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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상담학

자존감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

자존감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
제이 E. 아담스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러한 "자존감" 가르침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안에서 자존감 원리들과 실천들을 
찾는데 부족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믿지 않는 심리학자들을 자신들의 안내자들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지지를 긁어 모으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성경은 들추어지고 구절들은 그들의 이론의 신빙성을 지지하기 위해 
뒤틀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혹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아니, 이들이 성경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한 것은 이미 그들이 
믿고 있는 관점을 성경으로 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방법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이기도 한 이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방법은 
버릇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교적인 사고체계는 받아들여지고, 성경은 마치 그 
사고체계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버렸습니다. 첫 번째로 프로이드의 '이드'에 
대한 관점이 원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선 상에 선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종교적인 발언을 여기 저기 늘어놓은 융의 사상이 기독교와 가까운 사상으로 
생각되어지기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융의 사상이 티베트인들의 '죽은 자들의 책'과 같은 
경전에서 얻어진 종교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은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비록 잠언 18장과 다른 성경 말씀들이 그의 사상과 실천을 반대하지만) 경청과 수용에 대한 칼 로저스의 
관점이 성경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는 스키너의 행동주의가 (성경이 말하는 
상과 벌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창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성경이 말하는 상과 벌에 대한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심리학계의 가장 최근의 관심인 '자기가치' 교리가 성경의 교리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심리학적인 사상들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위험합니다.
1. 성경을 벗어난 관점들에 성경적인 권위가 주어진 것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췹니다.
"어떻게 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리학적인 자존감 관점을 승인하는겁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이러한 관점들이 성경의 탈을 쓰고, 원저자의 의도와 문맥에서 벗어난 성경 구절들을 통해
지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정말로 이러한 관점을 
가르친다고 믿도록 미혹되었습니다.
2. 하나님이 잘못 전해집니다. 당연히 이건 모든 이유들 중 가장 위험한 이유입니다.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이 (아주 극소수의 기독교 심리학자들만이 많은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본문을 
주해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신경하게 다룬다는 사실과,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쉽게 이러한 해석들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무섭고도 끔찍합니다.
성경은 해석자가 원하는 말을 하도록 학대되고, 마치 밀랍처럼 가장 최근의 유행과 같은 
모양으로 빚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경외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3. 성경은 어떤 사고체계든지, (자기가치 사고체계를 포함해서 모든 이교적인 사고체들이 
그렇듯이) 성경과 성령님의 힘으로부터 동떨어져서 인간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여지없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구체화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사고체계가 그들의 마음 속에 이미 굳어지고 난 후에야 
성경을 펼쳐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과 자기가치 사상의 창시자들의 가르침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대체하는 비성경적인
방식에 성경의 가면을 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그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는 원리적인
구절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구절들은 바로 1) 마태복음 22장 36~40절, 2) 로마서 6장과 골로새서 3장, 3) 야고보서 3장 9절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
우리는 이 구절들과 함께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도 살펴볼 것입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논제의 목적을 생각해볼 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바로 39절 
말씀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 구절은 
아마 자기가치, 혹은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트로비쉬는 이 구절을 "자기 사랑의 명령"이라고 부르면서, "자기
사랑은 그러므로 우리 이웃을 향한 우리의 행동의 전제 조건이자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정말 깜짝 놀랄만한 발언입니다! 트로비쉬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는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의 척도이자 기준이 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우리의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트로비쉬는 "이 발견(인간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현대 심리학 
이론)은 예수님의 명령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 다음가는 중요한 명령으로 강조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무모함까지 
보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트로비쉬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지금까지 땅 속에 묻혀있던 
이 위대한 진리를, 이 중요한 성경의 명령을 발굴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이라는 세월동안 교회는 
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 구절은 전혀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한번 사실대로 따져봅시다. 
