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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과제(2)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과제(2)
김재성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II.vi. 한국 장로교단들의 정체성 
앞에서 역사적으로 검토해본 바에 따라서 현재 한국에 있는 여러 장로교단들의 차이점에 대해서 진단하여 보고, 신학적인 차별성과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1-5번까지의 그룹은 공통적으로 경건주의적이며, 칼빈주의적인 여러 신앙고백서에서 강한 신학적 영향을 받았고 철저한 기도생활과 성경무오설에 입각한 말씀연구, 강해설교,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 희생적인 목회자상의 정립 등 면에서 상호 공통적인 측면이 많다. 칼빈주의 기본 신앙을 추구하는 면에서 공통분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있다. 이것은 특정 교단에만 국한되는 특징은 아니다.
1. 분리적인 근본주의
선명한 정통 칼빈주의 정신을 주창하면서 일반문화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소 분리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재건파, 순장로교, 총공회, 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반고소파 고려측과 고려신학원(사직동), 백영희 목사측, 독립개혁교단(김홍전 박사) 등이다. 자기 교단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작은 차이점을 크게 보고, 장로교단의 연대에 소극적인 기질을 가진 그룹은 어느 교단 내에나 존재한다. 
2. 경건주의적 신앙고백주의
청교도적인 경건한 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제시된 칼빈주의를 지향하면서,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이 끼친 영향 하에서 “엄격한 칼빈주의”를 지켜온 합동측 일부, 박윤선 박사의 주경신학과 인격적 감화를 입은 고신측 일부와 합동신학대학원 등이 이 그룹에 속한다. 경건생활을 강조하면서 성화와 회심을 강조하는 경향은 한국교회에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수 많은 장로교회의 군소교단들과 다른 교파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장로교회의 흐름이다. 
3. 교세 확장적인 부흥주의
교회의 양적인 성장과 부흥운동을 위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1만 교회 운동’이라는 확장정책을 지속해 온 합동측 교단에서는 그에 상응하도록 지방 신학교를 육성했고, 급기야 매년 9백 여명에서 1천 여명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하도록 총신대 신대원의 확장정책을 폈다. 그런가하면, 소위 ‘통신신학과정’을 도입하는 등 신학교의 양적 확대주의라는 정책을 통해서 급속하게 성장한 방배동 기독신학대학원과 합동 정통측이 신학 교육의 전통을 혁신(?) 시켰다. 양 교단 이외에도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수 많은 군소 교단들과 신학교들도 ‘총신’이라는 미명 하에 ‘교세 확장주의’를 지향하여 오고 있는바, 이런 성장정책은 ‘복음주의’에서 영향을 입게 되므로서, 장로교회 뿌리를 상실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 ‘부흥운동’(revivalism)은 요나단 에드워드와 죠지 휫필드의 영향에서 비롯되었고, 최근에는 마틴 로이드 죤스의 주도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와 무디의 부흥운동, 1974년 한국에 상륙하여 큰 영향을 미친 빌리 그래함의 전도운동과 같은 세 부류의 부흥운동은 ‘알미니안적인 신복음주의’라고 하는 신학적 기초를 배경으로 삼고 있고, 장로교단이나 개혁교회 진영이 지켜온 교리적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물론 세계선교를 위하여 초교파적인 강조점을 갖고 있으나, 장로교회와는 신학적으로 다른 요소들이 많았다. 체험을 강조하지만 반율법주의, 반지성주의, 감정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 상실은 부흥지상주의 확장운동을 도입하므로서 초래된 신학적인 혼돈에 기인하고 있는 바 크다.
4. 지역주의에 근거한 교단 정통주의
선명하고 순수한 장로교회의 정통신앙을 주장해온 지도자들의 강력한 정치적 리더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교단 형성의 동기와 발전과정에서는 특정 지역주의가 다른 요소들보다 더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는 고신측과 개혁측이 이에 속한다. 이들 양 교단에서 과감하게 지역주의를 떨쳐 버리려는 노력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노력하지 않는 한, 동서로 갈라져서 형성된 이들 교단들이 비록 건전한 신앙고백적 칼빈주의 장로교단들이라 하더라도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5. 세대주의적 보수주의
한국 장로교단은 압도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보수주의적인 신학을 펼치고 있지만, 세대주의자들은 문화적 보수주의 경향을 띄면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치중하였다. 김세창 박사와 대신측, 일부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최근에는 영향이 매우 줄어들었지만, 1960년대까지는 부흥사경회 강사들을 중심으로 한국 장로교인들의 의식구조 속에 세대주의적인 성경해석은 크나큰 영향을 미친 바 있으며, 문자주의 해석에 입각한 종말론으로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6. 신정통주의적 절충주의
세계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교단 태생의 기치로 내걸은 바 있으며,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주도한 ‘1967년 신앙고백’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고, 역시 칼 바르트의 신정통 신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통합측과 장신대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7. 토착적인 문화주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반정통주의적인 성경 비평학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토착화된 민중신학과 현실정치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문화적 신학의 경향이 현저한 한신대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의 입장이다. 
그 밖에 수많은 장로교단들은 특별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양한 사조에 흔들리고 있으며, 신학적 정체성이나 교단 창립의 정통성면에서 혼란스러운 장로교회들이 많다. 
III. 현대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 상실위기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 속에서 여러 종류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각각 교단마다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야기된 논쟁에 관한 고찰로부터 얻은 결론은 서구의 장로교회가 자유주의 신학과의 대립으로 야기된 진통을 겪으면서, 우리 한국 장로교회의 첫 세대와 제 2세대까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었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초기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이 남겨준 청교도적 정통 신앙을 핵심으로 삼고 따라가고자 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제 3세대는 현저히 변질되어서 앞선 세대가 남겨준 정체성의 상실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라고하면 기독교의 정통교단으로 인정을 받던 신용도(?)가 현저히 추락하여 버렸다. 이제는 장로교회라고 해도 불신을 당하고 있으며, 다른 교파와 전혀 차이점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체성의 상실 위기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 1:9)는 말씀의 교훈처럼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나 교회사에서나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 3세대의 타락과 방종이다. 족장들의 찬란한 시대가 지나고 난 뒤, 모세와 여호수의 위대한 지도력이 쇠퇴하고 난 뒤, 다윗과 솔로몬의 황금시대가 지나고 난 후,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초기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난 후, 뉴잉글랜드 퓨리탄들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난 후, 훌륭한 업적이 꽃피우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그 전통와 역사를 허물어버리는 쇠퇴기와 침체기가 있었다. 필자는 바로 지금이 한국 장로교회가 성장기와 융성기를 지나지 않았나 하는 조심스러운 진단을 하게 된다.
앞에서 일곱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본 한국 장로교회는 각각의 그룹마다 정통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의 맥락을 잃어버릴만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정통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거세고, 세속화의 물결이 더욱 극심하게 몰려와서 한국 장로교회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과 성경중심의 철저한 보수신학은 많은 도전을 받았다.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노력하여 왔으나, 사회적 영향력과 감화력이 현저히 감소하여 갔다. 목사와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별로 좋지 않다는 보고서를 접하게 된다.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다음의 몇 가지 현상과 문제점 때문이다. 
