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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언약사상

김재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2013년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발표를 기념하는 450주년 (1563-2013)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는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되어서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런 역사적 문서를 돌아보면서, 한국 개신교 교회가 계승해 나가야할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종교개혁 초기 정착 과정에서 독일 남부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개혁신앙이 체계화되어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전세계적으로 그 영향이 확장되어서 오늘날까지 개혁신앙의 기초를 견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유럽의 개혁교회들과 미국을 포함하는 북미주 전지역에서도 45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이 문서에 의존하여 설교하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는 이유는 “기독교 교리의 모범교안으로서 가장 뛰어난 문서”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 
1563년 1월 19일에 독일 남부도시 하이델베르그에서 개혁주의 교회 총회를 통과하자, 제일 먼저 개혁신앙이 널리 퍼져있던 네델란드 교회가 표준문서로 채택하였다. 베젤 (Wesel, 1568), 엠덴 (Emden, 1571), 돌트 (Dort, 1578), 해이그 (Hague, 1586)지역에서  받아들였다. 다시 세계적인 개혁주의 모임으로 확대된 돌트 총회 (1518-9)에서 벨직 고백서와 돌트 신경을 포함하여 삼대 표준문서로 가결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벨직 고백서와 함께 개혁주의 신학을 담고 있는 가장 표준이 되는 문서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이다. 독일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벨지움, 영국 등 서구 유럽과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구 유럽, 미국과 카나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에서도 번역되어서 가르쳐지고 있으며, 가장 영향력 있는 문서로 손꼽히고 있다. 이 고백서가 접근하기 쉽고, 성경적으로 체계화 된 것이기에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훗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네델란드의 개혁교회가 표준신앙 문서로 채택하였기에 그 후손들이 퍼져나간 북미주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민자들과 후손들에게도 중요시되었다. 이들과 교제하였던 여러 장로교회에서도 공식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교파에서도 이를 사용하였는데, 1680년에 침례교 콜린스 목사(Hercules Collins)는 “정통 요리문답서”라는 이름으로 개정을 하여 출판했는데, 유아세례는 생략하고, 성인의 침수세례를 옹호하는 입장을 담았으며, 다른 조항들도 약간 수정을 하였다.
독일 남동부 하이델베르그에서 프레데릭 3세 (1559-1576 재위)가 자신의 통치구역 내에서 새로운 요리문답을 작성하고자 주문하였다.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 (Zacharius Ursinus)는 요리문답의 핵심작성자로서 해설서도 역시 출판하였다. 캬스퍼 올레비아누스 (Caspar Olevianus, 1536–1587)가 이 문답서의 홍보역을 책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3)프레데릭은 그 지역의 종교적인 상황이 좀 더 알려지기를 염원했고, 루터파와 개혁교회의 지혜를 한데 모아서 가장 훌륭한 신앙의 선언을 발표하기를 소원했다.4)일반 성도들에게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제공하고 교육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부분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들과 대립적이며, 칼빈, 멜랑톤, 루터, 쯔빙글리, 불링거, 버미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이 풀이해놓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초판은 독일어 되어 있었고, 라틴어 번역판도 1563년 1월에 출판되었다. 1563년 11월 15일판에는 52주로 나뉘어서, 매주일 오후예배 시간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재편되었다. 미국 크리스챤 개혁교회 (CRC)에서는 독일어판과 라틴어 판의 성경구절을 인용한 부분들을 편집하여서 1975년 종합판을 새로 채택하였다.5)
   
 
(1) 언약사상과 종교개혁의 신학
 
언약신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기까지 종교개혁시대에서부터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성경적인 구원의 전체 역사와 구조를 밝히 보여주는 언약신학은 이레니우스와 어거스틴이 구조적으로 강조하여 놓은 것을 종교개혁 이후로 개혁신학자들이 재정립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와 칼빈으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언약신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중요한 신학체계의 구성원리가 되어졌다.6)

언약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성경적인 신학연구에서 시작하여 가장 중요한 교리로 발전되다가 백 여년이 지난 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3-1649) 7장에서 최고로 면밀하고도 정확하게 세 가지 언약으로 정립되었다. 구속의 언약, 행위언약 (혹은 창조언약, 율법언약, 생명언약, 자연언약 등으로 여러 학자들이 다양하게 표현함), 은혜언약으로 정리되었다.7)보스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야말로 언약교리를 모든 신학의 항목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교리로 가르친 최초의 신앙고백서라고 평가하였다.8)혹자는 네델란드 라이덴 대학의 코케이우스 (1603- 1669)가 1648년, 「하나님의 언약과 증거들에 대한 교리요약」에서 세계 최초로 세 가지 언약을 정리했다고 주장하는데, 서로 다른 대륙에서 각각 발전시켜 나오다가 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9)따라서, 언약신학에 관해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그 작성자들 두 신학자는 초기 사상을 정리하였고, 견고하게 유지하므로써 다음 세대가 언약사상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깨우침과 안목을 열어주었으므로, 결정적인 공헌을 남긴 것이다.  
 
개혁신학자들 대부분이 언약사상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언급하였다. 특히, 언약신학은 스위스 여러 도시에서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무스쿨루스, 롤록, 코케이우스, 윗시우스 등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점차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침내,  스코틀랜드 언약사상가들에 의해서 국가적으로 언약을 실현하는 절정기에 이르렀다. 스코틀랜드 언약신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네 명이 참석하였으니, 로버트 베일리 (Robert Baillie, 1599-1662), 죠지 길레스피에 (Gerogre Gillespie, 1613-1648), 알렉산더 헨더슨 (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새뮤얼 러터포드 (Samuel Rutherford, 1600-1661) 이었다. 이들이 영향을 끼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세 가지 언약이 정립된 것이다.
개혁신학은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언약신학을 근간으로 한다. 칼빈과 그 동시대의 개혁사상을 물려받은 17세기 신학자들은 언약사상에서 일반적인 일치와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었다.10)칼빈에게서 시작해서, 무스쿨루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잔키우스, 윗시우스까지 종교개혁시대와 정통신학자들의 다양한 신학적 강조점에서 가장 공통된 부분이 언약사상이었다. 언약사상에서 차이점이나 상이점들은 많지 않았고, 동질의 개념에서 신론과 인간론, 구원론과 성찬론 전반에 걸쳐서 연결되어져서 여러 핵심주제들의 근본을 형성하고 있다. 
 
(2) 언약사상에 대한 대립적 해석들
 
17세기 정통주의 확립시기에 발전해 나온 언약신학에 대한 최근 비판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를 하려면, 먼저 그 학자들의 뿌리로 지목되고 있는 16세기 후반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형성되어왔는가를 파악할 때에 보다 선명해 진다. 19세기에 나온 정통신학자들에 대한 평가는 역시 독일신학자에 의해서였으나, 1850년대까지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자들과 정통신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떠나 버렸기에 주목할 만한 연구가 없었다. 그래서 그 때까지는 우르시누스, 잔키우스, 올레비아누스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거나 주목하여 거론한 신학교수들이 없었다.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이 독일 남부와 북서부에 널리 영향을 미친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없었으며, 그래서 이들에 대한 연구가 너무나 부족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독일 내에 있던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11)
 
1) 루터파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비판
독일 신학계에서 헤페-베버-비져-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루터파 신학자들이 17세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의 언약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점차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고 있다.  후기 종교개혁자들이 발전시킨 정통신학과 언약신학에 주목하여 시도된 연구는 19세기에 중엽에 시작되었는데, 1857년 칼 슈드호프가 발표한 것이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표준적인 연구라고 볼 수 있다.12)
이와 동시에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 하인리히 헤페 (1820-1879) 교수가 「16세기 독일 개신교 교의학」을 1857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헤페는 언약사상의 뿌리가 칼빈이 아니라 멜랑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발표한 이유는 독일개신교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제공한 근본이라고 구성하려했던 것이다. 루터파 개혁주의가 정통이요 스위스 칼빈주의가 제대로 신학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헤페는 1879년에 발표한  「개혁교회와 경건주의의 역사」에서 자신의 학설을 번복하였다. 언약신학의 역사적 발자취를 정리하다보니, 독일의 멜랑톤이 아니라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나왔다고 한 것이다. 다시 연구를 집중해보니까 독일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 스위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헤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비판한 분이 게할더스 보스 박사이다. 독일에서 나온 언약사상을 남쪽 칼빈주의자들이 집어삼킨 것이아니라는 것이다. 스위스 쮜리히에서는 쯔빙글리와 불링거가 재세례파에 반대하면서 언약사상을 발전시켰고, 이들에게서 영향을 입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가장 탁월한 언약사상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았다.13)결국 헤페는 방대한 자료를 연구하는 성과를 발휘하면서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하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는 예정론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해서, 헤페는 칼빈 이후의 정통신학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서로 대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라고 풀이하였다. 헤페는 스위스의 베자와 독일의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역할을 서로 대립적으로 파악하였다. 제네바의 칼빈주의자들보다는 오직 독일의 개혁주의자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에 대해서만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1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었던 두 신학자들은 칼빈의 엄격한 예정론, 즉 어떤 사람은 택함을 받고 어떤 사람은 유기에 처해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인간의 결정이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에게만 의존한다는 교리를 완화시키려 시도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두 사람 언약신학자들은 다시 역사 속에서 인간의 동반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선회를 했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초기 정통신학자들의 사상이 제대로 주목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는데, 쉬렝크는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최고의 언약신학자인 코케이우스로 이어지는 중간 연결고리를 맡은 신학자는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라고 보았다.15)쉬렝크도 역시 헤페처럼 독일 초기 개혁신학자들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엄격한 예정론자들과는 달랐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후기 정통신학자들은 예정 교리의 경직성을 탈피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신학자들은 계시의 발전사를 강조하면서 철학적으로 교리학을 구성하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의 신학자들과는 매우 달랐다고 평가했다. 적어도 올레비아누스의 언약신학은 17세기 초엽에 나온 코케이우스의 기술적으로 고안된 교의학 체계와는 대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17세기 정통신학자 중에서 언약신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코케이우스와 그 이전 세대가 다르다고 평가한 부분이다. 결국, 이들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칼빈과 다음 세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다르고, 그리고 그들은 또 다음 세대 코케이우스와 다르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몰트만은 헤페의 평가를 그대로 반복하여 17세기 신학에 대한 비판을 확대재생산하였다. 16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테오도르 베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근거한 엄격한 예정론 중심 신학에 대항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럽대륙의 개혁신학이 바로 후기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언약신학이었다고 보았다.16)예정론자들과 언약사상가들 사이에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언약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학방법론을 거부하는 광범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철학의 굴레로부터 신학을 해방시킨 것이며, 생명에 대한 성경적이며 인간적인 사색을 새롭게 던진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정통신학을 곡해하고 과소평가 하는 매우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 과는 달리, 칼빈의 예정론과 선택설은 후기에 나온 언약신학과 전혀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랑에 의해서 제기되었다.17)그리고 최근에는 베커도 역시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저술을 발표하였다.18)

