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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과학적 발견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 


노승수 목사


과학자의 관측에 의하면, 우주가 128억 년, 지구가 45억 년 즘 된 것으로 관측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관측이 실제 우주나 지구 나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해석에 따라붙는 것이 역사적 아담이 실제냐 허구냐 하는 문제가 따라 옵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로마서 5장의 해석과 그 교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과학의 이런 이해를 받아들이면 아담에게 언약적 책임을 묻고 이 역사적 아담의 대표성 자체가 문제가 되며 이 역사성의 문제는 로마서 교리의 진위의 문제로 확대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이며,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45억년의 역사는 단지 45억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가 말하는 아담이 비유이거나 신화로 격하되면서 우리가 가진 성경 이해와 거기서 비롯된 교리의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45억년이란 과학자들의 이론은 우주 팽창에 대한 수학적 계산과 관측, 지구의 지층과 미생물들에 대한 분석과 그에 따른 추정이고 여기에는 우연을 전제한 철학적 이론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관측이 아니라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학자 입장에서는 필연을 전제한 신학적 이론을 깔고 이 관측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주의 나이가 128억 년이란 과학자들의 주장은 빛보다 빠른 어떤 것을 관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입장에서 빛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빛보다 빨리 우주를 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죠.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듯이 시간은 중력의 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초기 우주가 초고중력의 그 무엇으로부터 빅뱅을 한 것이라면 지금의 지구 중력으로 상대화된 값인 128억 광년은 실제 우주의 나이가 아니라 크기를 말해 줄뿐입니다. 우주의 끝이 128억 광년 거리에 존재한다가 사실은 더 객관적인 진술인 셈이죠. 지구  나이 역시 45억년이란 추정은 지구 중력의 상대적 시간을 기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정자나 난자로 짓지 않으시고 갓난 아이로 짓지 않으시고 다자란 성인으로 지으신 것처럼 지구 역시 성인의 지구로 지으셨다고 신학적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지구 나이 45억년은 나이가 아니라 생성과정을 보여줄 뿐입니다. 정말 45억 년처럼 보이는 지층과 지구의 구조물은 빛보다 빠른 팽창을 통해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통해서도 생성이 가능합니다. 우주의 크기처럼 말이죠. 그럼 왜 자연과학자들은 45억년을 고집할까요? 그들은 이 초고도로 정밀하게 미세조정된 생물 발생의 환경과 생명체의 정밀구조가 우연이란 전제 위에 건축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측이 아니라 우연이란 철학적 전제일 뿐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팩트1(불이 났다)와 팩트2 (연기가 난다)는 경험되지만 이 둘 사이의 인과관계는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 했습니다. 이 성찰로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탄생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좀더 이성적이라면 칸트처럼 신을 알 수 없다는 데 머물러야 합니다. 관측을 우연이란 마음의 전제로 확대하는 일은 사실 과학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신학이 교조화하는 것도 경계해야하지만 과학이 종교화하는 것도 옳지 않은 흐름입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관측을 존중하되 이 관측은 더 큰 전제와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관찰을 신처럼 과학자를 제사장처럼 여기는 시대가 되었지만 관찰은 이론에 의존해 있습니다. 천동설의 시대 수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관측으로 천동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측은 지동설이란 더 나은 이론이 나옴으로 폐기가 되고 과학은 그렇게 패러다임의 이동을 통해 이전의 이론과는 불가통약적으로, 관측의 누적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전합니다. 즉 현재의 관측을 뒷받침 하는 우연에 의한 생성을 반대할 이론이 나오거나 관측이 가능해지면 폐기 수순을 밟습니다. 적어도 과학자에게 신은 자연관측의 변인이 아닌 것이죠. 따라서 신학과 과학은 어떤 점에서 불가통약적인 자연과 신 이해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은 과학의 영역이라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자연은 신의 창조물임을 명시합니다. 과학자이기 전에 신자로서 관측 할 수 없으나 신이란 변인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는 게 신앙적인 상식 아닐까요? 과학자이기 이전에 신자로서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께 대한 존중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과학의 시대를 살지만 현대 신앙인은 창세기의 아담의 역사성과 창조의 역사성을 믿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신화나 가르침을 위한 비유가 아니라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을 믿는 신자로서 우연을 기반한 철학적 전제를 따라 성경과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필연에 대한 신학적 전제와 믿음을 포기하는 게 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6일 창조를 말하고 아담을 지으신 것을 말합니다. 이 사실과 지구가 45억년 즘 되어 보인다는 것, 우주의 크기가 128억광년 즘 되어 보인다는 것이 서로 충돌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의 우연의 전제를 걷어내고 거기에 신학적 전제를 입혀 얼마든지 이 관측은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128억광년 크기의 우주와 45억년 된 지구를 6일에 얼마든지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