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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과제(1)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과제(1)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 조직신학)
한국 장로교회는 전 세계 교회가 경이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큰 교세로 성장하여왔고,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확장과 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장로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출범하여 성경적 교회제도를 새롭게 정립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신앙고백서들을 창출하므로서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물론 장로교회도 세계의 다른 개혁주의 기독교 교회나 교단들과 더불어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본질적인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장로교회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석에서도 다른 교회와 교파가 지닌 장점을 인정하고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장로교회는 가장 독특한 특성들을 갖고 있다. 
과연 장로교회란 어떤 점에서 다른 기독교 교파와 구별되는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무엇을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한국 장로교회가 제대로 장로교회 다운 참된 정체성을 띄고 있는가? 약 130여 개의 장로교단으로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 장로교회는 최근에 정체성 논의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2002년 정암 박윤선 기념 신학강좌의 주제로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밝혀보고, 그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자”는 취지에서 개최되는 이번 강좌는 팔십 평생 신학교육과 주석저술을 통해서 정암 박윤선 박사가 정립하고자 했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매주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정립을 위해서 다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장로교회가 고백하여야 할 몇 가지 핵심적인 신학사상을 정리하고 둘째로,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 논쟁과정을 살피면서, 정체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이 현재 어떤 위기에 직면했는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로교회가 지켜나가야 할 목회 원리와 과제를 정체성 회복의 대안으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I.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밝히려면, 신학사상의 개요와 그 강조하는 독특한 교리와 정치제도를 검토해야 한다. 신학적 정체성을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핵심적인 진리들을 제시한 칼빈주의 신앙고백서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16세기와 17세기에 만들어진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신앙문서와 신앙고백서에 장로교회와 개혁주의자들이 성경에 따라서 믿었던 가장 핵심되는 조항들이 압축되어 있고, 그에 따른 새로운 교회 정치제도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종교개혁 초창기 개혁파 교회들은 ‘참된 말씀의 선포’, ‘정당한 성례의 집행’, ‘권징의 시행’만으로도 참된 교회를 구분하려 노력했으며, 신앙고백서를 만들어서 그들이 믿는 바 공통분모를 서로 확인하고 다짐했다. 
I.i. 성경적 교회제도 
역사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과 같은 장로교회의 탄생은 16세기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이 확고히 주장함으로써 드러나게 되었고, 그의 영향을 입은 요한 낙스가 스코틀랜드에서 꽃 피운 장로교회 정치제도가 발전하게 되면서부터다.
칼빈과 그 동료들이 주장한 종교개혁신학을 물려받은 장로교회의 강점은 성경에 충실한 기본 진리들을 고백하면서, 질서를 잃지 않는 유형 교회 체제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장로교회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과 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일,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구원에 관한 교훈들은 오직 성경에서만(sola scriptura) 찾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또한 “전체 성경은 오류가 없는 믿음과 생명의 규칙이다(tota scriptura)”라는 기본 정신을 항상 견지한다.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 생활만 새롭게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성직자 중심의 상하구조로 되어있던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회제도를 창안하여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을 성경적으로 정립하였다. 올바른 구원관의 정립과 함께, 그것을 시행하는 장로교회만의 독특한 신학체계와 정치제도를 실행시키는 성경적 교회론을 정립하는데 주력했었다. 소위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급속히 부상한 에큐메니즘 운동으로 인해서 장로교회의 신학과 교회론이 무차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나, 종교개혁자들은 탁월한 교육을 통해서 목회자가 될 사람들을 철저하게 훈련하고 가르쳤으며, 이런 노력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로교회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사용하게 된 ‘장로교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요한 칼빈이 시작한 ‘콘시스토리’(오늘의 개교회 당회 제도와는 약간 다름. 도시 전체의 목사 15명과 같은 수의 장로들의 모임)와 개혁주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세워졌다. 엄밀히 사전적인 정의를 말하자면, 장로교회란 “기독교 교회의 신학사상과 교회제도에 대해서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이 ‘장로’라는 대표자들을 중심기구로 하여 구성한 ‘교회의 제도’와 ‘신앙체계’를 동시에 통칭하는 말이다.
신약성경의 증거 중에서 교회의 조직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볼 때에, 목양하는 직분으로서는 장로보다 더 존귀하거나 더 큰 책임을 맡은 다른 제도는 없었다.
장로들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그리고 정치와 경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장로들은 사도행전 20:17, 28에 보여지는 대로 에베소 교회에서 가장 책임있는 권징의 사역을 맡았었다. 빌립소서 1:1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돌아보는데 가장 높은 지위로서 ‘감독’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 자신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책임감을 호소하고 있다(벧전 5:1).
구약성경에 보면 오래 전부터 족장들을 장로라고 부르며 존중해 왔다. 신약성경에서는 “장로”라는 직분은 많은 경우에 “감독”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에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로 다시 역할이 세분화되었다. 여기에는 다소 개념적인 발전이 있다. 구약에서 장로는 각 지파의 대표자이자 연장자였으나, 신약시대의 장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경건과 모범적인 가장으로서 성도들에 의해서 인정받고 선발된 지도자였다(딤전 3:1-7).
칼빈은 교회가 융성하고 확장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목사와 교사(오늘날의 신학대학 교수), 장로와 집사의 네 직분이 주어졌다고 규정했다. 권징의 시행을 담당하여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장로의 직분은 말씀의 선포자인 목사 직분과 같이 매우 중요하게 회복되었다. 칼빈은 치리하는 장로직은 권한이 아니라 섬기는 사역으로 본다.
칼빈은 직위(Offices)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섬김 또는 기능(functions)을 더 자주 언급한다.
비로소 제네바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중심의 상하구조를 벗어버리고 성경적인 교회제도를 복원하면서 평신도 대표가 참여하는 장로교회 정치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중세 암흑기를 거치면서 장로의 역할은 차츰 축소되고, 종신 수도사들과 독신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개편되어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독점하다가, 16세기 들어 학문의 발전과 함께 종교개혁시대가 도래하여 장로라는 직분이 회복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장로들은 대부분 귀족으로 탁월한 학자이거나, 시 행정가, 또는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의회 의원들이었다. 그러한 배경을 기초로 하여 지난 4백 여 년의 개신교 발전의 역사 속에서 장로교회는 차츰 보다 깊고 광범위한 신학적인 체계와 교리적 구조를 형성하였다.
I.ii. 신앙고백서들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체계 또는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를 가장 성경의 교훈에 충실한 원리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칼빈주의 원리들을 성경의 총체적 가르침을 확립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세계의 장로교회의 목회자들과 직분자들은 임직을 받을 때에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따라서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신앙원리를 받아들이며 이에 따라서 생활하기로 서약하고 있으며, 만일 그것을 위반할 시에는 스스로 직분에서 물러나기로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회가 고백하면서 간직해 나오고 있는 신앙은 세계 기독교 역사와 교회의 변천사를 통해서 볼 때 가장 보편적인 인류문명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문화는 종교적 신념과 배경을 토대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과 유대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보존되어온 오랜 신앙의 역사 속에서 잉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담아서 요약한 신앙고백서, 신앙에 관한 교훈집과 교리요약에 해당하는 칼빈주의 신앙고백서, 그리고 요리문답 등 잘 요약되어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성경의 권위와 성경적 교회건설을 회복하고 재건하면서, 요한 칼빈의 저술과 성경해석과 설교들을 통해서 개혁신학의 정통성이 확보되었다. 따라서 장로교회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칼빈주의’(Calvinism) 신앙고백서들에 담긴 중요한 신앙체계를 따르게 된 것이다. 
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물려받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이후 약 백여 년 후에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요리문답에 기초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미 16세기부터 17세기 초엽까지 유럽 각지에서 박해와 시련 속에서 만들어진 제네바 신앙고백서(1541), 갈리칸 신앙고백서(155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벨직 신앙고백서(1561), 영국교회의 39개 조항(1563),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1564), 돌트 신경(1618-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1643-8)에서 다루어진 교리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체계적 종합이다.