Ⅲ.ⅰ. 교단간 대립과 우월의식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한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싸우는 가운데 몇 차례 크나큰 분열을 체험하면서 잘못된 체질이 내성화 되었다. 서로서로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므로서 교단간의 대립이 확산되고, 자기 교파 우월의식에 도취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밖으로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1959년 장로교회가 분열한 뒤로 선명성과 도덕적 명분을 내세우던 보수주의 교단들이 연이어 세포분열을 하게 되면서, 교회의 신뢰도는 현저히 손상되었다. 1970, 1980년대에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자 선출 모임은 통합측 인사들과 합동측 인사들의 대결장이었다. 마치 남한과 북한의 대립에 버금가는 정도였었다. 합동측과 통합측은 서로 ‘장자교단’이라느니, ‘최대교단’이라고 주장하면서 보이지 않게 우월의식을 드러내었다. 고신측은 ‘순교정신 계승’이라는 차별성을 부각시켜나갈 뿐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에서 주도적인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난 1980년대 초반 합동신학대학원과 개혁신학원이 각각 설립된 이후 한국에서 정통성을 자랑하던 장로교회는 더욱 더 싸늘한 경쟁관계에 접어들었고, 교단만이 아니라 신학교 사이에도 더욱 더 냉랭한 대립과 경쟁의식만 남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일부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고 하면서, ‘한국 장로교 총 연합회’에 소속한 21개 회원교단들이 신학적인 정체성을 잠정한 채 과시성 행사에만 치중하는 듯하여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우려를 갖게 한다.
지금 한국 교계는 과거처럼 어느 특정한 지도력을 가진 몇 몇 인사가 장기간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따라서 새로운 지도력의 창출이 요청되고 있으며 상호 연대와 연합을 통한 장로교회의 결속력을 증가시켜야 하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일을 성사시킬 만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너무나 관료제도를 닮아서 임기제 총회장을 지내고 나면, 제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직무가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강변하면서도 야고보와 요한과 게바와 바나바와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는 과정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물론 그도 때로는 게바를 책망도 하였고, 때로는 바나바와 의견차이를 드러낼 때도 있었다(갈 2:9). 종교개혁시대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결국 다양한 교단으로 나뉘어질 것을 예측하고 알았다. 그러나 모두 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한 방향의 운동을 하고 있다는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다. 칼빈은 당대에 루터를 가장 존경하였으며, 스위스 여러 대표들과도 연대의식을 자주 표명한 바 있다.
장로교회가 더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소아병적인 ‘엘리트의식’(elitism)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지는 일이며, 건전한 다른 교단과 형제우애와 연대를 강화하는 일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이름 하에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한 교단들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고백하는 여러 개혁주의 신학 교육기관들의 연대는 더욱 강화해야만 한다. 합동신학대학원을 비롯하여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 한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개혁신학연구원, 천안대학교와 기독신학대학원, 대한신학대학원, 대신대학교(대구), 국제신학대학원, 광신대학교, 칼빈대학교 등 장로교회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육기관들과 연구소, 그리고 교회들 연결하는 협조네트워크를 강구해야 한다. 물론 이들 학교에 모든 교수진이 칼빈주의 신학에 정확하게 입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나, 대체로 서로 협력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건전한 학교들이므로 교수진과 학생들의 격의 없는 교류를 적극 권장하고 연합 네트워크를 주도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Ⅲ.ⅱ. 신학과 경건의 분리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경향이 존재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여, 한쪽에서는 ‘교리와 신학을 중시하는 그룹’(the Dotrinal Party)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감정과 체험중심 그룹’(the Experience Party)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그룹은 각각 선호에 따라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교리적 그룹’은 지속적으로 신학적인 원리와 학자적인 지식주의 전통을 고집하려한다. 성경무오성에 관한 논쟁, 칭의론에 대한 강조, 불신자에 대한 영원한 심판, 삼위일체론과 예정론을 보다 철저히 주장한다. 신앙의 활력을 위해서 존재하는 신학 이론을 가지고 자신들의 지적인 만족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어지고, 몇 사람의 중심으로 쌓아올린 전통을 선호하여 지속적으로 학습 중심으로 기울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 내에서 교리적 그룹은 가장 성경적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다른 교파보다 훨씬 더 정통성을 유지해 왔다는 명분과 전통을 강조를 하고 있다. 더구나, 다른 교파의 신학과 신앙수준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시하는 경향마저 갖고 있다.
‘교리적 그룹’을 대표하는 신학교 교수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회현장에서 괴리된 상아탑 속에서만 갇혀 있기 때문에, 교회의 절실한 필요에 효과적인 대처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전도에 능하고 복음을 설파하는데 익숙한 전파자 보다는 신학 강사를 양산해 내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신학자들의 논쟁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너무 개념적이요, 너무 작은 하나님이다.
그런가 하면 ‘경험중시 그룹’은 신학적인 질문을 경시하고, 교리논쟁이란 죽은 정통에서 하는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신비적인 체험, 은사체험, 세상적 축복개념 등에 대해서 무분별하게 혼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때로는 신학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분명한 기준이나 명확한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교회 내에서 술과 담배, 결혼전 성생활, 낙태 등에 대해서는 전혀 침묵하며, 오히려 다양화하고 복잡하게 흐르고 있는 현대적 세속화는 허용하고 관용하려 한다. 말씀으로부터 오는 감화감동 보다는 기도나 전도현장의 체험과 경험을 강조하고 그러한 확신이 “주관주의”에 빠져버린 것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신앙생활의 최종 권위와 기준은 성경이라는 점을 역시 잊어버리고 있다.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신학체계(Divinity)와 인격적인 경건 생활(Piety)은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축복을 풀이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는 실천이 없는 교리와 신학은 사유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생명력이 없는 이론적 신학이란 신학의 이름을 빙자한 사유에 불과한 것이다. 혹자는 칼빈주의 혹은 개혁신학은 이론중심이라고 비판한다. 이것도 역시 편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론적 체계화에 기여한 신학자들이 체계적인 신학을 형성하고자 노력하면서 ‘교리문답식’, ‘교의학적인’, ‘학교에서 교육하는’ 방법론, 즉 ‘개혁파 스콜라주의’라는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핍박과 연이은 계몽주의 여파로 인해서 그들의 시대에 필요했던 해답을 제시한 것이지, 실천이 필요 없어서 그러한 ‘이론적’ 신학의 체계화 작업에 골몰했던 것은 아니다.
‘학문’과 ‘경건’은 장로교회가 계승하여온 보화와 같다.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머리로 그려내고 있는 신학은 실천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살아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슴으로 경배하지 않는 교과서적인 신학은 메마르고 경직된 논리 싸움으로 빠지게 된다.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뒷받침되어야 그 신학사상을 공부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라는 윤리적 귀결은 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의 신학은 “데올로기아 피에따띠스”(theologia pietatis)로서, 믿음과 삶, 교리와 윤리가 통합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영향이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은 메마른 교리주의자가 아니라 실천적 성격과 목회적 동기가 함께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과 실천적인 체험이 함께 강조되는 것은 성령의 증거사역이라는 초월적 능력에 대한 신뢰와 의존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가슴 속에서 증거하는 것들은 지울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 신자들이 어떤 미신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성도들이 체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호소하면서, “체험”(experientia)은 언어로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체험”(experientia)은 확신과 인식과 감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호한 추론이나 이성적인 회의(speculation)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있는 체험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한 바와 똑같이, 체험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을 믿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장로교단에 속한 신학교육 기관에는 지식이 풍부한 박사들이 넘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곳곳에는 수많은 장로교회들이 세워져 있다. 이 두 진영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다. 목회자들은 정통신학에 대한 갈급함이 없고 자신의 설교와 목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싫어한다. 신학자들은 실천 목회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헌신도 결여되어 있으며,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과 목회의 결합은 요원하게 되고 말았다.