현대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의 정통신학에 대한 해설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부분들이 많다. 1926년 오토 리츨이 발표한 「교리사」를 보면, 후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체계 전반에 걸쳐서 언약 개념의 지속적인 적용이 보인다는 것이다. 언약의 상징인 성찬론의 객관적 특징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자연언약 혹은 율법 언약이라는 조건적 언약이 은혜언약의 기본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후로 성경에 과연 몇 개의 언약이 나와 있느냐가 논쟁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는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 속에는 두 개의 언약이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언약으로 나뉘어져서 은혜언약은 일관되게 통일되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19)맥코이는 초기 정통신학자들은 두 가지 언약사상을 가졌으니, 타락이전의 아담이 지켜야 할 언약은 행위언약이었고 그 이후로 은혜언약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이다.20)트린터루드는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가 언약신학의 구조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해 역설하면서, 이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타락이전의 행위언약이 가장 핵심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21)오토 리츌은 올레비아누스의 저술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어진 시간 이전의 언약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고 주장하였다.22)그러나 최근에 베르호에벤은 그러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표현은 들어있지 않다고 보았다.23)
               
스트렐은 불링거, 무스쿨루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폴라누스 등 언약신학의 발전에 공헌이 있으나, 베자, 버미글리, 잔키우스, 퍼킨스 등은 “칼빈의 균형있는 신학을 왜곡하였고, 예정론을 신학의 핵심 위치로 격상시켰다”고 비판하였다.24)그런가 하면, 와이어는 우르시누스가 타락 전 언약의 개념을 소개하므로써 대표언약의 분기점이 되는 저작을 남긴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잔키우스도 역시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서 언약사상을 왜곡했다는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스트렐과 와이어는 멀러 교수가 소개하는 정통신학의 거대한 발전적 연속성을 주목하지 않으며, 정통신학자들에 대해서도 전혀 동정심을 갖지 않았다.25) 
               
언약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체계 전반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구원을 설명하는 핵심근간이자 교회의 성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사상이다. 현대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서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존중하는 게할더스 보스, 죤 머레이, 안토니 후크마 교수 등은 모두 다 걸출한 언약신학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칼빈 신학대학원의 리챠드 멀러 교수와 비어마 박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마이클 호튼, 피터 릴백, 토마스 클락, 칼 트루만, 시카고 트리니티 대학교의 신네마 교수, 헨드릭스 대학의 죤 파르팅 교수 등의 훌륭한 연구 성과를 주목하여 보면서 이해의 안목을 넓혀나가고자 한다.26)
               
릴백 교수가 연구한 칼빈의 언약사상은 오늘날의 걸출한 언약사상가들의 저술에 비교해볼 때에 매우 주목할 만 하다. 그밖에도 언약신학에 대한 최근 중요 연구자들을 살펴보면 바울 신학에서 율법과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론에 관한 주목되는 저술을 많이 발표하고 있는 휫튼 대학의 신약학 교수 쉬라어너 (Thomas R. Schreiner), 미국 남침례 신학교의 하페만 (Scott J. Hafemann),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토론토 침례교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친 가링톤 (Don Garlington),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다가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순종과 복종을 강조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만두고 기독교개혁 교단에서 오직 목회자로만 사역하다가 최근 은퇴한 노만 쉐퍼드 (Norman Shepherd) 등의 저술들도 현대 신학자들의 논쟁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다.27)

 2)제네바의 예정론과 쮜리히의 대립
언약신학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현대 칼빈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16세기당대에 함께 활약했던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언약신학의 대립구조를 강조하는 연구들이 학파를 형성하고 있다. 트린터루드 (Leonard Trinterud), 베커 (J. Wayne Baker), 맥코이 (Charles S. McCoy), 묄러 (Möller), 그리브스 (Greaves) 등은 쯔빙글리, 불링거, 외콜람파디우스 등 스위스 북부 라인 강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분명하게 인식된 언약의 조건적 성격, 하나님과의 쌍무적 관계, (bilateral conditional covenant) 즉 인간의 책임있는 신앙적 행동을 포함하는 구조가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칼빈과 제네바에서는 예정론 중심의 단일 언약사상만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스위스 내부에서도 쮜리히와 제네바가 각각 두 가지 서로 다른 언약사상 구도를 갖고 있었다고 엄격하게 구별하려는 것이다. 지금 가장 논의되고 있는 문제점은 과연 칼빈과 제네바 쪽의 개혁주의 언약사상가들이 조건적인 성격을 제대로 파악했느냐에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언약사상이 발전되어 왔다는 주장이다.
               
베커가 요약한 분석에 따르면, 칼빈과 제네바 신학자들의 언약은  하나님 쪽에서만 주도하는 일방적, 주도적, 편무적이다 (unilateral);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약속이다; 언약 성취의 부담은 하나님께 있다; 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쯔빙글리, 불링거, 라인강 주변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언약은 쌍무적이다(bilateral);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적 약속과 인간의 반응, 즉 상호적인 대응이다; 언약 성취의 부담은 인간에게 있다; 언약의 성취는 각 개인의 순종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대비시키는 이유는 제네바 쪽의 지도자들은 예정론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 편에서 반응하며 지켜가야 할 믿음과 순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칼빈과 불링거에 대해서 서로 비교한 것은 일부분은 옳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는 요소들이 있다. 특히 베커는 칼빈과 불링거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것은 예정론 때문이라고 본다. 칼빈은 이중예정자요, 불링거는 단일 예정론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정론을 언약신학과 연결 지으려는 지나친 추론이다. 베커는 제네바 쪽의 언약사상에서 인간의 경건과 순종이 조건처럼 보여지고 있지만, 이것은 먼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므로 일종의 ‘가설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28)
               
그러나, 필자는 위와 같이 쮜리히와 제네바를 구분하는 방법과 베커의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베커와 그가 인용한 일부 신학자들에 의하면, 칼빈의 언약신학은 쯔빙글리와 불링거가 발전시킨 쌍무적 언약개념과 본질상 서로 다른 것으로 평가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29)비록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호조약으로 언약이 맺어졌다 하더라도, 이 쌍무적인 언약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편무적인 성격도 항상 은총을 근거로 하는 은혜언약이라는 점을 먼저 고려되어야만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순종으로 완성되었다.
언약사상을 정확히 해석하는 작업은 교리사적으로 난해하다. 이처럼 대립적인 이론이 팽팽하게 맞서있는 것은 신학의 계보가 이미 다르게 형성되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적인 칼빈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들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다양한 현대 신학사상이 개입되어 있고, 16세기 종교개혁 해석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사상은 사실 하나의 신학주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주제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에서 윗시우스까지 핵심사항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3) 하이델베르그의 종교개혁과 통합된 요리문답서 작성의 중요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신학적인 특징들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그 태동 배경과 역사적 환경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는 것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30)독일남부 지방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비교적 늦게 받아들였고, 칭의, 선행, 행위에 관련된 로마 가톨릭 신학과 루터파와의 격돌이 벌어져서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선제후 루이스 5세 (재위, 1508-1544) 때에는 혼란 속에서 전혀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다가, 그의 동생이 1545년에 권좌에 오른다. 곧 프레데릭 2세 (재위, 1544-1556)의 통치하에서 하이델베르그 도시 전체가 오랫동안 신봉하던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개신교 진영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지역은 거의 다 루터파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마틴 루터가 1546년에 사망하고 난 후였다. 1555년 루터파에서도 멜랑톤을 따르는 화해주의자들이 “아우그스부르그 화의”를 만들어 독일 군주들의 지원 하에 통일된 규범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루터의 후계자들은 소위 정통 루터파의 입장을 수호하고자 이 문서를 중요시 했다.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루이스 5세와 동생 프레데릭 2세의 조카이던 오토 헨리 (재위, 1556-1559)가 군주로 추대되면서, 또 다시 종교개혁의 방향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오토 헨리는 신학문제에 대해서 탁월한 식견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기에, 필립 멜랑톤 (1497-1560)의 자문을 받고자 그를 초대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 대표교수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대신해서 틸레만 헤수시우스 (1527-1588)을 파송하여 신학교수회를 주도하게 하였다.31)   루터 사후에 독일 루터진영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정통파를 자처하는 순수 루터주의자들 (the Gnesio-Lutheranism)과 루터의 가르침을 약화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화해를 시도하던 멜랑톤주의자들, 혹은 필립주의자들 (the Philippists or Melanchthonians)로 나뉘어 있었다.32)선제후로 취임하여 잠시동안 통치한 오토 헨리는 하이델베르그 출신이자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멜랑톤파에 속해 있었다. 그는 유화정책을 시도하면서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들도 초빙하여 개신교 진영 전체의 조화를 모색하고자 하여 그의 짧은 통치 기간에 많은 신학자들을 초빙했다.33)필립주의자 딜러 (Michael Diller)는 이곳에 온 후로 팔츠지방의 당회에서 막강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고, 스트라스부르그 루터파 목사 마르바흐 (Johannes Marbach, 1521-1581), 쮜리히 개혁자들과 가까운 질러 (Stephan Zirler)와 에라스투스 (Thomas Erastus, 1524-1583)가 군주의 자문관으로 초빙되었고, 대학교의 법학교수로는 칼빈주의자들 (Christopher Ehem, Francois Baudouin, 1520-1573)이 들어왔으며, 신약성경을 가르치는 보뀌누스 (Petrus Boquinus, 1518-1582)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는데 초빙되었다. 

16세기 중반부에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전혀 다른 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루터의 97개조와 이신칭의 교리에 맞서서 교황 바울 3세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트렌트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칭의론을 골자로 하는 루터의 핵심교리를 저주하고 교황권을 정당화하는 문서를 채택하였다. 지금까지 이 트렌트 선언서가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구원론을 유지하는데 중요시 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보다 확고하게 문서를 채택해서 이에 대응하는 논리를 펴게 되었다. 그리하여 1560년대에 가장 많은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들이 스위스와 독일, 영국 등지에서 나타나게 된다.
 