그러나 루터교회는 ‘the Formula of Concord’(1577)와 ‘the Book of Concord’(1580)를 최종 결론으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핵심적인 교리의 선언은 ‘Decrees and the Creed of the Council of Trent’(1563-4)에 담겨있는 바, 신학적인 입장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다만,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항상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말씀 속에서 바른 신앙적 원리들을 찾아내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I.iii. 개혁주의 핵심교리들
장로교회는 다음과 같은 핵심교리들을 성경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장로교회에 있으면서 어느 하나의 교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매우 불건전한 생각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축복 그리고 인생의 성공을 강조하는 것은 얼마든지 성경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방탕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동시에 강조하지 않는 것은 인간들의 귀에 ‘변질된 복음’과 ‘값싼 복음’을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연구주제가 필요하고, 진정한 장로교회의 대표적 교리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종교개혁 이후로 발전된 개혁주의 정통 신앙고백서에 담긴 기본 원리들(articuli fundamentales) 이자 중심 진리들로서 아홉 항목으로 정리해 본다.
1. 성경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계시의 기록으로, 그 내용은 완벽하며, 그 권위는 절대적이요, 그 교훈들은 최종적이다. 전혀 오류가 없다(딤후 3:16; 벧후 1:21; 갈 1:11, 12; 눅 24:27, 44; 롬 3:2, 살전 2:13, 막 7:5-7). 
2.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인격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마 28:9, 고후 13:4, 마 3:16, 17).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통치자이다(롬 11:36).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성경에 충실하려는 신실한 장로교회가 가장 강조하는 교리로서,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우주와 모든 인간을 다스리시며 관할하심을 가르치는 핵심교리이다.
이 교리에 의해서 장로교회는 이 세상에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예배하는 것이며, 인간은 어느 누구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계 7:11, 12, 계 5:12). 인간이 무엇을 했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는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제쳐놓거나 넘어서서 강조한다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서 그분을 공경하고 섬기려는 목적에서만 가치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인생들에게는 참된 행복과 가치와 보람이란 불가능하다. 인생은 하나님을 찾아 경배하고자 지음을 받았고,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여있는 의미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구원에 있어서 핵심을 이룬다(롬 8:30). 인간들 스스로 성취한 것들은 구원에 있어서 본질이 될 수 없으며, 핵심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그 믿음의 효과를 생각할 때에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모든 사람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생활에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한 사건들까지도 섭리하기 때문에(행 27:24, 31, 34; 사 55:10), 우리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해야 한다(왕하 19:28, 단 3:21).
장로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그 사건들에 부여할 완전한 의미가 있음을 믿는다(엡 1:11).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목적을 이루도록 허락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 결코 그 어떤 사람에게도 발생할 수 없다(엡 2:10, 행 4:27, 28; 마 16:29, 30).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행동도 통치하고 계시며 그들의 사악함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리신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궁극적 경륜에 따르도록 작정하시고, 역사하시고,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을 심지어 악하게 보이는 사건들까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한 것이 되도록 바꾸어 버리신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으며, 만물의 영장으로 호흡을 주신 주권자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겁게 하려는 것이다. 
3. 인간의 부패와 타락
장로교인들은 아담의 죄악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창 3:13, 롬 5:19-21). 죄는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담겨 있으며, 만일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살도록 자연스런 성향이 용납된다면, 사악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란 “처음부터 선과 악 그 어느 쪽에도 중립적이다”라는 말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환경이나 교육이나 상황에 따라서 좀더 고상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혹은 타락하기도 한다는 설명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 본성은 선한 것이 아니다(창 6:5).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에 머물거나, 선을 향해서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다(롬 5:6; 8:7; 3:10-12; 요 3:6, 롬 7:18). 완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 나가면서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충족적인 존재도 아니다. 인간 본성은 악하여서, 아무리 어린 유아라도 죄악된 경향과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택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해서 훈련과 금지조항을 두지 않는다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이상과 같이, 장로교회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원죄’의 교리(Original Sin)를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이란 태어날 때부터 내재해 있으며 본래부터 죄의 감염으로부터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불완전함은 중생한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믿는 우리들의 성격에도 결부되어 있다(롬 7:14, 약 3:2, 요일 1:8, 10). 
따라서, 장로교회가 믿는 원죄의 교리는 인간의 전적부패라고 요약되어진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류는 근본적으로, 전적으로 모두다 함께 죄악을 드러낼 뿐이다(롬 5:12-19).
또한 전적타락의 교리는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낸다(롬 6:23, 창 2:17).
인간 존재란 단순하게 죄악을 범하는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다른 도움과 대안을 스스로 찾아낼 방법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냥 자연적으로 내버려두면, 인간들의 세계는 죄악으로 범람할 뿐이다. 인간은 죄악에 묻혀서 사악함을 떠날 수 없고, 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영적으로 말하면 죽어있는 상태다(갈 3:10, 살후 1:9, 롬 1:21-28, 렘 26:11, 신 28:15). 우리의 생활과 행동은 어느 것 하나라도 순수한 것이란 전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인간의 의로움이란 모두 다 불결한 넝마조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내부 속에 온전한 의로움이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깨끗하고 완전하게 씻음을 받으며, 철저하게 고칠 수 있는 전향의 가능성마저도 갖고 있지 못하다(엡 4:18, 마 25:14).
4. 그리스도의 구원성취
장로교인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대속 제물로 삼으시고자 오랫동안 예고하시고, 마침내 성취하셨음을 믿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성부와 함께 선재 하신 분이며,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동등하셔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되(히 1:3, 요 1:1),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눅 1:27, 갈 4:4). 우리와 똑같은 본성과 모습을 취하셨지만 죄가 없이 사시다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값을 지불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망을 이긴 승리자로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사, 다시 하늘 나라로 승천하셨고, 성령을 보내사 그의 사역을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적용하시고 역사하신다.
주 예수의 완전한 순종과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자기 몸으로 드리심으로 공의를 충분히 이루시고(히 9:14, 10:14, 롬 3:25, 엡 5:2),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화해를 이루었고, 영원한 천국의 유업을 주신다.
성령의 부음과 선물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경건한 삶을 소유하게 되었다(롬 6:9, 14, 15:18, 19, 딛 3:4, 5, 요 17:17). 성령은 그리스와 우리를 연결하는 끈이다. 이 새로운 생명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의 심령 안에서 시작되어진다. 성령이 적당한 때에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까지는 인간은 의롭게 될 수 없다(요 3:5, 18, 36, 갈 2:16). 이 새 생명은 성령이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하는 방식으로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신다(고전 3:12).
5. 선택
장로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를 강조하면서,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확신한다(마 13:20, 21; 22:14, 요 6:64-66; 8:24; 요일 2:19, 히 6:4-6).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빌 3:9, 엡 2;6, 행 13:38, 39). 우리들의 인격이 훌륭하고 고상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요, 구원을 받을만한 선행을 쌓아서 그로 인해서 인정을 받아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을 뿐이며, 그를 찾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엡 2:8).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가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까닭에 이제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었다.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교리는 무슨 다른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거나 평신도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선택 교리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찾아주시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밝혀 주실 때까지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주실 때까지는 인간은 믿을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이렇게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과오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는다(엡 1:3-11). 
따라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버림을 받은 자들 또는 영원히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믿는다.
선택의 교리는 모든 장로교회 성도들에게 깊은 사랑과 신뢰를 받아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모든 인간의 노력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확신과 보장을 해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확신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성도들을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현재 세상에서나 장차 올 세상에서나 아무 것도 없다. 이 확신은 성도로 하여금 어떤 좁은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항상 그 앞에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나가게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까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성도는 안전하다(빌 1:6, 요 10:28, 29, 32:40, 렘 32:40, 요일 3:9, 벧전 1:5, 9). 
6. 성화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선택된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거룩한 생활을 힘쓰고 노력해야 함을 믿고 고백한다. 성령은 성도들이 죄악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보호하고, 생활의 거룩함과 성화에 진보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새 생활로 인도해 주신다(골 1:11, 벧후 3:13, 14 엡 3:16-19). 
