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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앙고백서

이승구 교수의 사도신경 강해 중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사도신경 강해11: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2):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을 당하사"

이승구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본문: 마태복음 26:35-27:66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 생애의 끝 부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읽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그렇게 많이 생각하며, 특히 고난 주간(passion week)에 우리가 주로 이 부분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그런 의식이 더 확대되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기록된 것들만을 우리 주님의 고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난"(suffering)이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주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죄의 세력과 권세에서 풀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성격과 의미를 잘 생각해 보고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어떻게 연관되어져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전체성"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가 받으신 고난은 "전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그의 고난은 전체적인 것이었으며, 그가 취하신 인간성으로도 그는 전체적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로, 시간적으로 그는 전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소위 말하는 고난 주간에만, 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관련된 사건들에서만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뿐만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1] 그의 생애는 그 전체가 수난의 생애(a life of suffering)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영국의 어떤 묘지 앞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라는 비명을 보면서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는 그리스도였다고 생각하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부터가 수난스러운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감추시고 우리의 정황 가운데 오시는 것 자체에 벌써 우리를 위해 당신님을 주시며, 당신님을 우리에게 맞추시는 일(accommodation)입니다. 벌코프가 잘 말하듯이 "만군의 주께서 죄의 형태로 사신다는 것, 무죄하신 분이 날마다 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신 다는 것, 거룩하신 분이 죄로 저주받은 세상에서 사신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2] 더구나 그가 태어난 것도 인간적으로 보아도 영광스럽다기 보다는 비천한 출생을 하셨습니다. 또한 호적을 하러 가는 독특한 상황과 베들레헴에 많은 이들이 왔었다는 섭리적 정황에 따라 그가 낯선 곳에서 태어나 구유(ՖԼՔՍՇ)에 뉘어지셨다는 것도[3] 그의 고난을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또한 그 후에도 그는 부유한 삶을 살지 않았고 가난한 유대인으로 사셨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난지 40일쯤지나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정결 예식을 행할 때에도 일년된 어린양을 번제로, 비둘기를 속죄제로(레 12:6,7) 드릴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어린 반구 둘로 정결 예식을 감당할 정도로(레 12:8; 눅 2:22-24)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4]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그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를 수종들며 그가 당대의 랍비와 같은 대우를 받으셨다고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를 들어서 자기 소유의 집을 지니시고, 편안한 삶을 사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수난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고, 더구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은 수난의 극치(passio magna)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5] 성육신에서 시작된 그의 수난은 십자가에서 그 극치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그의 생 전체에 걸쳐서 수난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인간성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수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신 인간성 전체에서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즉, 그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6] 그러므로 그가 받으신 수난은 무수한 것입니다.[7] 이 중에서도 그의 영혼이 받은 수난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의 존재를 바로 이해한 이도 극히 적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이해한 이들도 매우 적은 것입니다. 그는 가족과 친척들에 의해서도 오해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가 백성들을 위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 주시며 귀신을 쫓아내신 것에 대해서도 그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다고 오해받기도 하셨습니다(마 12:24). 더구나 그가 가장 가깝게 여기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가르친 제자들조차도 그가 말씀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가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가 말씀하셨던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선전을 청결하게 하신 후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요 2:19), 유대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제자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난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으니(요 2:22), 그 전까지는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삶과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한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고, 그가 부활하신 후에야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가 알려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지극한 배려를 베풀면서 그의 삶을 살아가신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가 십자가의 속죄에서 짊어지실 우리의 죄에 대한 "중보적 죄의식"(a mediatorial consciousness of the sin of humanity)을 가지고 사셔야만 했습니다.[8]

그러나 그가 받으신 최대의 고난은 역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시는 그 일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은 이 무시무시한 분리를 가져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9] 여기에 그의 최대의 수난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던 이 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이 죽음이 얼마나 공포로 가득찬 것임을 분명히 해 줍니다. 이것을 바로 볼 때에야 왜 그가 십자가 수난을 앞에 놓고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막 14:33), 그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으며,[10]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하시면서(막 14: 34) 기도해 주기를 요청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구속이 얼마나 큰 값을 치루어야 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렇게 실재적이고 큰 값을 지불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죽으시는 이 특정한 죽음은, 바울이 "죄의 삯이라고 말한, 죄인들과 하나가 되셔서 그들의 죄를 지시고, 그들의 죽음을 죽는,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부어지는 그런 죽음인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렇게 사용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잔도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시 11:6, 75:8; 사 51:17, 22; 렘 49:12, 계14: 10, 16:19, 17:4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대신하시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이 잔을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11] 또한 이 때 예수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버림받고, 성부께서 버리신 것이 아주 실재적인 것이지만 "성삼위 내의 통일성은 그 때에라도 파괴되지 않았다고 하는 역설을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Cranfield, 마가복음 주석). 그 누구도 신성내의 분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12] 그리스도의 수난을 강조하다가 삼위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든지, 신성 자체의 수난을 말하는 식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도 인성은 인성이고 신성은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을 말하는 칼시돈 정의와 extra-Calvinisticum에 따른 사고를 잘 개발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는 비웃음과 능욕을 받으셨습니다(막 15:16-20, 31 참조). 그가 받으신 신체적 고난도 큰 것이었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관련해서 그것이 아주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의 관심을 따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잘 살펴보면 심지어 십자가 고난과 관련해서도 복음서와 성경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육체적 고난에 대해서는 그가 받으신 영적인 고난만큼 그렇게 크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수난 이야기와 비교하면 성경은 비교적 담담하게 절제하면서 예수님의 육체적 수난을 묘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영적인 고뇌에 대해서는 아주 큰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고구엘(M. Goguel)은 이런 점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초기 기록들이 그의 영적인 고뇌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정확히 세밀한 기록을 가지면서도, (흔히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견디신 육체의 고통을 그렇게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 앞에서 산 이에게 있어서 무한한 고통의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13] 로버트 스타인도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두려워하신 것이 신체적인 고통이나 죽음이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고 잘 말하고 있습니다.[14] 이 모든 사실들은 복음서를 읽는 가운데서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수난받으신 이유: "사랑"