먼저 위 구절에는(또 성경 전체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놀라셨습니까? 자아상에 대해서 말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다보니 성경이 그런 명령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시나요? 하지만 실제로 위 구절이나 성경 다른 곳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님께서는 그 분께서 두 계명, 오직 두 계명만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둘째'와 '이 두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세 번째 계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님께서 
말씀하신 두 계명에서 세 번째 계명을 만들어냅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을 
정당화 하는데에는 어떠한 변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뒤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건지,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존재하지도 않는 세 번째 계명에 
종속시킵니다. 아들러와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 관점에 따르면, 낮은 단계의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 높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4단계 욕구(자존감)가 
반드시 충족되어야만이 5단계 욕구(자아실현)가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러와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 관점에 강제로 맞춰진 위 구절을 이용해서 설명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4단계 욕구)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5단계 욕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트로비쉬는 그러므로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당신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없이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월터 트로비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한 
크랩의 발언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 당신은 반드시 
자아실현 단계로 나아가야합니다. 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당신은 반드시 그 전의 
네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이제 필립 캡틴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보다 
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필립 캡틴은 더 나아가서 이 위계를 그 자신만의 것으로 삼고 
재정의까지 내립니다. 즉,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에 종속되고,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에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발언들을 들어보면, 이들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위 구절을 다시 살펴보면 자기를 사랑하라는 
세 번째 계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두 계명 사이에 어떠한 종속 관계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존감 교리의 주장은 모습을 바꾸고 성경으로 온 뒤, 이 바꾼 모습에 성경을 강제로 
끼워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랑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계십니다. 
그 분께서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헬라어로부터) 다음과 같이 직역될 수 있습니다. "너는 네가 
지금 네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네 이웃을 반드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신 동일한 자기 사랑이 에베소서 5장 28-29절의 
바울 사도님의 주장에도 나타납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님께서는 남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내들을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은 "누구라도 언제든지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자신을 양육하고 보살피기를 
그리스도님께서 교회를 위해 하시듯이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울 사도님의 주장은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
마태복음 22장 36-40절을 누가복음 10장 29절과 비교해보면 아주 중요한 문맥 상의
상황이 나타납니다. 누가는 우리에게 "그러자 그(어떤 율법학자)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말하기를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지요.
율법학자의 문제는 무엇이였습니까? 자존감이 부족해서 문제였나요? 그 반대입니다.
누가는 "그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런 질문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그의 질문은 모르는 사실을 알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쩔쩔매게 하기 위한 질문이였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쩔쩔매게 해서
그 자신의 죄된 행동을 옳게 보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주십시오. 그 질문은
이기심으로부터 나온 질문이였습니다. 그는 지금 그 자신의 상태가 마음에 들었고,
그의 이웃을 위해 그의 시간이나 돈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처럼
그 자신만을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분명 높은 자존감을 북돋아주기 위한 비유는 아니였습니다.
아니, 그 정반대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의 요점은 누구든지 그의 이웃(누구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높은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청중들 또한 자신들의 낮은 단계 욕구를 먼저
충족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비유 속에 등장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의 문제가 자존감이 부족했던 것이였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마 사마리아인보다 자신들을 더 높은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율법학자의 문제와 동일했습니다. 그들 모두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트로비쉬는 우리 자신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전제조건이자
기준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을 재어보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도 그들에게 그대로 해 주어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기준은
예수님께서 두 계명으로 요약하신 십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라" (눅 10:27).