신학과 경건이 결합되지 못하는데서 가치 판단의 혼란이 발생한다. 경건의 실천보다는 어떤 특정한 사조나 어떤 특정한 목회형태를 답습하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고, 한계가 있다. 목회자나 지도급 성도들이 자신의 삶으로 내면화하지 못한 것을 현장의 프로그램으로만 채택하는 것은 매우 이중적인 괴리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한편의 교회들에서는 엘리트 성도양성을 위하여 제자화 목회, 셀목회, 다락방 성경공부,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가미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부흥회와 신유집회, 체험적인 금식기도회, 기도원 운동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주의자로서 만족하는 신앙인들을 양산해서는 안되고, 반대로 체험주의자로 기울게 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지성주의를 중시하면 엘리트주의에 사로 잡히고, 경건주의가 강조되면 주관주의로 흘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제 3세대 후반기의 한국 장로교회는 보다 깊은 말씀 연구를 통해서 이 양면을 종합하는 개혁신학의 총체적 유산을 더욱 연구하여 활용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과거의 어느 특정한 역사 속에 머물러 있거나 과거의 어느 한 시대로만 귀속하려 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은 시대마다 다양한 상황에서 출범하는 광범위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온 열린 신학이요, 지속적으로 형성-발전되어 온 신학이다.”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의 폭과 범위를 자신이 경험하고 선호하는 바에 따라서 좁은 안목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확장해야 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 프랑스, 스위스, 독일, 네델란드,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살펴 보야야 한다. 
한국과는 달리, 서구 유럽의 신학사에는 기독론 논쟁이 가장 오랫동안 거세게 일어났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무지하지 않기 위해서 신학의 연마가 필요하다. 또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창출한 훌륭한 개혁주의 신앙의 활력과 힘을 모두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에 수용할 때에, 오늘에 우리가 해답을 제시해야할 많은 문제에 대해서 다양하고 풍성한 유산을 활용하여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교육 기관들이 철저하게 훈련된 목회 후보생만을 배출해야 하는데, 이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보다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철저히 갱신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신학을 경시하는 목회자들 역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신학지식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학대학원 3년 동안에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자로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는데, 커리큘럼(이론과목 이수)에 따르느라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헌신이 투철하고 신학적인 안목을 가진 일군으로 일생동안 연구하고 노력해야만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Ⅲ.ⅲ. 성경에서 이탈한 설교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마 7:15)고 하셨고, 사도 요한은 모든 영들을 믿지 말고 이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는 가르침들이 정말로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검사해 볼 것을 주의시켰다(요일 4:1).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가 제일 먼저 회복해야할 정체성은 복음의 본질에 합당한 말씀선포라고 생각한다. 이단적인 가르침을 그냥 묵과하게 하고 적당하게 타협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에 대한 무지함에서 온다. 신학과 생활이 분리될 수 없듯이, 신학과 말씀선포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장로교회가 선포해온 기본적인 진리를 포기해버리면, 그토록 말씀에 충실해 왔던 정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바른 신학 사상이 없는 교회는 바른 윤리적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설교자들이 성경해석에 대한 확고한 소견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구속-역사적 성경해석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현실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성경 해석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대한 무지함과 영어의 장벽을 넘지 못하게 때문에 한계상황에 부딪히는 것이다.
신학의 빈곤에서 설교의 변질이 왔다. 신학을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은 초교파주의라느니, 범교단적인 선교운동이라느니, 편협하지 않은 열린 사고 등의 명분을 주기도 했다. 본디 신학연구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제도권에서 학위과정을 밟지 않는 경우에는 손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목회현장에서 큰 유익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해방 직후로 한국 장로교회에서 신학적인 통제가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과 싸워왔고, 헛된 복음주의에 대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었다. 그런데 서서히 신학사조가 변질되면서 ‘정체성’에 대한 연구보다는 ‘활용성’에 대한 관심만 높아갔다. 
또 하나 한국 장로교회의 통탄할 비극은 무인가 신학교육의 피해를 예상치 못하고 대량생산에 급급했다는 점이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고속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모든 분야가 부실하였지만, 신학교육을 책임진 신학교들도 부실을 면치 못하였다. 일제하에서나, 초기 196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비록 소수이지만, 우수한 신학교육을 받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한국 사회의 지식인 그룹을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일반 성도들의 교육수준이 매우 낮았으므로, 서울에서 신학교에 다닌 분들이라면 전국 어디에서나 최신의 학식과 지식을 겸비한 지역사회 지도자였었다. 
그러나 지난 30년 사이에 세상 대학교육은 보편화되고, 많은 기관들이 새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신학교육은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신학을 전공한다는 말을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신뢰성을 상실했다. 신학이 중세 최고의 학문이던 시대를 꿈꾸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신학수업은 아무 교회에서나 간판을 내걸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최고의 학문이던 신학은 이제 한국 땅에서는 무시를 당하게 되어 버렸다. 세상 학문에 뒤쳐진 사람들이나 하는 저급한 교육과정으로 전락해 버렸다. 1970년대 교육의 대중화에 편승해서 정규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무인가 신학교와 지방 신학교를 거쳐서 대량생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목격하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신학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야만 성경의 가르침대로 영혼을 지도하고 모범적인 생활의 본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장로교회의 설교에 반영되어야할 개혁신학은 부실교육의 여파로 인해서 현저하게 왜곡되고 말았다.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텔레비젼 설교자들이 대중의 인기를 무기로 하여 이단적인 거짓 교훈들로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음을 개탄하는 실정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미국의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강단에서도 미국식 전도설교자들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가장 선호하는 목회자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대중 설교자들은 화려한 제스춰와 호소력 있는 목소리,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다양한 예화를 구사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는 설교들이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개최되는 수많은 부흥집회와 사경회에서는 어떤 강사를 모셔오고 있으며, 장로교회 목회자들이 나가서 선포되는 메시지들은 과연 어떤 성경해석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가? 과연 앞에서 지적한 장로교회의 신학적 강조점들이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온전히 돌리도록 지도하고 있는가? 설교를 듣는 장로교회 성도들은 어떤 설교를 더 좋아하는가? 물질주의적이며, 성공과 숫자에 집착하는 부흥지상주의이며, 권세에 굶주려 있고, 특권 지향주의는 아닌가? 
지금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고 있는 중국교회가 지도자들의 부족으로 인해서 윤리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의 비복음적인 설교가 그대로 건너가서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는 한국을 넘어서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리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혼돈된 길로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가장 기초적인 신앙마저 왜곡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의 구원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칭의론은 루터의 표현처럼 교회가 “서느냐 무너지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교리이다. 이 교리는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요체”이지만,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는 그저 지나가 버린 교회사의 이야기에 불과하게 되었다. 가장 기초적이요 핵심적인 교리이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율법을 넘어서 은혜의 영성’을 주장하는 설교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과 은혜의 신앙”을 임의로 나누어 놓고,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정죄하고 결코 만족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돕지도 못한다고 한다. 율법적인 신앙이란 결국 죄에 대해 헛되게 싸우고 고생하는 것, 의로움을 얻기 위해 헛되게 싸우고 고생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한다. 반면, 은혜란 다른 그 무슨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삶의 방법과 체계를 뜻한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은혜의 신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은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며,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우리에게 의로움을 선물로 준다고 한다.
개혁신학의 무지함으로 인해서 ‘율법의 제 3용법’을 모르는 목사들이 ‘값싼 은혜’와 ‘모호한 영성’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복음 안에서 수용되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 일서 5:2-3). 
장로교회 신학의 특징은 당대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학자들이 제시한 위대한 사상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자들과 후기 청교도 운동의 기수들은 모두다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다. 칼빈, 베자, 퍼킨스, 에임즈, 존 오웬, 에드워드, 핫지, 워필드, 바빙크, 보스, 반틸 등은 당대 가장 탁월한 학자들로서 자신들의 시대에 맞는 신학체계의 개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최고의 수준 높은 신학교육에 생명을 걸다시피 했었다. 그들은 기드온의 3백명과 같이 하나님이 뽑으신 사람들로서,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기 위해서 훈련받은 종들이었다. 