그는 왜 이렇게 수난의 삶을 사셨을까요? 그가 고난을 즐긴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런 수난의 삶을 사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늘 보좌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누리시던 당신님의 그 영광을 한 순간이라도 가리시거나 감추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는 낮아지시되 종의 형상을 취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그를 고난에로 인도한 것이고, 사랑 때문에 그는 고난을 즐겨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한 그의 수난은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유일한 구속의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그의 생애 전체에 걸친 고난,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7문답).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만 하는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영광을 손상시킨 것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수난의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고난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그의 수난의 이런 의미가 아주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그의 수난의 구속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그 어떤 사람의 고난이 대신 할 수 없는 그리스도로서의 아주 독특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형벌을 대신 받아 주는 것이 그가 받으신 수난의 의미 전체는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는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마땅히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종의 삶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어 주시려고"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7문답). 그의 순종과 고난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시고 그에 대한 공로로 우리에게 생명과 온전한 의를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생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아 가면서 온전하신 순종의 삶을 살아 주신 덕분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의 삶도 비록 그 자체로는 흠이 많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온전한 순종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 대해 권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벧전 2: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것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이 구절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셔서 고난 당하신 것을 "가난하게 되셨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좋은 주석가들은 대개 다 이 점을 잘 설명합니다. 이런 강조점을 잘 설명한 후에 필립 휴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문학적으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하늘로부터 그는 갈보리와 무덤에로 내려오신 것이다. 이전에는 그보다 부유한 이가 없었지만, 그가 이제 가장 가난한 자가 된 것이다."[15] 그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 즉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그가 고난 당하신 것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가 가난하게 되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도심은 우리의 부요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까? 이러한 고난으로 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수난과 우리의 고난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수난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하는 대속의 수난인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성격의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영원을 다해 드려도 부족할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수난에 대해서 감사만 하고, 찬양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수난은 또한 지금 여기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의 성격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수난뿐만이 아니라, 수난을 당하는 우리에 대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우리의 모범이 됨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지금 여기에 사는 성도들의 수난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이 요점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수난의 삶을 사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 그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참으로 위로하고, 그들로 그 기독교적 고난을 잘 감당해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고난스러워도 우리를 위해 더 큰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ՓՕՌՐՁՈׄՓՁՉ ՔՁזՒ ֢ՓՈՅՍՅԿՁՉՒ ֿՌ،Ս) 분이시라는 것, 심지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는 것이(히 4:15)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짖지 않는(՗ՙՑוՒ ֠ՌՁՑՔԿՁՒ) 분이 어떻게 우리를 체휼할 수 있느냐는 현대인의 질문을 바라보는 듯 오래 전에 웨스트코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시험 중에서 죄인을 체휼하실 수 있음은 죄를 경험해야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만이 가장 온전히 알 수 있는 죄에 대한 유혹의 강도를 경험하시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16] 그는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지만, 도날드 해그너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그 자신이 죄를 범하시지는 않으십니다".[17] 그런 점에서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음을 생각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 따라서 그 분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는 삶이 가장 고난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너무 커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도 위로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보다 더한 고난을 당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시험 당하는 이들을 도와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말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사실 이렇게 하시는 것에 "체휼하신다"(ՓՕՌՐՁՈׄՓՁՉ)는 말의 뉴앙스가 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그저 감정을 나눈다, 동정한다(compassion)는 말 이상의 의미가 있어서 적극적 도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18] 친히 자신이 고난 당하신 우리 주님은 고난 당하는 우리를 뒤에서 밀어 주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후에는 그가 친히 우리의 눈에서 우리가 그를 위해 그의 나라와 복음 사역을 위해 흘린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당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삶,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고난의 삶이어야 함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삶을 사셨는데 그를 좇는다고 하는 우리가 고난을 마다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가 친히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셨는데, 어찌 우리가 존귀 영광 모든 권세만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근거한 그 고난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고난의 삶에로 나아가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2:21).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의미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16세기의 소시니안 주의자들이나 19세기의 유럽의 어떤 이들처럼 이 사실만을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의 일차적인 의미인 구속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난의 구속적 성격을 분명히 한 터 위에서 우리는 그 수난의 모범적인 의미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수난의 대속적 의미만을 말하고 모범으로서의 수난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수난 당하셨지만, 또한 우리의 모범으로서 수난 당하시기도 했다는 사실을 유념하고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고난의 삶에로 기꺼이 나아가는 일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자신을 주와 이웃을 위해 허비하며 고난을 당하는 데로 기꺼이 나아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난의 복음(the Gospel of suffering)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크게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것에 근거하여 구속함을 받은 우리로서도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여 우리의 삶을 희생하며, 시간을 내어 주고, 손과 발을 내어 주며, 생각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주)----------------------------------------------------------------

1 벌코프는 "He suffered during His entire life"라는 제하에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336).