모든 봉사의 생활 가운데 기도는 핵심위치를 차지한다(요 14:12-14; 엡 6:18, 19).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도록 성도들은 의로움을 향한 삶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를 자신의 생활 속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성도는 영적인 성숙을 성취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생활의 모범을 나타내야 한다. 성령께서 놀랍도록 역사하심 가운데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그 밖의 모든 경건의 특징들이 분명하게 성도의 생활 가운데서 열매로 드러나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고후 7:1, 히 12:14).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확실하게 커 나가게 되면 될수록 같은 신앙의 동료들을 사랑하게 되며 세상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지 더욱 더 사랑하게 된다.
이 목표를 위해서 성도들은 은혜의 수단들을 힘써서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믿으며 기도와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7. 교회
장로교회 성도들은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를 고백한다(롬 11:3, 행 9:31).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라는 점에서 우주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다(엡 1:22, 23; 골 1:18; 엡 5:23, 27, 32). 포도나무와 가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듯이 참된 교회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은 장소나 시대를 초월해서 우주적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골 1:18). 이 교회는 어떤 특정한 교단이나 단체로 규정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 있는 곳이라면 모임의 형태나 조직의 특성을 초월해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에 장로교회가 속해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장로교회가 아닌 교회도 속해 있음을 믿는다. 이 참된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참된 구세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든지 참여한다.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를 믿는 까닭에 장로교회는 성도들의 교통을 확신하고 강조한다(행 5:4, 히 10:24, 25; 행 2:42, 46, 고전 11:20). 기독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실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신자의 삶은 은둔가나 수도사들처럼 개인주의적인 독자성을 강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봉사하며 은혜와 상호 격려 가운데서 자라도록 하신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보편적 교회의 공동체적인 모습은 성례를 통해서 반영 된다. 신약성경의 강조를 따라서 말씀의 선포사역과 성례의 시행과 권징과 치리를 통해서 믿음의 권속들을 세워나가고 확장시켜 가는 것이다.
8. 언약과 성례들
장로교회의 특징적인 교리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긴밀한 언약관계를 조명하는데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심으로 독특한 관계성이 있음을 설정하였다(호 6:7). 하나님과 인간과의 상호 계약이자 약속인데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고, 인간은 회개와 믿음을 실행에 옮겨서 그분에게 용납되어지도록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창 9:9-13, 12:2, 13:16, 17:2-14, 22:17). 이 언약의 최종 완성자는 그리스도이며, “언약의 피”를 흘리시고(마 26:28, 막 14:24), “새언약”을 제정하셔서 사도들로 하여금 전파하게 하였다(눅 22:20).
언약신학에서 성례들은 항상 은혜 언약의 인침이자, 징표로서 해석된다. 장로교회는 오직 두 가지 성례들 즉 세례와 성만찬을 믿는다(마 28:29, 고전 11:20, 23). 우리는 이것만이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참된 성례임을 믿는다. 바른 믿음에서 이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을 증거하는 보여주는 상징들이다(마 26:27, 28).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성례들 속에 내재되어 있어서 이를 시행할 때에 전달된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예식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과 약속에 의존하는 것이며(요 6:63, 롬 4:11),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은총들의 상징이자, 증거요, 인치심이라고 볼 수 있다(창 17:9-11, 출 13:9, 10, 12:3-20, 롬 4:11).
성령께서 그곳에 머물러 계셔서 각 사람의 심령에 따듯함을 주시고 마음에 은혜를 끼쳐 주실 때에 그 속에 내재해있는 어떤 요소들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총들을 받는 것이다 (롬 2:28, 29, 고전 3:7, 6:11, 요 3:5, 행 8:13-23). 
세례는 친히 값 주고 사신 백성의 소유주이자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언약적 약속으로 인쳐주심을 드러내시는 성례이다(롬 4:11, 갈 2:29, 골 2:11, 12). 이런 약속을 눈으로 보여주는 세례는 이 약속이 성취된 사람들의 생명 속에 역사하신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서 구체적으로 그 약속들을 실현해 나간다. 이 성례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약속이 성취되어졌다고 믿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고백들에 근거하는 것이며 믿음의 권속으로서 지어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믿는 자들의 자녀들에게도 시행되는 바, 이들도 역시 믿음의 가정에서 기도와 예배로 성장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창 17:7, 갈 3:9-14, 롬 4:11, 12, 고전 7:14, 막 10:13-16, 눅 18:15, 16). 그들의 부모들의 가슴속에 역사 하셨던 성령께서 자녀들의 심령 가운데 임재 하시는 증거들을 드러내게 하신다. 우리는 역사적인 증거들과 함께 실제적인 증거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주님의 보호 아래서 참된 성숙에 도달하도록 성장할 것임을 믿으며 그러한 자녀들에게 주님의 임재의 상징이자 인치심을 시행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재림도 함께 증거하는 것인데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가운데서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이다(고전 11:23-26, 10:16, 17, 12:13, 마 26:26, 눅 22:19, 20). 사람의 심령에 전달되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만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모든 혜택들을 믿음으로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장로교회는 성만찬이야말로 어떤 특정한 교회나 회중이나 개인에게 소유된 전유물이 아님을 고백한다. 이것은 주님의 만찬이다. 따라서 어떤 교파의 예식이거나 어떤 교단의 비밀스러운 의식이어서는 안되고(행 3:21, 눅 24:6, 39), 차별하거나, 은총을 제한해서도 안된다. 모든 참된 신앙 고백자들의 공동체로서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이다(고전 10:16, 요 6:53-58). 무지하고 완악한 사람들이 합당치 않게 성례에 참여하여 주의 몸과 피를 더럽히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후 6:14-16, 고전 5:6, 7).
9. 부활과 재림
장로교회는 복음의 핵심이 부활과 재림이라고 믿는다(롬 8:23; 살전 4:17) 세상의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과 영들을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영광과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곳에 그와 함께 거하며, 그들의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릴 것이다(살전 4:17, 고전 15:51, 52).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며,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하게 될 것이다(롬 10:9; 고전 15:3-5).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영광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지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불명예와 영원한 저주를 받아서 주님의 영광과 임재로부터 격리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상급을 받아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주제들은 주로 유럽에서 종교개혁과 후기 퓨리턴 신학자들이 신앙고백서에 요약하여 제시한 것들이다. 서양의 장로교회에서는 신앙고백서에 담긴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청소년기에 요리문답 시간을 통해서 철저히 신앙교육에 힘써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문화와 시대를 새롭게 갱신하는 세계관과 윤리관의 근저가 되었다. 서양의 개혁교회들이 믿어온 신앙고백서들은 한국 장로교회에서도 그대로 표준문서로 채택하여 사용해 오고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들은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을 통해서 소개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본적인 규범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이 문서를 번역해서 사용하는 처지에서는 과연 이 문서를 만들어낼 때의 고통과 역경을 경험하지 않고서 그 의미를 제대로 소화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피를 흘리는 고난이 배어있는 신앙고백서를 온전히 이해할 길이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I.ⅳ. 개혁신학의 특징들
앞에서 살펴본 기본조항들을 강조할 때에 장로교회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성격과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정체성 파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태도이자, 신학적인 기본 자세이다.
첫째, 칼빈주의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soli Deo gloria)을 강조한다(롬 11:36). 
둘째,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철저한 통치권을 강조한다. 창조주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생산적인 열정을 가지고 계신다(고전 4:7).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눈금도 없다. 
셋째, 인간의 모든 생활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적으로 살아야하며 삶 그 자체가 종교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롬 10:13). 
넷째, 경건은 모든 성도들의 인간 생활의 행동원리가 되며 교리와 실천을 함께 균형있게 강조한다(딤전 4:7-8; 롬 12:1). 칼빈주의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로 접근한다.
다섯째,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성도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적인 교회 하나의 신앙고백을 확신한다(엡 4:4-6). 
따라서, 두 가지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입장을 피하도록 노력한다. 하나는 칼빈주의란 그저 다양한 기독교 종파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는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거부한다. 또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 교회만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참된 교회이며, 다른 교회들은 대부분 이단적이며 거짓된 교회라고 매도해버리는 극단도 피하고자 노력한다. 