성경의 모든 책들(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일상 생활에서 계명들의 실천 양식으로 가르키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준을 우리 자신이 아닌
성경에서 찾을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이웃들을 반드시 사랑해야하며, 우리
이웃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도 그들에게 그대로 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선한 일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치명적이고
죄악된 일들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음, 거짓말, 도둑질, 과식, 자살 시도와 같은
행위를 하는데, 그렇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행위들이 이웃 사랑의 척도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자신처럼'이라는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십계명과
그와 관련된 성경 말씀이 이웃 사랑의 기준이 되기에, 이 구절 자체에는 기준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는 '사랑의 강도'와 '사랑의 양'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둘째도 그(첫째 되는 계명)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어떤 점에서 이 두 계명이 같은 것일까요? 첫 번째로, 두 계명 모두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계명 모두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계명 모두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만큼 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명이 같은 두 번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너라는 존재의 모든 것과 네가 소유한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명령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진심으로, 열렬하게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두 계명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을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향한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이 자기 사랑은 거의
항상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동일한 정도의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러한 주장은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바울 사도님께서 사용하시는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남편이 그 자신을 열심히 돌보고, 소중히 여기고, 열렬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처럼,
동일한 정도의 사랑을 그의 아내에게 쏟아부으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가 그 자신에게
하는 것을 '똑같이' 그의 아내에게 하라는 말씀은 아니지요.)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교리를 변호할 때 가장 즐겨쓰는 마태복음 22장
말씀은 사실 그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본문을 진지하게
주해해본다면 우리가 오늘날에 보는 자기 사랑 교리를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장을 요약하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이웃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2장 39절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은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갈 2:20).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같이 하여라" (엡 5:25).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들에게 '주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에게 '주라고' 말하는) 자존감 교리
옹호자들은 그들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모든 올바른 행위는 그 부산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렇게 가르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13절과 골로새서 3장 1-10절
이제는 로마서 6장과 골로새서 3장을 살펴볼 시간입니다. 먼저 우리는 바울 사도님의 
두 편지들로부터 발췌된 이 두 본문에 대해 생각을 해볼 것입니다. 서로 병행 관계에 있는 
로마서 6장과 골로새서 3장은 신자들에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새 사람이며, 이전의 옛 사람은 법적으로 죽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덧붙여서, 신자들은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님 안에서, 또 하나님의 시각에서 새 사람이 된 것과 
같이, 일상 생활에서도 새 사람이 되라고 권면을 받습니다.
자아상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재빠르게 이 구절들을 움켜쥐고 그들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그 의미를 바꾸어 버립니다. 이 구절들이 원래 기록되었던 목적 따윈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이 두 본문을 대충 읽는다 해도 바울 사도님께서 자기 가치 교리를 가르치시려고 
이 두 본문을 기록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해보입니다. 또한 인본주의적인 
심리학자들이 위 구절들을 뒤틀려서 그들 자신의 교리를 가르치기 전까지 어떤 그리스도인도 
1,900년동안 위 구절들에서 그런 가르침을 도출해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두 구절을 통해 그들의 교리를 가르칠 수 있다는 착각에 
위안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자존감 교리를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한 교수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들의 자아상은 이 구절에서 옛 사람으로 비유되는 예전의 
생활 방식(부정적인 자아상)을 거부하고, 이 구절에서 새 사람으로 비유되는 새로운 
생활 방식(긍정적인 자아상)을 영구히 받아들이도록 결단하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그는 로마서 6장 11절을 인용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라." 그리고 나서 그의 주장의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이런 고집을
부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에 대한 분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자, 만약 위 구절에서 위의 교수가 주장하는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면, 자존감 운동은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위의 교수의 말과는 다르게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자아상에 대한 분명한 구절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3장과 로마서 6장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님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실 때, 
재판관이 되시는 그 분 앞에서의 우리의 법적 신분은 완벽하며, 우리에게서 어떠한 
죄과도 찾아볼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님을 
믿을 때 완전하게 용서를 받았으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아들 안에 서있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 분 안에서 모든 옛 일은 지나갔고, 이제 새 일이 와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도록, 혹은 우리의 자존감을 북돋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바울 사도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님 안에서 우리가 이미 새 사람으로 여겨짐을 받는 것처럼, 일상 생활에서도 
그런 새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도록 권면하는데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분은 
우리 자신의 성화되고 있는 도덕적인 상태가 그리스도님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칭의받은 
법적인 신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대로 죄 가운데 살겠느냐?"
2절 말씀은 우리를 어르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면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로마서 6장 11절을 인용한 그 교수는 선별적입니다. 본문의 완전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 다음 구절들도 인용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절과 13절에 
바울 사도님의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에서 
다스리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오직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권면하시는 바울 사도님의 목적은 분명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권면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12절의 시작을 알리는 "그러므로"라는 단어은 11절에 언급된 사실을 
통해 유추된 결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져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분께서는 "그리스도님 
안에서의 너희들의 법적 위치에 걸맞는 삶을 살기 시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시면서 바울 사도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라.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 와 비방과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을 내버려라" 
(골 3:3, 5, 8-10). 