신학적 안목을 기르게 하고 이를 설교에 적용하는 능력을 겸비하게 하는 것은 단순하게 수업연한을 길게 하거나, 정부 교육당국이 제시하는 대학원과정으로 편성해야만 가능 한 것은 아니다. 신학대학원 수업만으로는 개혁주의 목사상을 세우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높아져 가는 세상 지식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교육을 받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는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면 자체 정화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4. 예배와 목회의 혼돈들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의 위기는 외부적으로는 세속화로 인해서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시련에 직면해 있다.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주의에 영합하면서 혼합주의, 절충주의, 포괄주의, 적당주의, 타협주의, 포용주의 등 여러 가지 인위적인 행사들과 인기위주의 모임들이 너무 많이 성행하고 있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줄이자면, 하나님의 위치를 사람이 대신해서 차지해 버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 복음주의 교계에서도 동일하게 지적된 바 있다. “사람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시켜 버리는 현상”을 불러오게 하였다.
결국 예배가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 좋고, 사람의 귀에 들리기에 좋은 인본주의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homo adorans)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예배의 초점이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로 바뀌어져 버렸다. 물론 시대에 적응성을 가진 새로운 예배에로의 갱신은 귀한 것이다. 하지만, 심령의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드리고 헌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중심은 성령의 감화를 입고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준비되고 끝나야 한다. 그 어느 누구라도 인간의 영화가 드러나서는 안된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모든 예배 순서와 내용을 타협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예배의 사회자인 목회자의 기호에 따라서 변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예배의 주인이 아니다.
주일 정규 예배는 ‘보통예배’라고 생각하여서 규칙적이요,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돌아가는 경향이 늘고 있다. 어느 사이에 한국교회의 예배문화는 매우 변질되어 버렸고, 열심있는 성도들은 ‘특별예배’를 선호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참석하는 보통예배보다는 일부가 참석하는 특별부흥회와 며칠간의 특별새벽기도회, 몇 주간 특별연속집회, 특별히 고난절기에만 따로 강조되는 금식기도회라든지, 성탄절에만 강조되는 자선집회라든지, 교회창립 기념 특별집회라든지, 철야기도회와 특별 심야집회가 더욱 선호되는 모임으로 바뀌어 버렸다. 많은 감리교회에서는 웨슬레 회심주간에 그를 기념하는 집회를 열고 있는데, 이런 웨슬레안주의가 급속하게 장로교회에도 확산된 것이라고 본다. 더구나 세속화의 물결은 교회 안에도 파급되어서,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마저도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량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예배의 순서나 설교의 초점은 얄팍한 기복신앙과 물질주의, 신비주의와 은사 등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적응성(relevance)을 중시하면, 신학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의 양적 부흥을 위하여 인간적인 관심사항들에 치중하다 보면, 교회의 외적상황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만다. 1970대로부터 지난 30년 동안 한국 장로교회의 일부 교파에서는 교리적인 순수성과 신앙의 원리를 철저히 준행 하려는 노력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숫자를 늘이는 부흥 지상주의로 장로교회의 교회론을 변질시켰다. 교회는 구원역사의 사명에 입각해야만 그 정체성을 갖게되는 기관이다.
교회는 구제와 자선을 하고 있지만, 사업을 하는 기관이 아니기에, 유아원이나 유치원이나 양로원이나 기도원이나 수양관이든지 모든 교회에 관련 시설들은 구원역사의 주된 목적에 부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상당수 한국 교회들은 비영리단체이자, 영구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할 교회를 순수하게 세워나가지 않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거대할수록 임원선거전의 치열한 경쟁이 과열되어서 세상 정치와 유사하며, 혼탁의 양상이 심각하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임원 선거에 나타나는 불법타락선거는 부끄러움마저 모른 채 진흙탕 싸움판이 되어 버려서 치유 불가능하게 보인다.
거듭해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질이 의심스러운 교역자들의 양산으로 인해서 교계의 질서도 혼탁해졌다. 세상에서 낙오된 일부 함량 미달의 교역자들과 그들을 양산해내는 무인가 신학교, 그리고 교세확장을 위해서 무분별한 영입에 앞장선 교단 정치가들의 주장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순수한 교회론은 크게 왜곡되고 말았다. 세상교육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역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중에도 훌륭한 헌신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신학공부는 대충대충 적당하게 마치고, 다른 인간적인 방면에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려 하는 이들이 교계에 많아지면서, 교회의 예배가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
현대 한국 장로교회의 목회현장에는 개혁주의 목회철학이 실종하고 있다. 신학교 재학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하지 않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세속화된 세상과 영적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경건의 실현이 너무나 부족하다. 목회자들은 개혁주의에 확고히 서지 못한 채 알미니안주의적인 목회방법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려 하고 있고 인본주의적이며 인위적인 요소들을 더 많이 채용하고 있다. 대형교회가 주도하거나 유행하는 인기주의(sensationalism)에 목회방향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장로교회가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세상적으로 유행하는 풍조가 온다 하더라도 타협하거나 혼합해서는 안될 것이다. 장로교회는 오랜 역사와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신뢰를 구축한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교회 간판에만 나타나는 정체성이라면 차라리 그런 명목상의 간판은 없는 것만 못할 것이다. 
이단과 각종 불건전한 사상들이 혼합되어진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선명한 개혁신학의 목회모델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헛된 것이다. 겉으로는 크고 견고해 보여도 쉽게 무너질 것이며, 정통성을 주장하고 연조를 내세우는 교단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장로교회의 목회사역이 그리스도와 연관을 맺지 않고 인간적인 계획과 사업적인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생명을 살려내는 목회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IV. 장로교회 정체성 회복을 위한 신학적 과제
세계 장로교회가 물려준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은 정통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회복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로 갱신되어지는 것은 종교개혁시대처럼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자 모든 성도들이 결합된 몸이기에 공교회는 그리스도의 목회사역을 계승하여 감당하는 장로교회가 되도록 분명한 기독론에 입각한 목회 원리를 세워야만 한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제도 혹은 정치적인 특성 못지 않게, 신학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한국 장로교회가 오늘의 혼돈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론 전체의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데, 그 목회사역이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드러내는 일에 수종들며 참여하는 것이다(고전 2:2). 따라서,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는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사역을 드러내야만 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 하나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요즈음 영성신학에 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없는 영성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반성해야만 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회복해야할 신학적인 정체성은 교회에서의 모든 목회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전혀 없던 것을 새롭게 독창적으로 시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와 부활과 재림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가르치는 창조적 노력을 지속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노력과 에너지를 극대화하여서 다른 교파의 교회가 하지 못하는 거대한 기념비적 역사를 도모해야 한다거나, 최고의 판촉업적을 창출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목회사역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IV.i. 그리스도의 삼중직
구약성경에 감추어졌던 그리스도는 신약성경에서 밝히 드러내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신학적 명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감추어져 있다가, 신약에서 계시됨이었다. 모든 진리와 지혜와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et in Novo, Vetus patet.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밝혀진다.” 
신약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가르침들은 서신서에 이르면 다양하고도 구체적으로 소개되었고, 마침내 교회의 머리로서 제시된다.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이해하고 증거하던 사도들과 속사도들, 초대 교부들과 감독들의 연속선상에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남겨주신 위임명령과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승계하여 교회 사역의 기초로 삼아야만 한다. 