II.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정체성 형성 
그러면, 지금부터는 한국에 소개된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특징들과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사안들과 주요 신학자들의 저술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지나간 한국교회 1백 2십 여 년의 한국 교회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 장로교회가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논쟁에 빠져들었던 몇 차례의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몇 차례의 전개된 신학적인 논쟁은 한국 장로교회만의 문제들은 아니었고, 세계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장로교회의 기본 신학사상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자체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보존하였는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II.i.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경건한 신앙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발전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창기의 한국 정통신학을 수립한 선교사들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발적인 수용능력을 갖추게 되기까지,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과 인격적 감화로 말미암아 성경 중심주의, 개혁주의적 신학체계, 그리고 실천적 신학이 핵심을 이루는 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893년부터 1901년 사이에 한국에서 활약했던 미국 북장로교회 외지선교회 소속 선교사는 모두 40여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16명은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었고, 11명이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북장로교회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교 출신들이던 이들 선교사들은 모두 다 그들이 정통신학의 스승으로 존경하던 워필드 교수(B. B. Warfield)와 핫지 교수(A. A. Hodge)의 칼빈주의 신학을 그대로 품고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1901년 1월, 5년제 신학과정으로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마포삼열(Samuel Moffet) 선교사는 광범하고 일반적인 보수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조상숭배와 술 담배를 금해야 하며 첩을 두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들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생각하는 철저하고 엄격한 칼빈주의를 가르쳤다. 경건한 실천을 중요시했던 영국의 청교도들과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처럼 마포삼열 선교사는 신학과 윤리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사상에 대해서 간하배 교수는 “청교도적 신학은 요즘 일반적으로 율법주의니, 외식주의니, 공식주의라는 완강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초대 한국 선교사들은 퓨리탄의 가장 훌륭한 신앙의 특징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에서 12년 동안(1960-1972) 선교사역을 했던 간하배 교수는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영국이나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대체로 자유주의 신학을 수업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일본 교회의 특성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초기 한국 장로교회 선교부는 경건한 실천적 신학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평양신학교 최초 조직신학 교수였던 李訥瑞(W. D. Reynolds)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온 선교사로서, 칼빈주의 신학자 로버트 루이스 댑니의 조직신학을 교재로 채택하여 강의하였다.
댑니는 버지니아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서 남장로교회의 칼빈주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조직신학자였다. 이눌서의 후임을 맡은 具禮仁(J. C. Crane)도 역시 댑니의 교재를 중심으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 훨씬 더 정확하고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였고, 무천년설을 추가해서 강의하는 등 개혁 신학의 안목을 넓혔다.
1907년 제 1회 졸업생 7인을 기초로 하여 ‘독노회’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한국 장로교회는 앞에서 열거한 실천적 교리의 기초를 미국출신의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배운대로 실천하여 나갔다.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청교도적인 선교사들로부터 철저한 경건의 생활화를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기초로 세워나갔다. 
나라를 개방한 이후 처음 25년간의 전형적인 선교사는 퓨리탄형 사람들이었다. 이 퓨리탄형 선교사는 안식일을 지키되 우리 뉴잉글랜드 조상들이 한 세기 전에 행한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이나 성경을 비판할 때에 이러한 선교사는 강력하게 보수주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의 견해를 없어서는 안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서 “유럽 대륙의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가미한 장로교회”라고 주장하였다. 조직신학 교과서를 통해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제시한 박형룡 박사는 줄곧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전통을 지켜나갔다.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
박형룡 박사는 평양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된 퓨리탄 전통을 총신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정통신학으로 세워놓은 분으로서, 청교도적인 신앙을 기본으로 삼고, “하나님의 주권”, “성경의 신성한 권위”, “확신있는 전도의 실천” 그리고 “주일 성수”를 지켜 나갈 것을 주문한 바 있다.
1931년부터 3년 동안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초기 한국 선교사들로 받은 경건한 신앙과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 증언한 바 있다. 
나는 신학교 교장 나부열 선교사에게 배운 바가 많았다. 그가 종종 말씀하시기를 “교역자가 재주는 부족하다 해도 진실하면 된다”란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개척자요 중진이었던 마포삼열 박사의 인격적 감화도 모든 학생들이 많이 받았다. 그는 요리문답을 교수했는데, 그 교부와 같은 무게 있는 신앙인격으로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업아력 선교사(캐나다)의 인격적 감화를 잊을 수 없다. 
학생들은 그의 관대함과 온유함에 대하여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를 성자와 같이 생각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이눌서 박사의 조직신학 강의도 매우 은혜스럽게 들었다. 그는 미국 선교사이면서도 능숙한 한국말로 강의할 때 때로는 어떤 수도사 앞에서 설교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믿음과 덕과 감화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에 전해진 칼빈주의 신학은 지식 수준에 있어서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으로 아직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생활의 경건을 강력히 실천해 나가는 한편 인격적 감화력을 생명으로 삼고 있었다. 
II.ii. 성경무오설에 대한 도전
일제 하 한국 장로교회는 몇 차례 중요한 신학논쟁을 치르면서 정통성 시비를 하였고, 그런 가운데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정립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정통성을 매우 선호한다. 해방 후에 하나이던 장로교회가 신학적인 노선의 차이를 드러내어 수 없는 교단의 분열로 이어지면서도 여전히 총회의 횟수는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장로교단들이 제 나름대로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 내에서 성경에 충실한 정체성을 세워놓은 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하거나 고난 당한 분들로 인식되었다.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은 한 세대를 지나게 되면서 중대한 고비에 직면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세계 장로교회의 신학적 변질과 한국이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신학논쟁의 시초는, 국내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의 본국 교회가 신학논쟁에 휘말리게 된 이후였다. 서양 교회의 신학사상 중에서 한국 장로교회가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정통이냐 비정통이냐를 판가름하게 된 것이다. 
1. 세계 장로교회 신학의 위기
한국 장로교회가 신학적인 대립과 혼란으로 인하여 극심한 분열에 처하게 된 것은 서구 유럽의 개혁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신학적 대립에서 영향을 입은 바 크다. 한국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미국 장로교회는 20세기 초엽에 자유주의 신학의 급속한 보급을 통해서 점차 급진화 되어가는 흐름과 특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로 인해서 줄곧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던 미국 장로교회가 혼란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의 직접적인 지원과 지대한 영향으로 인해서 한국 장로교회도 신학적인 혼란과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호주, 카나다 등지에서 발생한 자유주의 신학논쟁의 영향이 열강의 이권 다툼의 대상이 되었던 한국 땅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미국 장로교회 신학적인 논쟁을 살펴보면 세 차례의 큰 위기와 대립이 있었는데 시대와 환경이 달라지면서 논쟁의 초점은 다르지만 핵심은 여전히 유사성을 갖고 있다. 첫 분열은 1741년에는 요나단 에드워드의 대각성운동에서 시작된 감동적인 전도집회의 후유증으로 신파(New Side)와 구파(Old Side)로 나뉘어진 일이다. 대각성 운동에 적극적인 후원을 한 신파의 지도자들은(Gilbert Tennent, Jonathan Dickinson, Aaron Burr Sr., Samuel Davies, Samuel Finley) 구파 진영(Francis Alison, John Ewing)이 스코틀랜드의 전통을 중시하면서 철저하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서명할 것과 장로교회 제도를 받아들이는 자들만 안수해야한다는 ‘the Adoptinig Acts’(1728-29)를 제안하자 반발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로 발돋움하게 될 윌리엄 테넛의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생 안수에 대해서 철저한 검토를 주장했다. 요나단 에드워드가 신파 총회에서 1752년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 한편, 구파의 지지율은 현저히 약화되다가 마침내 1758년 재결합하였다.
두 번 째 분열은 1837년에 일어났다. 미국 대륙에 끼친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으로 새학파(New School)와 구학파(Old School)로 대립하다가 교단이 갈라서게 되었다.