2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37.

3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으로(Cf. Norval Geldenhuys, The Gospel of Luke,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3], 101) 해석하기보다는 당시 가난한 팔레스타인의 한 지붕 밑에 동물의 거처와 조금 높여 지어진 사람의 거주 공간을 가진 방을 하나만 가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John Nolland, Luke 1-9:20, WBC 35A (Waco, TX: Word Books, 1989), 105f.을 보라. 김홍전의 글들도 보라.

또한 순교자 저스틴이 이 탄생이 "동굴'(cave)에서 일어났다고 말한(Dialogue with Trypho, 78:4) 후로 이 동굴에 대한 전승이 있고(Protev. Jac. 18f.; Origen, Contra Celsum, 1:15), 그와 관련된 330년에 탄생 예배당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였다. 동굴과 가난한 이들의 처소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I Howard Marshall, Commentary on Luke,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78), 107, 그리고 그가 인용하고 있는 W. Grundmann). 또 어떤 이들은 밖에서(in the open air) 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그러나 그럴 것 같지 않다는 논의로 Marshall, 106을 보라).

그러나 정확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것은 레온 모리스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것이 "가난과 주목받지 못함, 그리고 거부됨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뿐이다(Leon Morris, Luke, Tyndale NTC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8], 92).

4 이 점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지만, 대표적인 예로 Robert H. Stein, Jesus the Messiah: A Survey of the Life of Christ (Downers Grove, Ill.: IVP, 1996), 황영철 옮김, {메시아 예수} (서울: IVP, 2001), 86을 보라.

5 이런 이해를 잘 표현한 것으로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37을 보라.

6 벌코프는 "He suffered in body and soul"이라는 제 하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Berkhof, Systematic Theology, 337).

7 벌코프는 이 점을 따로 떼어 설명하면서 그가 다양한 원인에서 온 고통을 받으신 것, 즉 (1) 우주의 주께서 낮은 위치에 처하심에서 오는 고난, (2) 순결하고 거룩하신 분이 죄많고 오염된 환경 가운데서 살아야 하심에서 온 고난, (3) 그가 그의 생애의 초기부터 어떤 죽음으로 죽으실 지를 의식하면서 사시는 데서 오는 고난, 그리고 (4) 마귀의 시험들, 사람들의 미워함과 거부, 그리고 그가 받으신 능욕과 핍박 등을 그의 고난의 전체성의 또 다른 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Berkhof, Systematic Theology, 337). 그러나 여기서는 그 내용이 중첩됨을 생각하면서 이를 위 두 가지에 포함시켜 생각했다.

8 중보적 죄의식에 대한 언급은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37을 보라.

9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Leon Morris, The Cross in the New Testament (Exeter: Paternoster Press, 1976), 한역, {신약의 십자가} (서울: CLC, 1987), 50f.을 보라. 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좋은 논의로 44-51을 보라.

10 그 잔에 대한 크랜필드 교수의 다음 설명에 주목하라: "잔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다. 우리는 마가 복음 14:36을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심에 대해 외치신 말씀과 연관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고린도후서 5:21이나 갈라디아서 3:13과도 비교해 보아야 한다"(마가복음 주석).

11 이 점들에 대해서 Stein, 254를 보라.

12 Morris, 51. 그러나 그 뒤에 그는 William Temple로부터 이 수난이 하나님의 경험이 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므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역자 주의 말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신성의 수난을 생각한다든지 또는 신의 죽음을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은 예수의 양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51, 역자 주).

13 M. Goguel, The Life of Jesus (London, 1958), 541, cited in Morris, The Cross in the New Testament, {신약의 십자가}, 50.

14 Stein, 253.

15 Philip E. Hughe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62), 299: "From highest heaven He descended to Calvary and the grave. None was richer than He; none became poorer than He."

16 B. F. Westcott, The Epistle to the Hebrews (London, 18922), ad loc., cited in F. F. Bruce, The Epistle to Hebrew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64), 86.

17 Donald A. Hagner, Hebrew, NIBC 14 (Peabody, Mass.: Hendrickson Pub., 1990), 79.

18 Cf. William L. Lane, Hebrews 1-8, WBC 47A (Waco, TX: Word Books, 1991), 114, 108. Lane 은 여기서 히 10:34, 4 Macc 4:25; 13:23; T. Sim. 3:6; T. Benj. 4:4의 용례를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