개혁주의 교회는 그 바탕에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 왕, 제사장이 되신 역할과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
요한 칼빈이 체계적으로 정리한 그리스도의 삼중직 교리는 그 이후에 개혁신학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고, 복음의 핵심으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인성을 입고 오셔서 구원사역을 성취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계속해서 주권을 행사하시며, 역사의 종말에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관된 계시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경에 제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 말씀들, 죽음, 그리고 부활 속에서 이러한 자기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라고 자신을 확인시켜 주셨는데(요한복음 1장 14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밝혀주셨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최종 계시이며, 최고 계시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는 최상의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리라”(요 4:24). 그리스도 안에는 지식과 지혜와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칼빈은 선지자 직분을 그리스도가 수행하게 된 이유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아버지의 은혜를 전파하며 증거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복음을 계속적으로 선포하여 가르치는 직분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직분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실제적으로 제사장이시다. 개혁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였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히 9: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고자 정죄와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신 것이다. 칼빈은 “순결하고 흠 없으신 중보자로서 그는 자기의 거룩성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를 위해 확보하시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화목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은 헛된 누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과 승천이 성취한 것에다가 추가할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와 인간 편에서 요구되는 모든 것들을 다 성취하고자 중보자로서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인해서 인간의 죄를 용서받게 되었고 은총을 가져다 주셨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대신하시는 중보 기도자로서 제사장 역할을 맡고 계신다. 영원하신 중보자의 기도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교통하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로서 우리 자신을 모두 다 드릴 수 있다. 
세 번째, 그리스도는 왕의 직분을 갖고 계신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개혁신학자들은 믿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와 교회 안에서 주권, 권세, 통치를 행사하신다고 이해하였다. 교회에서 시행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권세, 권위, 절대적인 권능에 의존해서 행사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능은 역설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주님은 권세 있는 독재군주로서가 아니라, “봉사자”이자 “섬기는 자”로서 자신의 다스리심(servant leadership)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 11:15에서 그리스도는 왕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선포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들 중에서 대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신다(계 17:14). 칼빈은 여러 시편들(2:1, 9; 89:35-37; 110:1)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는 “교회를 보존하고, 보호하고, 돌보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부요케 하고, 영적 대적들의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결코 굴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어 견고케 하신다”고 설명하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구원을 얻도록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속 유지시켜 주심”이라고 보았다.
IV.ii. 교회의 삼중적 사역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해서, 장로교회가 추구해야할 교회의 사역은 목회자나 지도자들의 관심이나 소질을 발휘하되, 제 나름대로의 선호에 따라서 운영되는 인간적인 종교행위나 목회사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누가 어떤 형태로 감당하든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속성을 유지해야만 하며, 그리스도의 위임으로 수행되는 삼중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 장로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로서 성경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하려면, 그 교회의 머리되시며 설립자 되시고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세 가지 목회사역을 연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어야만 한다.
1. 제사장적인 교회사역
한국 장로교회는 지금 매우 혼돈된 가치관과 급속히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격동하고 있다. 일부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영향을 입고 있고, 일부에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봉건주의적 교육철학에 젖어있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남한 전체 인구의 17%에 머물고 있다. 우리 나라는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도 여전히 아직도 더 복음을 전파해야할 피선교국가이다. 
세계적으로도 점점 더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고,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치관을 정확하게 들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외면하고 있다.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외면하고 떠나서 제대로 가야할 길도 모르면서 방황하고 타락해 가고 있다. 그로 인해서, 인간 사회의 모든 관계와 가치관은 더욱 파괴되어 버렸고, 부서져 버리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화해를 이루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20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을 교회가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 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 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교회가 회복과 화해의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힘쓰는 일이 중요하다. 기초적으로 세워야할 화해의 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시작한다. 21세기 개혁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감당해야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란 사람들끼리의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역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마태복음 5:23-24에서 성도들과의 사이에 화해가 없다면 하나님과의 화해는 모두다 공허한 헛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을 감당하는 차원에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서로 환영하고, 용납하고, 화해하는 목표로 나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왕직을 감당하는 교회사역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정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그리스도의 권위와 통치를 따르고 있다. 지난 수 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세상 권력의 위세에 눌려서 박해를 당하기 일쑤였다. 중세 천년동안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영적인 권세를 강화하여 세속 권력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만용을 부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세계 정치 경제 지도자들은 교회의 요청이나 간청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군사정권 이래로 교회가 세상과 세속 정권에 대해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수동적으로 당하거나 국법을 준수하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정도였다. 한국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을 뿐, 정치권에서는 선거철에 정권 장악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목적 이외에는 교회의 영적인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같이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에서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법적인 구별도 있어서, 교회는 더 이상 권위도 없고, 권세도 없어 보인다. 
한국 교회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세상에 끼쳐야 할 영향력은 1990년대 이후로 시민단체의 부상으로 인해서 현저히 감소하고 말았다. 일부 참여자들의 경우에는 약간의 입지를 넓혔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소수의 개인들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구나 종교지도자들의 대표성을 운운할 때마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장로교회는 과연 누가 명실상부한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교회는 이 시점에서 성경적인 권위와 권세와 지도력을 회복하고 시행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권세와 권능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석을 하고, 그것을 교회의 원칙으로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들과 성도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위에서 지시하고 강제로 끌고 가는 정치권력에 대해서 안일하게 대처해왔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 그리고 다른 사도들이 정치 권력에 대해서 취한 태도들을 보면, 무조건 정치 권력에 아부한 것도 아니요, 반대로 정권 퇴진을 위해서 극한 투쟁을 일삼은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두 극단을 피하고, 세속 권력을 인정하고 국법질서와 평화를 지켜나가면서도 로마 황제의 명령이나 이스라엘의 헤롯 왕이 명하는 대로만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 에베소서 4장, 로마서 12장은 중요한 확신을 제공하여 준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만을 인정하고 따르고자 했다. 그리스도만이 실제적인 교회의 지도자이시며, 머리가 되어서 지도하고 계신다고 믿었다. 칼빈은 이처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모든 성도들과 나누어서 같이 공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의 사역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권력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따랐다. 히브리인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바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었다(출 1:17). 정탐군을 숨겨준 라합은 여리고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난 후,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수 2:9)고 고백하였다. 그들에겐 하나님만이 왕이요, 통치권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지키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견고히 세우고 순복해야만 한다. 성직자의 상하계급 구조는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하는 것이다. 안수받은 고위 성직자들이 위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라가야만 한다면, 아래로부터 시행되어야 할 성도들의 특권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소위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나, 교단이나 종파의 본부에 앉아있는 임원들이 지성적인 엘리트임을 자부하면서 전체 교회를 좌우하려 한다면 주님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성경에 가장 충실한 교회 제도이면서, 가장 바르게 질서를 유지하면서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지도력과 권위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말씀의 사역자, 다스리는 장로, 그리고 집사들로 구성되는 교회의 삼중직이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권한과 임무를 위임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사역”은 이 세 가지 직분들을 통해서 발휘되고 있다고 믿는다. 말씀과 성례를 시행하는 사역자는 성경적인 신실함을 지켜나가는 가장 중요한 직분이며, 참된 목회가 되도록 모든 목회적인 일과를 처리해야 한다. 장로는 그리스도의 목회사역을 위해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은사를 활용하되 질서와 권위를 지켜나가는데 모범이 되어야 한다. 집사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 것과 같이 교회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힘써서 은사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직을 현재 교회에 폭넓게 적용하고자 할 때에, 장로교회의 당회는 세상의 행정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다는 점을 우선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이미 상향식 권력구조를 타파하고 권한의 대폭 이양과 변혁을 핵심골자로 하는 개혁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당회가 제일 밑바닥에 있다는 의식을 갖지 않고, 마치 재정과 권한을 독점하는 교회 내의 상부기관으로 인식한다거나, 정치적 기능만을 우선시 한다면 매우 비성경적인 조직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기도와 헌신이 없는 당회 만능주의란 있을 수 없으며, 당회원들은 성경적으로 자신들이 성도들을 봉사하기 위해서 신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참된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권위 아래서 교회의 모든 생활에 바른 질서가 서도록 모든 교회를 유지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3. 선지자적 교회사역
마지막 선지자로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대해서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알게 하였듯이,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한다. 다양한 전도방안의 활용과 복음전파의 매체개발이 선진적으로 강구되어야 할 시점이다. 70인 전도대를 파송하셨고, 땅 끝까지 가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주님의 명령을(마 28:18-20) 수행하도록 효과적인 방안을 더욱 개발해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고 담대하게 선포하셨고, 세상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이자 사명이다. 상대주의 가치관에 의해서 이런 복음전도 방식은 보수주의자들의 매우 고집스럽고, 우직스러운 태도라고 할 지 모른다. 한동안 민중신학자들은 복음전도 보다는 사회갱신과 정치적 타락에 대해서 광야의 외침을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선지자적 활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선지자 직분의 포괄성 속에 그러한 정치적 대안제시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회비판적 저항활동을 예수님의 선지자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지나치게 좁은 해석적 한계가 있다. 