뉴잉글랜드 회중교회 지도자였던 벨라미(Joseph Bellamy, 1719-1790)와 홉킨스(Samuel Hopkins, 1721-1803)는 급격한 변혁기였던 미국의 독립전쟁 기간에 율법과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 혁명적인 개념을 제기하였다. 칼빈주의를 당시 미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식으로 변질시킨 사건은 예일 대학교의 테일러(Nathaniel W. Taylor, 1786-1858)와 비쳐(Lyman Beecher, 1775-1863)에게서 비롯되었다. 비쳐는 인간본성에 대한 긍정과 도덕적 완전주의,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에 대한 지지 등으로 칼빈주의 정통신학에 대해서 완화된 입장을 제기하였다. 1838년 총회는 신학적 다양성에 대해서 포용주의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칼빈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신앙고백을 지켜나갈 것을 결의한 것이다. 구학파의 지도자는 원죄의 전가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자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였다. 남북전쟁후 186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서명을 강조하기로 하고 형식적으로는 두 파가 재결합하였다. 
그리고 세 번 째 미국 장로교회 분열은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과 1936년 ‘정통장로교회’라는 교단이 출범하면서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유럽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1876년부터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게된 챨스 브릭스(Charles A. Briggs, 1841-1913)교수는 독일 베르린 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온 뒤로 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해 도전하는 신학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미국 북장로교회에 크나큰 파문을 던졌다.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와 알렉산더 핫지는 즉각 「영감론」을 발표하여 새로운 이단자에 대해 정통신학을 옹호하였다.
이 시대에는 로체스터 침례교 신학대학의 조직신학교수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의 사회복음주의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주의 신학에 큰 타격을 입혔다.
챨스 다윈의 무신론적 진화론,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 막스주의 사회사상의 영향이 전 분야에 걸쳐서 크게 확산되었다.
1924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보수적인 교수들과는 전연 반대되는 자유주의 신학을 담고있는 ‘오번 선언서’(The Auburn Affirmation)에 북장로교 지도급 목회자들 274명이 서명하였다.
이 당시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주일성수, 개인기도, 영혼구원, 개인적 체험에 강조를 두는 “근본주의자들”로서 사회윤리와 정치문제에는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경향도 있었다.
미국 장로교회의 위기는 점점 더 가중되어지다가 1926년 메첸 박사가 워필드 교수의 자리에 취임되는 것이 좌절되었고,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새 학장에 스틴븐슨(John Ross Stevenson)이 임명되었다. 이것을 좌경화의 결과라고 항의하던 그레샴 메첸 박사가 매카트니, 반틸, 알리스, 윌슨 교수 등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첸을 지지하는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1936년에 정통장로교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였다.
2. 성경무오설과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한국에서도 초기 오십 년 동안 지켜져 내려온 경건한 신학은 앞에서 살펴본 미국 교회의 좌경화 영향을 직면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보수적이면서도 훌륭한 청교도 신앙은 복음전도에 열정을 다하여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교육과 자선기관을 세웠다. 새벽기도회와 부흥사경회를 중시하는 등 초기 반 백년 동안 청교도적인 신앙전통을 지속하여 오다가 1930년대 중반과 후반에 들어서면서 중대한 전환점에 도달하게 된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 논쟁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주제는 성경무오설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는 신학으로서 성경무오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앞에 열거한 여러 이슈 중에서 성경무오설이 제일 심각한 논쟁의 초점으로 제기되었다. 이 주제는 구미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였고, 미국에도 역시 가장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 목회자들과는 달리 젊은 세대에 해당하는 신진 목회자들은 일제치하에서 서서히 자유주의 신학의 여러 부분들을 제시하였다. 일제 하에서 일본이나 해외 유학을 다녀온 신진학자들인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등은 진보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1935년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가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고, 김춘배 목사는 여성 안수를 지원하는 발언, 그리고 김재준 목사의 신학지남 원고 게재 금지 등의 논쟁이 벌여졌다. 1935년 총회록은 장장 250페이지에 달하는 신앙수호의 지침을 제시하고 단호하게 이런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1938년 총회는 감리교 유형기 감독이 주도한 아빙돈 성경주석의 번역에 참여한 자들을 제재하는 한편 금서조치를 내렸다.
II.iii. 신사참배 거부와 주일성수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매우 독특한 측면은 일제 하에서 전개된 우상숭배 거부로서 주일성수를 박해하는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에서 표출되었다. 한국 장로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다른 교파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삼일운동에 주역으로 참여하고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완전히 무릎은 꿇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국 장로교회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박관준 장로 등 옥고를 치르는 분들을 정통성 있는 분들로 추앙하게 되었다. 일본의 강압을 그대로 수용한 1938년 제 27회 총회 결의가 있었고, 2년 내에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전원 추방되었고, 국내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윤산온 선교사(Dr. George S. McCune)를 비롯하여 평양시내에 있던 선교사와 목회자 27명 전원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신학 교육과 선교사역은 거의 중단사태에 이르렀다. 
“200여 교회가 폐쇄를 당하였으며, 2000여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옥에 갇히었고,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1942년에는 각 교파가 그 고유한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교회들은 차츰 사역을 중지하였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신앙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을 지켜내면서 ‘다른 복음’(갈 1:6)을 거부하고, 고생과 박해를 견디어 낸 암흑기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1943년 4월 전필순 목사를 의장으로 하는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이 일제의 조종으로 출범하였고, 유대민족에 관련된 부분을 먹칠하도록 하더니 나중에는 신약성경도 4복음서 외에는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와 안이숙 여사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자적 모델을 가장 순수한 성도의 모습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40년부터 김재준과 송창근 목사 등은 ‘조선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포용적인 신학노선에서 신학교를 세웠는데, 이들은 서양선교사들로부터 독립된 신학교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서양이나 일본이나 조선말기의 입장에서는 다 같은 외세였지만,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만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간단히 말하면 조선신학교를 주도한 인사들은 일본제국과 타협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는 1946년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으나, 1947년 신학생 51인의 항의서한이 총회에 제기되어서 신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신학위원회에 참여한 선교사들과 한국 장로교회 지도자들은 위인사, 옥호열, 권인함, 서고도, 박형룡, 김진홍, 심문태, 명신홍 목사였다. 위원회는 김재준 교수가 「새사람」11월호에 쓴 글을 조사한 뒤, 1년간 미국 유학을 결정하였다. 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혁을 시도하다가, 김재준 교수가 신학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자 남산에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양측은 한국동란 속에서 내면적인 대립을 계속하다가 성경무오설을 부인하는 김재준 목사에 대해 1953년 38차 총회에서 목사직 제명처분을 내렸다. 1954년 6월 캐나다 연합 장로교회의 지지 속에 ‘한국 기독교 장로회’로 분립해 나가게 되었다. 한국 전쟁의 고난 중에서 박형룡 박사를 주축으로 총회신학교를 세운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기독교장로회 총회에 비교해서 볼 때에,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해방 후 교회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 재건 운동방안과 신사참배자들의 해결을 놓고서 대립하였다. 결국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주축으로 1946년 9월 12일 한부선, 함일돈, 최이손, 마두원 선교사 등이 가세하여 박윤선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고려신학교의 문을 열었다.