오토 헨리가 즉위한지 3년 만에 사망하고, 프레데릭 3세 (1515-1576)가 선제후로 권좌에 등극하였을 때에는 팔라티네 지방은 멜랑톤을 따르는 온건한 루터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약간 남아있던 로마 가톨릭에 지지를 보내는 자들과 순수 정통파를 자처하는 루터주의자들과 스위스쪽에서 영향을 받은 개혁파가 뒤섞여 있었다. 프레데릭 3세의 사위, 요한 프레데릭 (1529-1595)이 루터의 비텐베르크가 위치해 있는 삭소니 지방의 선제후가 되어서 점차 온건파 멜랑톤주의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릭 3세가 군주로 즉위하던 1559년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통루터파 헤수시우스와 화해주의자 필립 멜랑톤을 따르는 개량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로 성령교회의 집사이자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신학수업을 하던 윌리엄 크레빗츠 (William Klebitz)와의 성만찬에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재성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로마 가톨릭을 벗어나서 종교개혁의 진영에 가담하기로 하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지만, 여러 계파가 혼재하였다.34)여전히 독일 봉건군주들은 모두 프레데릭 3세의 친인척들로 사촌지간이었고, 대부분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였으나, 1546년 루터가 사망한 이후로 멜랑톤을 따르는 “필립주의자들”과 강경하고도 원칙적인 루터 지지자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1559년 선제후에 취임한 프레데릭은 하이델베르그 신학자들이 엄격한 루터파 원리주의에서 벗어나서 좀 더 유연하게 교회를 세워가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멜랑톤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어떻게 통일을 도모해야 할 것인지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1560년 4월에 멜랑톤이 사망하자, 복잡한 신앙의 문제들을 구하고자 쮜리히와 제네바 신학자들에게 연락하기 시작했고, 칼빈주의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마침내, 1560년, 하이델베르그에서 신학토론회를 열게 되었다. 자신도 역시 확고한 신학적 확신을 갖고자 고뇌하고 있던 중에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35)엄격한 루터파 원칙주의자들이 프레데릭에게 공격을 가하면서 필립주의자들과 개혁파를 추방하라고 공격하자, 도리어 루터파 원리주의자들 추방하였다. 이 신학토론에서 개혁파의 주장을 매우 신선하게 듣게 되었고,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있던 루터파 지역이었지만, 프레데릭은 개혁신앙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독일 땅에서 루터파의 핵심기지가 사라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1562년, 개혁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인 군주 프레데릭은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문서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루터파 진영에 대해서도 서로 평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절실하였다. 멜랑톤을 따르는 자들과 개혁파 사이에 연대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초가 되는 것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마치 프레데릭의 개혁신학, 변화된 신앙적인 법규와 같은 것이다. 경험이 많은 군주는 교수들과 목사직에 필요한 새로운 인재들을 초빙하였다. 칼빈주의자 주레거 (Wenceslaus Zuleger, 1530-1596)가 이 지역 교회의 대표 목사직에 취임했다. 올레비아누스가 목회자 훈련원 조직신학교수가 되었다가 훗날 가장 중요한 성령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트레멜리우스 (Immanuel Tremellius, 1510-1580)가 구약교수로, 우르시누스가 신학대학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를 중심으로 하여 상당히 많은 개혁진영의 신학자들이 프레데릭을 도와서 새로운 신앙고백서 작성에 참여하였다.36)    
 
프레데릭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필요로 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가야 하는지 혼란에 빠져버렸다. 선제후 프레데릭 3세는 독일 연방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높은 지방을 통치하는 자로서 이 사태를 종식시키는 묘안이 필요했다. 그는 경건한 군주로서 이런 충돌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루터파 원리주의자들의 주장을 무마하고, 멜랑톤의 포용주의를 능가하는 글이 필요했다. 개혁신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갈등관계에 있는 루터파와도 화합하는 형태로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되었다.37)

과연 하이델베르그 주변의 여러 개혁교회들을 하나로 묶고, 교리적인 통일을 이루는 일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제 80항에서는 직접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 대해서 공격하면서도, 예정론에 대한 교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루터의 요리문답서들이 이미 있었지만, 그의 글에서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 수도사의 표현들이 많았다. 오래된 로마 가톨릭 용어들을 그대로 채택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루터의 소요리문답 (1529)과 대요리문답 (1529)에 담긴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례해설 등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치는 요리문답이라는 방식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펴낸 「신학대전」이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져 있었다. 역시 트렌트 종교회의 선언문도 마찬가지다. 이런 요리문답의 방식은 중세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남겼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제자 플라톤이 대화록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에 대해서 해설을 가르쳤는데,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것을 근거로 해서 더 발전시키면서 다른 개신교 신학자들이 세부적인 내용들을 첨가해서 발표한 것이다. 루터가 만든 요리문답서들은 매우 중세적이며 진부한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루터의 요리문답은 일반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불편하게 만들려하지 않았던 배려에서 그리 만들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용어들이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구원의 전과정을 재현하는 미사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훨씬 체계적이고, 목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신학적인 주요 주제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언약신학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로와 확신” (Comfort and Assurance in Christ) 이 중심주제로 다루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이들 두 가지 측면이 종교개혁 진영의 다른 개혁파에서는 동시에 강조되지를 못했었다. 위로의 문제를 먼저 다루는 이유에 대해서, 그것이 “요리문답의 의도와 골자”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제시하였다.
 
“이 위로의 골자는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며 또한 그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리하여 그가 우리를 영원토록 구원하시고 보살피신다는데 있는 것이다.”38)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해서 균형과 조화를 제시하였다는 측면이 단연 돋보이는 장점이다. 기독교의 핵심주제들, 기독론, 교회론, 칭의와 성화, 성례론 등에 대해서 개혁주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하이데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학주제는 당시 진행되던 루터파와의 신학논쟁과 관련되어있는 65문에서 82문까지의 세례와 성찬 부분이다. 1560년 6월 3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성만찬 신학논쟁이 있었다. 프레데릭 3세의 딸, 결혼식 축제를 토론장으로 활용했다해서 “예식장 토론”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는데, 이때에는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참여하지 못했었다. 이 두 사람은 1561년에 초빙된 교수들이었다.39)여기에서 나온 내용들이 충분히 반영되어져서, 절대로 평화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중립적이며 공통의 기반을 추구하는 내용으로 절묘한 연합을 도모하고 있다. 우르시누스의 성만찬 해설에 보면, 화채설, 공재설, 기념설 모두를 비판하는 정확한 논지가 돋보인다.40)
 
세례와 성찬의 예식을 “은혜의 증표이자 인침”이라고 설명하였다. 전통적인 루터파에서는 세례는 은혜의 수단이자, “죄를 용서하는 사역”으로 중생과 같이 동일시하였다.41)루터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는 믿음과 상관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이 창조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파에서는 세례받은 어린 아이들은 중생할 어른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모든 목적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어린 자녀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은 이미 그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단지 채택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다. 개혁주의는 처음부터 교육적인 신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물론, 불신자를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기만 하면 믿음을 갖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1문항에서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모든 진리에 따라서 내가 참된 지식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복음에 의해서 내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가슴에 담긴 신뢰이다.” 성경적인 진리와 믿음의 지식이란 지성적으로 교육이 되어져야만 하고, 항상 가슴에 경험적인 확신이 같이 결속되어진 것이라고 개혁주의자들은 주장했다.42)
성례에 대한 해설을 위해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편재설, 실제적 임재를 다루어야 한다. 프레데릭은 온건한 조화를 위해서 멜랑톤주의자들, 쯔빙글리파, 칼빈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부분을 개발하여 능숙하게 정리하였다”.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전통적인 루터파 교리와는 달리, 대부분의 항목에서 개혁신앙을 표명하고 있다. 그 핵심은 22항목에서 58항목까지 참된 믿음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16세기에 나온 거의 모든 신앙고백서들과 요리 문답서들이 참된 신앙을 중요하게 취급하게 된 것은 로마 가톨릭과의 대립적인 위치에서 성경적인 진리를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로 세례의 내재성을 성령과 연계시켜서 표현된 것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65항목에서 보게된다; “성령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또한 성례의 시행을 통하여 그 믿음을 확증하게 하신다.”44)
“경건한” 프레데릭 3세가 하이델베르그에 들어온 1559년을 전후하여 루터파와 스위스 종교개혁 진영의 격돌이 심각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골자로 하는 요리문답이 나오자 루터파 원리주의자들은 즉각 거부하였다. 스위스 쮜리히의 불링거 (1504-1575)는 “지금까지 나온 요리문답서 중에서 최고의 문서”라고 극찬하였다.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에는 개혁사상과 멜랑톤의 주장들이 조화롭게 들어있기에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에게 1563년 4월 3일 편지를 보냈다. 하이델베르그에서는 제네바 요리문답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이 되었는데 칼빈의 이름이나, 제네바라는 도시명칭마저도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올레비아누스는 독일 사람들은 칼빈의 이름이 들어있으면 읽어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베자에게도 편지를 보내어서 이 요리문답서를 검토하여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칼빈은 직접적으로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평생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연구하는데 집중했던 프레드 클루스터 박사는 “하이델베르 요리문답에 대한 칼빈의 태도가 우호적이었다”고 평가했다.46)왜냐하면, 1563년 7월 23일, 칼빈이 예레미야 주석을 프레데릭 3세에게 헌정하면서 군주의 경건을 높이 칭송하였기 때문이다.47)하지만, 칼빈의 직접적인 답변은 없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은 프레데릭이 직접 작성했는데, 세 가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고 교육하고자 함이요,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지침을 주고자 함이며, 신앙고백의 통일성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증거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구조적인 특징은 129개의 문제와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에 대해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해설한 것이다. 루터파 신앙고백서들은 먼저 십계명을 신앙고백 앞에다 넣어서, 어떻게 죄인들을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에서는 십계명을 신앙고백의 내용 이후로 넣어 놓으므로써,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성도들이 즐거운 봉사임을 강조하는 구조가 돋보인다.                
총 129항목으로 구분된 문제와 답변들은 세 가지 묶음으로 구별되어져 있다. 첫째는 위로이다. 둘째는 인간의 비참함과 불행이다. 타락과 인간의 자연상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신 율법을 다룬다. 셋째는 인간의 구속이다. 52주로로 나뉘어져 있다. 매주 교회에서 가르치도록 배열된 것이다. 이 문서를 통해서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되는 체계적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매주 지속적으로 교회에서 배우게 되었다.               
               