위 본문도 역시 옛 삶이 그리스도님 안에서 새 삶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바울 사도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님 안에서 이렇게 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너희도 너희들의 일상 
생활에서 이렇게 된 것이 사실인 것처럼 살아라." 이 본문에서 더 나은 자아상이나 
높은 자기 가치를 찾으라는 속삭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바울 
사도님께서는 단지 이상적인 삶(그리스도님 안에서의 우리의 완벽한 위치)을 보이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삶을 향해 계속해서 성화되어가라고 권면하실 뿐입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우리 자신들을 유일무이하게 경이로우며, 본질적으로 가치있는 존재들로 
보아야합니다." 위 구절들이 과연 이러한 기독 저술가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목적은 그리스도님 안에서 우리(칭의)와 일상 생활에서의 
우리(성화)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차이를 좁히도록 
권면하는데에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 씌여진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본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 만족을 파괴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에서 
더 큰 진척을 보이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님 안에서의 우리의 완벽함과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의 행실을 비교해보는 것만큼,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 수도 있는 
우리의 자기 가치감과 자기 만족감을 무너뜨리는데에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로마서 6장과 골로새서 3장은 자존감 교리를 강화시키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님 안에서의 우리의 신분에 걸맞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기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구원과 함께 우리가 받은 
새 삶에는 위대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자리에 주저앉아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하기에 바쁘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9절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 3장 9절과 그에 해당하는 구약 성경 본문인 창세기 1장 27절과 9장 6절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주님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하니" (약 3:9).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 1:27).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창 9:6).
위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형상'입니다. 자아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재빠르게
(그리고 올바르게) 인간이 타락 전 뿐만 아니라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집어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로부터 우리는 신자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타락 이후, 타락 전과 같은 완전한
형상이 인간에게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형상과 체질적인 형상을 구분 짓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경고와
권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엄중한 경고와 권면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본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자기가치 교리를 옹호하는 한 사람의 주장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인간의 타락)"은 인간이
이제 더이상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런 주장만큼 진리에서 동떨어진
주장은 없을 것입니다. 타락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여겨집니다...
성경은... 심지어 타락한 인간들조차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심지어 신약 기자들조차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식하고 있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저주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글을 쓴 이는 이 진리가 바로 자존감
교리의
기초석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졌으며, 그 분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고귀함, 의미있음, 가치있음, 중요함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떠들어댑니다. 그는 우리에게 확신에 차서 말하기를,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록 인간 안에 있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긴
하지만) 인간이 어느 정도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한 사실 그 자체는 자존감이나 자기가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신약의 기자들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나올까요?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사실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 
단 한번도 높은 자존감에 대한 이유로 쓰여진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공격함으로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받는 것일까요? 자, 이제 논점이 무엇인지 설명하겠습니다. 바로 이 논점에서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저술가들이 길을 잃고 헤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제 아내의 사진을 당신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사진을
저주하고, 그 사진을 조롱하고, 그 사진에 침을 뱉고, 그 사진을 찢어버렸습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행동 때문에 잔뜩 화가 난 제게 왜 그렇게 했는지 설명해야만 할 것입니까. "고작 사진일
뿐인데 왜 그러세요?" 당신이 묻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고작 사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제 아내의 사진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것입니다.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져 있는 사진 그 자체는 그다지 가치가 없습니다. 아마 그 사진은
몇 백원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그다지 가치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확실히 인간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진 못합니다. 타락했든지 타락하지 않았든지, 구속되었던지, 구속되지 않았던지 유한한
피조물은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 창세기 9장과 야고보서 3장의 경고는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주어졌다기보다는 인간을 그 분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
그 분께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누가
지음을 받았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 신학생이 감옥에 갇혀 자신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자책하는 한 범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윌리엄씨, 당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 분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분의 눈에 당신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인답니다."