그 해 12월 3일 경남노회 석상에서 고려신학교 출신을 목회자로 받지 않는다는 결의가 있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탈퇴하였다. 지금까지 고신 총회는 신앙전통 면에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라는 선명성과 순수성을 갖고 있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교회 분열과 분리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II.iv. W.C.C. 에큐메니즘과의 대립 
순교자들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게 된 한국장로교회는 교리적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의 에큐메니즘 신학사상을 놓고서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교회일치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낳았다. 한국 교회를 갈라놓은 연합운동은 허구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통성을 지켜온 대한 예수교 장로교단이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느냐를 놓고서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은 해방 후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모국 교회가 교회 일치운동을 하는 세계교회 협의회에 가입해 있었기에 한국교회 내부에서 그들을 따르는 측과 거부하는 측으로 나뉘게 되었다. 불과 소수의 보수적인 선교사들만 가입을 적극 반대하는 형편이었다.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한국 보수주의 장로교회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훼손시키는 신학사조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금일 세계 교회의 대세는 신학적 자유주의와 교회의 합동을 추진하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기울어지고 오직 소수의 복음주의 교회들과 신도들이 교회 본래의 전통신앙을 지키려 노력한다... 에큐메니칼 운동 동참파는 말하되, 순결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전연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니 견실하고 현실적인 복음주의자는 반드시 에큐메니칼 운동 동참자가 될 것이라 한다... 미국 교계에도 이와 유사한 분열이 복음주의자들 중에 생기니 소위 신복음주의란 운동으로 인한 것이다. 신복음주의 운동은 3거두, Harold John Ockenga, Carl Henry, Billy Graham의 지도 아래 사회복음을 주장하여 W.C.C.의 사회적 활동에 따르며 교회합동을 역설하여 W.C.C.와 로마교회에 아첨을 자행하면서 재래의 정통주의 복음주의는 교회의 사회적 의무에 등한하다느니, 교의문제로 교회를 분리하는 분리주의자들이라느니, 과학을 무시하는 몽매주의자들이라느니 하여 정통주의에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활동의 방식에서 W.C.C.를 따라가니... 그들은 성경을 과학에 맞도록 해석한다하여 진화론과 성경 고등비평에게 문을 열어주니 큰 일이다.
1959년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두로 인해서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되어 총신대학교와 장로회 신학대학교로 존립하게 된 것은 단순하게 총회장의 불법사회로 인한 것도 아니었고 국내 목회자들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노진현 목사는 분열의 상황을 증언으로 남기면서 증경총회장들의 권고에 따라서 임시 정회를 하였는데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총회를 거부하고 빠져나간 쪽이 통합측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날 총회분열의 배면에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정치적인 주도권 싸움도 작용하였다. 그동안 성장한 한국 장로교회는 외국 선교사들보다는 한국교수진이 많아지고, 자체적으로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신앙전통을 계승할 단계에 와 있었다. 한국 교회는 지역적으로 이북출신 목회자들이 오랫동안 총회장을 맡아왔고, 남쪽의 목회자들은 거의 주도그룹이 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남북 분단으로 가장 지도적인 목회자들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 교회에서 사역하는 분들이었다. 물론 이북출신들이 아직은 많았었다. 따라서 경기 노회의 주도권을 놓고서 격돌한 지도급 목회자들 사이에는 지역감정과 교권싸움의 성격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무오설과 자유주의 신학배척, 신사참배 거부와 주일성수의 순수한 전통, 혼합주의적인 교회일치 운동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 한국 장로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여 왔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여러 차례 신학논쟁으로 생겨난 장로교단들은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 내에서 합동측은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를 지켜 나왔다는 의미에서 법적인 연속성을 주장한다. 통합측은 한경직 목사와 강신명 목사 등은 세계 에큐메니칼과 교류하면서 세계적인 교단들과 선교사들을 배출한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들과 교류하고 있다는데서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다. 총신대와 장신대는 2001년에 똑같이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여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몇 차례 신학논쟁을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서 신학적인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신학적 정통성은 총회신학교가 지켜 나왔다. 김재준 교수는 한국 교회가 “정통주의 신학 일변도로 말미암아 허다한 비극을 연출하였다”고 보수주의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강원룡은 메첸을 따르는 “완고한 근본주의”라고 비판하였고, 이종성 교수는 한국의 정통 칼빈주의를 “신바리새주의”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다 한국에서 오로지 보수주의 신학만 강조하고 한가지 사상에만 집중한 것이 문제라고 비평하였다. 
II.v. 장로교회 정치원리의 왜곡과 교권주의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함에 있어서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요소는 과연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를 제대로 해석하고 소화하고 정착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부 한국 장로교단에서는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 선출시에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한국 장로교회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없다. 장로교회 정치론은 신학적 정체성의 일부로 취급하여야 하는바, 장로교회 정치제도 수립과 실제적인 적용이라는 분야는 교회론에서 수립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의 회의제도와 조직, 그리고 회의 운영은 개혁신학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담는 구체적 그릇이다. 그러나, 한국 정통신앙을 계승한 장로교회는 지난 120년 동안 점점 더 그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한국판 교권주의가 성행하게 되어져 버렸다. 장로교회 성도들 다수가 상처를 입었고, 정체성의 혼돈을 일으키고 있으며, 뚜렷한 대안과 방향도 없이 표류하고 있다. 
한국 세속정치가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한국 장로교회도 오랫동안 권위주의 시대의 흐름에 젖어있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조국의 경제 성장과 근대화의 성취과정 속에서 크게 외적으로 성장하였지만, 민주적인 교회정치를 구현하지 못한 채 내적인 변질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제 1세대는 해방 직전까지 청교도적인 경건생활의 전통을 가졌고, 이를 계승한 제 2세대는 노진현, 정규오, 이환수, 박찬목, 황금천, 김윤찬 목사 그리고 한경직 목사와 강신명, 강원룡 목사 등이 주도하였다. 제 3세대에서는 앞에서 보여지는 남북의 지역적인 대립구조에다가 남한 출신들간에 지방 연고주의가 함께 결부되어서 상승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장로교회의 정치제도가 명목만 남고, 그 내용은 한국의 권위주의 군사독재처럼 변질된 교권주의가 드러난 것은 1970년대 초반으로 제 3세대에 해당하는 목회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한국장로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외형적인 면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1980년에 이르러서 정치적인 민주화 열풍으로 ‘새로운 지도력’을 갈급해 하고 있었다. 1970년 초반 박형룡 박사가 총회신학대학에서 은퇴하고, 총회를 주도하는 새로운 제 3세대의 목회자들이 임원직과 신학교 이사회를 맡게 되었다. 
또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남한출신들 사이에서 지역적으로 심하게 대립하여서 총회의 임원직을 맡고있는 ‘주류’와 ‘비주류’로, 즉 ‘영남’ 대 ‘호남’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1978년 총회는 정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절충을 시도하였다. 서울에서 이환수, 박찬목, 황금천, 백동섭, 영남에서는 노진현, 이성헌, 김태운, 호남에서는 정규오, 최석홍, 김일남 목사를 세웠으나 목회자들에게서 교권싸움이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므로 교리논쟁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교권을 장악한 인사들이 교계 내의 화합과 발전을 지도하기보다는 총회신학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행한 사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총회신학교 교수들 중에서 신학사상이 의심스러운 분이 있다는 지적들이 계속해서 총회석상에서 제기 되었고, 교단을 좌우하는 정치적인 목사들과 관련을 맺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좋지 않은 선례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교권 싸움과 총신 재학생들의 문제제기로 인해서 1979년 9월 20일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총회는 전투경찰들의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이영수, 한석지, 최성원 목사를 중심으로하는 주류파들은 이미 오후 4시에 입장한 후 문을 닫아버렸다. “이날 밤 교회 안에는 대의원 370명, 회의 준비위원 180명, 등 700여명이 있었으며, 교회 밖에서는 비주류측 대의원, 신학생 등 방청객 500여명이 대치, 소란을 피워 3시간이 넘게 통행이 마비됐다. 총회는 이날 밤 7시 30분 쯤 대의원 370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에 한석지 목사, 부회장에 이영수 목사 등 집행부를 뽑고 밤 10시 30분쯤 해산했다.”
이탈자 권면 위원에는 한병기, 최동진, 최정복 목사가 선정되었다. 
이에 비하여, 비주류는 전라도 중심이었으니, 총회장에 김일남, 부총회장 백동섭, 서기 박병진, 부서기 이찬영, 회록서기 김규섭 등으로 11월 6일 서울 청암교회에서 “합동보수”라는 명칭으로 총회신학교의 회복과 복구를 주장하였다.
총회신학교 교장에 박아론, 재단이사장에 정규오, 총신 이사장에 이환수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 후로 합동보수 교단은 지난 20여년 동안에서 합신 총회와의 연합을 시도하다가 무산되는 등 교단의 위상 정립에 힘쓰고 있다. 