(5) 은혜언약의 초석을 놓은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작성할 때에,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1534-1583)는 28세였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캐스퍼 올레비아누스 (1536-1587)는 26세로, 프레데릭 군주가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잔키우스 (1516-1590)가 1568년부터 우르시누스의 후임이 되었다.
쟈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실레시아의 브레스라우에서 태어나서 7년간 (1550-7) 빗텐베르그 대학에서 멜랑톤의 제자로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여러 개혁신학의 요람에서 섭렵을 한 후에 자신의 고향에서 가르치다가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가르쳤고 (1562-8),  ‘사피엔스 대학’ (Sapience College, 1561-77)으로 알려진 신학교에서 동시에 강의하였다. 이 대학교가 완고한 루터파주의자들에 의해서 장악되자 (1576), 노이쉬타트에 있던 개혁파 아카데미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강의하였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원저자로서 (1563) 올레비아누스와 함께 개혁주의 신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48)그의 언약신학은 불링거, 칼빈, 그리고 버미글리 등의 영향을 고루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논쟁이 일어나고 있으니, 초창기 신학을 수업하면서 받은 것들이 다시 피터 버미글리와 교류하면서 칼빈과 개혁신학으로 바뀌었다고 짐작되어진다.49)
 
우르시누스는 은혜 언약의 교리에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였다. 다시 강조하자면, 우르시누스야말로 은혜언약을 확고하게 설명하여 놓음으로서 언약신학의 발전사에서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는 언약신학의 종합적인 체계를 완전히 다 밝힌 것은 아니지만, 언약에 담긴 은혜와 은총을 부각시켜 놓았다는 부분은 인정을 받아야할 탁월한 언약신학자이다.
1561년 말 혹은 1562년 초에 우르시누스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학총론」(Summa theologiae)에는 323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처럼 긴 대요리문답의 핵심은 언약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0)다음은 우르시누스의 언약사상은 그 첫 번 째 문답에서 나온다.
 
“살든지 죽든지 당신이 갖고 있는 견고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한하심과 자유로우신 자비하심에서 그의 은혜의 언약으로 나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왜 이런 교회의 권징이 필요합니까?... 성례와 신적 언약의 모독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에 관한 중요한 질문에서 (제2, 3문항), 율법에서 (제10, 148문항), 약속들 (제33문항), 복음 (제35문항), 율법과 복음의 차이 (제36문항), 중보자 (제72, 72문항), 그리스도의 희생 (제224문항), 설교 (제272문항), 성례 (제274문항 이후), 그리고 유아세례 (제293, 294문항)에서 언약은 매우 중요한 핵심내용에 언급되어져 있다.  
               
첫째, 우르시누스는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약속일뿐만 아니라, 이 약속의 성취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질적인 “화해”(reconciliation)라고 풀이하였다.51)여기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언약에서의 화해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의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점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초점이자 기초가 되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중보자 사역에서 하나님과 사람, “양자 사이의 화해자이며, 모든 다른 언약의 중보자들과 똑같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의도적으로 그 하나님을 버린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포용력은 우리의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으며, 화해를 향한 문을 열어놓았다. 서로 달라진 양쪽 사이에 언약을 회복시키는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하셨다.

“언약이란 일반적으로 두 당사자 상호간의 약정, 혹은 계약으로서, 한 당사자가  스스로 상대방에게 특정한 조건하에서 뭔가를 주거나 받는 등의 어떤 일을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것인데, 이때 그 약속을 엄숙하게 인준하고 또한 그것을 깨지않고 반드시 준수할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특정한 외형적인 표징들과 상징물들이 거기에 수반된다. 언약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정의를 볼 때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간의 약속과 약정이라 정의할 수 있는 성경의 언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52)
 
히브리어 ‘베리트’를 유언 (testament)으로 해석하는 것도 언약을 죽음과 연계시키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사역으로 초점을 모으려 했다. 우르시누스가 가진 언약개념의 핵심은 “은혜로우시며 무조건적인 본질”이기에 우리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언약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으므로 동등한 대등관계가 아니다.53)
은혜언약이 우선적인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우르시누스의 핵심교리는 믿음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믿음에는 역사적 믿음, 일시적 믿음, 이적을 행하는 믿음,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 등 네 종류로 나눈다.54)오직 의롭다하심을 얻는 믿음은 모든 약속 개인적인 적용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은혜의 약속과 관계된 확신이요, 말씀에 대한 동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르시누스는 믿음이란 사람의 편에서 성취되어야 할 언약의 조건이라고 말하였다.
 
선택받은 자들의 회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결코 생활에서 완벽할 수 없다. 믿는 자들의 순종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방법은 중보자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르시누스의 선택교리는 은총을 우선 순위로 놓고 있으며, 칼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55) 
우르시누스는 은혜언약 (foedus gratiae)을 둘째 언약인 자연언약 (foedus naturale)에 연결하여서 설명하였다.56)이 자연언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과 맺으신 것으로서 자연에 의해서 알게 되도록 하셨으니,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의 마음에 심어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연적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악한 것에서 옳은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며,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으로 쓰여졌든지 기록되지 않은 채 마음에 쓰여졌든지 간에 자연언약은 우리에게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제시한다. 순종하는 자는 영생에 이를 것이요, 불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제 10문항 하나님의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인간과 세우신 언약의 일종을 가르치고, (quale in creatione foedus cum homine Deus iniverit) 어떻게 그것을 지키며 행동해야할 것을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언약을  세우신 이후에 무엇을 요구하시는 지를 가르친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어떤 종류의 존재이며, 무엇을 목표로 창조하셨으며, 그들이 타락하여 어떤 상태로 떨어졌으며,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그들이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제 36문항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답 율법은 창조시에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과 함께 맺은 자연언약을 포함하는데, 이는 본성으로 인간존재가 아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며,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져 있으나, 이와 동시에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가 가해진다.
 
제 135문항 어째서 그리스도의 성화와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여겨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가?
답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의롭고 참되신 분으로서 불변하시는 바, 창조시에 수립한 언약과 전혀 배치되는 않는 방식으로 은혜의 언약으로 우리를 받아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자연언약의 순수성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은혜언약에 참여시켰다.57)하나님은 자연언약에서 요구된 의로움의 기준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않는 한 영생을 우리에게 보상으로 주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구속하시는 것이 아니다. 은혜언약은 자연언약의 보충적인 성격이 있다. 은혜 언약을 담고 있는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는데, 자연언약을 담고있는 율법에 의해서 요구된 의로움을 보여주신 분이며 자연언약 아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는 영생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하셨다.
우르시누스의 언약신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활동이다.58)아버지 하나님이 언약의 창조자이며, 그리스도가 그 언약의 중보자인데, 성령은 자신이 언약의 선물이요 동시에 우리의 가슴에다가 영생과 의로움과 용서의 축복들을 인치시는 분이기도 하다. 성령은 택함 받은 자들 안에 믿음을 주심으로 칭의를 얻게된 가장 최초이자 최고의 유효적 근거이다. 성령을 떠나서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가져다 줄 분은 없다. 심지어 언약에 참여한 부모의 자녀들의 성화를 포함하여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성화의 집행자이다.59)성령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을 거듭나게 하고, 언약 안에서 그들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가르쳐주며, 하나님의 성전이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서 성도들을 빚어낸다. 성령은 성도들이 지켜내야 할 언약의 인간적 측면을 지탱해나가는데 필요한 지속적인 은혜의 근거가 된다. 쯔빙글리, 불링거, 무스쿨루스, 그리고 칼빈마저도 아직 성령의 사역이 언약적 기능을 어떻게 수행하는 지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르시누스의 가장 획기적이며 가장 탁월한 언약의 교리의 새로운 강조점은 성도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고 주장한 부분이다.60)이 요리문답을 시작하는 첫 문항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강조하였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화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저 법정적이며 외부적인 선언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그분과 긴밀하고도 친숙한 영적 관계성을 맺게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모두다 그냥 언약의 참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 자신과의 밀접한 연합을 이룬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언약의 혜택들만을 그저 약간 누리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며, 연합되어있다.61)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최고의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분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분은 언약에 우리가 속하여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일찍이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이러한 신비로운 연합을 강조하였고, 구원의 가장 핵심이라고 밝힌바 있으나, 우르시누스는 이것을 언약적인 맥락에서 풀어낸 것이다. 우르시누스는 이처럼 오래된 교리를 새로운 형식으로 풀어서 설명하였다.
               
칼빈의 신학에서 중요하게 드러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중심적인 내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유지하며 보호를 받는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으로 인해서 주신 믿음으로 얻게 되며, 의롭다하심을 얻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62)
               
다시 간단히 요약하면, 언약에 대한 가장 탁월한 설명은 제 3세대 신학자였던 우르시누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첫 번 째 요리문답 (Summa theologiae)에는 은혜언약의 영역이 확대되어 거의 전 교리체계에 반영되어졌고, 전 영역에 걸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행위언약의 선구자로서 창조시에 시작된 자연언약 (foedus naturale)이라는 개념을 개혁신학에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63)자연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것이 아니라, 아담과 맺은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순종을 의무화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물질 세계를 지켜주신다는 의무를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다. 우르시누스의 후기 작품에서는 자연 언약이 사라지고, 은혜 언약이 전통적인 자리에 다시 복귀하는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언약신학의 지속적인 변혁과 갱신을 드러내주는 부분들이다. 
 
(6) 올레비아누스의 언약사상
                
독일 남부 지역에서 개혁신학의 정립에 훌륭한 공헌을 한 캐스퍼 올레비아누스 (Caspar Olevian, or Olevianus, 1536-87)는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교에서 칼빈주의 신학의 초석을 놓았다.64)1550년부터 약 7년간에 걸쳐서 그는 파리와 오를레앙, 부르쥬에서 대학교육에 이르는 전과정을 공부하였다. 칼빈의 성장과정과 거의 유사한 학업을 마친 후에, 어린 시절부터 성경연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개혁신학을 수업하기 위해서 제네바에 머물면서 한동안 칼빈의 지도를 받았고, 쮜리히와 로잔을 머물면서 불링거와 파렐과 사귐을 가졌다. 뜨리에르에서는 미완성으로 그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으나, 이 도시가 로마 카톨릭으로 귀착됨에 따라서 이 도시를 떠나야만 되었고, 칼빈처럼 조국 프랑스를 떠나서 이방인으로 살아갔다.65)
               
독일 팔라티네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로부터 초청을 받아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 있는 동안 칼빈주의 신학 노선에 입각한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정립과 예배의식을 정립하는데 진력하였다.66)26세의 신예 개혁신학자로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1560-76)에서 가르치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편집과 해설을 주도하였다. 그는 차츰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자가 되었는데 ‘대표 언약설’의 주창자가 되었다. 그리고 프레데릭 3세가 사망하고 (1576) 그의 아들 루드비히 6세 (Louis VI)가 선제후로 등극하자마자 루터파 원리주의를 표방하게 되자,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추방되어서 말부르그 북쪽 50마일 지점에 있는 비트겐쉬타인과 베테라우 지방에서 칼빈주의 교회들을 돌보면서 궁정학자로서 귀족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나쏘의 헤르보른에서 (1576-87) 신학자로 활약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1) 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쟁들
                