그 신학생은 대체 왜 그 범죄자에게 그가 죄인이며 그리스도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일까요? 왜 그는 그 범죄자에게 무한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그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일까요? 왜 그는 그 범죄자에게 그 사실을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는 한 사람의 입이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이 "무한한 가치"가 인간에게
적용되는 발언들을 자꾸 듣게 됩니다. 이런 주장을 조금만 더 따라가봅시다. 범신론자나
인본주의자들에게서나 들을 법한 인간을 위한 기이한 주장들이 자꾸만 들립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영광스럽고 위엄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세상을
향한 그 분의 선물로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발언을 허용하는 성경 본문이 어디있습니까? 그러한 본문은 확실히 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저술가들은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저술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로 인해 모든
인간들은 엄청난 가치와 위엄을 지닌 고귀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자기가치 교리를 전파하는 자칭 복음주의자들에게 이러한 그들 자신들의 주장들을
곱씹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들의 주장들이 성경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저는 그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해보록 하겠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여러분은 그들의 주
장들을 미혹케 하는 어지러운 말들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10장 31절과 누가복음 12장 7절
때때로 자기가치 교리의 열성적인 전도자들은 마태복음 6장 26절("...너희는 그 새들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이나 마태복음 10장 31절("...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중하다.")이나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중하다.")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 열성적인 전도자들은 "사람이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위 본문들은
하나님께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이 본문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에 주목해주세요.
일단 두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2)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본문들에서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중하다" (눅 12:6, 7). 사람은 '많은 참새들'보다 더 가치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많은' 참새가 오백 마리라면 너희는 2백 앗사리온 이상의 가치(현재 원화로는
십 만원)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참새가 천 마리라면 너희는 4백 앗사리온 이상의 가치(현재 원화로는
이십 만원)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의 요점은 인간의 위대한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이 참새에게도 미친다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많은 사람에게도 미친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누구에게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돈으로 환산한 가치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 그 분은 인간에게 있어 (참새의 가치에 비한) 다른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참새는 일정한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같은
인간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집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 얼마나 가치있는가는 이 본문의 질문이
아닙니다. 존재 가치가 상대적으로 크냐 적냐로부터 나오는 논점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것이지 인간의 가치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중의 참새들을 돌보신다면,
그 분께서 (다른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참새들보다 더 가치있는) 당신을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아상 교리의 열성적인 전도자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신다고
주장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가치는 (참새 오백 마리나 천 마리 수준인) 고작 몇 십 만
원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정도 돈은 자존감을 고양시키기 적은 가치가 아닌가요? 이러한 가치
비교는 자존감 교리에 대한 열성을 식게 할 뿐, 그 교리를 고양시키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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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두 번째 장인 "무한한 가치?" 번역을 마칩니다.<자존감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은
총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 두 장에서 아담스 박사님께서는 자존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들을 성경적으로 
반박하셨습니다. 이제 세 번째 장인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에서 아담스 박사님은 자존감 운동의 성경적인 
대안으로 자기부정, 제자도, 우선순위를 제시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세 편정도면 연재가 끝날 것 같네요.
글의 길이가 애매해서 아래에 세 번째 장의 서론 부분을 포함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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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지금까지 저는 자존감 운동을 성경적으로 비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울에 그 교리를
달아보았을 때 부족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 글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여기서 글을 끝낸다면, 지금까지 제가 했던 일들은 모두
헛된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집을 전소(全燒)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집이
그 자리에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이제 그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존감 운동의 성경적인 대안은 무엇일까요? 이전에 저는 예수님께서 삶의 두 방식(그리스도인의
방식과 이방인의 방식)을 대조하신 마태복음 6장에 대해 설명해드렸습니다. 이방인의 방식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재물'를 모아 안정감을 얻고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방식은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그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기부인 : 디모데후서 3징 2절과 마태복음 16장 24, 25절
예수님께서는 자기확신보다는 자기부인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는 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자기부인은 자기(自己)에 대한 신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강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가치를 말하는 책들에서 자기부인에 대한 글을 읽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부인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성경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해보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 말씀을 자기가치 교리와 한번 비교해보도록 하지요.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우리는 'φίλαυτοι(필아우토이, "자기를 사랑하며")'라는 단어를 발견합니다.
이 본문에서 이 단어는 디모데 목사님께서 앞으로 사역을 하실 마지막 때에 피해야할 타락상의
다른 예들과 함께 나열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님의 이러한 경고는 오늘날의 목사들에게 또한
적절합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분명하게 정죄받는 종류의 자기사랑이 언급되어있습니다. 