이와는 정 반대로 세상을 향해서 원만하고 타협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도 온전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없다.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세상을 인정해 주고 서로 불편하지 않는, 소위 부드럽고 유연한 방법만을 찾다가는 ‘타협적인 복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기독교의 독특성과 유일성에 대해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들의 선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부에서는 보수적인 교회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계시를 밝히고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반드시 세례 요한과 같이 세속 정치에 대해서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선지자적 사명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한국 교회는 현실참여에 소홀하였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전통에 묶여서 기독교의 진리를 거부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녀온 가치관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보편 은총론과 일반계시론을 갖고 있는 개혁주의 교회들은 비신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아주 탁월한 접촉점을 갖고 있다. 세상 사람들을 접촉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로마서 1:18-23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제시한 내용을 활용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매년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각 교회에서는 피부로 이런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 주 5일 근무제 도입으로 교회보다는 자기 발전과 유원지로 향하는 발걸음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 생활패턴이 급속히 서구화 되면서 레저산업과 여가를 즐기는 풍조가 늘어만 가고 있다. 출산감소로 인해서 젊은 층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데, 이들을 교회가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IV.iii.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장로교회가 그리스도의 선지자, 제사장, 왕적인 사역을 교회에서 회복하여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우고자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어서 기름 부어주시고, 은사를 주심으로써 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오늘의 교회를 목회하시는 진정한 목회자라고 인정하면서, 21세기 장로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현재 한국 장로교회가 지속적으로 갱신해야할 활발한 교회사역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과 기름부어주심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세 가지 사역을 어떻게 구현하고 계시는가? 삼위일체론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할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 공유적이며(the intimate perichoresis of Son and the Holy Spirit) 긴밀한 상호의존적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셔서 성도들을 사역케 하므로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셔서 역사하신다(요 15:26).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계시되었다. 칼빈은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세 인격이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이 되시느냐에 관해서 통일성(unity)을 설명하는 용어로 삼위 사이에 상호 공유라는 용어를 채택했던 것이다. 
칼빈은 바로 이 성령이 우리 믿는 자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묶어주시는 끈”이 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각각 하시는 사역을 공유하고 계시듯이,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이제는 ‘살려주는 영’이 되어서 구원의 적용사역을 주관하고 계시듯이(고전 15:45),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회의 목회사역은 상호 공유적이며 분리시켜버릴 수 없는 공통분모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 믿는 성도들은 교회의 회원으로 세례를 받아 가입하며,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시고, 성령으로 인해서 구원의 효력이 발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이런 축복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하여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최초 집필자인 우르시누스(Ursinus)는 그리스도의 목회사역과 우리들의 목회사역과의 연결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일원이 되어지는 것은 그분 안으로 접목되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그분 안으로 연합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동일한 생명과 의로움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머리로서, 그분으로부터 성령이 모든 성도들에게 흘러 넘치도록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로부터 모든 성도들은 그들의 생명을 이끌어 내게 되었으며, 그분으로 인하여 통치를 받는 성도들이 되어진다면, 그분 안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그분에게 연합되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며, 그 은사를 활용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듯이, 지금도 그리스도의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을 수행해 나가고 계신다.
결어 : 새로운 종교개혁과 창조적 변혁을 촉구함 
현대 한국 장로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나서 개혁신앙의 활력소를 불어넣고 그 힘을 확산시키며 살아있는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애정어린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요한 사도는 초대 일곱교회를 준엄하게 비판하였다(계 2:1-3:22)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루터나 칼빈이 지금 이 시대에 한국교회에 다시 나타난다면, 루터는 ‘95개 조항’을 다시 내다 걸어놓을 것이요, 칼빈은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발표할 것이다. 문화 변혁의 열매들을 세계 역사에 심어놓았던 낙스, 쯔빙글리, 에드워드, 휫필드, 스펄죤, 아브라함 카이퍼, 마틴 로이드 존스 등 칼빈주의자들이 한국교회의 오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권징도 없는 교회, 영적인 각성을 전하지 않는 교회, 세속주의에 휩싸여 있는 교회에 대해 탄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로의 혁신적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에의 각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19세기말 화란 네오칼빈주의 신학자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개혁의 지속을 역설하였다.
장로교회의 모든 불행은 종교개혁이 끝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데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들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으려는데 기인한다.... 칼빈주의는 다양한 차원의 발전과 증진을 중단하지 않기를 염원하고 있다.... 홀란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미국이나 잉글랜드나, 아프리카나, 아시아나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동일한 발전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나라마다, 모든 개혁교회가 처한 지역에서, 그곳의 문화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전해야만 하며, 다만 다른 이념들로 하여금 오염시키거나 대체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장하고자 한다.
장로교회가 신학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정체성을 다시금 확고히 회복하고자 결단하는 일은 종교개혁적인 의지와 인식의 전환에서만 가능하다.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자신들의 생활을 전적으로 변혁하며, 성경적 칼빈주의 신학의 소중한 원리들을 버리지 않고 계승하면서 오늘의 시대사조와 맞서서 과감하게 분투 노력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요시야 왕과 같이 자신과 사회와 국가를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개혁신앙의 갱신과 변혁을 추진하되, 구속-역사적 성경이해에 기초할 것이며(엡 3:8-10; 롬 16:25-26; 골 1:25-27), 하나님 중심의 언약에 토대를 두어야하고(딛 1:6-9, 2:1이하),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신앙고백적이어야 하며(고전 12:3; 시 66:16), 변혁적인 문화관을 갖고 적극대처 해야 하고(갈 2:20; 고전 5:10), 교회 공동체를 중심해서만(엡 2:20; 딤전 3:15)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종교인들이 아니었다. 정체된 명상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는 종교로 바꾸었다.
반면에, 중세 로마 가톨릭은 현실로부터 떠나서 모든 개혁을 외면하고 국왕과 대주교와 영주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하는 유형에 속해 있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세상을 바꾸려하면서도 세상 그 자체는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한다(요일 2:15-17).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격동적으로 변하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불안과 걱정에 잠겨서 사는 이들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 있다. 날마다 경제적인 불안정에 시달리고 고달픈 사람들에게 제공할 평안과 평화의 근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에 대응할 자원,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이 풍성하게 주어져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인으로 따르고, 그를 좇아서 목회사역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역을 감당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과거 초기 한국 장로교회에는 목회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신앙적 실천과 철저한 헌신이 있었다. 목회자로는 길선주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와 같은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신학자로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그리고 삶으로 모범을 보여준 명신홍 교수와 같은 분들의 영향력이 살아있었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오랫동안 구습과 무지 속에 빠져있던 조선을 바꾸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있어서 선진 교육과 봉사를 통해서 귀한 역사를 창출한 바 있다.