언약사상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어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서, 먼저 율법과 복음과의 대조, 율법언약과 은혜언약의 대조 등이 올레비아누스의 책에서 평이하고 선명하게 등장한다. 이런 면모들이 과연 신학적인 방법론의 차이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초기 종교개혁자들과 다른 신학이해에서 기인한 것인지 논란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올레비아누스의 신학방법론이 피터 라무스의 이분법적 비교방법론에서 영향을 받았느냐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프랑스 칼빈주의 철학자였던 라무스를 제네바에서 베자가 강의하도록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67)
               
19세기 중반 영향력을 많이 미쳤던 루터파 자유주의 조직신학자 헤페는 올레비아누스가 칼빈의 예정론에 맞서서 반론을 폈으며, 멜랑톤의 입장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 신학자라고 평가하였다.68)그러나, 헤페의 신학노선을 존중하면서 따라갔던 칼 바르트는 올레비아누스야말로 칼빈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파한 철저한 칼빈주의자라고 보았다. “나는 올레비아누스에게서 칼빈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를 통해서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과연 올레비아누스가 칼빈주의자로 해석되어야 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인데, 그는 일종의 반스콜라주의자로 간주되어져왔다.”69)
               
최근에 와이어는 다시 한번 헤페의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70)그리고 몰트만도 역시 매우 복잡한 16세기 개혁신학자들의 방법론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헤페의 견해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몰트만을 반박한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비어마 교수는 올레비아누스가 사용한 논리적 방법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다고 본다. 그러나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고 보았다.71)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비어마의 연구에다 덧붙일 것은, 올레비아누스를 포함하여 정통신학자들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을 택하고 있었고, 수사학에 있어서는 ‘라미즘’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비어마의 주장에서 라미즘에 관한 부분이 더욱 첨가되어야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라미즘이란 하나의 교육학적 기술로서 변증법적 이론이나 형이상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레비아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수정하여 사용하였고, 라미즘을 채용하여 보다 효율적인 이해를 도모하였다.72)
               
올레비아누스가 저술한「고안집」(De inventione」은 트리에르에서 사용한 교재, 멜랑톤의 1547년판 「변증법」(Dialectices) 과 아주 유사한 작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신학방법론으로서 라미즘의 이분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상호 보충적으로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73)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채택하여 ‘원인’과 ‘효과’ 사이의 분석도 있고, ‘형상’과 ‘질료’ 사이의 구분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원리 라무스가 멜랑톤의 변증법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으니, 올레비아누스는 역시 명쾌한 설명, 분명한 이해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교육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생애의 후반기에 올레비아누스은, 라무스 (1515-72)처럼 단순하고 평이하고 명쾌한 도구를 필요로 하는 청소년들의 교사로서 봉사했기 때문이다.

               
올레비아누스를 비롯하여 대륙의 개혁신학자들과 영국 청교도들이 많이 채택한 라미즘은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인 창작물이 아니라, 옛날 방식을 답습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리스 문하생들인 피터 (Peter of Spain)와 루돌프 아그리꼴라 (Rudolph Agricola)의 방법론을 좀 더 새롭게 종합한 것이다. 라미즘은 신학의 형성을 위해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 방법을 채택하므로서 형이상학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방법론이 개선되어진 것이다.
                
2) 칼빈주의 언약신학의 통합과 발전
               
올레비아누스는 언약신학을 칼빈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최고로 잘 풀이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선택과 언약을 함께 분리시킬 수 없는 묶음으로 만들었다”74) 그는 언약의 개념을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정립하였으니,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편무적이요 우선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개념을 중요시하면서 절대적인 선택의 기조 위에서 정리하였기에, 쌍무적인 언약구조만으로 대립시키려는 입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올레비아누스가 기여한 언약신학의 기본 구조는 이 주제에 대한 칼빈주의 신학의 도약이라고까지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75)  그는 불링거의 언약신학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진 우르시누스의 조건적인 형식을 과감하게 변경하였다. 언약은 우리를 위해서 성취된 것이지, 인간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역설하였다. 인간 쪽에서의 역할은 상대방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지만 결코 대등한 동반자로서 하나님의 짝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76)물론 올레비아누스와 함께 사역하였던 우르시누스도 감히 하나님과 사람의 동등한 구도는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우르시누스의 경우에도 도움을 받지 못한 인간이 스스로 능력이 있어서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성령의 권능으로 중생한 사람만이 언약의 조건을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신자들에게는 은혜 언약이 먼저 성취되어졌기에 조건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개혁진영의 그 어떤 신학자라도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조건을 맺었고, 언약적인 관계가 서로 쌍무적인 책임을 감당해야하며 상호수혜를 얻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올레비아누스는 집중적으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사도신경을 해설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이 언약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구원의 집행”이라고 풀이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로부터 출발해서 정리하였다.77)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동지들이다. 그들에게는 두가지 하나님 나라의 혜택이 주어지고 언약이 유지된다. 즉, “죄의 용서와 날마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격려하여 훈련되어진 성화의 많은 것들인데 회개의 가치 있는 열매들로 나타난다.” 이 땅위의 나라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언약을 맺는데 조건이나 조항들이 설정되어지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분명한 항목들이 화해의 기초를 구성한다. 신앙의 고백서에서 믿음의 조항들은 일종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인데 그 언약의 제목들과 요약이 들어있다.
               
언약의 제목들에 대해서 올레비아누스는 사도신경의 내용에 따라서 다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 성부 하나님이 언약 혹은 화해의 최초 근거가 되신다. 성부는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신다. 둘째, 성자는 이 언약의 실행자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모든 내용이 이해되어진다. 셋째, 성령은 성부의 자비하심과 성자의 구속을 믿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확증하여 주신다. 넷째, 교회는 그의 언약을 적용시킨 자들의 모임으로서, 믿음과 화해의 효과를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올레비아누스는 우르시누스가 이미 발전시킨 언약의 개념을 훨씬 더 많이 적용하고 사용하였다.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이 언약이라는 제목 아래서 해석되어져 있다. 우르시누스는 구약과 신약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면, 올레비아누스는 사도신경의 네 가지 구조 안에서 기독교 교리를 요악하였다.
                
가. 삼위일체론
     
올레비아누스는 삼위일체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개혁주의 신론을 확고히 했다.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이해하는 첫 출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다고 이미 제네바의 칼빈이 역설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하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확실하게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죄인인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과제이다. 누가 과연 어떤 지혜가 있어서, 모든 인간들에게 창조주를 바르게 설명하여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회의론과 불가지론과 경험과학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시켜 줄 것인지는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바르게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하였다. 「삼위일체해석」(Expositio symboli apostolici, 1576)에서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기독론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그는 성육신과는 별도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이 중요한 주제를 기독론의 기초 위에서 정립하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띄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잘 요약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이 사도적 고백에 보면,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고백을 드린다. 사도신경을 중요시 하는 이유에 대해서 올레비아누스는 삼위일체가 그 핵심이라고 가르쳤다. 이어서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주의 섭리론을 옹호하였는데,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은 첫 창조에서 하신 것처럼 현재도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입증하는 것 중에 하나는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voce Euangelii) 그리고 ‘아들의 내적인 말씀에 의해서’ 교회로 청중을 모으는 것이다. 언약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한 위로의 근거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하는 권능과 작정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우주적 권능의 조합들 (subsets)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 만큼, 믿음이 커지고 존경하여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본체라고 보았다. 근원적이며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체는 초월적 지식 (extra intellectum)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서 주어진 제 이차적인 본질들로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구별할 수 있다.

               
올레비아누스의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이론신학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론적 설명을 담고 있는 언약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은혜언약에 참여하는 자는 삼위일체와 교통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은 믿음의 열매를 즐거워하는데,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서 나오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그들은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임을 받은 자들이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구원의 혜택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나. 넓은 의미로 확장된 은혜언약
          
올레비아누스의 언약사상의 핵심은 언약의 본질과 시행을 구분해서 생각한데 있다. 거듭해서 그의 글 속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본질의 통일성과 시행의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언약의 본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언약의 기본이요, 핵심이다. 언약의 통일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혜들을 나눠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온다. 구원을 받는다 함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회복되어져서 함께 동행 동거하던 에덴 동산에서의 자연스러운 임재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 바로
               
질문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과 연합하며 교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78)
 
인간의 최대 행복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연합하는데 있다는 말은 은혜언약의 본질을 바르게 지적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의 교제회복을 위해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에 먼저 솔선하셔서 언약의 형태로 인간과 연합을 위한 계획을 세워놓으셨던 것이다. 마치 인간들 사이에서도 서로 대적자들이 평화의 맹세와 약속을 하고 화해를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역시 자신과 우리 사이에 약속과 맹세를 다짐케 했는데 그가 아들을 육체로 보내시고, 그의 희생을 통해서 인간과 영원한 평화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처럼 순결하고 거룩한 자들만이 그분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불결함을 제거시켜야만 한다. 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며, 하나님의 구원의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의 언약“ (이사야 54:8, 10)이란 복음의 말씀과 다를 바 없으며, ”영원한 언약의 말씀“ (사59:21) 혹은 ”화해의 말씀“ (고후5:19)이라고도 한다. 복음이 약속하는 내용 혹은 언약의 전체 본질 속에는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다.79)
               
어떤 의미에서 올레비아누스는 은혜언약을 아주 넓은 의미에서 해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일방적인 (unilateral) 화해로서만 이해하지만 말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인 (bilateral) 다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단순히 화해의 약속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복종맹세가 함께하여 쌍방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약의 조건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서 은혜언약은 양편의 참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단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약속만을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야 하고 믿음을 지켜야 하며 순종해야만 그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편의 윤리적 책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쌍무적인 참여로서 언약에 대한 넓은 이해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핵심주제를 이루고 있다. 예레미야서에 약속된 새언약의 실행은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성취하심으로서 집행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가 왕으로서 부르시고 복음을 통해서 지도하시고 심령 속에서 용서와 내적 갱신이라는 두가지 은택을 베푸신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먼저 부르심을 베푸시고 새롭게하여 주시지만, 인간 편에서 반응하고 회개하고 노력하여 참여한다.
 
올레비아누스의 언약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장 눈에 돋보이는 부분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를 처음 주장한 칼빈보다도 우르시누스가 더욱 잘 활용했고, 올레비아누스가 가장 훌륭하게 언약신학에 접목시켰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라는 개념은 매우 긴장감이 넘치며, 역동적인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제 화해로서 언약을 좀 더 폭넓게 해석하는 올레비아누스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 양쪽이 언약에서 서로 연결되어진다고 보았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이자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며, 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과 화해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호의를 제공하는 통로이며, 우리는 그 호의를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그분을 소유할 때에만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언약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삼위일체가 서로 연합하듯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연합하듯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연합도 긴밀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연합은 물질적인 혼합이 아니다. 이 신비로운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그리고 그 연합의 끈은 성령이다. 이것은 이미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한 바 있다. 결국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 전체와 교통하는 것이다.
               