총회신학교에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를 망각한 교권주의자들의 전횡을 시정하려던 1979년과 1980년 9월까지의 노력은 신학교 이사회의 미온적인 대처로 인해서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교권주의를 새롭게 갱신하려던 장로교회 내부의 신앙적 순수성을 세워나가고자 박윤선 박사를 비롯한 5명의 교수들과 180여 명의 재학생들, 그리고 노진현 목사와 장경재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중도적 목회자들이 가담하여 합동신학대학원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그 출범 당시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개혁주의 신학의 철저한 확립을 위해서 노력하면서 그 순수성과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총회가 신학교를 직영하기 때문에 당연히 상위기관으로서 받들어야 한다는 식의 교권주의자들로 인해서 좌지우지되는 혼탁을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원은 장로회 총회와 ‘인준’관계로 출범하였다.
지금까지 지난 20년 동안 한국 초유의 신학교 체제를 시도해왔는데, 교수들이 교육의 주체자로서 중심에 서서 학사운영을 담당해 나가는 가장 모범적이며 안정된 신학교로 평가받고 있다. 신학교 위에 이사회, 이사회 위에 총회, 총회 위에 정치 목사들이 있어던 구조를 변혁시켰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세우는데 공헌한 박윤선 박사는 간단 명료하게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설명한 바 있다.
장로교 치리회는 소수보다 다수, 다수보다 진리(성경 말씀)에 입각한 것이다. 장로교는 진리 본위로 살 것을 주장하며 진리를 무상 명령으로 지킨다. 장로교는 진리를 얻기 위하여, 또는 진리를 보수하기 위하여 회의정치를 취한다. 
그리고 그 회의는 비록 다수의 결의일지라도 신자들은 그것을 추종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기독 신자는 진리에만 순종할 의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결단코 불복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그 양심의 자유이다. 이 ‘양심의 자유’는 생래적(生來的) 양심의 자유를 가리킴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려는 자유를 가리킨다. 합법적인 치리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를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다(히 13:17). 그러나 치리회가 실수할 수 있으니(행 4:5-11), 그 점에 있어서는 신자가 복종할 책임을 가지지 않는다. 성경 말씀을 위반하는 치리에 대하여는 순종치 아니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다.
장로교회의 교리적 정체성은 신앙고백서와 신학논쟁에서 드러났지만, 장로교회의 정치가 오염되어지는 가운데 정통 신앙은 현저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장로교회의 정통성은 진리에 순종하느냐의 여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적인 제도나 규모나 단체가 물려주는 것이 아니다. 한국 장로교회가 그 정통성을 성경으로 돌아가서 인정받지 않으면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통성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목회사역이 올바른 신학사상에 근거하고 좋은 열매를 통해서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최근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찾는 모임이 발족된 바 있다. 한국 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장효희 목사)는 2002년 6월 20일 ‘한국 장로교 정체성 회복운동위원회’ 주최로 세미나와 장로교신학회를 구성하고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공통분모를 찾아내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2002년 10월 19일 총신대학교에서 새로 ‘개혁신학회’ (회장: 김의원 총신대 총장)가 결성되어서 “현대주의 사조에 대항하여 한국 교회의 정통 개혁신학을 계승하고 보다 심도있게 개혁, 발전시키기 위하여... 창립한다.”고 밝히고 있다. 
2) W. Stanford Reid, ed., John Calvin: His Influence in the Western World (Grand Rapids: Zondervan, 1982), 33. 
3) Fred H. Klooster, "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 Calvin Theological Journal 14 (1979): 32-54. 
4) John T. McNeill, "The Church in Sixteenth-Century Reformed Theology," Journal of Religion 22 (1942): 251. "Ministers were content to serve churches without comprehending the church." 
5) Edmund P. Clowney, "Presbyterianism,"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eds., Sinclair B. Ferguson&David F. Wright (Downers Grove: IVP, 1988), 530-531. 
6) John Murray, “Office in the Church,"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7), 358-359. 
7)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Ford L.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IV.iii.2. 
8) Institutes, IV.iii.4,8. 
9) B. B. Warfield, "Calvinism," Selected Short Writings of B. B. Warfield, ed., John E. Meeter (Nutley: Presbyterian&Reformed, 1973), II:412. 
10) Reformed Witness Today: A Collection of Confessions and Statements of Faith Issued by Reformed Churches, ed. Lukas Vischer (World Alliance of Churches, 1982). Creeds of the Churches: A Reader in Christian Doctrine From the Bible to the Present, John Leith, ed.,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83). 위 책들 속에는 17세기 후반부터 나온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관한 문헌이 약 3백 페이지 이상 실려있다. 1934년 독일 Barmen Declaration과 미국에서 나온 ‘1967년 신앙고백서’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보수주의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자들은 비판적이다. 
11) 현대 개혁신학자들이 종교개혁시대의 신조를 연구하면서도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Jan Rohls, Reformed Confessions: Theology from Zurich to Barmen, tr. John Hoffmeyer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7), “Introduction by Jack L. Stotts," xiii-xxiii. 개혁교회의 핵심교리를 다섯 가지 (에큐메니칼 교회론, 인간중심의 기독론, 성경관, 사회윤리, 선교)로 제시한다. Cf. Donald K. McKim, ed., Major Themes in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2)에는 원죄와 전적부패를 주요 핵심주제로 다루지 않고 있다. 
12) ‘제네바 신앙고백서’(1536)에는 ‘하나님의 말씀’ ‘유일신 하나님’ ‘인간의 본성’ ‘예수 안에서의 구원’ ‘성령에 의한 중생’ ‘성찬과 세례’ ‘교회와 세속정권’ 등 모두21개 주제를 다룬다.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서울: 이레서원, 2001), 236. 돌트 신경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등다섯 주제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33항목을 다룬다. Richar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7), 277. Dr. Gordon H. Clark (1902-1985), What do Presbyterians believe?: The Westminster Confession, Yesterday and Toda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5). Dr. G. Aiken Taylor (1920-1984), "What Presbyterians Believe," the Presbyterian Journal, Weaverville, North Carolina. 
13) John Murray, "The Sovereignty of God: A Message to the World Today" (Philadelphia: Committee on Christian Education,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42), 1-32. idem,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of God (Grand Rapids: Baker, 1960). James M. Boyce, American Calvinistic Conference, ed., Sovereignty of God (Grand Rapids: Zondervan, 1940), 216. 
14) Institutes, II.i.9. 
15) Institutes, II.xiii.4. F. Wendel, Calvin: the Origin of His Religious Thought, tr. Philip Mairet (New York: Harper and Row, 1963), 224. 김재성 역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Heiko A. Oberman, "the 'Extra' Dimension in the Theology of Calvin," The 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21 (1970):43-64. Rohls, "Christology and the Calvinist 'Extra' (Extra Calvinisticum)", 102-117. 
16) The Cannons of Dort, "the first head of doctrine divine election and reprobation," in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Synond of Dort (1618-'19), ed. Peter Y. De Jong (Grand Rapids: Reformed Fellowship, 1968), 230-239. 
17) Institutes, III.xx.1. 칼빈은 1551년 제롬 볼섹과의 논쟁에서 Congrégation sur l'élection éternelle를 발표했고, 1552년 로마 가톨릭 Pighius에 대한 논박에서 Eternal Predestination을 저술했다. Opera Calvini, 8:85-138; 249-366. 
18) Eric J. Alexander, "The Application of Redemption," in To Glorify and Enjoy God: A Commemoration of the Westminster Assembly, John L. Carson&David W. Hall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4), 240. 
19) Institutes, IV.i.2-4. Alasdair Heron, "The Relevance of the Early Reformed Tradition, Particularly of Calvin, for a Contemporary Ecumenical Ecclesiology," in The Church in Reformed Perspective, ed. Lucas Vischer, John Knox Series 13 (Gevena; 2002):47-74 
20) Institutes, IV.xiv.17. 
21) Richard C.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An Exercise in Biblical-Systematic Theology" in A Confessing Theology for Postmodern Times, ed. Michael S. Horton (Wheaton: Crossway Books, 2000), 229-249. 