현대 사회질서에 변혁적인 기독교의 능력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취해 나가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부패한 부조리와 싸워야 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부단히 싸워나가야 한다. 한국의 모든 부패와 부조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기도와 성도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고쳐야 한다. ‘분단시대의 고통’과 ‘독재시대 희생자들’을 회복시키면서 선별된 실천가들로 활동하는 한국 장로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 개혁의 프로그램은 오직 성경적인 기준을 갖은 자들만이 가능한 것이다. 착취와 소외당하는 사람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한국 장로교회와 그 속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입술로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는 개인의 신앙적인 변화와 교회내의 신앙을 고치는데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서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사회 재형성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 권력자들은 모든 사회제도에서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생태학적인 책임, 윤리적인 책임, 그리고 지적인 책임은 전혀 감당하지 않고 있다. 이제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정착시키고, 각종 범죄를 방지하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만 한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정체성 회복이나 확립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의 병폐와 부조리를 혁신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가정폭력과 인권유린, 인신매매, 성적타락과 에로티시즘에 젖어있는 사회에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학대, 핍박당하는 북한의 성도들, 납북자와 탈북동포의 보호, 재소자들의 보호, 절대빈곤자들과 불치병자들에게 왕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베풀어야 한다. 이제 다시 시대적 자각과 함께 한국 장로교회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하여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거룩하고 순수하게 성장하면서, 사회적 변혁을 주도하는 열매가 넘치기를 기원한다.
1) 미국의 현대 개혁신학에 대해서 죠지 말스덴은 ‘신앙고백주의’ ‘경건과 부흥운동’ ‘문화적 칼빈주의’ 등 세 가지로 크게 구분한 바 있다. George M. Marsden, "Reformed and American," 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ed., by David F. Wells (Grand Rapids: Eerdmans, 1985): 1-12. 
Heiko A. Oberman, "Calvin's Critique of Calvinism," in Christian Higher Education: The Contemporary Challenge, Proceedings of the First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Institutions for Christian Scholarship (Potchefstroom: 1976), 372-381. 하이코 오버만은 현대 칼빈주의자들의 흐름을 분석하되 오늘날 칼빈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여섯 개의 그룹이 개혁신학 내에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전적 교리중심주의’ ‘신앙고백적 전통주의’ ‘신정통주의’ ‘화란의 문화적 칼빈주의’ ‘반정통주의’ ‘역사적 학파’ 등이다. 
2) Michael Scott Horton, Made in America: The Shaping of Modern American Evangelicalism (Grand Rapids: Baker, 1991), 제2장 실용적 복음주의, 제5장 감정 중심의 신앙. 
3) 박삼열,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도연구,” 『목회와 신학』160 (2002년 10월호):154-163. 
4) 「합동신학대학원 20년사」(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00), 165. 
5) 2002년 4월 25일 열린 ‘한국 장로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정책협의회������에서 한국 교회 장로교단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명칭 단일화의 시급성이 요청됨에 따라서, 8월 22일 오후 1시 30분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이 날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은 현재 130여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한국 교회 장로교단 중에는 이단 사이비 교단들이 같은 이름으로 활동하여 구별하기 어려운 현실이라 그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 현행 한국 교회 장로회 교단의 명칭을 ������한국장로교������로 통일시키기로 의견을 모으고 각 교단 총회에 헌의키로 했다. 「기독신문」 1398호 2002년 7월 3일자. 1405호 8월 28일자 참조. 
6) James Montgomery Boyce,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ed. David E. Wells (Grand Rapids: Baker, 1985), 300. 필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주의 연합과 교회일치론에 대해서 참고할 만한 주장들이 최근에 계속해서 쏱아져 나오고 있다. Cf. Lukas Vischer, Pia Conspiratio: Calvin on the Unity of the Christ's Church. John Konx Series 12 (Geneva: 2002). David Willis, "The Ecumenical Future of Reformed Theology," in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Tasks, Topics, Traditions, eds., David Willis&Michael Welker (Grand Rapids: Eerdmans, 1999):178-192. 
7) George M. Marsden, "Reformed and American," 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ed., David F. Wells (Grand Rapids: Eerdmans, 1985), 11. 
8)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은 (가칭) 대한예수교장로회 연구단체협의회를 창립한다. 2002년 6월 12일 운영위원장 등을 선임하였고, 예장 통합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니고 활동하는 연구단체들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상호 교류하므로 교단의 선교적 목회적 실천을 위한 신학체계를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이 협의회에는 장신대, 서울장신대, 한일장신대, 영남신학대, 호남신학대와 숭실대, 한남대 등에 소속된 20여 개 연구소, 한국기독교학술원, 평화통일신학연구소, 한민족선교정책연구소, 문화선교연구원, 목회교육연구원 등이 가입단체로 활동한다. 
9) R. Albert Mohler, Jr., "Evangelical: What's in a Name?" in The Coming Evangelical Crisis, ed. John H. Armstrong (Chicago: Moody Press, 1996), 32. 
10) J. B. Phillips, Your God Is Too Small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67). 
11) Richard Muller 교수는 17세기 개혁신학이 이론중심에 치우쳤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7), 113: “In the first place, the orthodox considered theology both objectively as divine gift and subjectively as habitus mentis (mental disposition), so that the human, subjetive aspect of theology was never excluded from consideration." 
12)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자들과 18세기 신학자들이 ‘실천’ 혹은 ‘종교’를 배제시켰다는 부분을 입증하면서, 이런 경향이 나오게 된 시초를 ‘경건주의’의 태동에서 찾은 칼 바르트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는 너무 상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은 ‘신학’이요, 인간의 체험적 현상은 ‘종교’라는 용어로 대비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ed.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Edinburgh: T&T Clark, 1936-69, I/2, 284-91. 
13) 김재성, 「칼빈과 개혁신학의 기초」(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1997), 138. 
14) Alasdaier Heron, The Church in Reformed Perspective. Report and Papers from a European Consultation of Reformed Theologians held at the International Reformed Centre John Knox from January 9 to 13, 2002. John Knox Series 13. ed., Lukas Vischer. 11: “it may helpful, indeed necessary, to supplement this picture of Calvin's practical theology of ecclesiastical order and organisation with some account of what we might call his dogmatic theology of the Church." 
15) Willem Balke, "Revelation and Experience in Calvin's Theology," in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350.: "Calvin's theology is not born from this sort of Anfechtung, but rather from his subjective experiences but from God, who bears witness to us of the divine salvation in the Word and our experience. Calvin terms this witness of the Holy Spirit in our hearts the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16) Institutes, I.vii.5: "Such a conviction that requires no reasons; such a knowledge with which the best reason agrees - in which the mind truly reposes more securely and constantly than in any reasons; such a feeling that can be born only of heavenly revelation." 
17)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서울: 이레서원, 2001): 19. W. Fred Graham, ed., Later Calvinism: International Perspectives (Kirksville: Sixteenth Century Essays&Studies, 1994), xi. Andrew Pettegree, Alastair Duke, and Gillian Lewis, eds., Calvinism in Europe, 1540-162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Robert V. Schnuker, ed., Calviniana: Ideas and Influence of Jean Calvin (Kirksville: Sixteenth Century Essays&Studies, 1988). 
18) Richard A. Muller, The Study of Theology: From Biblical Interpreation to Contemporary Formula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91), xiii. 