언약의 기초에 대한 올레비아누스의 설명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언약의 첫 번째 기초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획득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기초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물론 그리스도의 인격에 더 깊은 차원의 기반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자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있다.
             
은혜언약의 두 번 째 기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더 깊은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기초하여 나오는 것이다. 언약과 선택은 로마서 8장29절 속에 똑같은 황금사슬로 묶여져 있다. 하나님은 미리 특별하신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택하신다. 그 선택의 작정은 효과적인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믿음의 선물을 주심으로서 택함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된다. 믿음은 칭의 혹은 죄의 용서와 영화 혹은 마음과 몸의 새로워짐이라는 언약의 두가지 혜택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 고난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언약을 맺은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근거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교리보다도 은혜언약의 더 깊은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다. 하나님은 그의 끝없는 사랑에서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을 택하지 않고 그 중에서 일부만을 택하셨냐고 물어온다면, 이 결정에 있어서 듣는 사람 자신들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결정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이 완전히 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언약의 전체 본질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궁극적인 답변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의 결정에는 악이 없고, 순수하며, 부당하지 않고, 최고의 선택일 뿐이다. 예정과 언약의 두가지 혜택은 구원의 사슬에서 연결되어 있다.
               
1585년 언약에 관한 대작을 발표하면서 올레비아누스는 언약의 본질과 언약의 시행을 나누어서 설명하였다.80)언약의 시행에 관하여는 보이는 교회의 상황 속에서 이 축복이 적용되어진다고 하였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일반적인 언약의 시행에 참여한다.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태어나면서 모두 다 할례를 받는 것은 일반언약의 시행으로 정해진 것이다. 창세기 17장 10절-14절을 살펴보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의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히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니라”
                
하지만,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다 영적으로 할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은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런 마음의 할례는 특별한 언약의 시행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직 선택된 자들만 해당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이다. 외부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의 신앙을 검증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은 교회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보이는 교회에는 언약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기된 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그들은 마음의 갱신과 죄사함의 약속을 거부하고 있는 언약의 파기자들이다.
 
올레비아누스의 이러한 언약신학과 예정의 연결에 대해서는 현대 신학자들 사이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쉬렝크 (Screnk), 베커(Baker) 등은 올레비아누스가 너무 지나치게 언약을 좁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81)벌코프는 언약의 본질과 시행을 구분하는 올레비아누스와 뒤르뗑의 견해가 다소 모호하다는 평가를 남겼다.82)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언약의 자손들이라고 해야만 하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계시의 목적과 수단으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교수였던 피터 드 영 (Peter De Young)은 올레비아누스의 견해가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보이는 교회에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들어와서 언약과 그 약속에 약간의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성숙한 견해라고 보았다.83)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주어지는 외적인 언약의 시행에만 관련을 맺고 있을 뿐이며, 성령에 의해서 내적으로 시행되는 언약의 실제 혜택과 본질에는 관련을 맺지 못한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오직 육체로만 언약의 표징을 갖고 있을 뿐이며, 그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관련을 맺지 못한 것이다.
 
다. 언약의 통일성과 다양성 
          
언약은 단 하나 뿐이며, 영원한 은혜의 언약이다고 올레비아누스는 선언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은 칭의의 은혜가 공통적으로 동일하게 옛언약과 새언약에 들어있다.”84)왜냐하면 모든 시대를 통털어서 신실한 자들의 화해를 위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 언약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은혜의 언약, 즉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공통점이요 통일된 원리였다. 옛 구원의 경륜 아래서는 장차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가, 새 언약 아래서는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충만한 계시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킨다.
               
예수님 이전의 언약들은 아담, 아벨, 아브라함, 다윗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모두 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속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해하였다. 아담의 원죄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속죄함을 얻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죄도 역시 사함을 얻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차이점이란 단지 시행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똑같다고 주장했다.85)이점은 우르시누스의 주장과도 동일한데, 언약은 하나이며 옛 약속과 새 약속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하였다. “언약은 본질상 하나다. 그 양상에서는 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또한 덜 일반적인 조건에 있어서는 혹은 어떤 이들의 말처럼 그 운영의 양식에 있어서는 둘이다.”86)
               
올레비아누스는 우르시누스처럼 똑같이 “자연언약” (foedus naturale)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7)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생명의 약속이 들어있다. 만일 위반할 경우에는 죽음으로 형벌을 받게 될 것이요 완전히 순종할 경우에는 생명이 주어지는 조건이 부과되어 있었다. 올레비아누스는 자연법을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와 연결시켰는데, 이성, 의지, 감정,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서 드러나게되는 모든 속성들과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본성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우심을 인간의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계속해서 자신이 수행해야할 자연적인 의무감을 인식하고 있게 되어졌다.
               
올레비아누스는 “창조언약” (foedus creationis) 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는데, 타락이전 인간의 조건과 위치에 대한 설명에서 기본언약 (primium foedus)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사탄의 미혹으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 맺은 “창조언약”을 어기고 거짓 약속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사탄과의 언약 (foedus Sathanae)은 사탄의 약속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는 동맹이요 단결이다.88)이것은 은혜언약의 반대개념이라고 올레비아누스는 설명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의 본성은 사탄의 지배를 당하게 되었고, 어두움의 나라의 백성으로 전락했으며, 새로운 주인의 이미지를 반영하게 되었다.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께서 은혜언약 (foedus gratiae)을 준비시키셔서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반응하도록 예비하시고 저주에서 건져내셨다고 풀이했다.89)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모든 것들이 드러났고 완성되어졌다. 완전한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와 지배를 무너뜨리셨고, 대적들에 맞서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내시고 보호하신다. 완벽하신 순종을 통해서 중보자로서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무한하신 사랑을 주신다. 구원언약의 영원한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연합을 요구한다.
               
새언약의 시대에는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훨씬 더 풍성하게 인식하게 되어졌고, 믿음 안에서 그 혜택들을 더 즐기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더구나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제사법적인 과용과 구약시대의 규칙들을 준수해야만 하는 순종 의무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성취되었다.
           
성례들은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다고 올레비아누스는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언약의 본질은 동일하고 시행에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약속과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혜택이 여러 종류의 성례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모든 성례들은 그리스도라는 본질과 실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성도들을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는다. 구약시대에는 유월절과 율법적인 제사법들을 지켜야만 했는데, 이런 언약의 측면들은 중보자를 기대하게 했던 것들이고,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다 성취하시고 폐지되고 말았다. 물로 씻어내고 빵과 포도주로 영양을 공급받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적인 관계를 맺게 되어져서 죄를 씻음 받는다는 것과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고 강화되어진다는 것은 상징하는 것이다.
           
올레비아누스에 의하면, 은혜언약의 상호적 성격 (mutual covenant of grace, mutui foederis gratuiti)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례이다.90)화해의 일방적인 약속은 쌍무적인 순종과 다짐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명령의 측면과 인간이 반응해야하는 믿음의 조건이 함께 은혜롭게 연결되도록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 가운데서 선포하신다. 
          
그러나 아직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은 올레비아누스의 글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택한 자들과 맺은 단 하나의 영원한 은혜언약의 일부분으로 취급한다. 성부의 작정과 영원한 의도 사이에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성자께서 자신의 사역으로 성취해 나가는 상호 작용의 본질은 아직은 그 안에 함축 (ingredients)되어 있을 뿐이다.91)
 
결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는 개혁주의 언약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언약신학이 이들에게서 완전하게 발전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언약이라는 개념이 초기 종교개혁자들보다 좀 더 명쾌하게 규정되었고, 사용되었으며, 종합적으로 제시되었다.
               
언약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성경 전체의 전망과 사도적 교리의 전체 구조를 이 주제와 연관해서 풀이하였다.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를 제시하는 통합적인 원리가 언약임을 강조하였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하나의 은혜언약을 상징하고 인치는 것으로 성례를 풀이하여 루터파와의 논쟁을 종식시켰다.92)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는 하이델베르그에서 벌어지던 루터파의 ‘공재설’이 개혁파와 대립하던 성만찬 신학의 긴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으로 연결해서 풀이한 것이다. 언약에 참여한 백성들이 누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혜택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초월적이며 신비로운 연합으로 임하시는 임재, 즉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서 참여케하시는 은혜라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의 성격과 위치를 강조하는 언약사상으로 인해서 더 이상 빗텐베르그에서 설명하는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우르시누스는 “신인 협력적인 개념으로 언약신학의 출발점을 삼으려하지 않았다.”93)개혁신학과 일치되는 범위까지만 멜랑톤의 교리를 취사선택 하였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를 통해서 언약사상은 제네바와 쮜리히에서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발표한 것들을 통합하고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교리로 더욱 더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더구나 동시대를 살았던 테오도르 베자와 하이델베르그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상호 신뢰와 후원관계를 유지했다. 베자는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와 교분을 나누었고, 이들의 책이 제네바에서 출판되도록 후원하였다.
               
칼빈의 신학에서 강조된 것들의 대부분이 하이델베르그 신학자들의 언약사상에 들어있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율법언약과 행위언약으로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런 구분법은 이미 칼빈에게서 “행위 대 언약”으로 정리되어 있었으므로, 이중성을 파악하여 제시하는 동일선상에 있었다. 베자는 “행위의 교리”와 “은혜의 언약”을 구분했었는데, 교리를 빼고 “언약”을 넣으면 되는 것이요, 행위라는 것은 “율법”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성경중심의 신학이 여전히 강력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의로운 자들과 사악한 자들의 대조와 대립이 분명하다. 쮜리히는 쌍무적인 언약을 강조하고, 제네바는 편무적인 언약을 강조했다는 이중적 대립구조는 여전히 설득력이 없다. 훗날 영국 청교도들의 언약사상과 비교해 볼 때에도, 무조건적인 약속의 우선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면서도,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조건적인 쌍무적 언약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칼바르트는 독일 자유주의 루터파 신학자 헤페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아서, 언약적 대표 개념은 멜랑톤의 자연법 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규정해 버렸다. 그리하여 율법주의, 즉 행위 언약의 방법으로 소개되어서 개혁주의 신학에 들어오게 된 것이므로, 은혜를 강조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신학에는 들어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단순한 대조를 그대로 채용하여 제임스 토렌스, 롤스톤 등이 여러 저술을 발표하였다.
               