φίλαυτοι라는 단어는 디모데후서 3장 2절에만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의 용례를 비교해보는 방법으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종류의 '자기사랑'이 '교만함, 모독함, ..., 자만함,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함'과 같은 타락상들과 똑같은 종류의 타락상이라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의 목록들을 깊이 생각해보면, 여러분께서는 이 목록에 언급된 죄악들(혹시 
몰라서 말씀드리지만, 그 목록은 제가 윗 문단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깁니다)이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중심적인 초점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러한 초점으로부터 발생하는 성질의 것들이라는 것을
눈치채실 것입니다. 위 본문을 통해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나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랜드 래피즈나 다른 곳에 있는 어린이들이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이기심을
가진 어린이들로 자라간다는 그 사실에 슬퍼해야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나타난 목록의 많은 부분이 자신들의 삶과 연관지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타락한 인류 안에 잠재되어 있는 죄악된 성향을 억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권장하는 교육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입니다(잠 22:15 참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오히려 권장되어야할 것은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명령은 복음서들에서 여섯 번 언급되었습니다. 이 자기부인이야말로 자신들의 관심사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 순위로 두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셨던 예수님께서 전달하고 싶어하시던 말씀이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3).
하나님께서는 자기(自己)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분께서는 "부인(否認)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도록 하여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을 것이다"
(마 16:24, 25).
이 말씀은 어떤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것'을 부인("나는 사순절을 위해 껌 씹는 것을 
그만두었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부인(否認, '어떤 내용이나 사실을
옳거나 그러하지 않다고 인정하지 아니함')하라는 뜻입니다(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 자신에게
'아니'라고 말함' 혹은 '자신과 절교(絶交)하거나 의절(義絶)함'이라는 뜻임). 만약 자기확신만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부인과 반대되는 개념이 없다면, 자존감 교리를 가르치는 책들이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과연 어떠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대조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도 도저히 서로 타협하거나 겹쳐질 수 없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대조하십니다. 여기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할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삶의 방식들은 마치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것들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최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을 서로
섞는 혼합주의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을 이방인의 삶의 방식들로부터, 또 자기를 
부인하기는 커녕 그 분을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십니다(마 6). 이러한 대조는
각각의 복음서들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마 8:34-38, 눅 9:23-25, 요 12:25).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6:25). 혼합주의자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여길지 잘 모르겠습니다. 
위 본문에 '자기'와 '목숨'이라고 번역된 'εαυτόν(에아우톤)'과 'ψυχῆν(프쉬켄)'이라는 단어들은
모두 '자기(自己)'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서로 대체 가능한 단어들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과 누가복음 9장 25절을 비교해보십시오.
마태복음에서는 ψυχῆν이 사용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εαυτόν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그 분께는 '예'라고 말하라고 말씀
("나를 따르도록 하여라")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을 더하심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누가 의원님께서는 여기에 "날마다"
라는 단어를 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바로 
'불명예스러운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너는 너 자신과 네 죄된 행실들과 죄된 우선 순위들과 죄된 정욕들을 마치 범죄자들인 것처럼
다뤄야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그리스도님께서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우리 자신의 자아상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특히 자기가치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삼키기 힘든 쓴 약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상사병이 걸려버린 교회에게는 유일한 치료약입니다.
이 본문의 역설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을 위해 보존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리스도님과 그 분의 관심사를 우선 순위로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잃는 그 모든 것들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치셨던
진리와 동일한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이방인은 '재물'을 열정적으로 찾고 염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물에서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신들의 '필요'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님을 우선 순위로 두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필요'가 자신들에게 
더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조 : 요한복음 12장 25절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자기 목숨을[그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그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이 말씀은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사랑을 증진시키는 것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그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그리스도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잃거나, 그 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미워할 때, 그것을 영생에 이르도록 보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잃다'와 '미워하다'라는 두 단어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설사 정당한 것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욕망과 관심과 걱정을 제쳐두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나타난 것처럼, '미워하다'라는 말은 '덜 사랑하다'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병렬 구절인 마태복음 10장 37절을 통해 '미워하다'라는 말이 '덜 사랑하다'라는 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는 '미워하다'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이 쓰였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님과 그 분의 나라를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보다 우선 순위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부인은 자기가치, 자존감, 자기사랑 교리의 심장을 꿰뚫어 버립니다. 자기사랑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그리스도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님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가르침보다 더 그리스도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가르침이 있을까요?
