양에서 최초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이후 나머지 복음서와 로마서까지 번역되었다. 그리고 1883년 사도행전까지 번역되었고, 1886년 가을에는 서신서의 번역을 마치면서 신약성서의 번역을 완성하게 되었다.
한글 성경이 씨앗 되어 교회가 맺히다
◀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였던 서상륜ⓒ뉴스미션
홍삼 장사꾼인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번역된 성경을 봇짐 속에 숨겨 조선에 들어가기로 했다. 형제는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서 병사에게 검문을 받던 중 성경책이 발견되어 조선 검문소에 넘겨지고 성경책은 압수당하였다.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검문소를 빠져나온 형제는 다시 성경책을 봇짐 깊숙이 넣고 의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형제를 잡으러 의주까지 쫓아온 병사들 때문에 이리저리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는 가슴 속에 성경책을 안고 당숙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소래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형제는 피신해 있는 당숙의 집에서 자주 성경책을 꺼내서 읽었다. 성경책 읽는 소리를 좋아하던 당숙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서 조금씩 그 마을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성경책은 좋은 도구가 되었다. 이들은 필요할 때마다 성경책을 펴놓고 크게 읽기도 하며, 호기심을 갖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앞에서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장을 만들기도 했다.
◀소래교회 전경ⓒ뉴스미션
결국 두 형제의 열심은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과 함께 소래교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더욱 성장하여 1884년에는 13명, 1885년과 1886년에는 각각 20명, 70명의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교인의 숫자가 많아지자 서상륜은 중국에 있는 로스 선교사에게 침례식을 집행해 줄 것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 여건이 되지 않던 로스 선교사는 당시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 사역을 막 시작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였고, 서상륜과 성도들은 서울 정동까지 가서 침례를 받게 되었다. 후에 정동장로교회(現 새문안교회)의 창립예배에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민족을 위한,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복원된 소래교회 내부 모습ⓒ뉴스미션
소래교회는 황해도 지역 복음화의 전초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위한 안내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게일(James S. Gale)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 펜윅(Fenwick) 선교사, 맥켄지 선교사 등이 언어와 선교방법 그리고 한국문화를 소래교회에서 배웠다.
또한 평양 선교의 베이스캠프로서 평양 복음화를 위한 정상 오르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서상륜이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동생 서경조가 소래교회를 맡게 되었다. 그 후 서경조는 1901년부터 시작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꾸준히 성장하던 소래교회는 그러나 6․25 전쟁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북한 지역에 위치하면서 교회 성도들은 사라지게 되었고, 끝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 황해도의 소래교회는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총신대학교 내에 복원된 소래교회는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이 소래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소정의 신청서를 작성하여 총신대학교에 제출하면, 장소 사용에 대한 심사후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한국 기독교가 소래교회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 최초의 교회’와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긴 교회’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족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순교의 정신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헌신을 한국 기독교 후손들은 이어나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통일한국에 반드시 필요한 북한복음화에 새로운 발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래교회가 언젠가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 기독교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