페리 밀러는 언약신학이라는 것은 훗날 청교도들에 의해서 발전된 것인데, 한편으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방어하면서, 반율법주의자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94)세대주의자들은 환영했지만, 과연 언약신학이 초기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이요 낯선 것이었으며, 청교도 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너무나 과격해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의심을 이어받아서, 트린터루드, 베이커, 그리브스 등은 언약신학의 근거를 추적하면서 결국 제네바와 쮜리히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언약사상을 제시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칼빈의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을 재구성하고자 하면서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서 베자가 엄격한 예정론으로 왜곡시켰다는 켄달과 피터 툰의 연구로 인해서 언약신학은 감격을 잃어버리는 주제가 되고 말았다. 한걸음 더 나가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으니, 언약신학은 원래 고상한 칼빈주의와 베자의 예정론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보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신학이었고 인간적인 얼굴을 개혁신학에 가져다 주었다는 롤스톤의 주장이다. 퓨리턴들은 언약의 이중적인 구조를 강조해서 하나님과 서로 구원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는 식으로 차가운 대립적 사고체계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강압적인 율법주의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미국 신학자들 (van Zandt, Van den Bergh, Von Rohr)를 비롯하여 칼빈신학대학원의 안토니 후크마, 리챠드 멀러, 비어마, 커번넌트 신학대학원의 칼훈 교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존 머레이, 릴백 교수 등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언약신학은 충분히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신학자들과의 차이점 보다는 연속성과 통일성이 더 많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95)언약신학은 단순히 언어적인 연구나 구조적인 검토에 그칠 주제가 아니라, 언약적인 관계성에 대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에 대해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성을 보여주는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언약은 인류 구원역사의 근본구조에 들어있으며, 신학의 기본구조로서 기독교 신자의 생활과 실제의 모든 영역에 관련되는 핵심신앙이다. 언약신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강조하므로써, 성도들에게 유일한 위로와 한없는 사랑에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리스도의 보호아래 있음을 확신하는 교회 공동체의 연합과 강한 자의식을 심어주었다. 세상에서의 책임을 강조하여 국가 언약을 세우는 데 기여했고, 교회 구성원들이 세속적인 오락이나 쾌락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하는 경건을 추구하도록 했다. 특히, 세례와 성만찬의 신학을 확고히 하므로써, 영혼소멸설을 주장하는 에피큐리언들의 미혹, 변질된 이단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부활신앙에의 기대를 지켜나가게 해 주었다.
               