19) 한국갤럽연구소,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1998). 1984년의 1차 보고서, 1989년의 2차 보고서에 이어 1997년에 조사한 3차 보고서에 나타난 기독교에 대한 평가, 목회자에 대한 평가를 참고할 것. 갤럽연구소가 제시한 1995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정직 및 윤리성”에서 1위 신부, 2위 교수, 3위 승려, 4위 TV 기자와 아나운서, 5위 목사 등이었다. 목사의 순위는 1993년 통계에서 5위를 한 교사들을 제치고 들어간 것이다. 일반인들이 같은 종교인들 사이에서 윤리성 부분을 평가한 것을 보면, 5점 만점에 신부 3.59, 승려 3.29, 목사 3.02로 나왔다. 
20) Micahel Horton, ed. The Agony of Deceit: What Some TV Preachers are Really Teaching (Chicago: Moody Press, 1990), 23. 
21) 김재성, 「칼빈과 개혁신학의 기초」(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1997), 178: “... 칭의에 대한 개혁신학의 해답은 대체로 두가지 반응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새로운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경솔한 맹신주의자 (easy believism)가 되고 만다.” 
22) 2002년 9월 16일부터 17일까지 “한국 NCD 자연적 교회성장” 주최로 신길성결교회에서 열린 스티브 맥베이(Rev., Dr. Steve McVey) 목사 초청 '제2회 은혜의 영성 실천 컨펀런스' ‘크리스천 투데이’ 2002년 9월 23일자. 
23) 김재성, “영성신학의 문제점과 개혁신학의 대응” 「목회와 신학」 78 (1995년 12월호): 100-111; "“현대 영성신학의 흐름과 문제점” 「현대종교」 326호 (2001년 10월호): 46-67. 
24) 김재성, “개혁신학과 한국교회의 과제,” 「신학정론」 15권 1호 (1997) 46-75; 김재성, "한국복음주의 신학교육의 과제," 「성경과 신학」 22권 2호 (1997):57-95. 
25) David E. Wells, No Place For Truth: Or Whatever Happened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7. 
26) Alexander Schmenann, For the Life of the World: Sacraments and Orthodoxy (Crestwood, N.Y.: St. Vlai야mir's Seminary Press, 1973), 118. 
27) Richard Lints, "The Vinyl Narratives: The Metanarrative of Postmodernity and the Recovery of a Churchly Theology," in A Confessing Theology For Postmodern Times, ed. Michael S. Horton (Wheaton: Crossway, 2000), 103: “This redemptive narrative establishes the church's identity by establishing its own place in redemptive history." 
28) “크리스챤 신문”, 제 1996호, 2002년 9월 23일자, 1면 기사; “총회 중 금품살포에 부정선거 논란 부채질, 금권타락선거 여전히 기승.” 
29) 김재성, “영성신학의 혼돈과 문제점,” 「개혁신앙」20호 (1995년):57-75; “영성신학의 문제점과 개혁신학의 대응,” 「목회와 신학」78호 (1995년 12월호): 100-111; “현대 영성신학의 흐름과 문제점” 「현대종교」326호 (2001년 10월호): 46-67. 
30) Augustine, Questiones in Heptateuchum, 2.73. 
31) David E. Wells, The Person of Christ: A Biblical and Historical Analysis of the Incarnation (Westchester: Crossway Book, 1984); 이승구 역 「기독론-그리스도는 누구인가」(서울: 엠마오, 1994), 70: "우리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인물이 우리가 서신서에서 만나는 그리스도보다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학자들이 예수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상당히 다른 관계를 허위로 조작해 내었다고 본다. 즉 그가 흔히 예언자와 선지자로, 통치를 지시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그 통치를 시작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졌고, 또 이런 연구들에서는 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굉장한 지각과 높은 도덕성을 가진 인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허위라는 말이다.“ 
32) 칼빈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모든 개혁신학자들이 따르는 기독론의 전형이 되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의도적으로 선지자, 왕, 제사장의 순서로 되어있다. Calvin, Institutes, II.xv-xvii. 하지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되어 있고 (Heidelberg Catechism, Q. 31.), 개혁주의자들은 거의 대부분 하이델베르그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Robert Letham, The Work of Christ (Leicester: IVP, 1993). 
그리스도의 임무와 직분을 삼중직으로 가장 먼저 정립한 신학자는 유세비우스(Eusebius)로서 그의 교회사(I.3.9)에서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부써도 “Rex regum Christus est, Summus sacerdos et prophetarum caput"라고 말한 바 있다. F. Wendel, Calvi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His Religous Thought, tr. Philip Mairet (1950; New York: Harper&Row, 1963), 225, n. 125; 김재성 역,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9), 268. 하지만, J. F. Jansen, Calvin's Doctrine of the Work of Christ (London: 1956)에서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과소평가 하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칼빈의 초기 신학저술에서는 삼중직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33) Philip W. Butin, "Christ's Ministry and Ours: A Trinitarian and Reformed Perspective on the Ministry of the Whole People of God," in Calvin Studies VII (Davidson: 1994):1-13. idem, "Two Early Reformed Catechisms, the Threefold Office, and the Shape of Karl Barth's Christology," Scottisch Journal of Theology 44:2 (1991): 195-214. 현대 신학자 중에서 칼빈의 기독론에 근접한 삼중직을 따르고 있는 칼 바르트이지만, 그의 기독론 중심의 신정통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칼빈의 개념(two natures and three roles)과는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의 역사성을 일반사(historie)를 제쳐두고 단지 ‘구속사’(geschichtlich)적 측면에서만 의미를 찾으려는 계시관과 구속사 해석은 정통개혁신학과는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데도, 계시는 사건이라 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구분하지 않는다. 
34) Institutes, II.xv.2. 
35) Institutes, II.xv.6. 
36) Institutes, II.xv.4-5. 
37) Heidelberg Catechism, Q. 31. 
38) Michael S. Horton, Beyond Culture Wars: Is America A Mission Field or Battlefield (Chicago: Moody Press, 1994), 84-5. 역사 속에는 두 나라가 싸우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홀톤 교수는 운명에 복종하기 보다는 영생의 확신 가운데서 인내하고 싸워나가기를 지적하고 있다. 
39) Institutes, II.xv.4: “Then, relying on the power of the same Spirit, let us not doubt that we shall always be victorious over the devil, the world, and every kind of harmful thing." 
40)미국에서도 거대 장로교단이 이런 문제로 심각한 논의를 해오고 있는데, 루이빌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교회로 끌어들이느냐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강화해서 교회에 출석시키는 효율적인 방안을 연구하여 제시한 바 있었다.
A Proposal for Considering the Theology and Practice of Ordinat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USA), ed. M. Coalter, J. Mulder, L. Week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2).
41) T. F.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Trinity,"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2 (1990), 190. 김재성, "칼빈의 삼위일체론, 그 형성과정과 독특성,“ 「신학정론」제 20권 1호 (2002):129-130. 
42) Institutes, III.i.1. Sinclair Ferguson, The Holy Spirit (Downers Grove: IVP, 1996), 96-103; 김재성 역 「성령」(서울: 한국 IVP, 1997). Jae Sung Kim, "Unio Cum Christo: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s Theology," (Ph.D. dissertation, Westminster, 1998). 
43) Zacharias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 G. Williard (Grand Rapids: Eerdmans, 1956), 177. 
44) Herman Bavinck, "The Future of Calvinism,"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 5 (1894): 23. 
45) Harvie M. Conn, Eternal Word and Changing Worlds: Theology, Anthropology, and Mission in Trialogue (Grand Rapids: Zondervan, 1984), 224. 
46) 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3; "World-formative Christianity."