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긍휼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노승수 목사
내 어머니 서진희 여사는 무용가였다. 주요 무형문화재 살풀이 춤의 명인이었던 이매방 선생의 사사를 받은 제자였다. 지금 세종대의 전신인 서라벌 예대 무용과 출신이셨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센 기에 눌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어머니를 만나면 제일 힘든 장면 중 하나가 내가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현을 해도 강권하실 때가 많다. 물론 사랑이라는 걸 안다. 나이가 드니 그것도 다 사랑이더라. 그럼에도 내게 그 강권은 어린 시절 내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묶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구에게 강요하거나 그가 자발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도움을 주는 상황을 꺼려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이런 강권 덕분에 내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주로 뭘 원한다가 아니라 뭘 원하지 않는다로 어린 시절 굳어졌다. 누군가의 요구에 끊임없이 맞추다가 그것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거절의 표현으로 내 의사를 표현하게 된다. 아이러니지만 거절이 가장 싫었던 내가 거절을 표현함으로 나를 표현하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어머니의 강권은 내게 사랑으로 느껴지기보다 거절로 느껴졌다. 내가 신앙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에 목이 메여 했던 것도 이런 과거사에 기인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거절을 잘 하지 못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맞춰 주려고 노력을 한다. 동시에 의식적으로는 이것을 멈추려는 노력을 30년 째 해오고 있다. 설교 때도 새로운 교인이 오게 되면 그분이 알아 듣기 좋게 저절로 맞춰진다. 내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편인 것도 여기에 기원이 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삶의 빛과 그림자가 그렇게 내 성격적 특성을 이루고 또 장점과 단점을 이루며 씨실과 날실이 옷감을 짜듯이 내 삶이라는 옷감을 짜여져 왔다.
그게 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살아 올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이 삶의 자리로부터 내 삶의 어두운 부분을 믿음으로 걷어내고 더 건강하게 더 거룩하게 더 긍정적으로 자라갈 것이다. 꽃씨는 자기가 뿌리 내린 곳을 탓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오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그 시선에 자기 검열을 하며 내면의 비참을 감추고 어떻게든 사람에게 좋게 하려고 애쓰며 살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지만 늘 잘 되지 않는다. 또 누군가의 말에 오그라든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거기서 지쳐 쓰러져 있는 나를 볼 것이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온전하여서 그들을 온전한 자리로 인도하는 게 아니다. 내 상처 속에서 그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과 나의 자리가 만나는 곳이 내 상처이다. 누군가의 연약함은 이렇게 치료되며 건강해지며 성화에 이른다. 죄를 이기는 힘은 이 삶의 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런 내 자리로 성육신해 들어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성화에 대한 공허한 소리들이 많다. 하나님이 하느냐 내가 참여하느냐 그런 논쟁으로 성화되지 않는다. 성화는 내 삶의 자리, 빛과 어둠의 명암이 드러나는 자리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이뤄질 때 일어난다. 물론 이런 자기 성찰을 모든 신자가 해야 할 필요나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게 가능한 사람도 많지 않다. 분명한 점은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는 자리에서, 우리 연약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그분께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회피하고 방어하고 변명하며 갑옷을 자기를 무장하고 이론이나 사상의 뒤편으로 숨어서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이란 단순히 그 사실을 인정하고 확인해 가는 과정이다. 자기 죄를 들춰내거나 파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 연약을 인정할 수 없는 긴장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어쩌면 성화가 더뎌 보이거나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르치는 교사는 그렇게 사회 분위기로 오그라들어서는 교회 장면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현할 수 없다. 그가 더 영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 현장이 어디 그런가?
특히 한국 사회에서 추락은 제기불능과 동의어에 가깝다. 시찰회 목사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경우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며 실제로 우리 삶의 실패는 그저 실패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회개 없는 용서에 동의하지 않지만 동시에 참으로 회개한 자에 대해서 긍휼과 사랑으로 받아 줄 것을 말하기도 한다. 전자의 외침, 그러니까 회개 없는 평안에 대한 개탄의 소리가 높기도 하지만 진정 회개하려 들었들 때, 사랑의 돌봄으로 회복을 위해 힘쓰지 않는 사회와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누가 회개를 하겠는가? 회개란 제기불능과 동의어로 여겨진다면, 언어나 신학의 개념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심정적 정서가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 삶과 교회의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찾아 볼 수 있는가? 그렇다보니 사회나 교회는 자주 그리고 빈번하게 사나워질 뿐이다. 물어뜯기 바쁘다. 그래서 책잡히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고 그런 책이 발견되면 잘못을 말하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하고 부인하며 그 변명과 부인을 보고 피가 거꾸로 쏟는 누군가는 강제로 그의 옷을 벗긴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도 그 피상성에 있었서는 다름이 없다. 대단치 않은 잘못도 인정하지 못하고 그런 인정하는 순간 지는 거라 느끼는 듯하다. 그런 교회 현장에 치료와 자비가 존재하는가? 우리 교회가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대속의 주를 믿고 있는가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가정은 수많은 실수와 실패가 용인되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배우며 어른이 되어 간다. 교회라는 가정도 그와 같아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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