종교개혁자들과 후기 개혁신학자들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근거한 신학사상을 연구하고 깨우치려고 노력하였고, 성경을 철저히 공부하던 그들은 언약사상, 혹은 언약신학이 가장 중요하다는 깨우침을 터득하였고, 많은 저술에서 강조한 나머지 언약신학자로 불려지게 되었다. 언약은 기독론, 신론, 구원론, 인간론 등 핵심교리들과 서로 연결시키고 성경의 핵심으로 조명하게 된다. 언약사상은 예정론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강조되었는데, 그러한 주장을 펴게 된 이유는 인류 구원의 전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과 그 성취를 주목해 보았기 때문이다.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로 구성되는 언약의 개념을 풀이하면서, 16세기와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 많은 저술을 발표하였다. 종교개혁 후기 신학자들은 과연 초기 종교개혁자들과 단절되어진 것들이었을까? 이런 의문으로 정통 개혁신학의 흐름을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크고 넓은 구원의 경륜이 펼쳐져 있는 신구약 성경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과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과연 연계되어 있고,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하고 풀이하는 단서들이 엄청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의 ‘서신들’ 속에 등장하는 ‘구약’의 율법들이란 그저 닫혀 지고, 굳어져 버렸으며, 순전히 율법적인 권위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의미 없이 다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요, 신약의 예수님에 이르러서 사랑의 하나님이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의 모든 구속역사는 점진적으로 약속에서 성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반역, 하나님의 진노와 구원의 약속, 인간의 실패 등이 연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언약신학은 그 내용과 표현과 방식이 정립되었다고 하였지만, 각 시대적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과 연속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저술에서도 시대마다 표현과 강조가 달라졌지만, 그 통일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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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erman J. Selderhuis, “The Heidelberg Catechism: The Secret of Its Success,” in A Faith Worth Teaching: The Heidelberg Catechism’s Enduring Heritage, ed. Jon D. Payne & Sebastian Heck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3), vii; “the best-known parts of that manual of doctrine” Derry G. Hart, “The Heidelberg Catechism in the United States,” in A Faith Worth Teaching, 16-32. 북미주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받아들이는 교단들은 다음과 같다: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PCA),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CRC), the United Reformed Churches(URC), the Presbyterian Church (USA),(PCUSA) 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 (RCA), the Communion of Reformed Evangelical Churches (REC), the United Church of Christ (a successor to the German Reformed churches), the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also of German Reformed heritage), 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North America, the 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s, the Canadian and American Reformed Churches, Reformed churches of Dutch origin around the world.
2) Kevin De Young, The Good News We Almost Forgot: Rediscovering the Gospel in a 16th Century Catechism (Chicago: Moody, 2010).
3) Lyle Bierma, “The Purpose and Authorship of the Heidelberg Catechism” in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Sources, History and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5), 67.
4) Mark A. Noll, Confessions and Catechism of the Reformation (Vancouver, B.C.: Regent College Publishing, 1991), 134.
5) Fred H. Klooster, Our Only Comfort: A Comprehensive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Faith Alive Christian Resources, 2001). 2 vols.
6)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The Seventeenth Century (N.Y.: Macmillan company, 1939), 394. George Marsden, "Perry Miller's Rehabilitation of the Puritans: A Critique," Church History 39 (1970): 91-105.
7) Peter Y. De Jong, The Covenant Idea in New England Theology 1620-1847 (Grand Rapids: Eerdmans, 1945), 49. B. B. Warfield, The Significance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as a Creed (New York: Scribner, 1898). R. S. Paul, The Assembly of the Lord (Edinburgh: 1985).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제 2부, 5장 “언약신학”.
8) G. Vos,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in Reformed Theology,” in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Phillipsburg: P&R, 1980), 239.
9)Johannes Cocceius,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is Dei (1648). J. MacLeod, “Covenant Theology: the Need for a Reappraisal and a Reaffirmation,” The Monthly Record of the Free Church of Scotland (August, 1983), 147.
10) Andrew A.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al Thought: A Study in the Reformed Tradition to the Westminster Assembly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2), 3. Michael S. Horton, “Which Covenant Theology?” in Covenant, Justification, and Pastoral Ministry: Essays by the Faculty of 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 ed. R. Scott Clark (Phillipsburg: P&R, 2007), 206. Peter Golding, Covenant Theology: The Key of Theology in Reformed Thought and Tradition (Ross-shire; Mentor, 2004), 18. Johannes G. Vos, The Scottish Covenanters (Edinburgh: Blue Banner, 1940), 14.
11) 독일 내에서 루터파가 아닌 다른 종교개혁 진영에 대한 새로운 해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들은 다음을 참고할 것. Bernhard Lohse, "Dogma und Bekenntnis in der Reformation: Von Luther zom Konkordienbuch," in Handbuch der Dogmen und Theologiegeschichte, ed. Carl Andresen (Gö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80), 2:1-164. Hans-Jürgen Goertz, Pfaffenhaβ und groβ Geschrei (Munich: C. H. Beck, 1987). Heinz Schilling, "Alternatives to the Lutheran Reformation and the Rise of Lutheran Identity," in Germania Illustrata: Essayes on Early Modern Germany Presented to Gerald Strauss, ed. Andrew C. Fix and Susan C. Karant-Nunn (Kirksville: Sixteenth Century Journal Publication, 1992), 99-120.
12) Karl Jacob Sudhoff, C. Olevinus and Z. Ursinus: Leben und ausgewählte Schriften (Elberfeld, R. L. Friderichs, 1857), 377-8, 460.
13) Geerhardus Vos, “Doctrine of the Covenant in Reformed Theology,” in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Phillipsburg: P&R, 1980), 235-236. “It was not the case that Calvinist stream only later swallowed up the remains of the so-called German Reformed school. Rather, It formed its own bed in Germany very early on and watered its own area with its own freshness.” (p. 236).
14) Heinrich Heppe, Geschichte des Piestismus und der Mystik in der Reformirten Kirche (Leiden: E. J. Brill, 1879), 09-11. idem, Dogmatik des deutschen Protestantismus im sechzehnten Jahrhundert, 3 vols. (Gotha: F.A. Perthes, 1857), 1:143-44; idem, Theodor Beza: Leben und ausgewälte schriften (Elberfeld: R. L. Friderichs, 1861).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전혀 다른 이름으로 개작되었다. 원래 이름은 “복음적 개혁교회의 교의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통”이라는 제목은 전혀 들어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이 칼빈과 그 후예들이 전개한 “정통” 개혁주의 교리가 담겨있는 책도 아니다. 필립 멜랑톤을 “개혁신학의 아버지”라고 간주하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 책의 서문에 담긴 칼 바르트의 해설에서 이런 연결점들이 잘 드러나 있다. 「개혁파 정통교의학」, 이정석 역 (크리스챤다이제스, 2006).
15) Gottlob Schrenk, Gottesreich und Bund im älteren Protestantismus vornehmlich bei Johannes Coccejus (Gütersloh: C. Bertelsmann, 1923), 57.
16) Jürgen Moltmann, "Zur Bedeutung des Petrus Ramus für Philosophie und Theologie im Calvinismus,"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68 (1957):317.
17) August Lang, Der Heidelberger Katechismus. Zum 350 jährigen Gedächtuis seiner Entstehung, no. 113 of Schriften des Vereins für Reformationsgeschichte (Lipzig: Rudolf Haupt, 1913), 21-22.
18) Baker, Bullinger and the Covenant, 205.
19) Barth, Church Dogmatics, vol. 4.1:59.
20) Charles S. McCoy, "Covenant Theology of Johannes Cocceius," (Ph.D. dissertation, Yale University, 1957), 76.
21) Leonard Trinterud, "Origin of Puritanism," 48.
22)Otto Ritschl, Dogmengeschichte des Protestantismu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26), vol. 3:418-9.
23) J. A. W. Verhoeven, "Caspar Olevianus: Een Onderzoek naar plaats en funktie van het genadeverbond in zijn theologie," (Doctoraal scriptie, Rijksuniversiteit Utrecht, 1982), 114.
24) Stephen Strehle, Calvnism, Federalism, and the Covenant: A Study of the Reformed Doctrine of Covenant (Bern: Peter Lang, 1988), 83-189.
25) David A. Weir, The Origins of the Federal Theology in Sixteenth-Century Reformation Though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와이어는 그륀들러의 논지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Otto Gründler, Die Gotteslehre Girolami Zanchis und ihre Bedeutung für seine Lehre von der Prädestination (1965); idem, "Thomism and Calvinism in the Theology of Girolamo Zanchi," (Th.D. diss. P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61).
26) Gerhardus Vos, De verbondsleer in der gereformeerde theologie (Grand Rapids: 1891); English translation by S. Voorwinde and Willem Van Gemeren,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in Reformed Theology," in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ed. Richard B. Gaffin Jr. (Phillipsburgh: Presbyterian and Reformed, 1980): 237-67. John Murray, The Covenant of Grace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3). Antony A. Hoekma, "The Covenant of Grace in Calvin's Teaching," Calvin Theological Journal 3 (1967):144-61. Peter Allan Lillback, The Binding of God : Calvin's role in the development of covenant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1).
27) Thomas R.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 A Pauline Theology of Law (Grand Rapids: Baker, 1993); idem, Paul, Apostle of God's Glory in Christ : A Pauline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1). Norman Shepherd, The Call of Grace : How the Covenant illuminates Salvation and Evangelism (Phillipsburg, N.J. : P & R Pub., 2000).
28) Baker, Bullinger and the Covenant, xxi-xxiii.
29) Andrew A.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al Thought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2), 336-7. Peter Golding, Covenant Theology: The Key of Theology in Reformed Thought and Tradition (Ross‐shire, Scotland: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2004).
30) Charles D. Gunnoe Jr., “The Reformation of the Palatinate and the Origins of the Heidelberg Catechism, 1500-1562,” in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Sources, History, and Theology, ed. Lyle Bierma et al. (Grand Rapids: Baker, 2005), 15-47.
31) Clyde L. Manschreck, Melanchthon: The Quiet Reformer (N.Y.: Abingdon, 1958); Robert Stupperich, Melanchthon, tr. Robert H. Fischer (London: Lutterworth, 1965). 
32) Lyle D. Bierma, “The History and People behind the Heidelberg Catechism,” in A Faith Worth Teaching: The Heidelberg Catechism’s Enduring Heritage, ed. Jon D. Payne & Sebastian Heck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3), 5.
33) Christa Boerke, “The People behind the Heidelberg Catechism,” in The Church’s Book of Comfort, ed. Willem van’t Spijker, tr. Gerrit Bilkes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09), 74-88.
34) James I. Good, The Heidelberg Catechism in Its Newest Light (Philadelphia: Publication and Sunday School Board of the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1914), 133. Derk Visser, Zacharias Ursinus, the Reluctant Reformer: His Life and Times (N.Y.: United Church Press, 1983), 103-4.
35)Bard Thompson,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Catechism,” in Essay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by Bard Thompson et al. (Philadelphia: United Church Press, 1963), 29-30.
36) George W. Richards, The Heidelberg Catechism: Historical and Doctrinal Studies (Philadelphia: Publication and Sunday School Board of the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1913), 185, 187. Thomas A. Brady, Jr., German Histories in the Age of Reformations, 1400-16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Willem van’t Spijker, ed. The Church’s Book of Comfort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09), 1-88.  
37) Bierma, “The Purpose and Authorship of the Heidelberg Catechism,” 67. idem, “The Theological Distinctiveness of the Heidelberg Catechism,” Theologia Reformata 49 (December, 2006):331-41.
38) Catechesis, summa theologiae per questiones et responsiones exposita in D. Zachariae Ursini opera theologica, ed. Quirinus Reuter (Heidelberg: John Lancellot, 1612); 영어번역서,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 G. W. Williard (Columbus: Scott & Bascom, 1852; Grand Rapids: Eerdmans, 1954); 원광연 역,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6), 61.
39) Lewis W. Spitz, The Renaissance and Reformation Movements (St. Louis: Concordia, 1987), 2:431-32.
40)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6), 651-666.
41) Martin Luther, Small Catechism, 4.2.
42) John W. Nevin, History and Genius of the Heidelberg Catechism (Chambersburg: Publication Office of the German Reformed Church, 1847), 158.
43) Bierma, “Doctrine of the Sacraments,” 33. “After all, the Heidelberg Catechism deftly sidestepped divisive points and emphasized the common ground among the Melanchthonians, late-Zwinglians, and Calvinists in the Palatinate, especially on the explosive issue of the Sacraments.”
44) Sebastian Heck, “Washed from All My Sin”: The Doctrine of Baptism in the Heidelberg Catechism,“ in A Faith Worth Teaching, 88; ”The first time, then, that the HC mentions baptism is implicitly in the answer.“
45) 불링거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Carl Pestalozzi, Heinrich Bullinger: Leben und ausgewahlte Schriften, Leben und ausgewahlte Schriften der Vater und Begrunder der reformirten Kirche (Elberfeld: Friderichs, 1858), 5:415.
46) Fred H. Klooster, “Calvin’s Attitude to the Heidelberg Catechism,” in Later Calvinism: International Perspectives, ed. W. Fred Graham (Kirksville: Sixteenth Century Journal Publications, 1994), 311-331.
47)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Jeremiah (Grand Rapids; Baker, 1993), 11:xvi-xxiv.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 224.
48) Karl Sudhoff, C. Olevianus und Z. Ursinus: Leben und ausgewählte Schriften (Elberfeld: Friderichs, 1857); G. Bouwmeester, Zacharias Ursinus en de Heidelbergse Catechismus (The Hague: Willem de Zwijgerstrichting, 1954); Derk Visser, Zacharias Ursinus, the Reluctant Reformer: His Life and Times (New York: United Church, 1983).
49) Perter Alan Lillback, "Ursinus' Development of the Covenant of Creation: A Debt to Melanchthon or Calvi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 (1981):247-88. Derk Visser, "The Covenant in Zacharius Ursinus," Sixteenth Century Journal 18 (1987): 531-44.
50)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6). 우르시누스가 언약을 언급한 구절에 밑줄을 그은 것은 필자가 강조하여 밝혀주고자 추가한 것이다.
51)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제 18문항.
52) Ibid., 186.
53) Robert W.A. Letham, “Saving Faith and Assurance in Reformed Theology: Zwingli to the Synod of Dort,” (Ph.D. diss., Aberdeen University, 1979), 1:188-190,193.
54)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제 21문항.
55)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al Thought, 417.
56)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제 10, 11, 12문항. Lyle D. Bierma, "Law and Grace in Ursinus' Doctrine of the Natural Covenant: A Reappraisal," in Protestant Scholasticism, 96-110.
57) Ibid., 제 36문항.
58) Lyle D. Bierma, German Calvinism in the Confessional Age: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 (Grand Rapdis: Baker, 1996), 57-60.
59)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제 109, 110, 266, 272, 294 문항.
60) Ibid., 제 38, 92, 110, 239, 240, 315, 316 문항.
61) Ibid., 제 39, 109 문항.
62) Lane Tipton,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in Justified in Christ, ed. K. Scott Oliphint (Mentor, 2007), 23.
63) Baker, Bullinger and the Covenant, 204. J. G. Moller, “The Beginnings of Puritan Covenant Theology,” Journal of Evangelical History 14 (1963):58.
64) 올레비아누스의 생애에 대한 연구서들은 다음과 같다. M. Goebel, “Dr. Caspar Olevianus,” Mercerburg Review 7 (1855):294-306. D. Agnew, “Caspar Olevianus,” in The Theology of Consolation (Edinbugh: 1880); Charles Miller, "The Spread of Calvinism in Switzerland, Germany, and France," in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ed. John H. Bratt (Grand Rapids: Eerdmans, 1959), 48. J. A. W. Verhoeven, "Caspar Olevianus: Een onderzoek naar plaats en funktie van het genadeverbond in zijn theologie," (Doctroaal Scriptie, Rijksuniverstiteit Utrecht, 1982).
65) Olevianus, “To the Youth Addicted to True Godliness,” a preface to An Exposition of the Symbole of the Apostles, tr. J. Fielde (London: 1581), 38-39.
66) J. Ney, Die Reformation in Trier 1559 (Halle: 1906-1907). K. Sudhoff, O. Olevianus and Z. Ursinus (Elberfeld: 1857).
67) W. J. Ong, Ramus, Method and the Decay of Dialogue from the art of Discourse to the Art of Reason (Cambrideg: Yale University Press, 1958), 301-305.
68) Heinrich Heppe, Geschichte des deutschen Protestantismus in den Jahren 1555-1581, 8 vols. (Marburg: 1852-9).
69)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1, 59.
70) David A. Weir, The Origins of the Federal Theology in Sixteenth Century Reformation Thought (Oxford: Clarendon, 1990).
71) Bierma,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 229-38. idem, "The Role of Covenant Theology in Early Reformed Orthodoxy," Sixteenth Century Journal 21 (1990): 458-9.
72) P. Ramus, Commentariorum de religione Christiana (Frankfurt: 1576), 6-10.
73) R. S. Clark, "The Authority of Reason in the Later Reformation: Scholasticism in Caspar Olevian and Antoine de La Faye," in Protestant Scholasticsm, 120-22.
74) Baker, Bullinger and the Covenant, 204. Moller, “The Beginnings of Puritan Covenant Theology,” 58.
75) Lyle D. Bierma,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05).
76) Letham, “Saving Faith,” 1:199-201.
77) C. Olevianus, An Exposition of the Symbole of the Apostles, or rather of the Articles of Faith. In Which the chiefe points of the everlasting and free covenant between God and the faithful is briefly and plainly handled. Tr. by J.Field (London: 1581), 44-45.
78) Bierma, German Calvinism, 63.
79) Caspar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inter Deum et electos, itemque de mediis, quibus ea ipsa substantia nobis communicatur (Geneva: Eustathius Vignon, 1585), 272.
80) Ibid., 1-3.
81) Schrenk, Gottesreich und Bund, 61.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48.
8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39), 285.
83) Peter DeJong, The Covenant Idea in New England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5), 25.
84) Olevianus, De substanta foederis Gratuiti inter Deum et Electos, itemque de Mediis quibus ea ipsa substantia nobis communicatur. (Geneva: 1585), 227-231.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 Thought, 426.
85)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231.
86)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187.
87)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251, 253-254.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 Thought, 428.
88) Bierma,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 182.
89)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251.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 Thought, 429.
90)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407-408.
91) Bierma,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 161-168.
92) Weir, “Foedus Naturale,” 187.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al Thought, 438, 110. 와이어는 성례신학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자들의 언약사상이 아무런 발전적인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나, 울시는 정반대로 성례신학과 언약사상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93) Lillback, “Ursinus’ Developement,” 268.
94) Miller, New England Mind, 366-367.
95) Lillback, “The Binding of God,”29. Murray, Covenant of Grace,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