22) A.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rdmans, 1931), 33.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4. Studies in Theology (Banner of Truth, Edinburgh, 1982), 241-263. I.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 (Ann Arbor: Servant Books, 1983); John Bolt, Christian and Reformed Today (Ontario: Paideia Press, 1984), 20. 
23) Annual Report of the Korean Mission of the U.S.A. Presbyterian Church, 1920. 
24) 간하배, “해방 후 한국 장로교 보수신학,” 신학지남 170 (1975년 가을호): 49. 
25) Robert Lewis Dabney (1820-1898), Systematic Theology (1871;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5). 모두 74장으로 체제와 내용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거의 같다. cf. Thomas Cary Johnson, The Life and Letters of Robert Lewis Dabney (Richmond: 1903). Frank Bell Lewis, "Robert Lewis Dabney: Southern Presbyterian Apologist," (Ph.D. dissertation, Duke University, 1946). Morton Smith, Studies in Southern Presbyterian Theolog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62): 183-216. 
26) A. 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Scribners: 1919), 540. 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5-6에서 재인용. 
27) 박형룡, “韓國 長老敎會의 神學的 傳統,” 神學指南 174 (1976, 가을): 11. 
28) 박형룡, “神學指南의 韓國 神學史的 의의,” 神學指南 171 (1975, 겨울호) 27: “현재 교수 강사 여러분은 좀더 힘써 집필하여 본지의 내용 충실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본지의 신학적 입장이 본래 청교도적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여 그것의 회복에 힘을 모으기를 바란다.” 
29)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편,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5), 24. 
30) 한국인들의 정통성 인식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난다. 해방 후 오늘까지 ‘정통야당’을 내세우는 인사들이 정권담당자들 보다도 이념적 정당성을 인정받았었다. 일제하 독립투사들의 계보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야당은 타협보다는 선명성을 주장하여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런 기준에 맞지 않으면 한국인들은 심정적으로 거부하였다. 민주운동 시대에 고난 당했던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어용교수’ ‘반체제 인사’ ‘양심적인 데모’ 등이 사라졌다. 
31) William K. Breitenbach, "The Consistent Calvinism of the New Divinity Movement," William and Mary Quarterly 41 (1984): 241-64. L. Tinterud, The Forming of an American Tradition: A Re-examination of Colonial Presbyterianism (1949). 
32) Edwin H. Rian. The Presbyterian Conflict (Grand Rapids: Eerdmans, 1940), 23. C. Gregg Singer,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American History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4), 66. Elwyn A. Smith, The Presbyterian Ministry in American Culture (Philadelphia: Westminster, 1962), 264. George Marsden, Evangelical Mind and New School Presbyterian Experie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33) Mark A. Noll, "The Spirit of Old Princeton and the Spirit of OPC," in Pressing Toward Mark: Essays Commemorating Fifty Years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eds., Charles G. Dennison&Richard C. Gamble (Philadelphia: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86), 235-246. 
34) Charles A. Briggs, The Higer Criticism of Hexateuch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93); Bible Study: Its Principles, Method and History (New York: Scribner's Son's, 1883); American Presbyterianism (New York: Scribner's Sons, 1885); Messianic Prophecy (1886); Whither? A Theological Question for the Times (1889). Lefferts A. Loetscher, The Broadening Church: A Study of Theological Issues in the Presbyterian Church since 1869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54), 33. "C. A. Briggs in the Retrospect of Half a Century," Theology Today 12 (1955): 37. 
35)Archibald A. Hodge and Benjamin B. Warfield, Inspiration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81). 
36) W. Rauschenbusch,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New York, Abingdon Press, 1945);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New York : Macmillan, 1912);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08, c1907); The social principles of Jesus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16). cf., C. H. Hopkins, The Rise of the Social Gospel in American Protestantism, 1865-1915 (New Haven, Yale Universiy Press; London, H. Mil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0). 
37) Charles Evan Quirk, "The Auburn Affirmation: A Critical Narrative of the Document Designed to Safeguard the Unity and Libert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1924" (T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Iowa, 1967). idem, "Origins of the Auburn Affirmation," Journal of Presbyterian History 53 (1975):120-142. Edwin H. Rian, The Presbyterian Conflict (Grand Rapids: Eerdmans, 1940), 17. 
38)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sm 1870-1925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120. 
39) Bradley J. Longfield, The Presbyterian Controversy: fundamentalists, modernists, and moderates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40) D. Clair Davis, "Machen and Liberalism," in Pressing Toward Mark: Essays Commemorating Fifty Years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247-258. 
41) 미국 Westminster 신학대학원 교수진은 지금까지 모두 세 권의 성경무오설에 관한 논문집을 출판하여 줄기차게 개혁주의 성경관에 관한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다. Members of Westminster Faculty, The Infallible Word: A Symposium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1946); Ed. John H. Skilton, Scripture and Confession: A Book About Confession Old and New (Phillipsburgh: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3); Ed. Harvie M. Conn, Inerrancy and Hermeneutic: A Tradition, A Challenge, A Debate (Grand Rapids: Baker, 1988). 
42) 민경배는 오히려 메첸파 보수주의자 박형룡의 근본주의 신학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백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84), 496쪽. 
43) Allen D. C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한국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3), 186. 
44) 郭安全, 「韓國敎會史」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3), 192. 
45) 김린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신앙생활사, 1958), 8: 손양원 목사의 서문, “... 언젠가 많은 청중에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백년 후에는 다 죽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죽은 사람이 누구인가?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가 복이 있으리라,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고 하신 예언을 이제 생각하건대 이는 당신의 결심이었고 또한 실천이었습니다. 내 몸 역시 수금중에서 목사님 순교의 소식을 듣고 울었습니다. 아! 갸륵하구나 우리 주목사님의 죽음! 과연 예수의 제단에 드린 제물이오 대한교회의 면류관입니다.“ 
46) 김재준, “한국 신학대학 25주년 회고,” 「신학연구」제 9집 (한국신학대학 신학회, 1965).민경배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조선신학교를 세워 일제와 타협했다는 Conn 교수의 해석을 부정한다. 「한국 기독교회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2), 359-362. 이 학교가 “선교사들의 통제와 간섭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신학교”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양선 교수는 민경배의 민족주의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 1956), 192: “자유주의 신학 내지 일제의 강압에 따르는 일종의 변질된 신학사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29 (1967): 137-178. 
47)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서울: 영문, 1996), 40. 
48) 김영재, 「한국교회사」(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249-253. 
49) 박형룡,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 「신학지남」제25권 1집 (1958) : 11-22; 박형룡,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21. 
50) 민경배 교수는 이를 “총회장 노진현이 개의를 묻지 않고 불법 사회”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라고 해석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백년사」, 555.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66-67, 388. 
51) 노진현, 「진실과 증언」(서울: 도서출판 하나, 1995), 4, 머리말: “지금 민경배 교수가 쓴 한국기독교교회사가 각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그 당시 분열사를 언급한 부분은 도무지 근거가 희박하다... 역사는 창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민경배 교수의 글은 창작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그 역사의 현장에서 총회장으로 분열의 쓰라린 고통을 온몸으로 부딪혀온 내가 아직도 엄연히 살아있는데, 나에게는 한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교회사를 쓸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 당시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다.” 
52) 김재준, “혁신과 통합의 출발점,” 기독교사상 1964년 5월호, 34. 
53) 노진현, 「진실과 증언」73. 
54) 대구 매일신문, 1979년 9월 22일자. 
55) 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 下」(한국복음문서 협회, 1983), 182. 
56)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64회 총회회의록,” 18쪽. 
57) “개교 20주년 기념선언서,”「합동신학대학원20년사」, 263-266. 
58)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교들,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Biblical Theological Seminary, Greenville Presbyterian Seminary 등이 장로교회 목회자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교단과는 인준관계에 있다. 
59) 박윤선, 「개혁파 교리학」(서울: 영음사, 2002), 제 6편, 교회론에서, “개혁주의 교회 정치 원리의 역사적 유래와 이에 대한 평가”를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