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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마 1:18-25)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마 1:18-25) 


노승수 목사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1. 그리스도의 나심(18-21)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은 16절에 '나시니라'와 다른 단어 입니다. 오히려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할 때, '세계'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태복음에 단 두 차례에 이렇게 반복이 되었습니다. 18절 상반부는 17절까지의 설명을 완결하는 것입니다. 이 '게네시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번역은 '톨레도트'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창세기 강해를 통해서 좀 더 상세하게 살피겠습니다. '엘레 톨레도트'라고 관용적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의 용례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다' 할 때 '사적' 야곱의 약전은 이렇다 할 때, '약전'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창조 기사를 설명할 때도 ' 창조의 대략이'등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족보를 설명할 때만 사용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씨' 곧 '여자의 후손'이 어떤 계보를 따라 어떤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오게 되는 지를 보여줄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앞의 1-17절의 완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제 18절부터 설명이 되는 사건 역시 이런 구속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자가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2:4에 창조로 부터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계시가 이제 최종 계시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전개를 알려주는 일종의 문학적 장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 계시를 전체를 통일되게 해주고 있습니다. 각자 각기 다른 저자에 의한 다른 주제에 대한 저작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경륜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위해 남기신 통일된 저작임을 보여줍니다. 창세기로부터 약속되었던 그 계시가 이제 역사 속에서 실현됨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들은 대체로 다 번역을 하지 않았는데, '데'라는 접속사가 앞에 나옵니다. 영어 번역본들은 대체로 'Now'로 번역을 했습니다(KJV, NASB). 그리스도 예수를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제 그분이 우리 곁에 어떻게 오셨는지를 살펴볼까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을 했습니다. 당시 유대 풍습에 의하면 이 약혼부터가 결혼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략 1년 정도 친정에 거하면서 약혼의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 이후에 집으로 데려가 아내를 취하고 부부 생활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혼의 기간도 이미 결혼 기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 흔적을 19절에서 남편이라 칭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인 요셉을 가까이 하지 않은 이 시기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것은 독자들을 위한 설명입니다. 응당 요셉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지요. 지금 저자, 마태는 이글을 복음서를 읽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근데 이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요셉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요. 다만 자신과 동침한 일이 없는데 잉태된 일이 들어난 것입니다. 요셉은 참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19절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은 오늘날처럼 법과 정의로움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 통상 관계를 중시하는 표현입니다. 어제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던 다말의 경우, 유다가 다말을 향해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합니다. 이 때 의란 자신이 유다의 가문에 시집을 와서 해야 할 후사를 잇는 일에 충실했다는 소리입니다. 엘과 오난이 연이어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면 참 팔자가 센 여자인 셈이지요. 그런 까닭에 시부였던 유다의 입장에서도 셋째인 셀라로 하여금 엘의 대를 잇도록 해야 했지만 꺼려졌던 것이지요. 그러자 다말이 창녀로 분장하여 그 시부였던 유다로부터 대를 잇습니다. 이 때, 유다가 다말에게 '네가 나보다 옳다' 곧 의롭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통상적 의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의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의 그 간의 관계를 생각해서 조용히 '파혼'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의 의미입니다. 


요셉이 이를 생각하자 주의 사자 곧 천사가 개입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뜻합니다. 창세기를 강해할 기회가 생기면 그 때 '주의 사자'에 관한 부분은 다시 한 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마리아 데려오기를'은 혼인 관계의 최종적 절차로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면 혼인관계가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고 요셉이 이것을 인해 심중에 파혼의 절차를 생각하고 있자 주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이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거기에 더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고지까지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여호수아' '예수아' '예수'는 다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와 '예수아'는 히브리식 표현이고 '예수'는 헬라식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도움이시다' 혹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에 대해서 해설을 붙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경의 구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처럼 죄를 그저 추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실제적이며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본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곳에 오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결여하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참으로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주의 자녀입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내게 어떤 분이십니까? 


2. 구속 계시의 성취(22-25)


22절은 이렇게 이루어진 모든 일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성취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일이 있을 것에 대해서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이 성취하였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선지자들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증거하는 복음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역시 복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그 자신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즉, 구약에 이미 약속된 형태로의 복음이 이제 그 성취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체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이미 증거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이제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구약에 선지자로 말미암아 나타난 복음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에서 성경이 바로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이사야 7장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신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7장에 가면 이 예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당시 유다의 임금은 아하스였습니다.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당시 앗수르가 강성하여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가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앗수르에 대항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뒤가 영 켕기는 것이지요.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유다가 있으니 이 유다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려 한 것입니다. 이에 아하스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다의 아하스로 하여금 동참을 강요합니다. 이 때 아하스가 이것을 거절하자 이 두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해 들어온다는 소문이 무성해졌습니다. 왕과 백성의 마음은 흔들렸고, 윗 못 수도 근처에서 이사야와 아하스가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고 아하스는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때 이사야가 베푼 징조의 예언이 바로 이 임마누엘의 예언입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고 그가 자라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 즘이면 이 대적들이 다 앗수르에게 멸망하게 되어서 성 밖에서 양을 치고 얻은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즉, 대적들이 이 도성 예루살렘을 포위하지만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 아이가 젖을 떼고 철이 들기 전에 들에서 양을 방목해서 버터를 먹고 꿀을 캐서 먹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아이가 자라기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망하게 되고 그 증거가 '임마누엘'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일부로 '임마누엘'에 관한 예언이 나옵니다.(이사야 7장)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예언이 원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니고 마태가 무작위로 자기 형편에 따라 가져다 섰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사야서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 예언은 중의적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당시에도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계시를 할 목적이 우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싫다는 아하스에게 이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9장에 가면 보다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안목이 없다보니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 더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먼 산을 바라보면 두 봉오리가 겹쳐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당시 예언 속에서 먼 미래의 그리스도를 보면서 이런 겹침 현상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마태는 지금 그리스도가 우리 중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는 이 사건이 바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의 문맥에서 보면, 우리의 대적 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개입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의 징표로 '임마누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21절에서 예수께서 오시는 목적이 바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대적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은혜가 그리스도의 지상강림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 임마누엘 역시 성경에서 반복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출애굽 한 광야 공동체의 한 가운데 성막이 있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임재는 백성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일부였습니다. 장차 우리가 이르게 될 하늘의 도성 예루살렘도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나시게 되는 사건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주의 백성입니까? 그 특징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었습니까?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합니다.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고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며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사자의 분부가 있자 그것이 현시가 아니라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일장춘몽'이라 하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무시할 수도 있고 자기 마음의 소리를 따라 가만히 끊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 옵니다. 나는 때로 내가 옳다고 믿고 행하려 하던 바에 대해 주님의 뜻이 발견되면 그 즉시 그것을 접고 그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