자기사랑 교리의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은 영적인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 안에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할 범죄자가 있다는 말보단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라는' 말을 들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님의 제자도로부터 멀어지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내담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는 말보다는 "자기 자신을 그래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단계에요."라고 말하는 심리 상담가의 말에 그 위험은 분명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님과 그 분의 나라를 위한 사랑과 헌신을 향해 자신을 던짐으로써 이 세상에서 자기(自己)를 '잃기를' 바라십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점을 적어보라고 시키는 '스스로를 칭찬해요'와 같은 활동은 아이들의 모든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활동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강조점은 기독교 교육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자도 : 누가복음 14장 25-27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었는데, 그분께서 그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장 25-27절 본문에 대해 딱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장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모든 본문의 공통된 주제는 바로 '제자도'인데, 제자도란 이 삶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유대조차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님을 따르기 위해 당장 모든 유대를 끊어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자도란 언제든지 그럴 수 밖에 상황이 오게 된다면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를 할 정도로 그리스도님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끊기 힘든 유대인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님을 기쁘게 하고, 그 분을 따르고, 그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어린이들(혹은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해서 미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님께서 자기(自己)라는 주제에 관심을 보이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분은 이 중요한 주제를 결코 도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그 분께서는 이 주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으며, 그 사실은 그 분께서 이 주제를 그 분과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님께서는 사람의 위대한 가치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으며, 그렇게 주장할만한 정당한 사유조차 제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네 모든 필요를 채우고 너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나서 나를 따르거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터무니없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스도님을 자기 자신보다 우선순위로 삼는 것 :
고린도후서 5장 15절과 로마서 14장 7, 8절
그리스도님을 자기 자신보다 우선순위로 삼으라고 명령하는 구절은 요한복음 12장 25절만 있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님께서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더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고 합니다. 옛 사람의 방식은 이제 그리스도님 안에서 없어졌으며,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도 없어져야 합니다. 삶의 초점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가 된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14장 7, 8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다시 말합니다. 이 본문의 중심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그리스도님께서 자기(自己)의 자리를 대신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실제의 삶에서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과 의지에는 이러한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먹는 것과 날을 중히 여기는 것(롬 14:6)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새신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님의 나라의 번영을 위하고, 그리스도님의 명예를 위하는 일이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물어야할 질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답은 "만약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리스도님과 다른 사람들을 먼저 섬기는 삶을 살겠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필요하다면 그 분을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7절의 마지막 부분은 자살에 대해 설득력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리돈 씨는 이 구절의 의미가 "이 삶의 문제들로부터 안식을 얻기 위해 죽음을 찾거나 환영하는 것. 자살은 죽음에 있어 가장 이기적인 표현."라고 말합니다.
리돈 씨의 말은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님의 논점은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그리스도님을 위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자살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해지는 일입니다. 어떤 자살도 그리스도님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살이 옛 사람의 행위이며, 때때로 (금욕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권장되기까지 했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쐈던 홀리데이와 자기 자신을 목 매달았던 완다 윌리엄스는 자살함으로써 이기적인 행동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이나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자살 직전에 남긴 메모가 말해주는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높은 관심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나는 그런 식으로 대해지기에는 너무 괜찮은 사람이야.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대해지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심지어는 그들의 목숨조차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님께서 그들을 값을 치루고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한다면, 그리고 당신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 그 자체는 바로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가운데 그리스도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존감 교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들의 관심을 돌리게 만들며, 그럼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을 파괴시켜버립니다. (아들러/메슬로우 욕구 5단계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을 위해 먼저 다른 기반을 다진다고 하게되면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아보는 사랑만이 우리를 우리 자신들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현대 심리학의 강조점과는 다르게, 성경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우리들이 결코 우리 자신들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자기를 '찾거나 구하는 것')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항상 그런 것처럼 이교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 미신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타파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하면, 너희에게 무슨 칭찬받을 것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들을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한다." '죄인들(하나님의 원수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할게."와 같은 자세가 악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기사랑, 자존감, 자기가치, 또 혹시라도 미래에 유행하게 될 모든 자기중심적인 교리들의 대안은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한다면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잃을 각오를 한다면 구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진리입니다.
<The Biblical View of Self-Esteem (자존감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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